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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정맥과 문화] 동편제와 서편제
고 김대중 대통령조차 극장을 찾아 감상했던 영화 ‘서편제’에서 유봉은 “동편제는 무겁고 맺음새가 분명하다면 서편제는 애절하고 정한이 많다고들 하지, 허지만 한을 넘어서게 되면 동편제도 없고 서편제도 없고 득음의 경지만 있을 뿐이다.” 라고 서편제와 동편제의 차이를 설명한다.
♤ 한치재에서 삼수마을로 이어지는 호남정맥 마루금
제(制)는 판소리가 전승되면서 전승계보에 따라 자연스럽게 음악적 특성에 차이가 생기게 마련인데 이를 제라고 한다. 그런데, 하필 동편제와 서편제라 구분하였을까? 그리고 동과서의 기준선은 어디인가? ‘제’라는 용어는 1940년에 출간된 ‘조선창극사’에 처음 등장한다. 19세기 중반부터 판소리를 체계화한 신재효 선생의 문헌에는 동편제와 서편제는 물론 제라는 단어조차 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동편제와 서편제 등의 판소리 유파의 분화는 19세기 후반에 발생하여 20세기에 개념이 정리된 것으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창극사’에 따르면 동편제는 웅장하고 감정을 절제하여 남성적인 느낌을 준다면 서편제는 여성스럽고 한이 담겨있으며,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것으로 대비시키고 있으며, 발성법에 있어서도 동편제가 구절의 끝마침이 쇠망치로 내려치듯이 명확하고 상쾌하다면, 서편제는 구절의 끝마침이 좀 길게 끌어서 꽁지가 붙어 다닌다고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 동편제와 서편제 이외에도 충청도를 중심으로 한 중고제가 있었으나, 중고제는 ‘비동비서’로 뚜렷한 특징이 없으며 오히려 동편제에 가깝다며 크게 비중을 두지 않았다.
동편제와 서편제의 지역적 구분에 대해서는 조선창극사에서 “동서의 유래는 송흥록의 법제를 표준하여 운봉, 구례, 순창, 흥덕 등지를 동편이라 하고 박유전의 법제를 표준하여 광주, 나주, 보성 등지를 서편이라 하였다. 그 후에는 지역의 표준을 떠나서 소리의 법제만을 표준하여 분화되었다”라고 적고 있다. 이는 동편제와 서편제 분화의 지역적 구분을 남원 운봉을 중심으로 한 전라도의 동쪽 지역과 나주를 중심으로 한 전라도 서쪽지역을 중심으로 구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섬진강을 중심으로 하여 서쪽인 광주, 나주, 보성과 같은 곳에서는 서편제가 많이 불렸고, 섬진강 동쪽의 운봉, 구례, 순창과 같은 곳에서는 동편제가 많이 불렸다”고 지역적 기준을 섬진강으로 보다 분명히 구분하기도 한다“ 그러나 동과서의 기준을 섬진강으로 구분하는 것은 물리적으로나 실제적으로 설득력이 떨어진다. 대부분의 문화는 강유역을 중심으로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기 마련인데 섬진강 본류를 경계로 문화가 나뉜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안된다. 실제 서편제가 광주, 나주, 보성, 화순, 담양, 해남 등지로 전승되고 동편제가 남원, 구례, 순창, 고창, 곡성 등지로 전승되는데 순창이나 곡성 등은 주로 섬진강의 동쪽이 아닌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오히려, 동편제와 서편제의 지역적 분류를 호남정맥으로 하면 보다 정확성이 높아진다. 광주, 나주, 화순, 담양, 해남 등지는 호남정맥의 서쪽이다. 또한 순창, 구례, 곡성, 남원은 호남정맥의 동쪽이다. 그러나, 동편제에 속한 흥덕(고창)은 호남정맥의 서쪽에 있고, 서편제에 속한 보성은 오히려 호남정맥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뭔가 개운치 않은 면이 있다. 일단 동편제로 분류한 고창지역의 경우 동편제와 서편제로 유파가 형성되기 전 우리나라의 판소리를 체계화한 신재효 선생이 살던 지역이다. 신재효 선생은 명창이 아니라 판소리 연구가이지만 문하에서 소리꾼을 길러냈다. 동편제의 김세종 등이 그의 대표적 문하생이다.
동편제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송흥록 명창은 남원 운봉에서 1780년에 태어났으며 1801년부터 1863년까지 활약하였다. 반면 서편제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박유전 명창은 1835년 전북 순창에서 태어나 25세의 나이에 전주대사습에서 장원을 차지하여 일약 톱스타가 되었다. 흥선대원군의 총애를 받은 박유전은 대원군의 실각과 입각에 따라 한양을 오르내렸으며, 대원군이 마지막으로 실각하고 일제에 의해 국권이 침탈당한 후 세상을 떠돌다 1890년대 후반 죽었다는 설과 보성으로 귀향하여 1906년경에 사망했다는 설이 있다. 즉, 19세기에는 동편제류의 판소리가 주류를 이루다가 19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서편제가 등장 발전했다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신재효 선생이 활동 시 동편제류의 판소리가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고, 아직 서편제는 분화하지 않은 시기로 고창지역이 우리나라 판소리를 체계화한 신재효 선생의 고향이라는 지역적 특성상 동편제가 전승되지 않았나 판단된다.
♤ 문학작품에서 흔히 민초를 지칭하는 패랭이꽃
반면 보성지역의 경우는 지형이 복잡하고 박유전 선생의 활동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아 보성지역이 서편제로 분화된 과정에 대해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우선 박유전 선생이 청년기까지 순창에서 보냈으며, 10대 후반에 보성(당시 장흥)으로 이사한 것은 맞는 것으로 보이나 소리를 어디서 누구로부터 사사받았는지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또한 성인기 보성에서 보낸 시기도 짧아 박유전 선생의 거주사실만으로 보성을 서편제의 고장으로 규정하는 것도 쉽지 않다. 오히려 박유전 명창으로부터 소리를 전승한 정재근 명창은 보성군 회천면(당시 장흥군 회령면)으로 지역기록이 명확하고 이후 회천지역을 중심으로 보성소리가 계승된 사실도 명확하다. 나주에서 박유전 선생을 모시고 정재근 명창이 이사한 당시 장흥 회령면은 호남정맥의 서쪽으로 명확하게 서편제로 분류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고창지역의 경우 호남정맥의 서쪽지역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우리나라의 판소리를 전체적으로 체계화한 신재효 선생의 영향으로 동편제 소리가 맥을 이어온 것으로 판단되며, 보성읍내의 경우 호남정맥의 동쪽에 위치하나 주요한 전승자들이 살았던 곳은 호남정맥의 서쪽인 보성군 회천면(1914년 이전 장흥군 회령면)으로 실제적인 전승지역으로 볼 때 호남정맥의 서쪽으로 분류하는 것이 맞다.
우리나라 판소리는 19세기에 전성기를 누렸으며, 동편제와 서편제 등으로 소리가 다양화 되었다. 그러나, 판소리의 경우 마을과 지역중심으로 전승되는 농악과 달리 명창을 중심으로 소수에 의해 맥을 이어왔기 때문에 지역적 구분이 쉽지 않다. 특히, 현대에 들어서 교통의 발달과 소리문화의 도시화 등으로 지역적 구분은 전혀 의미가 없게 되었다. 다만, 서편제와 동편제의 지역적 구분이 20세기 전반까지 발생과 전승되었던 지역으로 볼 때 대개는 호남정맥을 기준으로 동편제는 동쪽, 서편제는 서쪽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한승우 전북녹색연합 사무국장
판소리는 전라도의 무계집안 출신들로 구성된 창우집단에서 비롯한 이래 충청도와 경기도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기반으로 하여 발전하였다.
과거에는 지리적 제약으로 인해 음악 유통이 활발하지 못했기때문에 민요 등의 기층음악은 지역적 특색이 비교적 뚜렸하였습니다.
대표적인 기층음악인 판소리 역시 해당 지역 출신의 전문 음악인에 의해 그 지역의 음악적 색채가 가미되었고, 이에따라 지역별로 각각의 차이를 가지면서 판소리는 보다 풍부한 음악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판소리를 정의하면 다음과 같다.
부채를 든 한 사람의 창자(소리꾼)가 한 사람의 고수의 북장단에 맞추어, 창(소리/노래),아니리(말), 너름새(몸짓)를 섞어가며 긴 이야기를 엮어가는 극적인 음악 - 최동현,[판소리란 무엇인가], 1994
판소리의 지역별 음악적 차이는 '제'라는 용어로 구분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는 말 그대로 '서쪽 지역의 판소리'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섬진강을 기준으로 해서 전라도 동쪽 지역의 소리를 동편제라고 하고, 섬진강 서쪽의 소리는 서편제라고 합니다.
그리고 충청도와 경기도 지역의 소리는 중고제라고 부릅니다.
♤ 동편제와 서편제 중고제
판소리에서의 유파란 결국 창법의 차이를 일컫는 것인 바, 판소리의 창법에서 동편과 서편이 나누어진 것은 전성기 때의 일이다. 송흥록의 법제를 표준삼아 섬진강 동쪽에서 부른 것이 동편제이고, 박유전의 법제를 표준삼아 섬진강 서쪽에서 부른 것이 서편제였다. 판소리에서 유파의 구분이 생기게 된 것은 일단 판소리가 발전하여 다양해지고, 이 다양한 판소리를 간추려서 이해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다양한 판소리를 유형화하여 구분해 본 것이 '제'의 개념으로 형성되었다는 말이다.
판소리 동편제, 서편제라는 말이 처음으로 사용되는 문헌은 '조선창극사'의 대가닥조(條)이다. '조선창극사'는 90명에 이르는 명창과 명고수의 간략한 전기와 더늠들을 모아놓은 책인데, 책의 앞부분에서 판소리에 관한 몇 가지 사항을 언급하는 가운데 대가닥이라는 항목을 설정하여 '제'를 설명하고 있으며, 각 명창의 이름 아래 '동편'이니, '서편'이니, '중고'니 하여 '제'를 구분했던 것이다.
1. 동편제
시조(始祖) 명창:
송흥록 스타일을 이어 받은 유파.
음악적 특징:
우조(羽調씩씩한 가락)의 표현에 중점을 두고, 감정을 절제하며 '대마디 장단'을 사용하여 기교를 부리지 않는다.
지역적 구분:
섬진강 동쪽지역. 전라 좌도지역.
지리산 부근 전라도 산악지역 등지.
남원, 운봉, 구례, 순창, 홍덕 등
창법:
씩씩하고 대담하며, 처음 소리를 낼 때 신중히 내고, 구절의 끝맺음이 명확하다.
동편제 창법은 ‘막자치기 소리’라고 하는데 이는 특별한 기교 없이 ‘목으로 우기는’ 소리를 말한다. 이러한 비기교성 때문에 동편제 소리를 제대로 하려면 선천적으로 풍부한 성량을 타고나야한다. 대체로 장단의 운행에 있어서 그 템포가 빠르며 ‘잔가락’ 없이 ‘대마디 대장단’이 주축이 되고 대마디 속에 빈틈없이 사설을 채워 한 마루의 장단으로 소리 한 꼭지씩을 해결해 나간다. 이처럼 동편제는 장단의 마루에 충실하고 템포가 빠르기 때문에 자연히 발림(몸짓)을 할 여유가 없어서 연기 면에서 건조한 인상을 준다. 그 대신 목으로 우겨대는 특징을 살려 장단마다 끝은 ‘졸라 떼기’ 때문에 긴장이 풀리지 않고, 따라서 다음 소리를 기대하게 때문에 건조함을 커버한다고 한다. 동편제가 비기교적이고 건조한 연기로 일관된다는 것은 그만큼 예스럽고 소박하다는 것을 뜻한다. 기교면에서 고졸하다는 것은 그만큼 역사가 오래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판소리가 발생하여 독립된 예술 형태로 형성될 시기의 수법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정통파인 것이다. 동편제 소리는 ‘어부가 그물코가 큰 그물로 고기를 잡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는데 자연히 자잘한 고기는 빠져나가고 큰 고기만 남는 것과 같이 대충대충 거뜬거뜬한 인상을 주면서도 야멸찬 소리로 이어지는 창법이라 할 수 있다.
대표 명창:
송흥록을 비롯하여 박만순, 김세종, 정춘풍, 김창록, 김찬업, 박기홍 등이 있다.
2.서편제
시조명창:
박유전 스타일의 유파.
음악적 특징:
계면조(界面調슬픈가락)의 표현에 중점을 두며, 발성의 기교를 중시하여 다양한 기교를 부린다. 소리가 늘어지는 특징을 지니며, 매우 기교적인 리듬을 구사한다.
지역적 구분:
섬진강 서쪽지역. 전라 우도지역.
전라도 평야지역 등지.
광주, 나주, 보성, 화순, 해남 등
창법:
부드럽고 애절하고 꼬리가 길다.
동편제에 비해 섬세하고 여성적이다.
서편제는 동편제의 고졸성을 극복하여 이루어진 기교파를 말한다. 동편제가 선천적인 성량에 의존하는데 반하여 서편제는 후천적인 노력이 그 성패를 가르는 것으로, 말하자면 가공과 기교와 수식으로 소리를 만드는 유파이다. 따라서 동편제처럼 거뜬거뜬 소리를 할 수 없어 자연히 소리는 늘어지고 템포도 늦어지게 된다. 장단도 ‘대마디 대장단’으로는 맛이 없어져서 ‘잔가락’이 많이 끼어들게 마련이고 동편제에서처럼 한 장단에 소리를 차곡차곡 해결해 가는 것이 아니라 소리 한 꼭지를 몇 장단씩 끌고 나가기도 한다. 소리에 여유가 있다 보니 발림도 풍부해져서 연기도 발달되었다. 고졸하고 소박한 동편제를 개혁한 서편제는 정통적인 창법에서 해방되어 기술적으로 발전된 유파라고 하겠다. 그러나 동편제를 고집하는 사람들은 서편제를 이단으로 모는가 하면; 서편제에서는 동편제를 ‘장작 패듯 한다.’고 빈정댄다. 서편제 소리는 ‘어부가 그물코가 작은 그물을 써서 잔고기 하나도 빠뜨리지 않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는데 서편제의 ‘곰상곰상 차근차근’한 기교성이 고줄한 동편제와 잘 비교되는 말이다.
대표명창:
박요전을 비롯하여 이날치, 정창업, 김채만 등이 있다.
3. 중고제
시조특징:
염계달, 김성옥의 스타일을 이어 받은 유파.
음악적 특징:
상하성이 분명하고 애조를 잘 불렀다.
지역적 구분:
경기도와 충청도에서 성행.
창법:
동편과 서편의 중간이다
가풍과 달리 창법에서 독특한 기교를 부리는 것으로 중고제(中高制)가 있다. <창악대강>에서는 '동편, 서편도 아닌 중간제이다 성음의 고저가 분명하고 명확히 구분하여 들을 수 있으며 또 소리를 낼 때 평평하게 시작하여 중간을 높이고 끝을 다시 낮추어 끊는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중고제란 근본적으로 성량이 풍부한 사람이 아니면 흉내도 낼 수 없는 기교이다. 소리의 '내두름(初頭)'은 낮은 음정에서 시작하여 차츰 음정을 올려 창자의 성량에 한계에 달하면 다시 음정을 낮추어 부르는 기교인데 이 중고제의 명인은 모홍갑이었고 근세에는 송만갑이 이 기교를 많이 썼으나 근래에는 중고제 기법을 쓸 줄 아는 사람을 찾기 어렵다고 한다.
대표명창:
염계달을 비롯한 모흥갑, 고수관, 김제철,
한송학, 김석창, 김정근, 김창용 등이 있다
동편제 지역은 지리산과 맞닿고, 서편제 지역은 평야가 발달했다. 지형 탓인지 소리가 각기 다르다. 기교와 수식이 돋보이는 소리가 서편제라면, 동편제는 기교가 적다. 대신 힘이 있고 박자가 빠르다. 소리 끝을 짧게 끊고 시김새가 굵다. 일제 강점기를 기점으로 전통을 강조하는 소리는 고제, 새로운 흐름을 강조하는 소리는 신제로 구분한다.
가풍이니 기교로 구분되는 창법들은 모두가 지난날 명창으로 알려진 특정한 대가가 개발한 특수 창법으로 이른바 ‘더늠’(어느 대가의 장기로 후배들이 즐겨 부르는 대문)으로 오늘날까지 변화 없이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가풍 또는 기교는 동편제나 서편제를 막론하고 모두 즐겨 부른다. 두 유파는 배타적이어서 서로가 뒤섞이는 일은 없으나 소리의 특정한 대문에 이르면 똑같이 이 ‘더늠’을 부르는 것을 알 수 있다.
석화제, 설렁제, 경두름제의 세 가지 창법은 어느 특정 명창이 새로 개발한 독특한 스타일로서 가풍이라 하겠다.
설렁제를 개발한 사람은 명창 권삼득(1771-1841)이라고 전하여 진다. 원래 권삼득은 안동 권씨 후예로 글공부보다는 소리공부에 더 집착하여 끝내 광대가 된 이른바 ‘비갑이(양반출신의 광대를 말함)’에 속하는 천재적 성악가였다. 그는 영․정․순조 연간에 활동했던 8명창 중 가장 선배로서 신재효는 ‘광대가’에서 ‘권생원의 사인(士仁))씨는 천층절벽 불끈 솟아 만장폭포 월렁 꿜꿜…’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 말로 보아 그의 창법은 매우 격렬하고도 청고(淸高)했던 것 같다. 그는 전통적인 창법에는 만족할 수 없어 이 ‘설렁제’를 개발하였는데 일명 ‘호걸제’라고도 할 만큼 호기 등등한 가풍으로 현재 전창(傳唱)되는 것으로는 ‘춘향가’에서 군노사령이 춘향을 잡으러 가는 대문, ‘흥보가’에서 놀부가 제비 후리러 가는 대문, ‘적벽가’에서 군사들의 설움타령에서 중에서 자주 들을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놀부 제비 후리러 가는 대문은 후세의 전창자들이 “이 대문은 옛날 8명창 중의 하나인 권삼득 선생의 더늠인디…”하며 그의 대표적인 더늠으로 소개하고 있다.
석화제는 ‘가야금 병창제’와 비슷한 가풍으로 명랑하고 건들거리는 성음이 많이 들어가는 것이 특징이다. 현행 판소리 중 ‘춘향가’의 천자 뒤풀이, ‘수궁가’의 토끼화상을 그리는 대문과 날짐승들의 상좌다툼 등에서 이 석화제의 가풍이 전창되고 있다. 석화제의 창시자는 김계철이라고도 하고 김제철이라고도 하여 명확하지 않다.
경두름제는 <창악대강>에서 ‘순조-철종간의 명창인 염계달(廉季達)에 의해 비롯’되었고 ‘염계달의 출생지가 경기도 여주임으로 그의 특조를 일러 경도림이라 한다.’라고 설명하는데 이로보아 염계달이 창시자이며 그가 경기도 태생이기 때문에 경도림이라 하였다는 것은 곧 그의 창법이 경기도 토리(사투리)가 짙다는 것을 뜻한다. 현행 판소리에서 이 경두름제가 가장 잘 나타나는 것은 ‘춘향가’에서 이도령의 대화 부분인데 춘향, 춘향모, 방자나 향단이는 남원 사람인데 반하여 이도령은 서울 양반이기 때문에 호남조로 부르기보다는 경기조로 부르는 것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 것 같다. 이것이 하나의 스타일로 확정된 후로 ‘수궁가’에서 토끼가 용궁에 다녀와 별주부에게 욕설을 퍼붓는 대문, 흥보가에서 박 속에서 나 비단을 두고 부르는 ‘비단타령’에 이 경두름이 나오게 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호남조가 아닌 경기조 스타일이다. 동편제의 후계자였던 송만갑은 서울에 초청받아 소리를 할 때에는 그들의 기호에 맞도록 이 경두름제를 많이 섞어 소리를 했다고 한다. 따라서 경두름제는 유파라기보다는 가풍이다.
반드름제는 한 마루의 장단 속에 문학적 사설을 길게 삐치기도 하고 짧게 몰아붙이기도 하는 장단에 관한 기교를 말한다. 소리의 경지가 어느 정도 숙달해지면 ‘’대마디 대장단‘으로는 무미하기 때문에 요구되는 기교로, 소리가 높은 수준에 이른 다음에야 가능하고 듣는 사람에게도 단조로움을 벗어나게 해준다.
붙임새는 반드름제와 마찬가지로 음악의 단조로움을 극복하고 음악적 미감을 더하기 위하여 이 기교를 사용한다. 이 붙임새는 장단과 문학적 사설과의 관계인바 말을 놓는 자리에 따라 ‘엇붙임, 잉아걸이, 꾀대죽’등으로 불리는 기교가 있다. 이러한 기교가 가장 많이 사용된 것은 흥보가 중에서 김창환의 ‘제비 노정기(路程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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