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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21일 아들이 군에 입대했습니다. 그 날 이야깁니다.
"오살할 놈의 새끼가."
여자가 달칵 소리 나게 상추와 열무 김치가 담긴 접시를 우리 앞에 내려놓았다. 둘러 앉아 있던 우리는 움찔했다. 스탠으로 된 국그릇에는 수많은 상채기가 나 있었고 그 그릇에 담긴 열무 김치는 오래 된 듯 줄기가 누랬다. 희다 못해 누렇게 바랜 플라스틱 그릇에 담긴 상추는 물기 그득해 털면 좌르르 쏟아져 내릴 것 같았다. 우리 넷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를향했다. 퉁퉁한 여자였다. 선명한 흰 머리칼들이 그녀의 전체 머리빛을 회색으로 만들고 있었다. 여자는 파마기 하나 없는 긴 머리를 묶어 뒤로 넘기고 있었고 부숭부숭한 얼굴은 햇볕에 타서 얼룩덜룩 했다.
"아아니예요. 손님들한테 한 소리가 아니고 저 바깥에 개새끼한테 하는 소리라요. 저 새끼가 못되먹어서 말썽을 부려서 그래요."
그녀가 변명아닌 변명을 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탁탁 소리를 내면서 양념들을 내려놓았는데, 된장과 마늘, 그리고 조각 낸 고추가 반찬의 전부였다.
"개새끼가 이렇게 사니까 지가 최고인 줄 안단 말이지."
욕은 아주 뚜렷했다. 느닷없다는 느낌이 몹시 불쾌한 것으로 바뀌었다. 나는 일어서서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엉덩이께 바지가 터질 듯 실룩거렸다. 나가버릴까. 그럴 수는 없었다. 시계는 벌써 열 두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밥을 먹고 나면 한 시가 넘을 터였다. 아이가 보충대에 들어가야 하는 시각은 한시 반, 겨우 한 시간 삼십 분이 남았을 뿐이었다.
집을 나선 것은 열 시쯤이었다. 서울에서 춘천까지는 한시간 반정도면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가는 길에 점심을 먹으리라 생각했던 것인다. 남편은 휴가를 냈다. 자신의 부모님과 연관된 일 이외에는 꿈쩍도 하지 않던 남편이었다. 딸아이도 따라나서 모처럼만에 가족이 나들이하는 셈이었다. 애초에 나는 오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이와 떨어진다는 생각, 아들이 군에 입대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온몸이 눈물로 차올랐기에 추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미 눈물을 쏟은 다음이었다. 빨래를 개다가 혼자 복받쳐 울었고 눈물 줄줄 흘리면서 딸아이 방에 들어가 엉뚱하게 딸아이를 붙들고 엉엉 울어댔던 것인데. 책을 읽다가 모니터를 들여다보다가 온몸이 눈물로 그득해지는 그런 일을 두어 번 겪고 나자 추스리지 못하고 울어댈까봐 끔찍했다. 해서 가지 않겠다고 결심을 했고 그렇게 선언했는데 가지 않겠노라는 내 결심을 들은 아들아이는 심상한 표정이었다.
"엄마 마음대로 해. 나는 어떻게 해도 괜찮아."
하긴 가는 방법은 많았다. 버스도 있었고 기차도 있었다. 인터넷에는 배차 간격까지 상세하게 올라와 있었다. 가지 않겠다는 내 말을 들은 딸아이는 자신이 대신 데려다주겠노라고 제안 했다.
"엄마, 내가 오빠 버스 터미널까지 데려다 주고 올게."
그건 데려다 주는 게 아니었지만. 단지 배웅하는 것이었지만 제딴에는 사뭇 진지했다. 최근 머리를 몽땅 깎아 군인 못지 않게 짧은 머리칼을 한 딸아이로서는 대담한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무슨 생각인지 어느 날 밤 제 손으로 머리칼을 모조리 깎아버린 딸아이를 보고서 나는 기겁을 했고 딸은 귀찮아서라고만 대답했을 뿐인데 역시 바깥 시선에는 신경이 쓰이는 모양인지 바깥 출입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랬으니 오빠를 터미널까지 배웅한다는 것만도 대단한 용기였을 터였다.
가지 않겠다는 그 생각은 전전날, 아이를 데리고 친척들 집 돌면서 인사시킬 때만 해도 변함없었다. 언제나 정면을 비켜가면서 살아왔다. 뒤로 슬쩍 물러서서 아픔과는 거리를 두었고 그런 식으로 자신을 달래왔는데 그것이 결코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는 것을 뒤늦게서야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 아프더라도 보고 오자. 앞으로 수십년간 들어가는 모습 보지 못했다고 가슴 찔리는 것보다는 낫겠지.'
아침을 준비해놓고 아들아이를 부르러 갔다가 아이가 내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하고 있는 것을 본 다음 든 생각이었다. 아들은 나설 준비를 하기보다는 내 컴퓨터에 제 모니터를 떼어 달아주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 상황에 모니터라니.... 언젠가 아이에게 물었던 적이 있었다.
"네 모니터, 내가 쓸 수도 있니?"
"아마 쓸 수 있을거야."
그랬을 뿐인데 그걸 기억해 두었다가 군에 가는 날 아침 다른 일 제쳐놓고 그걸 하고 있는 것이었다. 준비물 챙기랬더니. 무언가 울컥했다. 아무에게도 받아보지 못한 배려였던 것이다.
그래서 네 식구가 춘천가는 길을 따라 달려왔고 오는 길은 심심찮게 밀려 은근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날은 더울 정도로 화창했다. 서울에는 개나리들이 져버린 지 오래였지만 서울을 벗어나자 개나리들은 여전했고 군데군데 산벚꽃나무들이 꽂아놓은 꿈처럼 화사했다.
강촌을 지나고 등선폭포를 지났다. '춘천 102 보충대, 앞으로 십오분'이라는 팻말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배는 고프지 않았지만 열한시 반이었다.
"여기서 점심 먹고 갈까?'
물굽이에서 남편이 차를 세웠다. 초록 물이 오르기 시작하는 강가는 더할 나위 없이 싱그러웠다. 햇살이 강물위에서 반짝였고 산그림자가 저 멀리서 맴돌고 있었다. 때로 바람이 찼다. 평일인데도 식당 앞에는 차가 많았다. 차에서 내리는 사람마다 한 명씩 머리 바싹 깎은 아이가 꼭 끼어있었다. 아이들끼리 몰려 온 패거리도 있었으나 주로 가족끼리 몰려온 일행이 대부분이었다. 한 일행은 내려서서 길을 알리는 표지석 옆으로 갔고 누군가 사진기를 들이댔다. 아들아이는 그런 아이들을 볼 때마다 피식피식 웃었고 어젯밤에 깎은 자신의 머리를 매만졌다.
"에이, 쪽팔려."
"어쩔 수 없잖니. 다들 입대하는데, 누가 신경쓴대?"
닭갈비와 막국수. 식당은 바글거렸다. 좁기도 했다. 우리는 돌아나와 차를 탔다.
"여기서 십 오분 걸린다니 얼마 안 남았을거야."
굽이를 돌아서 조금 달리니 '춘천 102 보충대 앞으로 십 일분'이라고 쓴 팻말이 나왔다.그리고는 십분. 다시 차에서 내렸다. 강가에 자리잡은 식당이었다. 시멘트의 회색을 남김없이 드러낸 둥근 건물이었다. 식당은 진열장처럼 통채로 유리를 드러내고 있었고 안에서 먹는 사람들의 모습이 훤히 보였다. 역시 메뉴는 닭갈비와 막국수, 밖에서 들여다보아도 빈자리가 없었다. 혹시나 싶어 문을 밀었다. 테이블은 빈 곳이 없었다. 모든 테이블에는 커다란 철판이 가운데 놓여 있었고 붉은 색 음식이 놓여 있었다. 닭익는 냄새가 훅 끼쳐왔다. 누구라 할 것없이 머리 짧은 아이를 두고 먹고 있었다.
두리번 거리다가 둥글고 묵직해보이는 철판을 들고 오는 여인에게 물었다.
"자리 있어요?"
여인은 말하고 싶지도 않은 모양인지 고개만 저었다. 도로 나왔다. 이층으로 올라갔던 남편과 아이가 내려왔다.
"이층은 안해. 문 닫았어."
다시 차를 탔다. 조바심이 일기 시작했다. '점심도 못 먹이고 보내면 어쩌지. 들어가면 배고플텐데.' 그러잖아도 아이는 들어가면 먹지 못하고 온 온갖 음식이 생각난다고 했다. 그런 말을 하면서 외할아버지가 시켜준 닭튀김을 끝까지 먹었던 것이다.
네 군데 식당이 모두 만원이었다. 시계를 보았다. 열두시가 넘고 있었다.
조급해진 나는 차를 세우기도 전에 미리 뛰어내려 다섯번째 눈에 띤 식당에 들어가 빈 자리가 있는지를 물었다. 동굴 모양으로 치장한 식당이었다. 동굴벽처럼 세워놓은 장식물은 온통 금색으로 오히려 불편했고 사방에 놓여 있는 각종 기념물인듯 싶은 장식은 가치와는 상관없이 흉물스러웠다.
"자리 있어요?"
긴 머리를 뒤로 묶은 퉁퉁한 식당 주인이 실내를 둘러보았다. 역시 '102보충대까지 십분'이었다.
"몇 분인데요?'
"네 명이에요."
"있어요. 들어오세요."
배가 나온 그 남자의 모습은 당당했으나 무언지 모를 추레함이 풍겼다. 어쩌면 나같은 미물은 모를 누구일지도 몰랐다. 거침없는 목소리와 자신이 넘쳐나는 태도가 묵직함을 더해주었다. 식당은 입구를 중간으로 하고 양쪽으로 나뉘어 있었다. 어지러이 놓인 신발들을 발끝으로 밀어제치면서 되돌아나가 차안에 앉아 있는 아이들을 불러들였다.
"여기 자리 있대."
입구 양쪽에는 화단이 있었으나 둘러볼 겨를이 없었다.
"저쪽으로 가세요."
그가 가리킨 쪽은 왼쪽이었다. 막 손님이 일어선 듯 너저분한 테이블이었다. 우리가 자리잡은 쪽에는 세 팀이 있었다. 가족인 듯한 두 팀과 모임에서 나온 듯한 한 팀이었다. 모임은 모두 젊은이들이었고 다른 두 팀은 우리처럼 머리 짧은 한 명을 놓고 둘러앉아 있었다.
"야, 여기 손님 받아."
나를 맞아들인 주인 남자가 주방을 향해 소리 질렀다. 이 집 주방은 들어서는 입구 맞은 편인 모양이었다. 카운터 뒤에 바로 주방이 있었고 양쪽은 사각 앉은뱅이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그는 행주를 들고와 우리가 차지한 테이블을 닦았다.
"뭐 드실랍니까?"
메뉴를 볼 것도 없었다. 벽에 붙어 있는 메뉴판에는 닭갈비와 막국수 뿐이었으니까.
"닭갈비 삼인분 주세요. 오래 걸리나요?"
"금방 나옵니다. 술은 뭘 드릴까요?"
"술은 안 마셔요. 아, 사이다 하나 주세요."
"밥은 어떻게 드실래요? 막국수 드실랍니까?
"아니요. 밥을 주세요."
주인이 주문을 받고 카운터로 돌아갔다. 카운터 뒤, 휘장을 들추고 여자가 나왔다. 키는 작았고 퉁퉁했다. 여자는 은빛의 꽃무늬 섞인 알루미늄 쟁반을 들고 있었고 그것을 들고 와서 김치와 상추를 내려놓았고 내려놓으면서 우리를 기겁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불쾌감을 남겨놓고 여자가 간 뒤 남자가 왔다. 그는 두터운 둥근 철판을 테이블 한 가운데 있는 불 위에 내려놓았다. 검은 철판은 오랜 세월 버틴 듯 군데 군데 벗겨져 흰 빛이 드러나 있었다.
"여기서 102보충대까지 얼마나 걸립니까?"
남편이 물었다.
"여기서 십분 걸려요."
굵은 그의 목소리는 느릿했고 우렁우렁했다. 그에게서는 닳고 닳은 이의 무게가 풍겼다. 가볍지 않으나 안심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었다. 시장에서 좌판을 벌이는 이들처럼 빤질거리는 무엇이 있었으나 쉽게 무시할 수 없는 무언가도 있었다. 그는 철판을 불위에 놓고 가스불을 켰다.
"먼저 후라이팬을 달구어야 하니까 좀 기다리세요."
"양념을 맵지 않게 해주세요. 제가 매운 걸 못 먹어요."
남편이 말했다.
"아, 걱정 마십쇼. 요즘 고추는 하나도 안 매워요. 매운 걸 못 먹는 사람도 다아 먹게끔 해드려요. 거 옛날에는 매워서 못 먹었는데 요즘은 안 그렇다니까요."
"야, 여기 4번 테이블은 양념 절반만 넣어서 맵지 않게 해드려. 매운 걸 못드신단다."
주인 남자가 주방에 대고 소리쳤다.
배가 고팠다. 열무 김치는 시었고 된장과 마늘을 먹기는 힘들었다.
"닭갈비 기다리는 동안 뭐 좀 다른 거 먹을래?"
"먹을 게 뭐있어. 닭갈비밖에 없는데."
"여기 메밀 부침개 있네. "
"부침개 하나 주세요."
남편이 카운터에 있는 주인에게 말했다.
"야, 4번 테이블에 메밀 지짐이 하나 있다."
주인 남자가 주방을 향해 소리 쳤다.
정작 입대할 아이는 수첩에 이런 저런 것들을 옮겨 적느라 정신없었다. 오는 동안도 내내 전화하느라 말 한마디 제대로 할 짬이 없었다. 동아리 친구, 선배, 동기, 고등학교 동창, 전화할 사람은 많고도 많았다.
여자가 부침개를 가지고 왔다.
"개새끼가 지 마음대로 한다니까요."
여자는 누구도 보고 있지 않았다. 여자는 탁 소리를 내면서 접시를 내려놓았다. 접시가 출렁 춤을 추었다.
"지가 제일 잘난 줄 알아요."
"저 밖에 있는 개새끼한테 하는 소리에요. 어제 그 개새끼가 닭을."
어쩌고 저쩌고 했으나 알아들을 수 없었다. 여자의 태도는 극히 미묘했다. 혼자 중얼거리는 것 같았으나 분명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고 내용은 손님들에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듣고 싶지 않았으나 듣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뭐람. 아이들이 인상을 찌푸렸고 남편은 세모눈을 했다. 여자는 다시 주방으로 돌아갔고 주인남자의 눈이 그녀의 뒤를 쫓았다.
바람이 불어왔다. 왼쪽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 옆에 있는 창문이 열려 있었다. 햇볕이 나무 잎사귀에 떨어져 내리고 있었고 나뭇잎은 노랗게 보일 정도로 환했다. 아기가 있는 팀이었다. 손자를 따라온 듯 머리 깎은 젊은이가 한 명, 그리고 골고루 세대가 섞인 어른들이었다. 그들은 소주를 마셨고 닭갈비는 거의 다 먹어 철판은 너저분했다. 여자가 국수를 쟁반에 들고 왔다. 그녀는 국수그릇들을 소리내면서 내려놓았고 아무도 그녀에게 신경쓰지 않는 듯 보였으나 그녀가 그릇들을 내려놓는 동안 그들은 입을 다물었다. 여자는 이내 일어서서 돌아갔다. 방을 가로질러 가는 동안 소리가 퉁퉁퉁 울렸다.
주인 남자가 잘게 자른 양배추, 잘게 자른 닭고기, 양념을 담은 접시를 들고 왔다. 흰 양배추위에 올라앉은 붉은 양념은 맛깔스러워보였으나 우리는 모두 식욕을 잃은 뒤였다. 그는 접시위의 물건들을 철판위에 부었다.
"뒤적이지 말고 기다리십쇼. 양배추가 익어야 해요. 닭고기가 두꺼워서 익는 데 한참 걸리니까 그때 가서 뒤적이세요. 양념이 골고루 배어 들어야 맛있습니다. 허허."
많은 것을 아는 사람답게 그는 이런저런 주의를 주고 있었다.
"아주 안 맵게 드시려면 양념을 좀 덜어내세요. 나중에 부족하면 더 드리니까 얼마든지 달라고 하십쇼. 우리집 닭갈비는 아주 맛있습니다. 다 드시고 난 다음에 양념에 밥을 볶아드세요."
나는 카운터 뒤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내 눈길을 따라 가던 주인 남자도 시계를 보았다. 열두시 사십 오분. 먹는데 삼십분, 가는데 최소한 십오분은 잡아야 했다. 남자는 시간을 계산했다.
"지금 사십 오분이니까 충분해요. 한 삼십 분 드시고 십 오분에 나가시면 되겠네."
그는 다시 덧붙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좀 늦어도 괜찮아요. 한 시에 도착해도 괜찮습니다. 한 삼십분 늦어도 아, 차가 많이 밀렸나보네요. 어서 오세요. 그런다니까요.허허"
"요즘 군대는 옛날하고 달라요. 부모님들은 옛날 생각하시는데 걱정하실 것 하나도 없어요. 천천히 드시고 가도 됩니다."
남편을 보면서 하는 말이었다.
그가 실제로 보충대에 가 본 적은 없을 것이었다. 길목에서 식당을 운영하다보면 이내 알게 된다. 손님들은 늘 목적을 가지고 지나간다. 점심을 혹은 저녁을 때우느라 드나드는 손님들의 이야기를 주워들었을 것이고 그 이야기만 해도 충분히 도움이 되었으리라. 이 식당들이 내놓은 팻말, 거리에 즐비한'102보충대까지 몇 분'이라는 팻말만 보아도 누구를 상대로 하는지 짐작이 갔다. 어디 우리 같은 사람이 한두명이겠는가. 군대가 생긴 이후 아니 입영이라는 저 제도가 생긴 이후 화요일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몰려들 것이었으니 화요일은 그들에게 바쁜 날일 것이었다.
"아, 그렇습니까? 고맙습니다."
식당 주인 몸무게의 절반이나 나갈 듯한 남편이 대답했다.
닭고기가 익는 냄새가 났다. 지글거리면서 양배추가 투명하게 변했고 뒤적이는 동안 붉은 양념이 묻어 갈색으로 변해갔다. 군데군데 떡볶이 떡이 굴러다녔다.
"자, 어서 먹어. 먹어야 기운내서 가지."
맛이 없었다. 아이들은 두어 젓가락 집어 먹은 뒤에 열의가 식었는지 뒤적이기만 했다.
남편은 고기를 골라내 아이들 접시에 올려놓았고 아이들은 떡을 골라 먹었다. 주인 남자의 말대로 그다지 맵지는 않았다.
다시 퉁탕탕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대화를 뚫고 명확히 들려왔다. 소리는 우리 앞쪽에 앉아 있던 팀에서 들려왔다. 여자가 그릇을 내려놓고 있었다. 일순 그쪽 팀이 고요해졌다.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그들 역시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옆 테이블을 치우느라 철판을 들고 카운터 쪽으로 가던 주인 남자도 그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가 다시 주방쪽으로 갔다. 바닥이 쿵쿵 울렸다.
주인은 재빨리 그녀 뒤를 좇았다.
"야, 너 뭐 불만 있으면 말로 해. 손님들 드시는 데서 구시렁 대지 말고."
키도, 몸집도 훨씬 큰 식당 주인이 그녀 뒤에서 귀에 대고 말했다. 그가 뒤로 붙어서자 두 사람은 놀라울 정도로 닮아보였다. 긴 회색빛 생머리를 묶어 뒤로 넘긴 모습이나 퉁퉁한 몸이나 옷차림이 똑같았던 것이다. 주인 남자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내가 앉은 자리와 가까웠던 탓에 똑똑히 들렸다.
여자가 움찔했다.
"아니, 아니예요. 내가 뭐 불만이 있갔어요. 그냥 손님들 맛있게 드시라고 했을 뿐이에요."
여자는 허둥지둥 주방으로 들어갔다.
닭갈비는 절반도 넘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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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소설입니다. 눈 앞에 그날의 광경이 환히 보이는...^^
^^ 그렇게 읽히려고 작정했답니다.
저도 2월2일에 아들 논산훈련소 보냈는데 어떤 엄마에겐 글감이 되고 어떤 엄마는 허전한 탄식만 늘어놓고 있네요. 지금쯤은 자대 배치 받으셨겠어요. 잘 지내고 있을거라 믿어야죠. 아들 보내는 엄마는 아쉽고 안타깝지만 그곳에 계신분들은 늘 일어나는 일상이겠지요. 글 잘 읽고 갑니다. *^^*
자대 배치 받아 유격훈련 갔다 왔다는 전화를 어제 받았답니다. ^^ 면회도 한번 갔구요.
저도 머지않아 아들이 군대를 갈텐데..... 가슴이 아프겠죠... 생각만해도 코끝이 찡해지네요.
ㅎㅎ 그거 곧 회복되더라구요. 전 아들 훈련소 있는 동안 거의 매일 편지를 썼답니다.
팔 하나 다리 하나 떼어낸 듯 아프셨나 봅니다. 지금은 좀 진정이 되셨겠네요. 참 이상합니다. 대부분 이렇게 아들을 군대에 보내는데 저는 왜 자랑스런 마음이 먼저 들었는지... 군대에 갈 때 저희 부부는 그저 구경만 했습니다. 지가 알아서 시기 선택하고 할 수만 있다면 전방으로 갈 거라고 말하며 씩씩하게 집 떠나는 아들을 보며 서운함 보다는 어찌나 대견하던지...의정부로 갔지요. 아빠가 데려 갔구요, 저는 작은아이 대학 입학식에 같이 갔지요. 지금 생각하면 어쩌면 그것이 핑계였을지도.. 아무리 강심장을 가졌어도 아이가 입었던 옷이 소포로 오면 엄마가 운다는데 전 그때도 울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옷을 빨지 못하고 한 달 이상 아이방 침대 위에 그냥 밀쳐 두긴 했었네요. 신병 훈련 끝나면 전화도 자주하고 집에도 자주 올거예요. 안타까움도 많이 줄어 들겠지요. 지금쯤 마음의 키가 조금씩 자라고 있겠네요. 우리아인 방정리 하는 것과 혼자 사는 방법을 군에서 배우고 왔답니다^^ 나중에 전역한 뒤 그 성과도 글로 보여 주세요. 바쁘셔서 다행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희야'님 매일 눈물 짓고 있었을것을.... (일요일 아침이라 한가하기도 하고 바람재도 일요일은 조용하길래 답글 길~~~게 씁니다)
그러잖아도 그 날 돌아와서 엉엉 울고 있는데 번역회사에서 전화가 왔더라구요. 그렇지 않았으면 계속 울었을 뻔 했답니다. 다행히 편지 쓰는 제도도 있고 저도 몹시 바빠서 이내 회복했답니다. 물론 한동안 집안은 무덤같았지만.
오랜만에 희야님 글 읽습니다. 무척 반갑네요~
고맙습니다.
큰녀석 입대땐 마누라 따라가지도 못했고 작은녀석 입대땐 함께가서 어찌나 서럽게 울어대던지~ 그때일을 떠올리면서 아주 실감나게 잘 읽었습니다 제대후엔 군대 잘 보냈다고 자신있게 말할껍니다 ㅎㅎㅎ
ㅎㅎ.^^ 입대식 마치고 줄 지어 들어가는 모습 보고 저도 입술 깨물었더랬습니다. 한번이라도 더 보려고 멀리서 까치돋움 했더랬지요. 지금은 양구에 있답니다. 잘 하고 나오겠지요.
울 아들도 7월에 간다는데 왜 그리 더운달에 신청했냐고만 했는데 스스로 선택했지만 땀을 많이 흘리는 아들이기에 올 여름 걱정입니다..
글게요. 더워서 걱정이네요. 여러 모로 재고 잰 끝에 내린 결정이었겠지요. 스스로 선택했으니 견뎌낼 겁니다. ^^
우리아이도 7월에 갔다가 지금은 제대했는데 추울 때 보다 나을거라고 하더군요.
에궁 앞으로 두번 닥칠일이겠지만 생각하면 눈물이 나네요 ...
겪어보면 달라요. ^^ 전 눈물나리라고는 생각도 안했거든요.
희야님...저는 지금 웃고 있습니다. 막내놈이 제대하고 복학해서 1학기를 마쳤거든요. 요즈음은 인터넷으로 사진도 볼 수 있고 조금 더 지나면 채팅도 가능하답니다. 그러니 마음 놓으십시오. 덕분에 저도 아들 보내던 그날을 더듬어 봅니다. 여기는 울산인데 의정부까지 갔었거든요.
아 멀리서 가셨군요. 의정부라면...서울 근교로 배치되었던게지요? 아이 훈련소 있는 동안 인터넷으로 부지런히 편지를 썼답니다. 며칠 빼먹었을 뿐 거의 매일 썼지요. 지금은 자대 배치 받았고 아이도 제가 바쁜 걸 아니 핑게 삼아 편지를 안 쓰네요. ^^
저두 이회창씨 찍으려구 맘 먹고 있는데, 군대 안 보낸 이야기가 터졌을 때, 저의 작은 아들이 입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못 찍었죠. 투표장 투표소 커튼 젖히고 들어가서 도장을 집어 드니, 저절로 다른 사람 칸으로 도장의 방향이 가더라구요. 충분히 희야님 맘이 이해됩니다.
ㅎㅎ 그래서 표 하나를 잃었군요. 그 중요한 표를. 어쩐지 떨어지드라....ㅋㅋ
군대교육내용은 알차고 충실합니다.^^ 질이 떨어지는 엉터리 장교나 간부만 없다면. 아드님은 더욱 훌륭한 사람이 될겁니다.
희야님도 아드님 군대 보내셨군요. 뭐 그리 눈물까지 날까 싶어도 당해 보면 어쩔수 없는 엄마의 마음이지요. 단편소설 읽은것 같습니다. 글 쓰시는 분들은 기억력이 좋으신것 같아요. 세밀한 부분까지 정확하게 묘사하셨네요.
희야님의 큰아이가 입대를 했군요. 저도 아이 군에 보낼 때에 현관 앞에서 잘 다녀오라고 인사 나누고 돌아서 문 닫으며 쏟아냈던 눈물.. 그 아이 많이 성장하는 시간을 갖게 되겠지요.. 가족의 의미도 한층 더 깊게 각인될께고요.. 희야님.. 안녕하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