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키이우) 지하철에 비상이 걸렸다. 도시의 남북을 가로질러 달리는 지하철 파란색 노선의 6개 지하철역이 지난 8일 침수돼 운항이 6개월간 중단된 데 이어 일부 지하철의 지반(지하철 천정)이 꺼지는 조짐도 포착됐다. 러시아군의 공습에 따른 피해라면 모르겠으나, 자체 설계및 시공의 문제라는 지적이 많다.
정치적으로는 수도권(키예프) 지하철을 총괄하는 비탈리 클리치코 시장이 코너로 몰리는 모양새다. "우크라이나를 권위주의로 몰고 가고 있다"며 젤렌스키 대통령을 비판한 클리치코 시장에게는 최대 악재다. 내년 3월 대통령 선거를 의식한 정치 파벌간의 경쟁이 키예프 지하철 문제로 더욱 가열될 것으로 보인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에 따르면 긴급 보수 작업을 위해 폐쇄된 데메예프스카야 지하철역 주변의 지반이 꺼진 것으로 17일 전해졌다. 지하철 위에 건설된 데메예프스키 시장의 한 쇼핑건물이 뒤틀리고 일부가 내려 앉았다. 현지 텔레그램 채널은 "지하철 위 쇼핑몰이 밑으로 꺼지기 시작했다"며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주변 아스팔트에 균열이 생기고 블랙홀도 포착됐다.
키예프 지하철 역 주변의 지반 침하 모습/텔레그램 캡처
키예프 시당국은 그러나 "파란색 노선의 6개 지하철역이 폐쇄되기 전에도 이런 일이 일어났다"며 "전문가들은 정기적으로 이를 모니터링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시는 “폐쇄된 지하철역 사이의 구간은 안정적이고 완벽하게 제어된다"며 "전문가가 보강 구조물 배치 및 누출 위치 파악 작업을 계속 중"이라고 해명했다.
키예프 시는 내년 여름 두 개의 지하철역을 더 폐쇄하고 보수할 것으로 알려졌다. 지하철 터널 벽면에서 누수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키예프 지하철역의 침수가 처음 알려진 것은 지난 8일이다. 스트라나.ua와 rbc 등 러시아 매체에 따르면 키예프 지하철의 일부 구간이 침수되면서 테렘키역과 데메예프스카야역 사이의 6개 역이 폐쇄됐다. 천정에서 물이 새 지하철 철로로 물이 흥건하게 고였고, 지하 터널 구조물의 안정성이 우려됐기 때문이다.
폐쇄된 이 노선은 키예프의 리비드강 아래로 지나고 있다. 6개 지하철역은 2010년~2013년 키예프에서 가장 최근에 개통된 역들이다. 지하철이 개통되면서 역세권및 주변 지역에 건설 붐을 일어났다. 우크라이나 전쟁 전 통계(추정)에 따르면 키예프 인구의 약 10%(최소 25만명)가 이 지역에 거주했다.
지하철 운행 중단으로 버스 정류장으로 몰린 키예프 시민들
시민들의 발 역할을 해온 지하철이 중단되자, 당연히(?) 교통대란이 벌어졌다. 시당국은 운행이 중단된 지하철 구간에 버스 77대와 트롤리 버스 20대를 긴급 투입했으나, 교통 혼잡은 피할 수 없었다.
현지 영상을 보면 지하철 천정이 붕괴 위험에 처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 당국은 “균일하지 않는 압착 과정과 주변 진동, 터널 프레임의 하중 등으로 인해 지하철 터널 구조의 안정성이 손실될 위험이 있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부실 시공(방수및 고정 작업 미비)과 리비드강 범람, '이탄·泥炭습지'(낮은 온도로 죽은 식물들이 미생물 분해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태로 쌓여 만들어진 토양층이 있는 습지/편집자 주)라는 지형적 요소를 침수의 주요 요인으로 꼽았다.
사실, 리비드강을 건너가는 이 구간은 건설 당시에도 6명의 인부가 사망하는 등 우크라이나 최대 규모의 지하철 건설 사고가 발생했던 곳이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클리치코 시장은 지난 8일 침수된 지하철 구간을 둘러본 뒤 빅토르 야누코비치 전대통령과 미콜라 아자로프 전총리, 레오니드 체르노베츠키 전시장에게 책임을 돌리며 비판했다. 야누코비치 대통령 정권은 지난 2010년 권력을 잡은 뒤, 국민에게 빠른 성과를 과시하기 위해 방수 작업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지하철역을 급히 개통했다는 것이다. 그중 테렘키역은 2013년 11월 가장 마지막으로 개통됐다.
지하철 누수 현장을 점검하는 클리치코 키예프 시장/텔레그램 영상 캡처
지하철 천정을 지목하며 누수 상황을 설명하는 모습/
그렇다고 클리치코 시장이 전임자들을 비난하기에는 '너무 시간이 흘렀다'는 반박도 나온다. 데니스 슈미할 총리는 이튿날(9일) 키예프 지하철 침수에 대해 시 당국을 비난하고 나섰다. 슈미할 총리는 "키예프 지하철은 대중교통 수단의 핵심으로, 또 수천 명의 시민이 찾는 방공호로 전략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며 "시 당국의 무관심으로 붕괴 위험에 처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시장이 참여하는 지하철 기술 및 안전 문제에 관한 특별위원회를 소집하기도 했다. 시중에서는 지하철 침수 사건이 클리치코 시장과 젤렌스키 대통령 세력간의 갈등을 촉발할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됐다. 대통령측이 클리치코 시장 측에 반격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는 분석에서다.
실제로 6개의 지하철역이 폐쇄되자, 친 대통령실 언론들은 키예프 시당국의 책임을 묻기 시작했고, 클리치코 시장 재임 9년간, 지하철 역이 하나도 건설되지 않았다고 점도 지적하고 나섰다.
안그래도 불과 1주일 전, 시 당국은 오데사 광장까지 지하철 노선을 연장하기 위해 4,700만 흐리브냐를 투입하기로 했는데, 물건너 갈 판이다.
클리치코 시장도 '위기 극복' 위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지난 5년간 논쟁을 벌였던 키예프 도심의 니콜라이 쇼르스(Николай Щорс) 기마상이 9일 아침 전격적으로 철거되기 시작했다. 시민들의 관심을 지하철 침수및 교통 대란에서 '기념물 철거'로 돌리려는 시장의 시도로 간주됐다.
논쟁을 벌였던 키예프 쇼르스 기마상이 전격 철거되고 있다/영상 캡처
지난 여름에도 젤렌스키 대통령 측과 클리치코 시장 간에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 펼쳐졌다. '사전 점검을 끝냈다'는 키예프의 주요 방공호 중 일부가 공습 경보 상황에서도 문이 잠겨 시민들이 제때 사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민 불만은 빗발쳤고, 격분한 젤렌스키 대통령이 시민의 안전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클리치코 시장을 해고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시장은 해임되지 않았다. 서방 측의 반대가 있었다는 분석도 나왔지만, 클리치코 시장의 해임은 젤렌스키 대통령에게도 부메랑으로 돌아오는 타격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클리치코 시장에 대한 젤렌스키 대통령 측의 공격에 한계가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