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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13)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폰 쿨바흐의 ‘샤를마뉴의 대관식’
프랑크 샤를에게 황제의 관을! 그리스도교 왕국의 탄생
-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폰 쿨바흐, ‘샤를마뉴의 대관식’, 막스밀리아늄(바이에른 의회 궁), 독일 뮌헨.
800년 성탄,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으로 예순 남짓의 남성이 엄숙한 자세로 들어가고 있었다. 체구가 큰 것으로 봐서 북쪽 지방에서 온 사람으로 보였다. 거대한 덩치는 전사의 몸에서 풍기는 불굴의 힘을 표현하는 것 같고, 흰 머리카락과 수염은 고상한 인품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예사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금세 알 수가 있었다. 프랑크 민족을 이끄는 왕 샤를(이탈리아어 카를로, 영어 칼)이었다.
한겨울의 추운 날씨지만 대성전을 채우고 있는 분위기는 감동적이고 따뜻했다. 왕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을 흠숭하며, 자신의 잘못에 대해 자비를 청했다. 동정녀 마리아께 전구를 청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때 조용히 그의 곁으로 다가오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 역시 몸에서 풍기는 인품과 성품이 남달랐다. 훗날 ‘성인’ 교황으로 불리게 될 레오 3세였다. 어떤 학자들은 “왕이 미사 도중 기도에 몰입해 있는 사이, 성 베드로의 ‘고백의 제단’에 있던 레오 3세 교황이 그에게 다가가 머리에 관을 씌워주었다. 관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기존의 ‘왕’의 것이 아니라, ‘황제’의 것이었다”고 말했다.
초상화 작가이며 역사 화가
소개하는 작품은 독일의 초상화 작가며 역사 화가인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폰 쿨바흐(Friedrich August von Kaulbach, 1850~1920)가 그린 ‘샤를마뉴의 대관식(Krnung Karls des Großen)’이다.
그는 하노버의 궁정화가로 역사를 주제로 그림을 그리던 테오도르 쿨바흐(Theodor F.W.C. Kaulbach, 1822~1903)의 아들이다. 그는 아버지한테서 그림을 배웠고, 후에 뉘른베르크 쿤스트게베베슐레에서 아우구스트 폰 크렐링(August von Kreling)의 제자가 되었다. 이 학교는 뒤에 뉘른베르크 벨레아르테 로얄 아카데미가 되었다. 그는 한스 홀베인(Hans Holbein)의 작품을 모방하기도 했다. 1871년, 바이에른 주 뮌헨으로 이주했고, 후에 프란츠 폰 렌바흐(Franz von Lenbach)와 프란츠 폰 스턱(Franz von Stuck)과 함께 뮌헨학파를 정의하는 그룹의 멤버가 되었다. 초상화 작가로 경력을 쌓았기에, 독일 제국은 물론 미국에서까지 사회적으로 신분이 높거나 유명 인사들 사이에서 꽤 인기 있는 초상화 작가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쿨바흐는 파리를 여러 차례 여행했고, 그래서일까, 19세기 말 프랑스 화풍을 연상케 하는 작품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 1886년 바이에른의 뮌헨 벨레 아르테 아카데미 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작품은 그의 역사 주제의 작품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유럽 전체에 미친 샤를의 영향력
작품 속에 등장하는 샤를은 로마 교황의 요청에 따라 북쪽에 있는 야만 민족들의 왕국에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그리스도교를 중심으로 유럽의 일치를 유지해 달라는 사명을 부여받았다. 이것은 프랑크 왕국의 설립 초기부터 있었던 것으로, 역대 프랑크 왕들의 공통된 사명이었다.
700년대 중ㆍ후반에 들어서면서부터 프랑크 왕국의 왕은 이미 아키텐과 롬바르드족을 정복했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아랍인들의 위협을 받고 있던 스페인까지 평정했다. 색슨족과 바이에른족의 반란을 진압했으며, 아바르족과는 전쟁 중에 있었다.
샤를은 단순한 전사가 아니었다. 그의 영향력은 유럽 전체에 예술과 학문을 꽃피게 했다. 카롤링거 문예 부흥은 그의 시절에 일어났다. 그의 존재는 그 자체로 사랑받는 주제였고, 전사들은 그를 존경했으며, 그리스도교의 유익한 것들을 정복하는 땅으로 확장시켰다.
이에 성 레오 3세 교황은 샤를의 머리에 황제의 관을 씌워 주었고, 과거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영토지만 더 이상 이교도의 로마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했다. 샤를 역시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 아니라, 성경에서 정의한바 왕 중의 왕, 군주들의 군주의 지상 대리자가 영광스럽게 부여한 칭호를 받았다.
로마의 백성은 “샤를 아우구스투스, 위대한 하느님으로부터 관을 받으신 분, 로마인들의 평화의 황제께”라고 환호했고, 프랑크 민족은 칼과 창을 세워 두드리며 “성탄! 성탄!”이라고 소리쳤다. 클로비스 시대부터 이어온 환호였고, 프랑크 민족이 역사의 주인공으로 다시금 입장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가 있는 성 베드로 좌(座)에서 그 해 성탄, 중세 그리스도교 문화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서구 가톨릭 제국이 탄생한 것이다. 800년 전 같은 날, 아기 예수가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탄생하신 것처럼.
어떤 역사 비평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로부터 내려오는 로마 교회를 설립하시면서 그 안에 큰 문명을 일으킬 씨앗을 하나 마련해 두셨는데, 그것이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고 했다. 8세기 동안 민족들의 회개와 교회의 확장으로 씨앗은 발아될 준비를 마쳤고, 마침내 때가 차서, 성 베드로의 후계자인 한 성인의 손에 의해 샤를의 제국에서 축복과 인정으로 꽃을 피웠다는 것이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샤를마뉴의 대관식 1200주년을 기념하며 “위대한 역사적 인물, 샤를마뉴 황제는 유럽의 그리스도교 뿌리를 상기시키며, 당면한 인간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분야에서 문화적인 개화를 이루었습니다. 연구자들이 그 시대를 연구하는 이유입니다. 유럽은 자기 정체성을 연구해야 합니다. 유럽은 샤를마뉴가 남겼고 1000년 이상 보존되어 온 문화유산을 되찾으려는 힘찬 노력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샤를마뉴는 프랑크 왕국의 최고 전성기를 이끌며 과거 서로마 제국의 거의 모든 영토를 회복함으로써 로마 제국을 기억하는 유럽인들에게 과거의 영광을 느끼게 해 준 인물이었다. 그는 새로 개편된 유럽의 지형학적 구도에 그리스도교의 복음을 토대로 법과 문화와 예술을 복원했다. 쇠퇴와 혼란이 거듭되던 시대에 그리스도교를 중심으로 유럽을 세운 설립자가 되었다. 그리스도교를 철저하게 수호한 황제로 인해 서구는 처음으로 자기 정체성을 확립했고, 그리스도교와 로마를 하나로 인식하는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샤를의 대관식은 1000년 이상 그리스도교 지배를 의미하며, 그것의 보편적 타당성을 입증하는 공적이고 상징적인 행위였다. 권위의 원천은 지상에서 하느님의 대리자가 주관한다는 데 있었다. 하느님으로부터 오지 않는 권위는 지상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샤를의 대관식은 그리스도교 왕국의 탄생이자 그리스도교 문명의 재건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작품 속으로
장소는 성 베드로 대성전이고, 시점은 밤이다. 주님 성탄 전야 미사의 중간에 교황은 샤를에게 도유를 하고 ‘황제’로 칭하며 관을 씌워주고 있다. 그리고 ‘존엄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도 부여하고 있다. 오른쪽 앞의 기록관은 이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로써 서로마 제국의 부활이 선언되었다.
왼쪽 군중 사이의 한 군인은 관객으로 하여금 이 순간에 집중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오른손을 들어 “저 사람을 보라”고 말하는 듯하다.
샤를의 대관식은 로마를 조상으로 둔 유럽에서 프랑크 왕국의 통치권을 분명히 하고, 로마 그리스도 교회와의 유대를 강화하는 동시에 향후 유럽 국가들의 이상적인 통치 방향을 제시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14) 장 빅토르 슈네츠의 ‘알쿠이노를 접견하는 샤를마뉴’
샤를마뉴의 ‘카롤링거 르네상스’, 오늘의 유럽을 만들다
- 장 빅토르 슈네츠, ‘알쿠이노를 접견하는 샤를마뉴’(1830년), 파리, 루브르 소장.
2018년 월드컵 축구가 러시아에서 열렸다. 이탈리아는 지역 예선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본선에 참가조차 못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결승까지 올라가 크로아티아를 4:2로 누르고 최종 우승의 영예를 누렸다. 그 모든 과정에서 이탈리아는 한 번도 이웃 나라인 프랑스를 응원한 적이 없다. 그만큼 두 나라는 서로를 싫어하고 잘못되면 고소하다고 생각하는 기류가 큰 것이 사실이다. 1500년간 유럽의 역사 속에서, 제2차 세계대전과 같은 전쟁 시에 서로에게 총을 겨누었던 탓도 있지만, 여기에는 근원적인 이유가 있다고 여겨진다.
이탈리아 입장에서 볼 때 프랑스는 프랑크, 곧 북방 야만 민족 중 하나였다. 그런 민족이 종교와 언어와 법률을 모두 로마에서 받아들여 ‘문명’을 가진 민족으로 재탄생하였다. 프랑스의 뿌리를 아는 로마, 곧 이탈리아는 그것이 꼴 보기 싫은 거고, 프랑스는 로마 제국을 쫄딱 망하게 만든 별 볼 일 없는 반도가 기껏 살려주었더니 이제 와서 우리를 무시한다는 것이다.
프랑스 입장에서는 과거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에 꽃을 피웠던 문화가 제국의 멸망과 이민족들의 난입으로 꺼져가는 것을 다시 살려, 이민족들이 일으킨 왕국들에 전수한 일등공신으로 자처하는데, 그것을 전 유럽이 인정하는데, 로마만 무시한다고 울먹이는 것이다.
이번에는 프랑크 왕국이 어떻게 유럽의 종주국이 되었는지, 그들이 이룩한 문화적인 업적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일상적인 주제를 고전적으로 그려내다
소개할 작품은 프랑스 출신의 화가 장 빅토르 슈네츠(Jean-Victor Schnetz, 1787~1870)가 그린 ‘알쿠이노를 접견하는 샤를마뉴’이다.
슈네츠는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의 제자며, 테오도르 제리코(Thodore Gricault)의 친구다. 낭만주의에 입각한 신고전주의와 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어릴 적부터 동경했던 이탈리아에서 오래 머물렀고, 로마에서 프랑스 아카데미 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빌라 메디치에 초대된 젊은 예술가 중 눈에 띄는 경력을 이룩한 사람으로 손꼽히기도 했다.
슈네츠는 작업실 안에서 박제된 형태의 모델보다는 자연과 인간의 현실과 일상의 장면들을 화폭에 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에 로마시의 허락으로 외곽에 거주하는 유목민과 집시촌으로 들어가 그들의 삶의 현실을 화폭에 담았다. 동시에 ‘지중해’ 생활의 풍경과 인물들을 그리는 데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민간의 신심을 표현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연구했고, 가장 의미 있는 순간을 포착하려고 노력했다.
당시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대립은 상당했다. 공개적으로 서로 다투었는데, 비록 완전한 해결책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슈네츠 덕분에 둘의 상반된 견해가 심도있는 회화에 대한 지식으로 화해를 모색하기도 했다. 그는 평범한 방식으로, 농부와 전사(戰士)들의 일상적인 주제를 고전적인 방식으로 그려냈다. 이런 방식이 그를 더욱 유명하게 만들었다. 1841~1846년 로마의 프랑스 아카데미 원장을 지냈고, 1870년에 파리로 돌아가 83세에 사망했다.
다양한 학문과 예술이 꽃피우다
그림 속 이야기는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 메세나 운동으로 다양한 학문과 예술이 꽃을 피웠던 것처럼, 샤를마뉴로 인해 오늘날 유럽이라고 일컫는 곳에서 고전이 꽃을 피운 것과 관련이 있다. 역사는 이것을 ‘카롤링거 르네상스(Carolingian Renaissance)’라고 부른다. 카롤링거 왕조의 카롤루스(샤를) 시대에 일어난 라틴 문화, 즉 고전의 부흥 운동이다.
이 운동은 샤를이 과거 서로마 제국의 영토를 모두 평정하는 과정에서 로마 문화가 비교적 많이 남아 있던 지역들을 접수하면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샤를이 야만 민족들 사이에서 탄생하는 성직자들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시작한 순수한 교회 운동이었다. 도처에서 ‘라틴어 사투리’(오늘날 유럽어의 기원이 되는 ‘로망스어’)가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 성직자들에게 정확한 원래 라틴어와 라틴 지식을 전수하려는 목적이었다. 결과적으로는 고전의 부활이었고, 유럽 전역에서 라틴 문화가 꽃을 피우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마뉴(magnus), ‘위대한’이라는 호칭에 걸맞게 그리스도인으로서 강력한 군사력을 기반으로 영토를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지켜내며 체계적인 행정 제도를 도입하여 제국을 안정시키고 문화와 예술이 융성하도록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교황에게 약속한 대로, 그리스도교의 확산을 위해 도처에 많은 성당과 수도원을 지었고, 거기에 딸린 학교와 병원 등을 지어 성직자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학문을 전수하고 연구하도록 했다. 프랑크 왕국은 물론, 주변의 여러 왕국에서 저명한 학자들을 초청하여 제국 내 학문을 장려하고 학자들을 양성하였다.
카롤링거는 교황뿐 아니라 성 베네딕도 수도회와도 깊은 관계를 맺으며 제국 내에 수십 개의 대수도원을 지었고, 교양 있는 성직자들을 왕궁에 모셔 왕실 자녀들의 교육에 힘썼다. 이를 모델로 각 지역에서도 성당과 수도원을 짓고, 백성들을 교육함으로써 지역 문화의 산실로 자리매김하도록 했다.
샤를은 건축, 미학, 문학, 시 등 다양한 문화 분야에서 참되고 진정한 개혁을 시도했다. 그는 왕국의 도처에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불러들였다. 요크지방에서 태어난 앵글로색슨족 출신인 알쿠이노, 롬바르드족 출신의 파올로 디아코노, 피사 출신의 문법학자 피에트로, 아랍인들이 스페인을 침입하자 도망쳐 온 고트족 사람 테오돌포 도르레앙스 등이다.
탁월한 문법학자들의 변증법적인 수사학은 당시 궁정에서 발전하고 있던 여러 정책에 힘을 실어 주었다. 샤를은 여러 학문을 통해 기존의 인식을 심화할 수 있는 것들에 큰 흥미를 느꼈다. 그가 일으킨 문예 부흥에 힘입어, 수사학과 문법, 논리학과 음악, 기하학과 수학, 천문학을 ‘일곱 가지 자유 학예(septem artes liberales)’로 자리를 잡게 함으로써 중세 교육의 근간이 되게 했다.
그가 읽기와 쓰기를 거의 하지 못했다는 것은 크게 놀랄 일은 아니다. 당시에는 읽고 쓰는 것을 하위 계급에 맡겼기 때문에 그 일은 귀족에게 어울리지 않는 활동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문화는 구전으로, 개인의 기억으로 전수되었던 것이다.
작품속으로
한편 샤를은 문화 분야만 후원한 것이 아니라 전례와 성경의 텍스트를 확립하고 표준화하며, 고전 라틴어의 사전적이고 문법적인 유려함과 정확함을 취합하여 글쓰기 양식을 장려하기도 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요크의 알쿠이노(Alcuino, 735~804)는 그 선두에 섰던 학자였다.
그는 샤를의 지시에 따라 텍스트를 편집하고, 학사 일정을 마련하여 복사들을 위한 수업을 진행했다.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그는 직접 개발한 서체로 필사한 것들을 샤를에게 보여주고 있다. 황제를 둘러싼 인물들은 실로 다양하다. 왼쪽 앞에는 검은 피부의 학자들이 있고, 그 뒤로 황제의 사람들로 보이는 군인들, 오른쪽에는 터번을 쓴 아랍 학자들과 대상 상인들 및 여러 계층의 성직자, 수도자들이 그룹별로 채워져 있다.
샤를은 제국을 내외적으로 아름답게 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국방을 튼튼하게 하고 국토를 확장하며 도시를 재정비하는 한편, 문화와 예술, 학문을 장려함으로써 중세를 암흑이 아니라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장면] (15) 레지스트룸 그레고리의 ‘제국의 네 영토를 상징하는 여성과 오토 2세의 초상’
주교의 지팡이 목장(牧杖)을 든 황제, 교황권을 누르다
- 레지스트룸 그레고리(Registrum Gregorii), ‘제국의 네 영토를 상징하는 여성과 오토 2세의 초상’, 20×27㎝, 양피지에 그린 세밀화, 985년경, 프랑스 샹티이 성(城)의 콩데미술관.
샤를마뉴 제국의 붕괴
유럽의 아버지, 샤를마뉴가 사망하자 카롤링거 왕조는 세 부분으로 나뉘었다. 샤를에게는 공식적인 아내가 다섯이었고, 자녀들은 18명이었다. 샤를이 814년에 사망하고 루도비쿠스 1세 피우스(Ludivicus I Pius)가 뒤를 이었다. 840년 루도비쿠스 1세마저 세상을 떠나자 제국은 그의 세 아들에게 나누어 상속되었다. 큰아들 로타리우스 1세(Lotharius I)는 중프랑크 왕국을, 셋째 아들 루도비쿠스 2세 게르마니쿠스(Ludovicus II Germanicus)는 동프랑크 왕국을, 배다른 막내 카롤루스 2세 칼부스(Carolus II Calvus)는 서프랑크 왕국을 상속받고 843년 베르덩에서 각자 서명을 했다. 그래서 이를 두고 ‘베르덩(Verdun) 조약’이라고 한다.
870년에 이르러 이탈리아 땅을 중심으로 받은 중프랑크는 로타링거 왕조를 세우고 국호를 이탈리아로, 루도비쿠스 2세의 동프랑크는 독일로, 카롤루스 2세 칼부스의 서프랑크는 프랑스로 명칭을 변경하는데 이를 ‘메르센 조약(Treaty of Meerssen)’이라고 한다.
서프랑크의 카롤루스 2세 칼부스의 아들 샤를 3세 일 그로쏘가 888년에 사망하자 사실상 카롤링거 왕조의 몰락과 샤를마뉴의 제국은 붕괴되고, 유럽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이후, 이 왕국들에서 등장하는 여러 왕은 나라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개 중세기 유럽을 떠받치게 될 봉건주의 체제 속에서 지방 토호 세력에서 선출되었다. 그중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가문이 프랑스의 카페 왕조와 독일의 작센 왕조다.
익명의 마에스터가 그린 세밀화
소개하는 작품은 세밀화다. 프랑스 샹티이 성(城)의 콩데미술관에 소장된 레지스트룸 그레고리(Registrum Gregorii)라는 익명의 마에스터가 그린 ‘제국의 네 영토를 상징하는 여성과 오토 2세의 초상’이라는 작품이다. 985년경, 양피지에 그린 세밀화로 크기는 가로 20cm, 세로 27cm의 작은 그림이다. 앞서 언급한 바 있는 카롤링거 르네상스 시기에 꽃을 피운 문화 혁명의 하나가 양피지로 만든 책을 보급하는 일이었고, 책의 장식으로 세밀화 기법이 널리 확산되었다.
세밀화는 말 그대로 ‘세밀한’ 기법으로 그린 소형의 그림이다. 가는 붓을 사용하여 매우 정교하게 그린 그림이다. 책의 첫 글자나 문단의 첫 글자를 그림 형태로 그리는 데 주로 활용되었다. 서방에서 세밀화의 역사는 고대 이집트에서 파피루스에 그리던 것이 그리스-로마를 거쳐 중세 유럽에 이르러 양피지에 그리면서 크기가 달라지기도 했다. 중세기 세밀화는 카롤링거 르네상스 시대에 가장 꽃을 피웠다. 채색의 아름다움을 이용하여 종교화가 꽃을 피웠고, 점차 역사화, 풍속화 등으로 발전하며 ‘동-식물 세밀화’, ‘페르시아 세밀화’, ‘터키 세밀화’, ‘이슬람 세밀화’ 등으로 확대되었다.
이 작품을 완성한 작가는 레지스트룸 마스터(Registrum Master), 그레고리 마스터(Gregory Master)라고 한 레지스트룸 그레고리(Registrum Gregorii)라고 불리던 스승(마에스터)으로 10세기에 활동한 익명의 기록관이자 세밀화 작가다. 트리어(Trier)에서 에그버트(Egbert) 주교 재임 시절에 활동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완성한 ‘그레고리 기록’, ‘트리어의 두 성사’, ‘에그버트 코덱스’, ‘생트 샤펠(Sainte-Chapelle)의 복음서’ 등이 트리어 국립도서관, 프랑스 샹티이 성(城)의 콩데미술관, 파리 국립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독일 신성 로마 제국의 탄생
작품 속에 등장하는 오토 2세는 오토 1세의 아들로 독일의 작센 왕조 출신이다. 흔히 ‘오토 왕조’라고 부르기도 한다. 오토 2세의 이야기는 936년 독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헨리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아버지 오토 1세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토 1세는 선친이 이룩한 왕국의 정치 시스템을 전면적으로 바꾸어 강력한 왕권을 회복하는 데 주력한 인물이다. 지방 토호 세력인 봉건 영주들의 힘이 막강한 것을 보고 황제는 직접 각 지역의 영적 지도자인 주교를 공작으로 임명하여 ‘주교-공작’이라는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 그에게 많은 혜택을 주었다. 그 대가로 황제는 ‘주교-공작’들로부터 조건 없는 충성을 약속받고 전쟁 시에는 군사적인 지원까지 받았다. 중세기 봉건주의 시스템에서 지방의 토호 세력인 봉건 영주들을 주교로 임명한 것이다. 이것은 결국 세속 봉건 영주들의 힘을 빼고, 왕권을 극대화하는 방식이었다. 주교-공작은 자손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사망할 시, 그 땅과 함께 모든 주권이 황제에게 귀속되기 때문이다.
이에 힘입어 오토는 독일 지역을 평정하고 이탈리아 영토에까지 들어와 정치적 군사적 통제를 하기 시작했다. 당시 이탈리아 왕국은 왕권을 놓고 여러 가문이 싸우고 있었고, 심각한 정치적 분열이 이어지는 가운데 교황은 제국의 지원은커녕 분쟁의 중심에서 시달리고 있었다. 게다가 당시 이탈리아의 남부지방은 비잔틴의 통제하에 있었다. 오토 1세는 로타리우스 2세의 부인 아델라이드의 요청에 따라 이탈리아 반도 문제에 개입하여 영토를 평정하였다.
960년, 성탄을 기해 요한 12세 교황도 오토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교황은 그 대가로 오토에게 제국이라는 칭호를 약속했다. 962년 2월 2일, 오토 1세는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황제의 대관식을 가졌고, 북부 이탈리아 땅을 포함한 독일 신성 로마 제국이 공식적으로 탄생하였다.
교황권, 황제의 보호 아래
대관식을 통해 황제가 되고 며칠 지나지 않은 2월 13일, 오토 1세는 확보한 강력한 힘을 토대로 ‘오토의 특권(Privilegium Othonis)’을 선포했다. 그것은 교황권을 황제의 보호 아래 둔다는 것이었다. 이 문서를 통해 오토는 “교황은 황제 앞에서 충성을 맹세해야 하고”, “황제는 교황을 심판할 수 있고”, “교황권은 황제권에 복속되며”, “황제는 게르만 민족에서만 나올 수 있다”고 천명했다. 교황 선출도 황제의 동의와 그가 보낸 대표자들의 입회하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명시했다. 황제는 로마 시에서 군사적인 행동을 할 수 있고, 앞서 피핀 3세와 샤를마뉴가 교황에게 기증한 영토들을 승인하는 우선권자라고도 했다. 이것은 이후 역사에서 교회와 제국이 오랫동안 교황파와 황제파로 나뉘어 격렬하게 충돌하는 계기가 되었다.
작품 속으로
오토 2세는 여성으로 표현된 4개 지방,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알레만니아에서 공물을 받고 있는 것을 표현했다. 알레만니아는 오늘날의 프랑스 알자스, 독일의 바덴과 슈바벤, 독일어권 스위스, 오스트리아의 포어아를베르크에 해당되는 지역이다. 황제가 앉은 의자는 주교좌인 카테드라다.
왼손에는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성체를 들고 있고, 오른손에는 사목자 주교의 지팡이 목장(牧杖)을 들고 있다. 오토 2세는 아버지 오토 1세의 뒤를 이어, 이탈리아에서 교황권을 누르고 황제 권력을 강화했고, 사망한 후에는 바티칸에 묻혔다.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16) 무명 화가의 ‘필리오케 교리’
삼위일체 교리 논쟁, 동·서 교회 분열의 기폭제로 작용
- 프랑스 볼봉에서 1450년경 소개된 ‘필리오케(Filioque) 교리’, 파리 루브르 박물관.
5세기부터 8세기까지 막연하지만 오늘날 ‘유럽’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지형이 형성되었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여러 가지 중대한 국면이 나타났는데, 이를 크게 몇 가지로 함축하면 ①프랑크 왕국의 성립 ②신성로마제국의 수립 ③이슬람 팽창 ④수도원 운동 ⑤동서 교회의 분열을 들 수 있다. 이 사건들은 각기 종교적, 정치적 측면에서 이후 서방 세계의 중세 역사를 결정짓는 중대한 국면으로 작용하였다. 동시에 각 사건이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서로 얽히고설켜 복잡하게 전개되면서 중세 유럽의 역사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기도 했다.
가령 570년 마호메트의 탄생으로 시작된 이슬람 세력은 과거 로마 제국의 영토였던 북아프리카와 동지중해를 그리스도교의 영역에서 빼앗아 갔다. 그 사이 유럽을 주도하던 프랑크 왕국에서는 새로운 수도원 운동이 일어나면서 비잔틴 황제의 명령을 받던 로마 교황의 권위를 세워나갔고, 이에 힘입은 교황은 프랑크 왕국과 비잔틴 동로마 제국 간 세력 싸움에서 확실한 결정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 로마 교황과 프랑크 왕국의 왕, 동로마 제국 황제의 결단은 중세 유럽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726년 동로마 제국 황제 레오 3세에 의한 성상파괴령에 이어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결정적으로 갈라놓은 1054년의 ‘필리오케 교리’는 별것 아닌 것 같은 문제가 종국에는 동서 교회 대분열의 기폭제가 되는 일대 사건이 되었다. 이로써 로마 교회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세력에서 완전히 벗어나 로마 교회 총대주교, 곧 교황과 로마 교회의 정치적 자립이 시작되었다.
삼위일체의 필리오케 교리
소개하는 그림은 1450년경 한 무명 화가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으로 프로방스의 성 아그리콜이 소개한 삼위일체의 ‘필리오케(Filioque) 교리’다. 프랑스 볼봉(Boulbon)에 있는 생 마르셀랭(Saint Marcellin) 소성당 제단 위에 있던 것으로 지금은 파리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필리오케(Filique)는 ‘e dal Figlio(그리고 성자로부터)’라는 뜻의 라틴어다. 589년 제3차 톨레도 시노드에서 아직 스페인에 남아 있던 아리우스파를 경계할 목적으로 이전 문서를 참조해 교리의 일관성을 자세히 지정하기 위해 서방 교회에서 라틴어 번역 사도신경에 첨가한 말이다. 교부들이 모두 참석하지 않은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381년)에서 채택된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의 그리스어 원문에는 없다. 이 때문에 동·서방 교회의 의견이 달라서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충돌은 번역의 문제가 신학 문제로 발전했다고 하지만, 사실은 처음부터 두 교회 간 권위의 문제였다.
성령을 설명하면서 헬라어 신경은 “성령은 성부에게서 발(發)하시고(τ εκ το Πατρ εκπορευμενον)”라고 했다. 라틴어 신경은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qui ex Patre Filique procdit)”라고 돼 있다. 이것은 동방 교회에서 사용하던 헬라어 신경과 서방 교회에서 사용한 라틴어 신경 간 불일치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신학적 논쟁에 정치적 문제도 얽혀
796년 프리울리 시노드에서 프랑크 왕국의 아킬레이아 파울리노 총대주교는 필리오케를 신경에 삽입할 것을 지시했고, 800년경 전체 프랑크 왕국의 미사에서 필리오케가 들어간 신경이 널리 퍼졌다. 이것이 847년 프랑크 왕국의 수도자들에 의해 예루살렘에 소개되자 동방 교회 수도자들이 강하게 반발하면서 양측 교회 간 문제로 쟁점화 되었다.
867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포티우스(Phtios, 820?~893)는 필리오케를 신경에서 삭제할 것을 서방 교회에 강력히 요구했다. 이것은 정치적인 문제와 결부돼 있었다. 당시 동방 교회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과 함께 로마를 여전히 자기네 통치 아래에 두고자 했고, 로마는 프랑크 왕국의 도움으로 동방-비잔틴 황제 중심의 교회에서 벗어나려 한 것이 이 문제와 맞물린 것이다. 이것은 뒤이어 교황 수위권(首位權) 논쟁 등 여러 가지 신학적인 문제와 함께 동·서방 교회의 갈등이 깊어지는 요인이 되었다.
동방 교회의 주장이 강해질수록 서방 교회는 이를 공식적으로 부정하며, 베드로 사도의 무덤좌(座)와 필리오케를 내세워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로마 교회가 동방 교회와 분리하는 정체성은 베드로 사도의 무덤이 있기 때문이다. 베드로 사도는 성자에게 직접 수위권을 받았다. 그래서 성령을 이야기할 때 성부만이 아니라, 성자에게서 발하신다는 필리오케의 핵심은 동방 교회를 자극하는 핵심 문구가 되었다. 왜냐하면 베드로 사도좌가 있는 로마 교회는 성자에게 나오는 성령의 이끄심을 직접 받고 있다는, 한마디로 동방 교회보다 우위에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문구였기 때문이다. 동방 교회가 기를 쓰고 이를 막으려고 한 이유다.
동방정교회와 라틴교회로 분열
결과적으로 ‘필리오케’가 동·서방 교회 대분열의 가장 중추적인 교리로 작용했다고 하지만, 사실 이것은 로마제국의 분열에 이어 수세기 동안 지속되어 온 정치적인 힘의 논리에 맞선 결과에 불과하다. 이후에도 동방 교회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는 자신의 관할지역에서 라틴전례의 사용을 금했고, 로마 교회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에게 ‘세계총대주교’라는 칭호를 폐기하고 ‘필리오케’가 들어간 신경을 공식 채택할 것을 요구하는 등 양측의 공방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1054년 동방 교회의 총대주교는 교황 특사 추기경을, 특사는 총대주교를 서로 파문하기에 이르렀고, 동서 교회는 ‘동방정교회’와 ‘라틴교회(로마가톨릭)’로 분열하고 말았다.
이후 역사 속에서 동·서방 교회의 화해를 모색하여 개최된 리용 공의회(1274년)와 피렌체 공의회(1439년)는 동방 교회가 필리오케의 신경 삽입은 거절했으나 그 교리는 승인함으로써 필리오케에 관한 신학적 논쟁은 일단락되는 것처럼 보였다. 오늘 소개하는 작품은 동·서방 교회가 ‘필리오케’를 인정하고 나름의 합의를 이룬 것을 기념해 그려진 1450년경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1472년 동방 교회는 단독으로 개최한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회의에서 앞서 리용과 피렌체에서의 합의를 정식으로 파기함으로써 동·서방 교회는 또 다시 결별하기에 이르고 만다.
하지만 동·서방 교회는 이후에도 계속해서 화해의 길을 모색했다. 과거 상호 파문과 관련해 서방 교회가 한 파문은 교황이 한 것이 아니라 특사가 한 것이라 그 합법성에 문제가 제기되었고, 동방 교회가 한 파문도 교황이나 서방 교회 전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특사 개인에 대한 인신공격적인 것이었다며 교회법상 동·서방 교회가 서로를 파문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견해가 유력해졌다. 이에 1965년 성 바오로 6세 교황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아테나고라스 1세 총대주교는 1054년의 상호 파문을 무효로 처리하고 화해하였다.
작품 속으로
작품은 간결하다.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다. 논쟁의 소지를 전혀 주지 않기 위한 작가의 의도를 충분히 엿볼 수가 있다.
가운데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있고, 양쪽에 성부와 성자가 있다. 성부와 성자의 입에서 나오는 빛줄기를 통해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發)하심”을 표현하고 있다. 성자에게서 발하심(필리오케)을 표현하기 위해 십자가의 수난과 머리 위에 있는 죄명이 그의 정체성을 더욱 분명하게 해 주고 있다. 작품 자체로 놓고 볼 때 너무도 단순하여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나,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한 작가가 그린 이 작품에 담긴 교회의 역사는 실로 엄청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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