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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신앙] (48) 푸르른 날
결코 꺾일 것 같지 않던 여름의 맹렬했던 폭염은 꺼져가는 장작불처럼 열기를 잃고 이제는 완연한 가을이다. 고개를 들어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자. 거대한 새가 남기고 간 듯한 흰 깃털 모양의 구름과 높고 푸른 하늘은 그 어떤 것보다 매력적이어서 자꾸만 시선이 간다. 미당 서정주 시인은 그의 시 「푸르른 날」에서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 저기 저기 저, 가을 꽃자리 /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라고 가을 하늘의 푸르름을 예찬했다. 하늘은 왜 푸른색일까? 대기가 없는 달에서 본 하늘은 검은색이지만 지구에는 대기가 존재하기 때문에 하늘이 푸른색이다.
태양 빛은 흔히 무지개색이라 부르는 여러 색의 빛이 혼합된 것으로 백색에 가깝다. 태양 빛이 대기권을 통과할 때 대기를 구성하는 질소·산소 분자들과 충돌하는데 이때 일부는 처음 진행 방향에서 이탈해 흩어지게 된다. 이를 빛의 산란(散亂, scattering)이라 하며 파장이 긴 붉은색보다 파장이 짧은 보라색과 파란색이 더 산란이 잘된다. 따라서 태양 빛 중에서 보라색과 파란색 빛이 우리 눈에 잘 들어오게 되는데, 눈에서 색을 감지하는 원뿔세포는 보라색 빛을 약하게 인식하여 결국 하늘은 파란색으로 보이게 된다. 이러한 빛의 산란 현상은 1904년 아르곤(Ar)을 발견해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영국 물리학자 존 윌리엄 스트럿 레일리에 의해 밝혀졌으며 이후 과학자들은 하늘이 파란색인 이유를 ‘레일리 산란’으로 설명한다.
한편 2300년 전 중국 송나라 시대의 장자는 하늘이 푸른색을 띠는 것에 대해 소요유(逍遙遊)에서 ‘天之蒼蒼, 其正色邪?(천지창창 기정색야 : 하늘이 푸르고 푸른 것은, 원래 푸르기 때문일까?) 其遠而無所至極邪?(기원이무소지극야 : 아니면 너무 멀리 있어서 그렇게 보이는 것일까?) 其視下也(기시하야 : 대붕이란 큰 새를 타고 9만 리 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봐도) 亦若是則已矣(역약시칙이의 : 또한 이처럼 푸르게 보일 것이다)’라 하였다.
대기권에 둘러싸인 지상에서 올려다본 하늘은 파란색이다. 장자가 언급한 가상의 큰 새인 대붕을 타고 지상 9만 리 꼭대기에서 본 것처럼 인공위성에서 내려다본 지구의 모습 역시 파란색이다. 하늘은 원래 푸른색이 아니지만, 빛의 산란 현상 때문에 푸른색을 띤다는 것을 장자는 간파한 것일까? 물리학의 원리를 철학적으로 꿰뚫어 본 장자의 혜안(慧眼)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푸른 하늘은 소망을 투영하고 바라는 대상이기도 하다. 현대 추상화가의 선두 주자인 바실리 칸딘스키는 1940년 「푸른 하늘(Sky blue)」이란 작품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서 잃어버린 인간의 순수한 본성을 되찾고픈 소망을 표현했다.
이번 가을에는 일상의 루틴이 되어버린 휴대폰과 컴퓨터 화면으로의 몰입에서 벗어나 더 거대한 화면인 푸른 하늘을 바라보자. 미당의 시처럼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에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도 해보고 칸딘스키의 그림처럼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세상일의 복잡함 속에서 잃어버린 나의 순수성을 찾아보자.
“물 한가운데에 궁창이 생겨, 물과 물 사이를 갈라놓아라.”(창세 1,6) “하느님께서는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셨다.”(창세 1,8) 궁창(穹蒼)은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넓은 하늘을 뜻한다.
[과학과 신앙] (47) 리더의 조건
1년 전인 2024년 10월 10일 스웨덴 한림원은 대한민국 작가 한강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이는 한국인으로서 그리고 아시아 여성으로서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역대 노벨 문학상 수상자는 총 120명이며 그중 여성 수상자는 18명에 불과하다.
여성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는 스웨덴의 아동문학가 셀마 라게를뢰프(1909년 수상)다. 그녀의 노벨 문학상 수상작인 「닐스 홀게르손의 신기한 스웨덴 여행」은 「닐스의 신기한 여행」 또는 「닐스의 모험」이란 제목으로 전 세계에 소개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1981년부터 1년간 TV 만화로 방영되어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작품 속 주인공인 닐스는 늘 부모님 속을 썩이던 말썽꾸러기였는데 어느 날 난쟁이 요정의 마법에 걸려 다람쥐만 한 난쟁이가 된다. 닐스는 집에서 키우던 거위 모르텐과 함께 야생 기러기 떼를 따라 스웨덴을 일주하는 모험을 시작하고, 결국 가족과 자연의 소중함을 깨닫는 착한 소년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다.
이 책을 보던 어릴 적에는 야생 기러기를 가축화시킨 것이 거위라는 것을 알지 못했기에 거위가 기러기처럼 하늘을 난다는 것이 참 신기했었다. 오리와 비슷하지만, 몸집이 더 크고 긴 목을 가진 기러기는 기러기목 오리과에 속하는 철새의 총칭으로 시베리아에서 서식하다가 가을이면 떼 지어 우리나라에 날아와서 겨울을 지내고 돌아가는 대표적인 철새다. 시베리아에서 한국까지 약 4000㎞를 이동하는 기러기의 V자 대형 비행은 꽤 인상적이다.
2014년 영국 런던대 제임스 어셔우드 교수의 연구팀은 「네이처」지에 철새들이 V자 대형으로 나는 이유는 맨 앞에서 나는 새가 공기 역학적으로 만들어내는 상승기류를 뒤따르는 새들이 이용하여 비행에 소모되는 에너지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맨 앞의 리더는 가장 경험이 많고 나이 든 기러기로 리더가 소리를 내면 무리의 다른 기러기들도 소리를 내어 응답하며 서로 격려한다. 그러나 맨 앞의 리더는 바람의 저항을 가장 크게 받으므로 체력 소모가 심하다. 그런 경우 선두에 있는 기러기는 뒤따르는 기러기에게 리더 자리를 내어준다. 그렇게 기러기들끼리 선두 자리를 교대하여 체력을 아끼도록 서로 도우며, 비행 중 낙오된 동료가 생기면 다시 날 수 있을 때까지 다른 한두 마리가 그 곁을 지킨다.
2007년 노벨평화상 시상식에서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이 인용한 ‘혼자 가면 빨리 가고 함께 가면 멀리 간다’는 아프리카 속담을 기러기들은 알고 있었던 것일까? 기러기들의 지혜는 인간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리더십이란 관리가 아닌 격려를 지향해야 하고, 진정한 리더는 반대자를 설득하고 추종자에게는 동기를 자극해야 한다’고 하였다.
우리 시대의 정치·경제·사회·문화·직장 공동체의 리더는 어떤 조건을 갖춰야 할까? 기러기 떼의 리더처럼 용기와 지혜를 갖추면서도 자기 것을 양보할 줄 아는 겸손함을 보여줄 수는 없을까?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한 불굴의 리더 모세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참 리더의 조건을 잘 보여주고 있다. “모세라는 사람은 매우 겸손하였다. 땅 위에 사는 어떤 사람보다도 겸손하였다.”(민수 12,3)
[박병준 신부의 철학상담] (39) 성과 주체와 열매 주체
성과 집착에서 벗어날 때 삶 자체가 열매임을 자각
재독 철학자 한병철(1959~)은 「피로사회」에서 오늘날의 인간을 ‘성과(成果) 주체’로 규정한다. 성과 주체는 스스로 과잉 긍정과 과도한 성과를 추구함으로써 자신에게 강제하는 ‘역설적 자유’에 자기를 내맡긴다. 성과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타인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자발성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성과 주체’는 자신을 스스로 닦달함으로써 항상 피로하며, 결국 탈진(burnout) 상태에 이르게 된다.
독일의 사회학자 퇴니스(1855~1936)는 인간 사회를 ‘결합 지향의 의지 구조체’로 보고, 그 관계 맺음의 방식에 따라 실제적이며 유기체적인 구조의 ‘공동사회’(Gemeinschaft)와 이념적이며 기계적인 구조의 ‘이익사회’(Gesellschaft)로 구분한 바 있다. 공동사회는 자연적인 ‘본질의지’(Wesenwille)에 기반한 사회이며, 이익사회는 합리적이며 의식적인 ‘선택의지’(Kürwille)에 기반한 사회다.
오늘날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경제적 이익을 합목적적으로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철저하게 이익사회를 대변하고 있다. 현대 이익사회에서 사회 구성원은 그 사회가 원하는 목적에 부합한 자가 되어야 생존할 수 있다. 거대한 기계처럼 움직이는 사회 안에서 구성원 각자는 자기가 맡은 역할을 잘 수행하기 위해 능력을 최대로 발휘해야 할 뿐만 아니라 가능한 한 최고의 성과를 거둘 수 있어야 한다. ‘성과 주체’는 바로 이러한 이익사회의 결과물이며, 자율적 주체의 ‘할 수 있음’은 무의식적 생존을 위한 일종의 자기암시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자유롭기 위해서는 무한 경쟁을 부추기는 이익사회에서 벗어나 친교와 나눔과 봉사로 결속된 탈목적적 사회인 공동사회, 즉 ‘공동체’(communitas) 삶으로의 변화가 필요하다. 공동체 삶은 ‘열매 주체’로서의 삶을 의미한다. 공동체 구성원은 이익사회의 ‘성과 주체’와 다르게 자기의 고유한 인격을 통해 공동체의 한 지체로서 고유의 소명 의식을 갖고 역할을 수행한다.
이는 무엇보다 구성원 모두가 자율적 존재로서 개별 인격의 고유성과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며, 공동선을 지향하는 가운데서 드러난다. 이때 각 개인의 고유한 역할은 신약 성경의 ‘탈렌트의 비유’(마태 25,14-30)에서 보듯이 각자의 ‘천부적 재능’(talentum)과 관계가 있다. 탈렌트의 비유는 ‘열매 주체’로서 삶의 중요성과 그 본질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열매 주체’의 삶은 인간 실존의 ‘본래성’과 ‘천부적 재능’에 기반해 자기 역량을 자연스럽게 드러냄으로써 성과보다는 그 과정과 열매를 중시하는 삶을 의미한다. 성과를 통해 평가받는 이익사회의 인간은 자율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엄밀하게는 자유롭다 할 수 없다. 과정이 아닌 성과에만 집착하는 성과 주체의 삶이 그 자체로 충만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이데거(1889~1976)는 존재 사유를 위한 터로서 ‘트임’(Lichtung)을 강조한 바 있다. 나무가 빽빽이 들어찬 어두운 숲길에서 만나는 빈터는 새로운 생명을 움트게 하는 빛이 들어오는 터이기도 하다. 성과의 집착에서 벗어나 잠시 사유를 위한 여유를 가질 때 우리의 소중한 삶 자체가 바로 열매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과학과 신앙] (45) 보이지 않는 힘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을 1년 앞둔 1944년, 미국의 시사 잡지 「LIFE」는 ‘스페이스 아트’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체슬리 본스텔의 그림을 게재했다. 「타이탄에서 바라본 토성」이란 제목의 이 그림은 토성의 위성 타이탄에서 토성을 보고 있는 듯한 사실적인 묘사로 전쟁에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우주에 대한 호기심과 모험심을 자극했다. 토성에는 태양계 행성 중 가장 크고 아름다운 고리가 있다. 1609년 갈릴레이는 망원경을 통해 토성의 고리를 최초로 관측하고 토성에 귀가 붙어있다고 표현했는데, 망원경으로 바라본 토성의 고리는 그야말로 경이롭다. 하지만 토성은 지구 부피의 760배나 되는 거대한 덩치에 비해 표면은 가스로 구성되어 속은 대부분 비어있으며 평균 온도는 –180℃로 매우 차갑다.
이러한 토성의 이미지를 잘 표현한 음악이 있다. 1919년 영국의 작곡가 구스타브 홀스트는 태양계 행성들을 주제로 한 대규모 관현악곡인 ‘행성’을 작곡했다. 그는 천문학이 아닌 점성술에서의 행성 배열인 ‘화성-금성-수성-목성-토성-천왕성-해왕성’ 순으로 곡을 나누고 각 행성에 해당하는 그리스 신화 신들의 이름을 표제로 붙였다.
토성(土星)이란 이름은 고대 중국의 천문학에서 흙의 성질을 가졌다고 여겨져 붙여졌는데, 서양에서는 로마 신화 속 농업의 신에서 유래한 새턴(Saturn)으로 불렸다. 동·서양이 각기 토성을 흙 이미지와 농업의 신으로 빗댄 점이 서로 일맥상통한다는 것이 신기하다.
홀스트의 ‘행성’ 중 5번째 곡인 토성은 ‘황혼기를 가져오는 이(the Bringer of Old Age)’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이 곡은 인생의 황혼기에서 느낄 수 있는 공허감·성숙·완성의 감정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명상적인 곡이다. 여름의 맹렬한 더위가 한풀 꺾인 9월은 해가 진 후 동쪽 지평선에서 떠오르는 토성을 밤새 관측할 수 있는 시기다. 토성이 지구와 태양의 반대 방향에 위치하여 지구-태양-토성이 일직선으로 늘어설 때를 충(衝, opposition)이라 부르는데, 올해 9월 21일 일요일은 토성이 가장 밝게 보이는 충의 시기다.
토성은 맨눈으로는 별인지 행성인지 구별이 어렵지만 망원경을 이용하면 고리를 가진 토성을 볼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태양계의 유일한 항성(별)인 태양과 행성인 토성의 주요 구성 원소가 수소와 헬륨으로 동일하다는 것이다. 태양은 수소와 헬륨이 모인 성운이 거대한 중력에 의한 수축 작용으로 내부 온도가 올라가 핵융합 반응을 시작하며 빛을 내는 별이 되었다. 하지만 토성은 중력이 약해 빛을 내는 별이 되지 못하고 가스로 구성된, 덩치만 크고 차가운 떠돌이 행성이 되었다. 중력의 차이가 별과 행성의 생성 운명을 결정한 것이다.
어찌 보면 사람에게도 태양의 중력과 같이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한다. 그 힘은 어떤 이에게는 종교적 신앙일 수도 있고 개인적 신념이나 철학 또는 특정 이데올로기일 수도 있다. 밤하늘의 토성을 보며 잠시 생각해본다. 태양의 중력처럼 거대한 힘으로 나를 지탱해주는 삶의 구심력은 무엇인가? 나는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려야 하는가?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필리 2,15)
[박병준 신부의 철학상담] (37) 돈
물질문화와 정신문화 상호작용해야 행복한 삶 가능
돈은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강력한 도구로서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이끄는 원동력이자 인간 삶을 이끄는 중추 역할을 담당한다. 그러나 이렇게 돈이 지닌 힘과 영향력 때문에 사람들이 돈을 소유하고자 강한 욕망을 드러내는 만큼 인류가 존속하는 한, 돈은 영원히 지속될 삶의 현실적 문제이기도 하다.
오랜 세월 돈은 단순한 교환 가치를 지닌 화폐와 다르게 시공간을 초월해 재물 축적과 개인 능력과 가치를 드러내는 중요한 수단이 돼왔다. 특히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의 소유는 곧 개인의 ‘자유’로 연결되며, 삶의 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척도로 작용한다. 돈은 우리에게 여러 측면에서 원하는 것을 완벽하게 충족시킬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돈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다는 환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나 돈이 그 자체로 삶의 절대 가치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돈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이와 관련해 독일의 사회학자 짐멜(Georg Simmel, 1858~1918)은 「돈의 철학」(1900)에서 돈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현대 문화의 심층적인 본질 구조와 특성을 면밀하게 분석함으로써 돈이 가진 상징적 의미를 밝힌 바 있다. 짐멜에 의하면 돈은 현대 사회에서 “다양한 가치 관계들이 응집되고 객관화되는 하나의 결정점(Krystallisationspunkt)”으로 나타난다. 이는 개별적이고 다양한 가치들이 돈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그 안에서 하나로 응집되어 결정화된다는 것이다. 돈은 단순한 화폐로서의 경제 수단을 넘어 다양한 ‘객관 문화’(objektive Kultur)의 가치와 내용을 결집하는 형식적 역할을 한다.
사실 우리는 돈을 매개로 사회에서 수많은 다양한 관계를 만들어간다. 그런 의미에서 돈은 개인 삶과 사회를 구성하는 매우 중요한 매개체라 할 수 있다. 돈은 화폐와는 달리 자기 안에 고유한 가치를 담지하고 있어 우리가 자신의 가치를 추구하고 실현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양한 객관 문화가 인간 영혼의 토대가 되는 ‘주관 문화’(subjektive Kultur)를 발전시킬 수 있을까? 그것은 돈이라는 ‘물질문화’가 ‘정신문화’와 상호작용함으로써 가능하게 된다. 이는 우리가 인격을 함양하기 위해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것에 돈을 지출하게 될 때 그 돈은 객관 문화(물질문화)와 주관 문화(정신문화)의 관계를 상호 고양과 성숙의 관계로 이끌어주는 중요한 핵심 요체가 된다는 의미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는 것도 물론 사실이다. 그러나 양적 논리에만 집중되어 있던 돈을 자신의 영혼에 기여할 수 있는 문화 활동에 투입하게 될 때 돈은 질적 논리로 전환된다. 인간의 행복한 삶은 결코 돈의 양적 논리에서 결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짐멜은 돈이야말로 “개인의 가장 고유한 영역 내에서만 성취될 수 있는 가장 내면적인 것을 지키는 수문장”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사회에서 어떻게 성숙하고 바람직한 돈의 문화를 만들어갈 수 있을까? 그것은 무엇보다 자기 영혼의 발전과 구원에 도움이 되고, 자신의 인격을 고양시켜 진정성 있는 자기 존재가 되는 길에서 찾아야 할 듯싶다.
[박병준 신부의 철학상담] (38) 악(惡)
실체가 없는 악의 직접적 원인은 인간의 ‘자유의지’
철학에서 가장 심오한 개념이 있다면 다름 아닌 ‘악(惡)’일 것이다. 오래전부터 철학은 악의 기원과 본질, 그리고 그 현상을 설명하고자 노력했다. 악은 ‘선(善)’의 대립 개념으로서 ‘선의 부재’ 혹은 ‘선의 결핍’을 의미한다. 그 자체가 신비롭기까지 한 악의 부정적인 요소는 그것으로 인해 인간이 절망하며 ‘죄스러운 존재’가 된다는 점이다. 악이 철학적으로 문제가 되는 이유는 무엇보다 악 자체가 인간을 고통으로 내몰기 때문이다.
악은 세상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자연재해처럼 이해 불가한 악이 있으며, 무지와 같이 무심코 저지르는 악, 그리고 ‘구조적 악’처럼 불가피해 보이는 악이 있다. 치유와 관련해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인간에 의해 빚어지는 다양한 악의 모습이다. 그런 악이 인간에게 상처를 주고, 직접적으로 인간을 고통스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악이 인간에게 고통을 가져다주는 것은 맞지만, 악과 고통이 엄밀하게 서로 환치 가능한 개념은 아니다. 고통이 항상 악을 불러오는 것은 아니기에 그렇다. 고통을 불쾌한 감정으로 이해한 에피쿠로스(Epicouros, BC 341~270)의 관점에서 볼 때 고통은 곧 불행이자 악으로 판단될 수도 있겠지만, 자기방어 기제로서 신체적 고통이나 한계 상황과 같은 고통은 분명 긍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악의 기원 및 본질과 관련해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는 완전한 존재는 그 자체로 바랄만한 것, 즉 ‘최고선’이기에, 악은 사실 실체로서가 아니라 다만 ‘존재 결핍’의 현상으로 존재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악은 결핍된 선에 붙어 존재할 뿐 악이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나타난 악은 참된 존재(실체)도, 그렇다고 전혀 없는 것(절대 무)도 아니며, 오로지 ‘상대적 무’로서 불완전한 존재 결핍(우유, 偶有)의 모습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실체가 없는 악의 직접적 원인은 무엇일까? 철학은 전통적으로 그 원인을 인간의 ‘자유의지’에서 찾는다. 윤리적 관점에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부정적으로 행해질 때 이를 ‘도덕적 악’으로, 특히 인간의 그릇된 자연 본성에서 비롯될 때 ‘근본 악’으로 규정한다. 다시 말해 도덕적 악 혹은 근본 악은 인간 본성에 근거해 바람직하게 있지 못함을 뜻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는 ‘비진리를 허용하는 자유에 악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악을 ‘사유의 부재에서 비롯된 평범성’으로 규정한다. 즉 악의 뿌리는 우리가 올바로 사유하고 판단하지 못하는 ‘무능력’에 있는 것이지, 외부에 그 어떤 거대 악의 실재가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악의 실제가 그런 만큼 우리에겐 악을 극복하기 위해 평소 올바로 사유하고 판단하는 습관과 훈련이 필요하다. 올바른 인간관계를 위한 소통도 중요하다. 잘못된 관계로부터 오는 악의 현상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타자를 소유하려는 그릇된 욕망은 부적절한 관계로부터 발생하는 악의 가장 일반적 모습이다. 이런 부적절한 관계는 지식의 차원에서는 대화와 소통의 부재 현상을, 의지의 차원에서는 권력과 지배 현상을 낳는다.
[과학과 신앙] (43) 비움과 버림
세계적으로 화제가 된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는 어린 시절 즐겨 먹던 ‘달고나’가 나온다. ‘뽑기’라고도 불리던 이 간식은 설탕이 주재료이며 식소다를 첨가해 부풀게 한 후 납작하게 누른 다음 그 위에 별이나 우산 등의 모양을 새긴다. 한 번은 집에서 달고나를 만들려고 어머니 몰래 국자에다 설탕을 넣고선 가스 불에 달군 적이 있다. 그런데 설탕은 잘 녹지 않고 국자 위에서 톡톡 튀기만 했다. 아뿔싸! 국자 속에는 설탕이 아닌 소금이 들어가 있었다. 흰색 알갱이인 설탕과 소금이 비슷해 보여 착각한 것이다. 설탕의 녹는점은 185℃로 낮아서 가열하면 쉽게 녹아 액체 상태가 되지만 소금의 녹는점은 801℃로 높아서 쉽게 녹지 않는다.
설탕과 소금의 녹는점은 왜 다를까? 설탕(C12H22O11)은 탄소·수소·산소 원자가 서로 전자를 공유하며 형성된 공유결합 물질로 분자 간 결합력이 약해 녹는점이 낮아 열을 가하면 쉽게 녹는다. 하지만 소금(NaCl)은 양이온인 나트륨 이온과 음이온인 염화이온이 강한 정전기적 인력으로 결합한 이온결합 물질로 녹는점이 매우 높다.
주기율표에 있는 118개 원소들 중 75% 정도는 나트륨 같은 금속 원소다. 금속 원소는 원자핵을 둘러싼 가장 바깥쪽 전자껍질에 있는 전자를 쉽게 버리고 전기적인 중성 상태에서 (+)성질을 가진 양이온이 되어 에너지 관점에서 더 안정한 상태가 된다. 그렇게 전자를 버리고 형성된 양이온은 전자를 얻은 음이온과 결합하여 새로운 물질을 형성하는데 비누의 주성분인 수산화나트륨(NaOH), 달고나를 만들 때 사용하는 식소다(탄산수소나트륨, NaHCO3), 제습제로 쓰이는 염화칼슘(CaCl2) 등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이온결합으로 형성된 물질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원소들은 가지고 있던 전자를 버릴 때 더 안정된다. 이것이 자연의 원리다. 버린다는 것은 비운다는 것이며 비웠을 때 비로소 새로운 것을 채우며 변화할 수 있다. 금속 원소들이 전자를 버리고 양이온이 형성되는 원리는 어찌 보면 ‘비워야 채워지고 버려야 얻는다’는 노자의 사상을 연상시킨다. 2500년 전 노자는 도덕경에서 ‘旣以爲人己愈有(기이위인기유유 : 남에게 베풀어 내 것이 생겨나고), 旣以與人己愈多(기이여인기유다 : 남과 나누어 내 것이 많아진다)’라고 했는데 노자는 이미 물질의 본성과 자연의 이치를 간파하고 있었던 것일까?
버리고 비워야 채울 수 있다는 노자의 사상은 무소유를 강조한 불교와 에픽테토스 같은 스토아 학파 철학자들의 사상에서도 볼 수 있다. 유형이든 무형이든 무언가를 소유한다는 것은 유효기간이 있는 물건을 한시적으로 관리하는 것과 같다.
부와 명예 그리고 사회적 지위 그 어떤 것을 소유하든 영원히 살 수 없는 인간에게 영원한 소유란 불가능하다. 영원히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영원히 소유하려 할 때 불행은 시작된다. 시대를 앞서간 미니멀리스트 노자에게서 그리고 무소유의 참 의미를 간파한 옛 현인들에게서 비우고 버리는 지혜를 배워야 할 것이다.
원자들의 화학결합을 통해 본 자연의 원리와 옛 현인들이 통찰한 비움과 버림의 의미를 되새겨보며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33)는 이번 주 복음 말씀을 묵상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