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24-30 석달 쯤 후에
본문은 다말의 정체가 완전히 알려지고 유다와 다말 사이에서 베레스와 세라의 쌍둥이 출생이 기록됩니다.
1. 본문 24-25절은
"(24) 석달쯤 후에 혹이 유다에게 호아여 가로되 네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였고 그 행음함을 인하여 잉태하였느니라 유다가 가로되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
(25) 여인이 끌려나갈 때에 보내어 시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나이다 청컨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뉘 것이니이까 한지라" 입니다.
다말은 보다 일찍 그 범죄를 폭로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극형을 요구받을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이것은 그럴 때에라야 보다 강력히 간언 할 근거를 지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다가 자기 며느리를 그토록 가혹한 형벌에 처하려는 이유는 그녀가 간음죄를 범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이 간음죄를 나중에 자기 율법으로 확정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이 때에는 여자가 약혼 때부터 남편에게 충실해야 한다는 관습이 유행한 것처럼 보입니다.
다말은 유다 가문에 출가했었습니다. 그녀는 그 때 유다의 셋째 아들과 정혼 중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판결의 문제가 된 것은 단순한 보통 간음이 아니라 음행의 죄였습니다.
유다는 자기 아들을 통해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자기 권리로 이 음행 죄에 대한 판결을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이런 종류의 형벌은 간음이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크게 혐오를 받아 왔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간음하는 자를 돌로 치라고 명합니다.
그러나 기록된 율법에 의해 형벌이 규정되기 전에는 모든 사람의 동의에 의해 음행한 여인은 화형에 처해졌던 것입니다.
이것은 혼인의 존엄이 굳센 수호자에 의해 지켜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자기 신체의 주인이 아니고 그 자신과 그 아내 사이에는 상호 의무가 있다고는 하지만 독신 여인들과 불의의 관계를 갖는 남편들은 그래도 극형에 처해지지 않습니다. 이는 부정 때문만 아니라 남편에게 끼치는 수치와 은밀한 교섭에 의해 야기되는 종족상의 혼란 때문에도 그 형벌이 여자에게 주어진 것인 까닭입니다.
남몰래 타인의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방종이 허락된다면 인간 사회에서 그 외 무엇이 안전하게 남을 것입니까? 사생아에게 이름을 도둑질해서 주며 합법적 상속자한테서 재산을 빼앗아 위조된 자손에게로 옮기는 일이 아닙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앞에서 혼인의 정절을 그토록 엄하게 주장한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하물며 간음을 벌하지 않고 소중히 여기는 오늘날 우리의 태만은 얼마나 더 악하며 변명의 여지가 줄어듭니까?
극형은 실로 그 범죄의 양에 비해 너무 엄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도 어찌해서 우리는 보다 경미한 과오를 보다 강경하게 벌합니까?
모든 세상 사람 마음에는 나면서부터 율법이 새겨져 있었는데 세상은 사단의 간계에 속아 넘어가서 그 율법의 퇴화를 허용했던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세상은 그리스도께서 간음한 여인을 안전하게 돌아가게 하셨다(요8:11)는 점에서 마치 그리스도께서 강도와 살인자와 거짓말쟁이와 주술가들의 형벌을 떠맡기라도 하셨다는 듯이 이 큰 광태에 대한 구실을 찾아 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행위에 의거하여 규칙을 확립시키려고 추구하는 것은 헛된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의도적으로 지상 재판관의 직분을 포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대담하게 사법권을 전횡하는 유다가 사사로운 개인이며 그 땅의 나그네였다는 점에서 의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그는 어떻게 생사를 마음대로 처리할 이런 큰 자유를 얻었습니까?
유다가 마치 자기 권세로 며느리의 사형을 명령했다거나 집행수들이 그의 집행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이 말씀을 이해해서는 안되며 다말의 죄가 입증되고 알려졌으므로 유다는 그녀의 고소인으로서 마치 재판관들이 이미 판결을 내리기라도 한 듯 거침없이 형벌을 선언하고 있다고 해석해야 합니다.
우리는 당시 판결을 내리는 집회가 열리곤 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유다가 다말을 공공연히 끌어내라고 명령한 것은 그 사건의 심리가 끝났으므로 다말을 관습대로 벌하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형벌을 화형이라고 상세히 못박는 것은 그것이 고난의 여지가 없는 사건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다말은 재판에 소환되기 전에 유죄가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2. 본문 26절은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가로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입니다.
1) 26절 초반은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입니다.
다말의 공공연한 수치는 복수의 염원에서 유래된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자기 시부의 마음을 진정시킬 목적으로 그와의 회견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죽음을 초개처럼 여기고 시아버지를 자기 운명의 동반자로 요구합니다.
유다가 즉시 자기 잘못을 인식한다는 것은 그의 정직성에 대한 증거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많은 과오가 백일하에 드러나고 자기들의 죄를 부인하는 모든 수단이 실패로 돌아갈 때까지는 자기 죄를 감추기에 급급한 것이 상례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강제로든 위협으로든 자백을 얻어낼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지만 유다는 자발적으로 고백을 하며 자기 잘못이 더 크다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유다는 자기 잘못을 고백함에 있어서 그 잘못에 대한 처벌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보면 우리는 타인을 혹평하는데 엄격한 자들이 자신을 용서하는 데에는 더 유연하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점에서 그를 모방해야 합니다.
즉 고문이나 큰 고통에 의하지 않고도 우리는 진실에 압도되어 하나님께서 책망하시는 죄악을 온 세상 앞에서 고백하는 것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우리는 그의 편벽성을 피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남에게 대해서는 가혹한 반면 자기 자신은 아끼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이야기는 당자가 듣지 않는데서 정죄하지 않는 일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이는 한 사람의 죄인이 멸망하는 것보다 무죄한 자의 용서가 더 선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변호는 때로 재판의 국면을 변화시킬 많은 일들을 폭로하기 때문입니다.
2) 본문 26절 하반은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입니다.
이 표현은 엄격히 말해서 적절하지 못합니다.
그는 다말의 행위를 꾸밈없이 그대로 시인하지 않고 비교해서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마치 오히려 자기를 고소할 수도 있었던 여인에게 부당하게도 이유 없는 분노를 터뜨렸다고 말하려는 듯합니다.
더욱이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어떤 개인도 자신의 피해를 복수하려고 선뜻 나서지 않는 경우에 세상은 죄에 대한 벌을 강요함에 있어 매우 느리게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흉악하고 가공할 만한 범죄가 자행되었었습니다. 유다는 자신이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하는 동안은 맹렬히 다구치며 심판의 문은 열렸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고소가 취하되자 양자는 다 도피해 버립니다.
물론 일어나 이들을 치는 것이 모든 사람의 의무라는 사실이 틀림없었습니다.
모세는 유다가 진정으로 참회하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유다가 다시는 자기 며느리를 가까이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그런 범죄를 선천적으로 크게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유다가 시부와 며느리의 결합이 불명예스럽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판단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다말과의 관계를 삼가 했겠습니까?
비열한 것은 존귀한 것에 대해 자연이 명하는 구별을 파괴하려고 시도하는 자는 누구든지 장대한 자들처럼 하나님께 공공연히 전쟁을 일으키는 자입니다.
3. 본문 27-30절은
"(27) 임신하여 보니 쌍태라
(28) 해산할 대에 손이 나오는지라 산파가 가로되 이는 먼저 나온 자라 하고 홍사를 가져 그 손에 매었더니
(29) 그 손을 도로 들이며 그 형제가 나오는지라 산파가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터치고 나오 느냐 한 고로 그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고
(30) 그 형제 곧 손에 홍사 있는 자가 뒤에 나오니 그 이름을 세라라 불렀더라" 입니다.
유다는 그의 실수에 대한 용서를 얻고 다말은 자신의 음모에 대한 사면을 받았지만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낮추시기 위해 자손을 낳게 만드셨습니다.
이와 유사한 일은 야곱과 에서의 경우에도 발생했지만 그것은 다른 이유에서였습니다.
우리는 자손이 때로는 길조를 나타내며 때로는 흉조를 나타낸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쌍둥이가 출생시부터 부모의 불명예를 수반하고 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새삼스레 자기들의 수치를 기억한다는 것은 그들 자신에게 유익했을 뿐만 아니라 그런 범죄에는 영원한 수치의 낙인이 찍힌다는 것이 증인들 앞에 표본 구실도 한 때문입니다.
산파가 한 말의 의미는 모호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터친다"는 말을 자궁막에 대한 말로 해석합니다.
태아가 나올 때는 자궁막이 파멸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이것을 베레스가 어떻게 가로 놓인 장애물을 돌파하고 먼저 나왔는지 이상히 여겨 한 말로 생각하는데 이 견해가 더 정확합니다.
베레스보다 앞선 그의 형이 간막이 벽으로서 그를 막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자들에게는 이 표현이 하나의 저주로 보입니다.
즉 이것은 '터침의 책임은 네게 돌아갈 것이니라' 라는 말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판단하는 한 모세는 그 해산에서 자손이 생겨났다는 것을 지적하려고 의도하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