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여설수행(如說修行)의 실천 ☞음성으로듣기☜
대성인님은 본초에서 「이렇게 깨닫는다면 무시(無始)로부터 이래(已來), 지금까지 항상 생각해 온 그릇된 망상(妄想)은 어제의 꿈을 생각하듯이 형적(形跡)도 없이 되어버리는 것이니라.」(신편어서 p.105)라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즉 대성인님은 이 바로 앞 문장, 나의 몸 체성(體性)을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라고 한다는 문장에 대해, 묘법연화경은 법화경의 이름이 아니라 나의 몸의 체(體)라는 것. 그리고 묘법연화경은 나의 몸의 체(體)를 불러 나타낸 부처의 말씀이므로 변함없이 그대로 나의 몸이 삼신즉일(三身卽一)의 본각(本覺)의 여래(如來)가 됨을 명백히 밝히시고 있고, 이를 깨달으면 과거세(過去世)로부터 지금까지의 중생의 미혹(迷惑)이나 망상(妄想)은 꿈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고 교시(敎示)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구체적 방도(方途)로써 창제의 중요성을 분명히 하시고 있습니다. 「이를 믿고 한 번이라도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 부르면 법화경을 깨닫고 여법(如法)으로 일부(一部)를 봉독(奉讀)함이니라. 열 번은 십 부(部), 백 번은 백 부(部), 천 번은 천 부(部)를 여법(如法)으로 봉독한 것이로다.」(신편어서 pp.105-106)라고, 성불의 법리를 믿고 한 번이라도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 부르면 진실로 법화경을 깨달아 법(法)상에서 올바르게 법화경 일부(一部)를 읽은 것이 되어 열 번이라면 십 부(部), 백 번이라면 백 부(部), 천 번이라면 천 부(部), 법화경을 읽은 공덕과 같으며 그 공덕은 매우 크다는 것을 나타내시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마지막에, 「이렇게 믿음을 여설수행(如說修行)의 사람이라고 말하느니라.」(신편어서 p.106)라고 말씀하시어, 이처럼 법화경을 믿고 불설(佛說)대로 수행하는 사람을 「여설수행의 사람」이라 가리키시며 그 실천을 장려하시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씀하신 「여설수행의 사람」이란 엄밀히 배(拝)하면 대성인님 자신(自身)입니다. 그것은 네 번의 대난(大難), 셀 수 없는 소난(小難)이라 말하는 것처럼 온갖 난(難)을 견디고 법화경을 신독(身讀)하며, 경설(經說)과 같이 수행하신 것은 대성인님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를 우리의 신행(信行)으로 요약하여 말하면, 그것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믿고 자행화타(自行化他)의 수행에 힘쓰는 사람이 여설수행의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본불 대성인님의 뜻 그대로 자행화타의 신행, 즉 창제와 절복 실천에 힘쓰는 것이 과거원원겁(過去遠遠劫)으로부터의 죄장(罪障)을 소멸하고 성불의 경계에 이르는 길임을 확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법주 니치뇨 상인 예하님은 “광선유포야말로 어본불 대성인이 말법에 출현하신 목적이며 우리에게 남겨진 존귀한 사명입니다.(중략) 대어본존을 향한 확신을 가지고 이체동심하여 신심 강성히 자행화타의 행업(行業)에 힘쓰고 광포를 위해 힘써 가는 그 속에 실증(實證)이 반드시 나타날 것입니다.”(대백법 853호)라고 어지남하시고 있습니다.
광포와의 싸움에는 반드시 온갖 장마(障魔)와 곤란(困難)이 앞다퉈 일어나겠지만 어법주 상인 예하님의 어지남 아래 항상 대어본존을 향한 절대적 믿음을 가지고 승속일치·이체동심하여 절복행에 힘쓰는 것이 중요하며, 거기에 「여설수행의 사람」으로서의 덕용(德用)이 갖추어져 어떠한 장해(障害)도 극복하고 반드시 서원(誓願)을 달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 함께 절복 서원 달성을 향해 거듭 정진해 갑시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망상(妄想)-이치에 맞지 않는 허황된 생각을 함. 또는 그런 생각.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