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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18강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본문/눅11:1-13
요절/눅11: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기독교는 기도교’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항상 기도하심으로 기도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기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막상 기도만큼 어려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노동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기도를 통해 신령한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가? 또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를 가르쳐줍니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해 기도에 대해 배우고 기도하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하나님과 깊은 관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이날도 여느 때처럼 한곳에서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하라고 잔소리하신 적이 없습니다. 다만 꾸준히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을 뿐입니다. 제자들은 그 모습을 보고 기도에 대한 강한 자극을 받았습니다. 암만 봐도 예수님이 능력의 역사를 이루시는 비결이 바로 기도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기도를 배우고자 하는 소원이 생기게 된 제자 중 하나가 나아와 이렇게 청했습니다. “주님, 세례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준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예수님은 마치 이날이 오기를 기다려 온 듯 회심의 미소를 지으시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십니다. 단, 기도의 형식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으십니다. 이를 볼 때 기도의 폼, 억양, 방식 등은 각자의 스타일대로 자유롭게 하면 될 것 같습니다. 대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범이 될 기도문 하나를 가르쳐주십니다. 우리는 이 기도를 통해 나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 앞에서 나는 누구인지 발견합니다. 이것을 기초로 우리는 기도가 무엇인지, 어떤 기도 제목을 가지고 기도해야 하는지, 우리가 왜 기도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먼저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 아버지여. 예수님은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도록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혁명에 버금가는 대사건입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저 높은 하늘 위에 계신 하나님을 감히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당시 임금을 부르던 호칭과 같은 주(The Lord)라는 호칭을 사용했습니다. 임금 앞으로 나아가려 하니 기도할 때마다 얼마나 긴장되고 겁이 나겠습니까?
그러나 ‘아버지여’라는 호칭은 전혀 다릅니다. 개인에 따라 시대에 따라 편차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기본적으로 개인적인 친밀함을 담고 있는 표현입니다. 특히 아무런 수식어가 없이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더욱 그렇습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도 아니고, 왕과 신하의 관계도 아니고, 가족의 의미에서 아버지를 말합니다. 기도할 때 일단 ‘아버지’ 이렇게 부를 때 푸근함과 따뜻함을 느낍니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속에 있던 말을 다 말하게 됩니다. 직장 상사 앞도 아니고, 교수님 앞도 아니고, 아버지 품 안에 있는데 감출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이렇게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 가운데 친밀한 대화와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까?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1:5)”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딸로 입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았습니다. 양자의 영을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할 때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롬8:15). 복음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바로 이 양자 됨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가 그분의 아들딸이 되었다는 것이 어떤 의미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를 너무 잘 아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카락 수까지 세고 계십니다. 또 하나님이 아버지시라는 말은 자녀인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원하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바로 이런 아버지 앞에 사랑받는 자녀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둘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는 우리가 기도해야 할 첫 번째 기도 제목입니다. ‘이름’은 존재를 가리키고 ‘거룩하다’는 말은 ‘구별되다’, ‘뛰어나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의 존재가 세상의 어떤 것보다 최고로 높임 받고 영광스럽게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4장 8-11절에 보면, 천사들은 밤낮 쉬지 않고 하나님을 찬송하며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하나님께 돌립니다. 그리고 이십사 장로들은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말합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11)”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모든 피조물에게서 마땅히 영광과 존귀와 찬송을 받으셔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의 기도 제목인 이유는 이 세상의 현실이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피조물들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 인간입니다. 사람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제쳐 놓고 헛된 우상을 숭배하거나 아예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경 속에 계시하신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이라 폄하시키고 기독교를 조롱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믿는 사람마저도 하나님의 거룩함을 반영하지 못하고 추하고 더러운 모습을 보여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만약 자신의 아버지의 이름이 모욕당하는 일이 발생한다면 이를 그냥 두고 볼 아들딸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른 일이 손에 안 잡힐 정도로 가슴에서 열불이 나야 정상일 것입니다. 하물며 이 세상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고 있는데 우리가 자녀로서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현실을 보며 우리는 애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탄식 가운데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전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의 삶과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서 높임 받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나라가 임하시오며. 하나님은 온 세상의 주인이시며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만약 하나님이 거룩하신 아버지이긴 하지만 다스리시는 분이 아니라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를 돌보고 싶어 하시고 돌볼 능력도 있지만 돌볼 권리가 없는 분이 되어버립니다. 아무 실권이 없는 아버지에게 우리가 구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한 왕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은 언제든 원하시는 일을 하실 수 있다는 확신 가운데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 하십니다. 이것이 기도 제목인 이유는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하고 반역한 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성경에서 공중의 권세 잡은 자라고 표현하고 있는 사탄의 세력입니다.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인간 역시 그 대열에 합류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이 세상은 어둠의 권세 아래 죄와 죽음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질병의 공포, 전쟁의 위협, 빈부격차, 부정부패, 강력범죄 등 각종 죽음의 증상들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이 근본적으로 바뀔 수 있는 해결책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 나라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만이 궁극적인 대안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을 때 죄로 인한 고통이 그치게 됩니다. 상함이나 해됨도 없으며 영원히 사망이 없고 생명이 왕 노릇하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 나라는 정의가 강물같이 흐르고 사랑과 은혜가 넘치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속히 임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정과 사회와 국가에 드리워진 어둠을 밀어내고 계속해서 확장되어 나가기를,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기도문의 전반부를 가리켜 흔히 ‘하나님을 위한 기도’라고 말해왔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까 하나님은 이미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은 온 세상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무엇이 부족하거나 필요해서 우리에게 기도해 달라 요청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이 기도 역시 다 우리를 위한 기도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죄와 죽음의 권세 아래 시달리고 있는 우리 인생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너희의 모든 필요 중에 가장 절실한 필요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회복하고 바르게 하는 것임을 깨우쳐주는 기도입니다. 전능하신 왕, 자비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돌보심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는 가장 복된 삶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과 나라를 위한 기도가 나에게 가장 절실한 기도 제목이라는 것을 늘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넷째,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예수님은 먼저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먹을 것이 풍족한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그리 와 닿는 말씀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날 먹을 것뿐만 아니라 앞으로 한참 더 먹을 것을 쌓아두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돈만 있으면 마트에 가든지 쇼핑몰에서 배달을 시키든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정말 그날 먹을 것을 위해 일했고 그날 일한 것을 가지고 먹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오늘 배불리 먹었다 해도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시대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걱정 대신 기도하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기도는 우리와 크게 상관없는 기도일까요? 당장 먹을 끼니 걱정은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여전히 육신의 필요, 물질적인 필요가 있습니다. 안정된 직장이 필요하고 살 집도 있어야 하고 자녀를 키울 교육비와 노후 대책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땀 흘려 일하고 열심히 수고한다고 해서 이런 필요를 스스로 다 충족시킬 수 있습니까?
다 내가 열심히 돈 벌어 내가 필요한 것 사고, 먹고 싶은 것 먹는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가 스스로 얻었다고 생각하는 그 모든 것은 사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들입니다. 우리는 공급자 되시는 하나님을 의존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육신의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나아가 구하도록 말씀하신 것입니다. 매 순간 하나님을 의지해 살아갈 때 우리는 필요한 것들을 신실하게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장래에 대한 염려와 세상 욕심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다섯째,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기도에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모든 죄를 용서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변화 받지 못한 죄악된 본성이 남아있어 이 때문에 죄의 유혹을 받고 죄를 짓습니다. 죄를 지으면 죄책감으로 인해 심령이 막히고 영적인 힘과 기쁨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우리는 이때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붙들고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죄책감을 제거해주시고 평강과 기쁨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점차적으로 죄를 멀리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 속으로 깊이 들어가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가 죄 용서를 구하기 전에 먼저 우리에게 죄지은 자에 대한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는 하나님께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자요, 늘 죄를 짓고 용서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우심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도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고 자신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더욱이 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에 우리는 용서하고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 사람들 사이에 가장 큰 문제는 서로 용서하지 못하는 문제 아니겠습니까? 자신에게 죄를 범하고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생각만 해도 울화가 치밀고 복수하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마음에 이 같은 분을 품고 사는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우리가 죄지은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우리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신다고 마가복음에서는 말씀하셨습니다(막11:25).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라도 죄지은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여섯째,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끝으로 예수님은 시험에 들게 하지 말 것에 대해 구하라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는 분입니까? 하나님이 우리가 죄를 범하도록 유혹하는 분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1:13).”
그럼 누가 시험합니까? 우리를 유혹하는 것은 사탄이 하는 일입니다. 사탄은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정욕이면 정욕, 탐욕이면 탐욕, 교만이면 교만, 우리의 허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넘어뜨리려 합니다. 흔히 하는 말로 인생 한 방에 훅 갈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사탄의 시험에 걸려 넘어지면 한 순간에 그 동안 쌓아올린 모든 것이 다 날아갈 수 있습니다. 자신만 망치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큰 상처와 피해를 입힐 수 있습니다. 문제는 사탄이 우리보다 훨씬 더 강하고 지혜롭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사탄과 우리가 일대일로 싸운다면 우리는 백번 싸워 백번 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연약합니다.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넘어질 위험이 가장 큰 사람이 누구인가 하면 자신이 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남들은 다 넘어져도 나는 안 넘어질 수 있다고 자신하는 사람, 그래서 기도 안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우리가 사탄의 시험을 뿌리치고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탄보다 더 강하신 분을 의지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시험에 들지 말게 해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라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기도할 때 우리는 깨어 있을 수 있고 하나님이 유혹에서부터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어떻게 기도해야 할 것인가를 비유로 가르쳐주십니다. 어떤 사람에게 한 친구가 여행 중에 배고프고 지친 상태에서 밤늦게 찾아왔습니다. 마침 그 집에 먹을 것이 다 떨어져 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배고프고 지친 친구를 불쌍히 여겨 다른 친구의 집을 찾아가 부탁합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이미 문을 닫고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으므로 떡을 줄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염치 불구하고 계속 문을 두드리며 끈질기게 부탁했습니다.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5,6).” 그 친구는 일어나 줄 수 없는 상황이라고 거절했지만 그는 끈질기고 뻔뻔스럽게 요청했습니다. 마침내 그 친구는 견딜 수 없어 일어나 떡을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의 결론으로 말씀하십니다. 8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그 친구가 줄 수 없는 상황에 있었지만 일어나 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간청했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간청’은 ‘끈질기게’, ‘뻔뻔스럽게’ 요청한다는 의미입니다. 상황이 힘들다고 포기하거나 뒤로 물러서지 않고 목적하는 바를 어찌하든 이루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도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가 어떻게 이런 간청하는 기도를 할 수 있었을까요? 첫째, 배고픈 친구에 대한 상한 심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먼 여행을 마치고 밤중에 찾아온 친구가 얼마나 피곤하고 시장할까? 이런 마음이 있을 때 한밤중에 실례를 무릅쓰고 잠자리에 든 친구를 찾아갈 수 있었고, 떡 세 덩이를 얻을 때까지 끈질기게 간청할 수 있었습니다. 둘째, 떡을 가진 친구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친구는 자기에게는 떡이 없지만 옆집 친구의 집에는 떡이 있음을 알고 간청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공급하심을 믿는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끈질기게 간청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간청하는 자세로 기도해야 함을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왜 간청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먹을 것을 주기에 인색하신 분이기 때문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에 대해 무관심하시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에 민감하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끈질긴 기도를 원하십니까? 우리는 때로는 되면 좋고 안 되면 말고 식으로 대충 기도할 수 있습니다. 별 소원 없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절박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면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속으로 들어갈 수도 없고 하나님이 도와주셔도 하나님의 도우심과 신실하심에 대해 깊이 경험할 수 없습니다. 기도에 대해 절박함 없이 설렁설렁하면 우리의 신앙의 깊이 또한 설렁설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간청하는 기도는 하나님이 나를 포기하거나 실망시키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믿기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 받기를 원하시는 주님이므로 당신의 이름의 명예를 걸고 들어주시는 분이시기에 간청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기초로 적극적인 자세로 기도해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여기 나오는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라는 말은 비슷한 말의 반복적인 표현으로 적극적이고 끈질긴 자세로 지속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입술만으로가 아니라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의 열정과 갈망을 표현하라는 것입니다. 한 아이가 가지고 싶은 장난감이 있었습니다. 꼭 가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빠에게 매달려 사달라고 졸랐습니다. 너무도 가지고 싶었기 때문에 계속 매달렸습니다. 아빠가 사주었습니다. 그때 아이의 기쁨이 어떻겠습니까? 우리는 간절히 지속적으로 기도할 때 기도의 응답에 대한 기쁨 또한 훨씬 커질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사랑도 훨씬 커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실로 우리의 간절하고 절박하고 지속적인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 아멘!
11-13절을 보십시오. 아무리 악한 아버지일지라도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알을 달라는데 전갈을 주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자기 자식에게만큼은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합니다. 그렇다면 하물며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자녀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8:32)” 했습니다. 다만 우리에게는 가장 좋은 것을 주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본문에 보면, 좋은 것은 ‘성령’입니다. 사실 성령은 삼위일체의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가장 좋은 하나님 자신을 주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15장에 보면, 아브람이 피해의식 속에 화가 무진장 나 있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나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자체가 가장 좋은 상이라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안에 천지 만물이 있고, 하나님 안에 내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신앙생활에 있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원천이 되십니다. 신자들에게 성령이 충만하게 역사하실 때 신자들은 권능을 덧입게 됩니다. 또 성령이 충만하게 역사해서 우리 삶을 인도하실 때 우리는 가장 좋은 베스트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임재와 성령의 충만함을 기도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아빠로 시작해서 아버지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하늘 아버지 안에 존재하며 그의 공급하심과 그의 보호와 그의 인도하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 제목을 마음에 새기고 기도하며 우리의 소원을 간청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나와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가 더욱 깊어지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