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격적 영성을 중시한 개혁주의 신학자
박윤선 목사의 신앙과 신학
박윤선 목사(1905-1988)
– 고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신구약 성경 66권 전체를 주석하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도 드문 일을 하셨습니다. 성경 전체를 주석하시기 위해 성지순례나 가족과 피크닉 한번 제대로 가보지 못하셨다는데 몇 년에 걸쳐 이루셨습니까? 혹시 크게 기억에 남을만한 에피소드 좀 이야기 해 주십시오.
박성은 : 주석 집필은 만주사변 때부터 시작하신 것으로 알며 1979년에 모두 마치셨으니 38~40년에 걸쳐 쓰신 겁니다. 어렸을 때 저희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항상 온돌 바닥에 놓인(의자를 쓰지 않는) 책상에서 주석을 집필하시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여름에는 에어컨은 물론 선풍기도 갖추기 힘든 때에 젖은 수건을 머리에 얹고 늘 않아 계시던 모습도 말입니다. 성지순례는 딱 한 번 미국의 고응보 목사님의 주선으로 당신의 연세 약 70초 중반에(1975년 즈음)가셨다가 담석증이 재발하여 중간에 일찍 돌아오신 일이 있습니다. 가족과의 소풍이나 휴가는 어렸을 때 여름에 조용한 해수욕장에 몇 번 간 것과 노년에 이곳 미국에 오셔서 두어 번 피크닉 가신 것 외에는 별로 기억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시간이 없으셔서도 그러셨겠지만 별로 재미를 느끼지 못하셨던 같습니다.
– 그러면 박 목사님이 주석 집필을 결심하신 때는 언제였습니까?
박성은 : 솔직히 이 부분은 제가 확실히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아마 메이천 박사의 신약학 강의를 들으실 때 그런 생각을 하셨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뒤에 회고하시기를 메이천 박사께서 성경 구절을 주고 집에서 주석을 해오라고 하시고 다음날 그것을 함께 분석 비판하며 공부하셨다고 합니다. 그런 일들이 주석 집필 생각을 매우 확실하게 하셨으리라 봅니다. 제가 웨스트민스터에서 신학 공부를 할 때(1981년 무렵) 아버님과 함께 공부하셨던 고 클라우니 박사님이 저에게 말씀하시길 아버님이 미국에 왔을 때 이미 주석을 기숙사에서 쓰시고 계셨다고 했습니다. 그게 2차 유학 때인지 아니면 그 후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 주석 집필을 위해서는 많은 언어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많은 언어를 언제 어떻게 습득하셨습니까?
박성은 : 아버님이 확실히 아셔서 쉽게 책 들을 섭렵하실 수 있었던 언어는 한국어를 빼 고 일어, 중국어, 영어, 독일어, 네덜란드어이 고 고전어는 히브리어와 헬라어였습니다. 2차 미국 유학 시에 고대어(아람어 외 한두 언어)도 하셨고 불어와 라틴어는 정식으로 배우신 것은 아니지만 라틴어는 읽고 해독하시는 데 상당히 조예가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네덜란드어 공부는 대부분 자습을 통해 하셨지만 직접 네덜란드에 가서 은퇴한 화란 교회 목사님 집에 5,6개월 거주하시면서 박사 학위를 위한 책들을 함께 읽어나가면서 크게 늘었다고 하셨습니다.
– 주석을 집필 하시는데 어떤 신학이 근간을 이루었으며 늘 중요하게 생각하셨던 점은 무엇입니까?
박성은 : 아버님의 신학은 인격적 영성을 중시하는 칼빈주의적 개혁주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무조건 옳다고 여기는 반틸의 전제주의적 기독교 변증학에 입각한 것이 아버님의 신학 근간입니다. 개혁주의 사상을 받아들인다고 하면서도 칼빈이 기도를 강조한 것에 대해 사람들이 우습게 보는 것을 늘 침통하게 여기셨습니다. 엎드려 기도하고 많이 울라 하시면서 많이 울어야 교만하지 않고 인격이 부드러워 지는 것이고 학문 위주로만 하면 신학을 냉랭하게 만드는 우를 범하여 살아있는 신학이 못된다고 하셨습니다.
– 목사님의 주석을 목회자들이 어떻게 아용하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으면 말해 주십시오.
박성은 : 아버님 주석은 어디까지나 당시 아직 외서의 섭렵이 어렵고 많은 목회자들이 시간에 쫓겨 허덕이는 상황을 늘 염두에 두심과 동시에 한국 강단을 염두에 두시고 쓴 책들입니다. 무조건 성경 편에 서서 쓴 주석,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그 누구보다 중시하고 기도로 쓴 주석임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고난과 역경을 감내하며 쓰신 주석이니 말씀을 준비하려면 성경 본문을 수십 번 읽고 묵상하고 기도를 심각하게 하고 난 후 박윤선 주석을 보고 바른 입장에 선 다음 다른 깊은 학문적 주석들을 더 섭렵한다면 좋을 것입니다.
– 목사님이 네덜란드 개혁주의 신학을 처음부터 많이 소개해 오신 것으로 압니다. 그렇게 소개하시려고 결심하셨던 특별한 계기라도 가지고 있습니까?
박성은 : 이 질문에 정확한 답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계기는 네덜란드가 개혁주의의 본산이요 당신이 공부하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반틸 교수와 스톤하우스 교수 그리고 프린스턴의 게할더스 보스 교수 등이 네덜란드와 깊은 관계를 가지신 분들로서 그들에게 많은 감화를 받았고 심지어 헤르만 바빙크가 반틸 박사에 의해 인용되는 것을 보고 매우 감동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네덜란드 개혁신학을 자연스럽게 한국에 소개하시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 목사님의 저술에는 헤르만 바빙크의 개혁교의학을 많이 인용하신 것으로 압니다. 바빙크를 누구를 통해 언제 알게 되셨습니까?
박성은 : 물론 두 말할 것도 없이 반틸 박사입니다. 반틸은 많은 화란 주석 뿐 아니라 반틸 자신이 직접 보던 책들도 저의 아버님에게 많이 주셨습니다. 반틸은 저의 아버님을 매우 사랑하셨습니다. 반틸은 그의 일생을 통해서 기독교 교의학의 보고는 헤르만 바빙크라고 공언하셨고 그의 책도 대부분 헤르만 바빙크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아버님은 아침마다 네덜란드어로 된 바빙크의 ‘개혁 교의학’(총 4권)을 소설 읽듯이 앉아서 읽으셨고 또 말씀하시길 바빙크야 말로 성경과 철학을 함께 갈파한 분이라는 찬사도 금하지 않으셨습니다.
– 이처럼 목사님은 성경 주석가로서 교의학 다시 말해 조직신학도 계속 공부해 오셨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박성은 : 사실 아버님께서 언젠가 말씀하시길 당신은 평양신학교에 다니실 때 교의학이 별로 재미없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유학을 통해 반틸로부터 바빙크를 철학적 조직신학자로 인식하게 되면서부터 조직신학에 매우 관심을 가지신 걸로 압니다. 심지어 칼 바르트도 바빙크를 자기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가장 위대한 교의학자라고 평했다고 합니다. 아버님의 소원 중 하나가 주석 집필이 끝나고 시간이 되면 성경신학적 교의학을 쓰시고 싶어 하셨지만 그렇게는 못하셨지요.
– 목사님은 성경연구뿐 아니라 교수로서 강의도 하셨지만 특별히 설교하시기를 매우 좋아하신 것으로 압니다. 왜 설교하시는 것을 좋아하셨습니까?
박성은 : 영혼을 변화시키는 설교야 말로 모든 신학의 최고 응용이요 배출구라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알듯 아버님도 그것을 깊이 인지하고 계셨습니다. 그래 항상 설교 잘하는 이들을 부러워하셨습니다. 아버님이 영성에 깊은 관심이 있었던 만큼 설교에 관심을 가지시고 설교학을 신학교에서 즐거이 가르치고 싶어 하셨습니다. 미국에 오셔서도 존 맥아더, 척 스윈돌, 척 스미스 등의 설교를 듣고 그들을 칭찬하시곤 했지요. 그리고 냉랭한 교조주의 죽은 정통에 대해서는 경계하셨습니다.
– 성경 주석가와 신학자로 활동하시면서 겪을 수밖에 없었던 가정생활의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 받으셨습니까?
박성은 : 이 질문은 어떻게 해결을 받으셨느냐고 묻기 보다는 어떻게 대처하셨는지 고쳐 답하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가정이나 교계의 어려움을 당할 때는 기도 시간이 아주 길어지셨습니다. 때로는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하시고 하루 종일 기도하시는 것도 많이 보았습니다. 콧물 엘러지도 있었지만 또한 우셔야 했기에 손수건을 여러 개 쓰시면서 기도하시고 “안타까워 견디기 어렵다.”는 말씀을 수도 없이 되 뇌이시면서 간절히 부르짖으셨습니다. 아버지의 이런 기도생활을 현실 도피로 보고 비판하는 이도 있겠지만 제가 보기엔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으신 것이고 다윗이 동굴 속에 숨어 하나님께 부르짖었듯이 부르짖으신 겁니다. 그렇지 않고는 아버님이 그가 맡은 그 많은 일들을 감당해 내기 어려우셨다고 생각합니다.(*)
이 인터뷰는 고 박윤선 목사의 4남 박성은 박사와 서면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출처 / 기독교 출판소식 통권 330호, 2015년 10월호,
박성은 박사 약력 / 미국 아이오와 주립대학 졸업,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의학박사,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석사(MAR), 동대학원 변증학 전공, 현재 미국 로스엔젤리스에서 신경내과 의사와 협동전도사로 사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