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
말씀:마태복음 5:10-12
요절:마태복음 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오늘은 팔복 중에 마지막 복인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에 대해서 배우고자 합니다. 팔복은 역설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 애통한 자, 온유한 자, 주린 자 이런 자들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이런 자들은 불행 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시는 제자도는 역설적인 복입니다. 오늘 살펴볼 여덟 번째 복 곧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그 중에서도 가장 역설적인 복입니다. 박해를 받는 것이 어떻게 복입니까? 욕을 얻어먹고, 핍박을 받고, 악한 말을 듣는 것이 어떻게 행복입니까? 그러나 주님은 이런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주님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고, 예수님 때문에 욕을 당하고, 중상 모락을 당할지라도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천국이 저희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에서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왜 복이 있는가를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진정으로 행복한 자의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10절에 보면 주님께서 팔복 가운데서 여덟 번째 복으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의’라는 것은 쉽게 말해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은 이런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가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천국이 저희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의’ 때문에 핍박을 받는 다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현재 행복한 자인 것입니다.
11-12절에 보면 주님은 계속해서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욕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고 거짓말로 중상 모락을 당할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욕먹고 핍박받고 모함을 받는 자는 하늘의 상이 크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즐거워하고 참으로 행복의 기쁨 가운데 도취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욕을 얻어먹고 핍박을 당하고 중상 모락을 당할 때 어떻게 즐거워하고 기쁨에 도취되어 살 수 있습니까? 이것은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자가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은 하늘의 상이 얼마나 큰지 알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 받을 ‘하늘의 상’이 얼마나 큰 가를 깨달을 때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린 아이에게 십억 짜리 수표를 쥐어 주어도 그 가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지 않습니다. 돈의 가치를 아는 어른들에게 십억 짜리 수표를 쥐어 줘 보십시오. 어떻게 되겠습니까? 너무나 기뻐 어쩔 줄을 모를 것입니다. 인생역전 로또에 사람들이 매료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돈의 가치를 알기 때문입니다. 한방에 인생을 바꿔 놓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주님 때문에 욕을 먹고 핍박을 당하고 중상 모락을 당하는 자가 받을 상이 어떤 한 가를 알게 될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하늘의 상’이란 무엇일까요? 마태복음에서 말하는 보상은 인간의 공로에 대응하는 보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보상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팔복의 모든 자질들과 상황들은 하나님의 통치의 결과이지 인간의 노력의 결과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하늘의 상’도 인간 스스로의 능력이나 업적의 대가로 주어지는 보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통치로 이루어지는 보상 곧 하나님 나라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모든 축복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통치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의 은혜와 축복을 이 땅에서 맛보고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누리는 이 하나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와 ‘아직’의 긴장 관계 속에 있습니다. 주님의 초림으로 말미암아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는 극치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그 때에 하나님 나라는 완전한 극치에 이를 것입니다. 그 때에 주님을 인해 욕을 먹고 핍박을 받고 중상 모락을 당하는 제자들은 극치에 이른 하나님 나라를 맛보고 누리게 될 것입니다. 완전한 하나님의 통치에 들어갈 것입니다.
극치에 이른 하나님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요? 우리가 그 나라를 알게 될 때 현재 주님을 인해 당하는 욕이나 핍박이나 중상 모락 가운데서도 우리는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입니다. 극치에 이른 하나님 나라는 계시록 21-22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계시록 21:1-4절에 보면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했습니다. 또 계시록 22:1-5절에 보면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고 했습니다. 주님을 인해 욕을 얻어먹고 핍박을 당하고 중상 모락을 당하는 자들은 이런 하나님 나라를 상으로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낙심하고 절망할 것이 아니라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여러 분들은 주님 때문에 어떤 박해를 받고 있습니까? 주님 때문에 어떤 욕을 얻어먹고 있습니까? 주님 때문에 어떤 중상 모락을 당하고 있습니까? 주님의 복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늘의 상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앞서 간 많은 믿음의 선지자들이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늘의 상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즐거워하였습니다. 우리도 믿음의 선지자들과 같이 하늘의 상을 소망하며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의를 위하여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의’를 위하여 사는 자를 세상은 왜 핍박합니까? 주님을 위해 사는 자를 세상은 왜 욕하고 핍박하고 중상 모락하는 것입니까? 자신들의 죄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을 떠나 부패하고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그들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2:15절에 보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야고보서 4:4절에 보면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세상은 오염되고 부패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대적합니다. 마귀가 다스립니다. 그래서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항상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19-20절에 보면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의를 행하는 자를 핍박하는 것은 그로 말미암아 어둠을 사랑하는 자신들의 죄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5:19절에 보면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이 의를 위해 사는 자를 핍박하는 이유는 자신의 악함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않고 주님께 속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의인이 핍박을 받는 것은 가장 기본적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요일 5:19). 아벨로부터 시작해서 아브라함과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왜 핍박을 받았습니까? 이들이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의로운 삶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불의가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로부터 핍박을 당하셨습니까? 예수님을 인해 자신들의 죄가, 자신들의 불의가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렸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속했고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그 때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과 ‘자기 잘못 때문에 핍박을 받는 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 잘못하면, 곧 법을 어기면 어떻게 됩니까? 환난을 당합니다. 옥살이를 하기도 합니다. 많은 벌금을 내기도 합니다. 사람들로부터 욕을 얻어먹고 혼이 나기도 합니다. 자기가 잘못해서 욕을 먹고 혼이 나는 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박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여기서 박해라는 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정당한 신념, 한마디로 의라는 것 때문에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에서 무능하고 게을러서 못사는 것을 보고 박해를 받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신념과 원칙을 포기 했더라면 잘 살 수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다른 것을 희생해 버리고 포기함으로 필연적으로 당하는 환난이나 고통을 박해라고 합니다. 이처럼 자기 잘 못 때문에 박해를 받는 자가 아니라 ‘의’ 때문에 박해를 받는 자가 행복한 자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의’를 위하여 살 때, 곧 주님을 위해서 살 때 반드시 많은 핍박을 받을 것입니다. 육체적인 핍박뿐만 아니라 욕을 얻어먹기도 하고 모욕과 악담을 당하기도 할 것입니다. 많은 현실적인 불이익과 손해를 당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자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으며, 하늘에서 상이 클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행복한 자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행복의 기준을 철저히 제고해 보아야 합니다. 제자는 더 이상 세상 사람들이 행복해 하는 상황을 목표로 살아가는 자가 아닙니다. 제자는 세상 사람들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고난과 손해의 상황에서도, 그 상황 자체로 인하여 행복해야 합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상황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음에 대한 실제적인 증거가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 하나님 앞에서 누리게 될 상이 클 것임을 보증해 주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게으른 자를 핍박하지 않습니다. 아에 상관하지 않고 내버려 둡니다. 그러나 의를 향하여 적극적으로 나아가는 자, 주님을 위해 헌신하는 자들을 핍박합니다. 이를 통해 의를 이루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가 의를 향하여 적극적으로 나아감으로 내 몸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현재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주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에 완전한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가장 행복한 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