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즈 고아, 벵의 샨띠홈 이야기!
프롤로그
*인도에서 비상계엄령 소식을 들었다. 믿겨지지가 않았다. 사실을 확인하고 공황상태에 빠졌다. 분노가 화산처럼 분출하였다.
민주주의를 씨를 뿌리기 위하여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고난과 고통을 당하였는데, 독재 폭력에 죽고 감옥에 가고 고문을 당하였는데,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과 눈물로 민주주의가 꽃피었는데 그 꽃을 감히 꺾으려 들다니! 짓밟으려 들다니! 죽이려 들다니!
하늘이 무섭지 않은가? 선열들의 피가 두렵지 않은가? 국민들이 두렵지 않은가? 국민들이 우습게 보이는가? 그렇게도 하찮게 보이는가? 그렇게 마음대로 해도 될 것 같은가?
오 하나님! 시련이 너무 큽니다. 우리나라와 민족을 불쌍히 여기시고 속히 민주주의를 짓밟는 악의 세력으로부터 우리를 구하여 주옵소서.
*샨띠홈은 2009년 에이즈로 부모를 잃고 태어날 때부터 수직감염 된 아이들을 섬기기 위하여 2009년 7월에 성북교회 단기선교팀이 참여한 가운데 데칸고원에 위치한 작은 도시에서 문을 열었습니다. 부모님 사망 후에 버려진 아이들 24명이 여기저기서 모여 들었고 우리는 그들을 위해 전체 살림을 주관하는 총무 1분, 요리사 1분, 아이들의 빨래와 청소를 해주시는 아얌마 1분을 일꾼으로 채용하였습니다. 닥터 헬렌은 캠벨병원의 원장이면서 샨띠홈의 원장으로서 아이들의 규칙적인 의료 검사와 약의 복용을 관리하였습니다. 건축비는 물론 한국교회가 100% 후원하였습니다. 가전제품과 가구 구입과 매월 생활비는 저와 한국교회 교우들이 자매결연과 장학결연으로 지원하였습니다. 샨띠홈을 방문한 교우들이 아이들의 자립을 생각하며 아이들의 직업훈련이나 특별교육을 위한 교육비도 아낌없이 지원하였습니다. 그 사이에 10여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성장한 아이들이 공동체로 함께 살 수 있는 집을 지었습니다. 대구 동원교회와 비전아시아의 후원으로 2층 60평으로 근사하게 지었습니다. 그리고 기존의 집도 40여 평으로 증개축을 하여 직업 훈련실을 만들고 여자들만의 숙소로 사용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코로나 팬데믹으로 샨띠홈이 강제로 닫히고 이 일을 함께 시작한 닥터 헬렌이 소천하면서 계획하였던 일들이 다 어그러졌습니다. 아이들은 뿔뿔이 흩어져 떠돌이가 되었습니다. 그런 아이들을 위하여 대구 동원교회와 대구노회 선교위원회가 캠벨병원에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샨띠홈을 돌려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하였습니다. 동원교회의 끈질긴 노력으로 캠벨병원이 20여 평의 건물을 개축하여 샨띠홈 아이들을 위한 쉼터를 만들었습니다. 아래 글은 “샨띠홈 쉼터”개원식에서 벵이 자신의 샨띠홈 경험을 들려준 것입니다. 그의 경험은 매우 긍정적이고 밝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다 그렇게 건강하고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16년 동안 30명 정도의 아이들이 들어왔지만 지금 남아 있는 아이들은 15명입니다. 라메쉬와 존 밥은 우리 샨띠홈에서 죽었습니다. 케말 파샤는 견디지 못하고 나가서 뭄바이에서 일하다가 죽었습니다. 강가 라주는 어디에 있는지 소식을 끊었습니다. 스프리야도 어느 날 사라졌습니다. 어린 가야뜨리와 큰 가야뜨리도 떠났습니다. 제얌마도 갔습니다. 언니 손을 잡고 울기만 했던 5 살배기 소녀와 언니 그리고 함께 온 친구, 유난히 두려움에 떨던 아이도 떠났습니다. 두어 달 살다가 적응하지 못하고 나간 아이들을 가끔 생각합니다.
살아 있을까? 죽었을까? 살아 있다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들을 생각할 때 못다한 사랑으로 마음이 안타까워집니다.
샨띠홈에서 쫓겨난 아이들은 현재 직업훈련원 기숙사, 학교 기숙사, 공장 기숙사, 친척집 등 여기저기 흩어져서 살고 있습니다. 외로움과 고달픔, 사회적 차별과 경시에 지친 그들은 함께 살 집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샨띠홈을 떠나 괴롭고 힘들지만 자유를 마음껏 만끽하여 옛날처럼 공동체 생활을 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파악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들 또한 복잡해진 현지 상황 속에서 옛날처럼 선뜻 집을 짓겠다고 나설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아이들이 피곤하고 지쳤을 때, 병들어 아플 때 와서 편히 쉴 수 있는 쉼터를 마련하는 것으로 우선 만족하기로 하였습니다.
아래는 벵이 “샨띠홈 쉼터” 개원식에서 들려준 자기의 이야기입니다.
사실이 아닌 이야기와 어려운 문장은 약간 수정하였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존경하는 내빈 어르신들과 교우님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샨띠홈 친구들의 소원이 성취되길 빕니다.
제 부모님은 2008년에 돌아가셨고 그 때 저는 HIV에 감염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부모님 사망 후에 저의 가족들은 저를 어떻게 보살펴야 할지 몰랐습니다. 가족들은 저를 시한폭탄으로 생각하며 두려워하였습니다. 그 때 큰 형이 잠말라마두구에 있는 샨띠홈에 데려다 주었습니다. 저는 저를 샨띠홈으로 데려다 준 형에게 항상 감사한 마음입니다.
제가 샨띠홈에 왔을 때 9살이었습니다. 저는 불안과 두려움으로 떨었습니다.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들이 있는 새로운 환경이 저를 걱정과 근심에 빠트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어린이들이었고 부모가 있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불안한 마음으로 서로 경계하며 멀리했던 우리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친구가 되고 한 식구처럼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부모님은 없지만 우리는 헬렌 엄마와 이 선생님의 사랑을 듬뿍 받았습니다. 두 분으로 인하여 우리는 외로움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두 분은 그 어떤 부모님보다 우리를 잘 돌보아 주었습니다. 지금 제가 여러분들 앞에서 제 삶의 스토리를 말할 수 있는 것과 우리 샨띠홈 친구들이 살아 있고 잘 살고 있다면 그것은 두 분의 덕입니다. 두 분이 없었다면 우리는 이미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났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앓고 있는 질병이 무엇인지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어떻게 극복해야할지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샨띠홈으로 온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많이 아팠습니다. 그때 닥터 헬렌 암마가 우리를 잘 돌보아주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마치 자신의 자녀인 것처럼 우리를 돌보았습니다. 그는 집에서 만든 음식을 우리가 먹었는지, 같은 음식을 먹었는지를 확인하였습니다. 저는 같은 음식을 먹여준 닥터 헬렌 암마를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병원에 행사가 있을 때 마다 그는 우리를 앞자리에 앉게 해주었고 “이 아이들이 내 아이들입니다.”라고 소개하였습니다. 우리가 잘못을 할 때 헬렌 암마는 여지없이 우리를 꾸짖었습니다. 그는 우리를 훈육과 하나님의 사랑으로 키웠습니다. 그때는 그 훈육이 싫었지만 지금은 훈육을 받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성탄절이 오면 좋은 옷과 맛있는 음식으로 우리는 행복하였습니다. 우리는 샨띠홈에서 매일 좋은 음식을 먹고 잘 잤습니다. 그리고 약을 잘 복용하여 건강해졌습니다. 헬렌 암마! 사랑합니다.
샨띠홈은 제 삶의 등불인 기독교 신앙을 심어주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기도하며 모든 염려와 걱정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의지합니다. 이 믿음을 이 선생님과 헬렌 암마에게 배웠습니다.
이 선생님은 한국에서 왔습니다. 우리 같이 버려져 고통당하는 아이들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는 HIV에 감염된 어린이들을 위하여 편히 먹고 자며 치료받을 수 있는 집을 짓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건축비를 후원하고 닥터 헬렌 암마는 부지를 제공하여 집을 지었습니다. 그리하여 두 분은 2009년 7월에 함께 샨띠홈을 설립하였습니다. 이 선생님은 우리를 무척 사랑하여 우리의 건강과 행복, 안전과 미래를 생각하며 샨띠홈이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였습니다. 현실적으로 같은 동족도 형제자매도 지속적으로 우리를 지원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 선생님은 우리를 위해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지원하였습니다. 그는 우리의 생일을 기억하고 모든 아이들에게 선물을 보내며 우리를 끊임없이 격려합니다. 또한 저희 결혼식에 경제적인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서 감사드립니다.
이 선생님! 사랑합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어거스틴 선생님과 뿌라투샤 누님을 알고 지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큰 사랑과 관심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와 함께 놀아주어 우리가 웃고 즐겁게 지내게 해주었습니다. 뿌라투샤 누님은 간식을 제공해주고 친 누님처럼 애정 어린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우리는 자라면서 두 분처럼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미치는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교육을 지원하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공부를 마친 후 어거스틴 선생님의 도움으로 캠벨병원에 취업을 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샨띠홈의 친구인 툴라씨와 결혼하도록 축복해주었습니다. 툴라씨 또한 병원에 취업을 하였고 병원 내 주택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두 분의 배려로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두 분의 친절과 지도에 감사드립니다.
생략~
저는 한국교회, 대구노회와 동원교회 그리고 이 선생님, 닥터 헬렌, 이다야 목사님, 어거스틴선생님, 뿌라투샤 누님 그리고 우리의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위하여 직접, 간접적으로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에필로그
이 자리를 빌어서 2008년에 선뜻 건축 후원을 해주신 윤승용집사님, 두 번째 건축 후원을 해주신 동원교회와 금창락 목사님과 비전아시아, 기존의 건물을 증개축해주신 동원교회에 엎드려 감사드립니다. 또한 자매결연과 장학결연으로 처음부터 지금까지 샨띠홈 운영에 동참해주신 교우님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겨울방학과 여름방학 때 샨띠홈을 방문해서 아이들과 함께 놀아준 많은 단기선교 팀들, 성북교회, 강남교회, 금암교회, 동원교회, 동촌교회, 영주중앙교회, 의료선교팀, 비전아카데미팀들과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려고 땀을 뻘벌 흘리며 놀았던 사랑스러운 청년들과 다양한 지원을 아끼지 않은 여러 교회들에도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샨띠홈을 함께 섬겼던 사랑하는 벗님들!
공동체로 함께 살던 샨띠홈은 없어졌지만 샨띠홈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현재도 계속 생활비와 한 달에 한 번 정기적으로 모이도록 활동비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뿐 만 아니라 공무원 시험공부, 교사 교육 그리고 기타 공부를 하는 학생들에게 계속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쉼터"로 끝내지 않고 “샨띠홈 쉼터”를 기반으로 해서 새로운 출발을 시도하고자 합니다. 그들이 살 수 있는 주택을 확보하고 공동체로 살 수 있는 상황과 형편이 만들어질 때 까지 함께 하여주십시오. 기도해주십시오.
제발 우리가 시작한 일, 우리 손으로 완성할 수 있도록 끝까지 함께 하여주십시오.
감사합니다.
2024년 12월 5일 벵이 쓴 글을
우담초라하니 10일 축시
새로 번역 정리하여 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