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신 119/200325]쑥을 캐는 남자
병원 검진차 올라오는 길, 아내와 친구에게 줄 선물로 뭐가 있을까? 그렇지! 쑥이 있구나. 그리고 엊그제 잡아 말린 민물새우가 있다. 소쿠리(비닐봉지가 아닌 소쿠리여야 한다)를 들고 마을 뒤뒤편 돌배나무 밑에 무성히 돋아난 ‘쑥바탕’으로 향했다. 1시간도 안돼 수북히 쌓여 두 집 먹기엔 충분하다. ‘6학년 4반’ 초로初老의 남자가 봄 햇볕을 즐기며 쑥을 캔다. 따분한 일이라고? 천만의 말씀이다. 누구를 위하여 이런 사소한 행위를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즐거움이라는 것을 아는 자들은 알리라. 허리 좀 아픈 것은 참으면 된다. 동네 아줌마와 할머니들이 소쿠리에 가득 찬 쑥을 보며 한마디씩 한다. “어찌 그렇게 쑥도 잘 캐요? 지비(당신의) 아버지를 닮아 못허는 일이 없소잉. 글고 뒤태가 어찌 그렇게 오촌양반(아버지 택호) 도싱(빼박은 듯 닮다)허다요잉?” 하룻밤 홀로 계실 아버지를 위하여 된장 풀어 쑥국을 끓여 놓았다. 간이 딱 맞아 몹시 흐뭇하다.
쑥을 캐면서 또 습관적으로 어머니를 생각한다. 그 엄마, 지금 내 곁에 계시면 얼마나 좋을까? 인자 영영, 다시는 볼 수가 없다니? 꿈속에라도 뵐 수 있기를 소망하거늘, 정말 가망이 없는 걸까? 나로서는 우리 엄마야말로 ‘봄의 여인’이자 ‘가을의 여인’으로 기억된다. 이맘 때쯤이면 고향에서 날아오던 ‘쑥 택배’. 봄은 쑥이고, 가을은 대봉시였다. 쑥과 대봉시는 바로 우리 엄마였던 것을. 아내가 끓여준 쑥국 한 그릇에 배 속에서 봄이 출렁댔던 것을. 그때마다 쑥에 관한 졸문도 여러 편 썼다. 아래 글은 ‘전라도닷컴’에 실린 것이다. 벌써 10년도 더 전의 일이다.
<고향에서 날아온 쑥국 한 그럭>
팔순 어매(어머니)가 점드락(하루종일, 저물도록) 캤을 쑥 한 봉다리(봉지)를 택배로 보내왔다. 말하자면 우리 아파트에 남녘에서 상경하는 봄과 함께 ‘내 마음속 고향’이 당도한 것이다. 고마움에 앞서 왈칵 짜증부터 났다. “잘 받았고 잘 먹겠다”는 전화를 하면서도 퉁명스럽게 “어-머-이, 지발(제발) 적선허고(바라건대) 이거고 저거고 인자 좀 그만허시요이” 퉁퉁 내질러놓고도 신간(마음)이 영 편치 않다. 어머니는 대체 언제까지 자식들을 위하여 이런 수고로움을 계속 하실 것인가.
‘꽃샘에 설늙은이 얼어죽는다’는 속담도 있지만, 꽃과 봄을 시샘하는 바람이 대낮에도 썬득썬득, 살을 에는 어설픈 날씨에, 이 양반은 얼마나 많은 밭두렁과 까끔(산비탈)을 헤매며 해쑥을 캤을 것인가. 마음은 두엄자리인데도 된장 풀고 향긋한 쑥 몽땅 넣어 끓인 국 생각에 벙그러지는 입은 또 어쩌랴.
“뫼똥(묘)이나 가먼 모리까(모를까) 어뜨케(어떻게) 주그먼(죽으면) 다 썩고 말 삭신(몸)을 가마니(가만히) 두냐. 우리 새끼들이 얼매나 만나게(맛있게) 먹을 거신디(것인데). 글고(그리고) 너는 그런 근심허덜 마라. 몸뚱아리를 자꾸 움지긴개(움직이니까) 이렇게 안아픈 거시여. 방구석에 처배켜(처박혀) 잇스먼 돈이 나오고 쌀이 나오냐. 글고 고거시 무신(무슨) 재미냐. 산송장이지” 어머니의 사설은 곧장 이렇게 이어진다.
“알았어요. 알았어. 엄니 허고자픈대로(하고 싶은 대로) 얼마든지 허시요이” 당신을 생각하고 한 말이 늘 이렇게 싱겁게 판정패로 끝나고 만다. 덤으로 잔소리 하나 더 듣는다.
“너그나 잘 허고 살아. 보내준 것 만나게 해먹고. 그놈의 술 쪼깨 먹고 일성(늘) 조심히라이. 대처(서울)는 너그 아버지 말대로 똥깐에 고자리(구데기)가치(같이) 사람들이 득시글득시글허담서. 까닥 정신놓고 살먼 코 비어(베) 간다며. 이눔아, 차돌같이 딴딴히져야여. 글고 니가 핑생(평생) 돈 벌 줄 아냐. 니 피처럼 돈 애끼(아껴) 쓰고.”
“무슨 코는? 벨 씰데없는 걱정 고만 허시오. 전화 끊을라요”
“니가 끊으라고 안히도 내가 먼저 끊는다이. 에미는 괜찬냐?”
뚝-. 대답도 듣지 않고 수화기를 먼저 놓으신다.
쑥국 한 그럭(그릇) 훌러덩 먹으면, 봄의 물결이 진짜로 내 몸에서 출렁거림을 느낀다. 그저 쑥국 한 그럭에 공기밥 두 개는 해치워야 직성이 풀린다. 나는 해마다 요맘때쯤이면 “봄은 쑥”이라고 우긴다. 나로선 봄은 늘 어머니의 해쑥과 함께 온다. 고향 임실의 봄이 서울 목동의 식탁에 고스란히 옮겨온 ‘공간이동’ ‘맛 이동’. 이 저녁, 나는 마냥 행복해 어쩔 줄 모르며 쑥국 예찬론을 편다. 오늘따라 쑥국 끓여주는 아내가 더욱 예쁘기만 한 것은, 늙은 부모가 아마도 우리의 금실까지 걱정해준 덕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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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에 대해 쓴 시를 찾아보니, 박미향이라는 시인의 ‘쑥’이라는 시가 마침맞게 있다. 이해하기가 쉽고, 쑥국처럼 담백한 좋은 시다. 함께 감상해 보자.
겨울 지나고 봄의 입맛이 까다로운 날
향기로운 너의 맛을 찾아본다
들에 나가 널 한 소쿠리 낚아채어
펄펄 끓는 가마솥에 널 데쳐본다
된장을 풀어 국물이 시원한 널 한 사발 먹어보자
입맛이 없을 때
입맛 돋우는 데는 네가 최고
매끈한 찹쌀가루와 잘 섞어 버무리면
어느새 입안 가득
너의 향내가 풍긴다
첫댓글 쑥의 향기가 코를 적시네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