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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모용화운이 눈을 부릅뜨더니 천천히 입을 연다.
너무도 익숙한 목소리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무척이나 듣고 싶었던 목소리기도 하다.
“처... 처... 천비야...!?”
“어라? 누님, 울고 있었어요?”
강천비가 손을 뻗어 모용화운의 뺨에 묻어있는 눈물자국을 지우며 걱정스런 얼굴로 묻
는다. 모용화운은 그런 강천비를 와락 껴안으며 강천비의 볼에 자신의 볼을 마구 비벼
댄다.
“야, 이 멍청아! 우리가 얼마나 네 녀석 걱정을 한지 네가 알기나 해?”
“욱!! 이거 좀 놓고 얘기해요, 누님! 켁, 켁!!”
강천비는 모용화운의 갑작스런 포옹 탓에 숨이 막히는지 숨을 켁켁거린다. 모용화운은
강천비의 반응에 화들짝 놀란 듯이 강천비에게서 한걸음 물러선다.
“미, 미안... 내가 잠깐 흥분했나 봐.”
그러나 이미 그때 강천비의 시선은 살아남은 금의위 대원들을 향하고 있다. 두 눈 씻
고 바라봐도, 이세혁의 모습은 코빼기도 안 뵈는 것을 알아챘던 것이다.
(누님, 대영반 나리는... 역시...)
강천비의 전음에 모용화운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진다. 그리고 재회의 기쁨으로
환하게 물들어 있던 얼굴에도 어느덧 짙은 우수가 드리워져 있다.
(그래. 얼마 안 됐어... 한 시진도...)
한 시진도 전에 이세혁이 당했다는 말에, 강천비는 별안간 대원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주은비를 똑바로 바라본다. 나타났을 때부터 제일 먼저 인사하고 싶은 인물이었던 데
다가, 무엇보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주은비를 외면하기 힘들어서다.
“... 너무 늦게 왔습니다, 공주님. 용서해 주십시오.”
도를 바닥에 꽂은 채, 정중하게 무릎을 꿇고 주은비에게 포권하는 강천비의 얼굴에는
전장의 공포 따위는 느껴지지도 않는다. 흐르는 강물처럼, 그저 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다.
“강... 소협...”
“뭐라 사죄의 말씀을 드려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본디 이런 사죄로는 턱없이 부족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마는, 상황이 상황인지라 일
단 사죄를 보류해 주시기 바랍니다.”
“... 아녜요. 전 이미... 소협을 용서했어요. 사죄 따위 할 필요 없어요.”
주은비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힘겹게 말하자, 강천비는 고개를 들어올린다. 주은비에게
고맙다는 뜻으로 허리숙여 인사한 강천비는, 마지막으로 흑령에게 시선을 꽂는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엇갈린다. 흑령은 이미 모든 준비를 끝마치고 달려들 준비를 하
고 있는 중이다.
“... 보다 더 강해져 돌아왔겠지? 아무 대책 없이 내게 덤벼들 녀석이라고는 생각하
지 않는다.”
“두고 보면 알겠지.”
왼팔을 늘어트리고 있던 흑령이 별안간 앙천대소(仰天大笑)를 터트린다. 강천비는 그
런 흑령을 덤덤한 얼굴로 주시하며, 바닥에 꽂았던 도를 뽑아 이리 휘둘러보고 저리
휘둘러본다.
“으하하핫! 예상대로, 처음보다 훨씬 강해진 것이 틀림없는 듯하군. 선공해도 되겠지
?”
“마음대로!”
강천비가 자신 있다는 어조로 강하게 말을 던지자, 삽시간에 주변의 모든 인원들이 술
렁인다.
“저런 꼬맹이가 우리 주공과 맞붙겠다는 말인가?”
“그, 글쎄. 그런데... 주공께서는 무척이나 기대하는 눈이잖아?”
철기군 대원들은 이렇게 술렁이고 있다. 그러나 금의위 대원들도 별반 차이는 없다.
“서, 설마... 혼자 저 괴물보다 더한 자식에게 덤빌 생각이란 말인가?”
“영수님께서조차 당하지 못한 자가 아닌가! 말려야 한다고!”
그러나 바로 그때, 흑령의 허리가 조금 굽혀진다. 그리고 어느덧 흑령은 사냥감을 노
리는 독수리보다 더한 눈빛으로 사냥감을 낚아채려는 듯한 자세로 강천비에게 달려든
다.
금의위 대원들이 ‘위험하다’의 위 자(字)도 말하기 전에 이미 흑령은 강천비의 숨통
을 끊어놓기 위해 여리게만 보이는 목에 흑도를 내리치고 있다.
“...!!”
하지만 쇠끼리 맞부딪치는 금속성과 함께, 흑령의 의지는 좌절된다. 강천비가 도를 들
어올려 흑령의 공격을 가볍게 막아낸 것이다.
“그때 네가 말했지... 내가 휘두르는 도에는 혼이 없다고. 하나만 부탁하지.
이번에는, 도에 혼이 얼마나 들어가 있는지 좀 알아봐 줬으면 한다.”
강천비의 안하무인(眼下無人)한 태도에, 흑령의 눈에서 불똥이 튄다.
“한쪽 팔을 다쳤다고 네놈 하나를 제대로 상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느냐!”
분노한 흑령의 흑도가 허공에서 포물선을 그린다. 강천비는 요리조리 흑도를 피해내면
서 한구석으로는 반격하기 위해 틈을 노린다.
달빛을 반사하지 않고 모조리 흡수해 버리는 흑령의 흑도는, 휘두를 때마다 도신(刀身
)에 묻어있던 피가 여기저기로 떨어져 나가는 바람에 묘한 살기를 불러일으킨다.
‘대단한 실력자다. 그간 내 능력이 얼마나 올라갔느냐에 따라, 내 생존여부가 결정되
겠지?’
자신의 목숨을 낚아채기 위해 현란한 몸부림을 치고 있는 흑도를 피해내는 강천비는,
흑령의 틈이 발견되지 않자 점차 초조한 기색으로 바뀌어간다.
그에 비해 흑령은 어떤가? 흑령 역시 처음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진한 살기를 뿜어
내며 강천비의 목을 따기 위해 전력으로 덤벼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강천비의 움직
임이 도무지 잡히지가 않아 속으로는 끓어오르고 있는 실정이다.
‘정말 놀랍다. 내 경공술을 잡을 수 있는 눈을 갖게 된 것 같은데다, 내 공격 범위를
모두 익힌 상태다.
단기간 만에 이까지의 발전도 가능하단 이야긴가...?’
결국 흑령은 공격 목표를 변경시키기로 결정하고, 서서히 우수에 신경 하나하나를 곤
두세운다. 그리고 강천비와 일정한 거리가 떨어지자, 흑령은 벼락같이 소리친다.
“흑마도법!”
1장도 안 떨어진 거리에서, 흑령이 신경 하나하나를 곤두세워 쓴 흑마도법의 위력은
가히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고강하다. 강천비의 안색이 급변하더니, 강천비 역시 서둘
러 기술을 전개시킨다.
“대지양단!!”
절기는 절기로 막으려는 듯, 강천비는 서둘러 대지양단을 전개시킨다. 하지만 강천비
는 곧바로 자신의 행동이 늦었다는 것을 파악하고 급하게 고개를 뒤로 젖혀 왼손으로
바닥을 짚는다.
“!?”
정말 아슬아슬하게 흑령의 흑도가 허공을 베고 지나간 것이다. 공기의 흐름을 끊어놓
는 듯한 흑령의 공격 덕택에, 강천비는 순간적으로나마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의 한기
를 느낀다.
‘현문강기(玄門剛氣)를 쓴다 한들, 내 내공으로 방어는 어림도 없다. 그렇다면 방법
은 단 하나.
좋아, 무조건 공격이닷!’
흑령은 공격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걸 알아채고 신형을 날려 강천비에게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상태다. 만반의 준비를 갖춘 흑령에게 하는 공격인지라, 흑령의 약점을 뚫
을 구멍이 보일 리가 없다.
‘젠장, 이대로 가다가는 또 공격권을 내주고 말 텐데... 좋은 방법이라도 없나...?’
흑령이 아미(蛾眉)를 찌푸리며 최대한 여유를 내어 약점을 찾아내려 애쓴다. 하지만
강천비가 여유를 부리는 듯한 태도를 보이자 눈에서 불길을 내뿜으며 다시 전력으로
흑도를 뻗는다.
파앗-! 하고 묵섬이 자신을 덮치는 듯한 느낌에, 이번에는 공중으로 신형을 날린다.
강천비가 공중으로 뛰어오르자 서있던 자리로 강천비의 머리카락이 가닥가닥 떨어지더
니, 이번에는 핏방울이 이마를 적신다.
‘귀신도 놀랄 만한 솜씨다. 대영반 나리는... 저런 자와 싸우셨다는 말인가...!’
흑령은 이마를 적시고 있는 피를 닦을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 살기등등한 눈으로 공
중으로 뛰어올라 맹렬한 속도로 공격을 감행한다.
“아수라멸도!”
익히 잘 아는 기술이기에, 자신에게 혹독한 치레를 안겨줬던 기술이기에 강천비의 얼
굴은 석상처럼 딱딱하게 굳어간다.
‘아직 저 기술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바가 제대로 없다. 전에는 막다가 당했으니, 이
번엔...!!’
강천비는 결국 피하기로 결정하고 최대한 몸을 튼다. 흑령의 아수라멸도에 명중되었다
가는, 적어도 사망이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서기도 하며, 또한 대책을 세우기
위해서기도 하다.
“받아라, 흑...!?”
가볍게 지상에 착지한 강천비가 흑령이 있을 거라 생각한 공중으로 도를 뻗어 수라구
류도를 펼치려던 순간이다. 하지만 귀신이 곡을 해도 시원찮을 모양인지, 흑령은 어느
새 깨끗이 사라지고 없다.
‘뒤다!!!’
등 한복판에 미미한 살기를 감지한 강천비는, 반사적으로 발을 굴러 공중제비를 한다.
강천비가 몸을 날린 찰나, 흑령의 흑도가 강천비의 등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기라도 하
려는 듯이 웅웅거리며 공중에서 춤을 춘다.
“내 차례다, 빌어먹을 자식아!”
너무 움직임이 큰 공격이었던지라 흑령은 아직 방어태세를 갖추지 못한 상태다. 그 틈
을 놓치지 않고, 강천비는 허리를 젖힌 반동을 이용해 오른발로 흑령의 얼굴을 걷어찬
다.
“윽!?”
불의의 습격을 받은 흑령은 강천비의 발차기를 감당해내지 못하고 왼쪽으로 튕겨나간
다.
“... 으윽!!”
흑령이 저만치 떨어져 있는 바닥에 뒹굴고 있는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강천
비는, 착지를 하기가 무섭게 등에서 느껴지는 무시무시한 통증에 입술을 꽉 문다. 등
의 상처가 다 아물지 않았는데 무리하게 움직이는 바람에, 또다시 상처가 벌어지게 돼
버린 것이다.
“크... 크윽... 애송이 자식!”
분노로 몸을 떨고 있는 흑령이 오른손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주변에는 경악의 눈
길이 오고간다.
“바, 방금... 주공께서 쓰러지신 게...?!”
“저깟 애송이에게?! 이, 이 나라의 대영반이란 작자마저 처리하신 분이??”
철기군들은 하나같이 못 믿겠다는 얼굴로 술렁인다.
“저, 저럴 수가!!”
“영수님께서는... 저렇게 쓰러트리지도 못했는데, 강 소협은...!!”
하지만 강천비와 흑령, 이들에게는 철기군의 대화도, 금의위의 대화도 들리지 않는 듯
하다. 두 사람의 가라앉은 얼굴, 그리고 점차 고조되고 있는 살기가 그를 증명해주고
있다.
“또 덤벼라, 흑령. 한층 강화된 내 솜씨를 이제부터 직접 보여주마!”
이마를 흥건하게 적신 피를 닦아낸 강천비는 신중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아무래도 등
의 상처가 또 아슬아슬하게 처지를 힘들게 만들고 있으니 먼저 덤벼들기엔 왠지 좀 두
려웠던 것이다.
“큭... 큭큭, 과연. 한층 더 강해진 것 같군. 예전의 쇠몽둥이를 휘두르는 듯한 모습
은 거의 지워졌으니 말야.”
흑령은 입술이 터진 듯, 입술을 낼름 핥고는 입속에 고인 피를 탁 뱉는다. 그리고 바
닥에 구르던 흑도를 격공섭물(隔空攝物)로 끌어들여 우수로 꽉 움켜쥔다.
“무지(無知)한 놈. 내게 덤벼들었다는 게 얼마나 감당하기 힘든 고통인지... 이제부
터 몸소 깨닫게 해 주겠다.”
흑령은 다시 한번 강천비를 두 동강 내기 위해, 맹수처럼 날카롭게 빛나는 눈빛으로
강천비를 노려보더니 쏜살같이 강천비의 품으로 파고든다.
깡!!
강천비의 도와 흑령의 흑도가 부딪히기가 무섭게 새파란 불꽃이 허공에 튄다. 흑령은
그야말로 섬전처럼 움직이면서도 괴물만치 강하게 느껴지는 힘은 그대로다. 그에 비해
강천비는 막기에 급급할 따름이지, 공격은 아예 생각조차 하고 있지 못하는 상태다.
‘으윽, 어떻게 왼팔을 그렇게까지 다친 상태에서... 이렇게 빨리 움직일 수 있는 거
지? 어떻게 이렇게까지 강한 힘을 낼 수가...!!’
강천비는 내심 경악성을 터트리면서 정신없이 흑령의 공세를 차단시킨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천비의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는다. 8월의 한밤이라 유난히 더운
탓이다. 강천비는 숨이 턱까지 차오르자, 점점 불안이란 감정이 먹물처럼 번진다는 것
을 느끼게 된다.
달빛에 반사되는 흑령의 눈은 살기에 젖어 시퍼렇게만 비치고 있다. 엔간한 호랑이라
도 겁을 집어먹을 정도로 매서운 눈초린데, 강쳔비아 위압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오히
려 그게 이상한 일 아니겠는가?
‘이대로 가다가는 개죽음이다. 개죽음을 벗어날 방법이라면...!!’
잔꾀 전문가 강천비의 뇌가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뇌에는 강천비의 전신으로 지령을 내린다.
‘그래, 이 무더운 날씨를 이용한다면...!’
땀으로 미끌거리는 쌍수(雙手)로 도를 꽉 움켜쥔 강천비는 필사적으로 흑령의 머리로
도를 내리친다. 그러자 흑령은 급히 흑도를 뻗어 강천비의 도를 차단시킨다. 도에 내
리칠 힘을 애초에 차단시키겠다는 목적인 셈이다.
“내가 노린 건 바로 그거닷!”
강천비가 말을 뱉음과 동시에 이마를 흑령의 얼굴 정중앙으로 날린다. 흑령은 또다시
이어지는 강천비의 기습적인 공격을 미처 눈치를 채지 못한 탓에 박치기 공격을 직방
으로 허용하고 만다.
“큭!”
흑령은 목을 뺀다고 뺐지만, 그런다고 해서 강천비의 박치기를 완벽하게 피해낼 수는
없었던 듯하다. 어정쩡한 자세로 얼굴을 뒤로 빼던 흑령은 결국 코에서 느껴지는 격렬
한 통증을 느끼고 천천히 바닥으로 기울어진다.
흑령은 땀 덕택에 몸을 제대로 지지하지 못하고 기울어지는 바람에 도를 막고 있던 자
세가 헝클어진다. 덕택에 강천비는 절호의 기회를 이용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다
시 도를 내리친다.
“지옥에나 떨어져라-!”
강천비의 도가 흑령의 미간에 떨어진다. 도가 박히는 느낌에, 강천비는 내심 베었다고
확신하고 도를 쥔 손에 힘을 푼다.
그러나... 이건 예전 흑령과 격돌할 적에 마음을 놓았을 때보다 더한 실수다. 전투를
벌일 적에는 언제나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된다는 철칙을 깨트리고 만 것이다.
“큭... 큭큭, 애송이 놈이 잔머리를 꽤 쓰는군.”
“...!?”
별안간 뒷전에서 들려온 흑령의 목소리에, 강천비는 몸이 굳어버리는 것을 느낀다.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상황에서, 누가 보더라도 자신이 이겼다고 판단되는 상
황에서도 흑령이란 놈은 유유자적하게 빠져나갔다는 사실이.
“한순간 방심이 부르는 건, 죽음이다.”
강천비는 흑령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린다고 생각한 순간, 퍼뜩 정신을 챙긴다. 전신
을 갈기갈기 찢는 듯한 살기가 등을 통과해 심장에게 소리치고 있었던 것이다. 위험하
다고.
흑령의 흑도가 달빛에 번뜩이더니, 강천비의 목을 노리고 어둠 속으로 녹아든다. 그리
고 그 순간 강천비의 목에서 피가 튄다.
“크악!”
강천비가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더니 바닥으로 툭 쓰러진다. 그러나 흑령은 이 틈을 타
서 강천비를 공격하지 않고 있다. 싸늘한 눈길로 모용화운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다.
“... 성가시게 하는군, 사망빙화!”
“그 소년은 못 죽인다. 영감님을 네 손에 잃었는데, 걔까지 네게 목숨을 내줄 순 없
어!”
언젠가 모용화운이 빙백신장을 날려 흑령의 흑도를 꽝꽝 얼려놓은 것이다. 빙백신장에
명중된 흑령의 오른팔은 현재 얼음덩어리가 되어 있는 상태다. 흑도까지 얼어붙어서,
몽땅 하나의 덩어리가 된 채로 말이다.
“사나이들만의 전투를 방해하다니, 그래서는 안 되지. 안되고말고.”
흑령이 코피로 물든 얼굴을 찌푸리며 얼음덩어리가 돼버린 오른팔을 들어올린다. 그러
자 철기군 병사들이 별안간 눈빛을 고치더니 병장기를 휘어잡고 말을 몰며 모용화운에
게로 달려든다.
“갈기갈기 찢어 죽여라. 사나이의 결투를 방해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 줘야 한다
!!”
흑령은 피로 물들어 섬뜩하기만 한 얼굴로 명령을 내린다. 철기군 병사들은 무섭게 모
용화운 한 사람만 목표로 하고 개떼처럼 몰려간다.
“순순히 목숨을 바쳐라, 사망빙화!”
형형한 눈빛으로 모용화운을 향해 달려드는 철기군 병사들의 눈에는 어느 정도의 확신
감이 녹아 있다. 100명 가까이 되는 대인원인지라 두려울 게 없는 것이다.
“마음껏 덤벼라, 쓰레기들아! 사람 목숨도 아까운 줄 모르고 덤벼드는 놈들은, 모조
리 죽여 줄 테니!”
모용화운이 빙백신장을 펑펑 쏴대자, 삽시간에 세명의 철기군이 얼음덩어리가 되어 바
닥에 툭툭 떨어진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철기군의 기세를 꺾기엔 역부족이다.
“전원, 모용 소저를 지킨다! 달려드는 철기군들을 모조리 척살하라!!”
황보성의 신속한 명령에 금의위 대원들은 나란히 모용화운의 곁에 진을 펼친다. 그리
해서 결국, 쌍방 사이에서는 다시 치열한 공방전이 재개되고 만다.
강천비는 모용화운의 공격 덕택에 죽지 않았다. 다만 염려되는 점이 있다면, 목의 살
갗이 찢어져 출혈이 심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대로는 못 죽는다... 이대로는...!!’
강천비는 황급히 바닥에 꽂혀있는 도를 빼내고 전투자세로 들어간다. 그러다가 흑령의
손에서 뿌연 수증기가 마구 올라오는 것을 보게 된다.
“여... 용케도 숨이 안 끊어졌나 보군. 운 좋은 줄 아는 게 좋을 거다.
이제부터는, 오로지 네놈을 죽이기 위한 살초만을 펼칠 생각이니까.”
아직까지 코피가 흐르는 바람에 흑령의 얼굴과 옷은 이미 피로 물들어 있다. 옷은 새
카만 덕택에 표시가 안 나지만, 피로 붉게 물든 흑령의 얼굴은 처음보다 훨씬 무시무
시한 살기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강천비는 긴장을 풀기 위해 침을 꿀꺽 삼킨다. 그러자 비릿한 피맛이 목구멍을 메운다
.
‘젠장, 상처가 생겨도 더럽게 생겼군. 어째 목을 다쳤는데 입에 피맛이 나는 거지?’
그만큼 상처는 중(重)한 것이다. 이미 목에서 흘러내린 피는 백의를 시뻘겋게 물들인
지 오래다. 그런데도 강천비의 목에서는 피가 그칠 줄을 모르고 있다.
“흐... 흐흐흐. 미안하지만, 죽고 싶어도... 네놈 마음대로 그렇게 쉽게 죽어줄 수는
없어.”
강천비가 느닷없는 웃음을 던지면서 첨가한 말에, 흑령은 얼굴을 굳히며 물이 뚝뚝 떨
어지고 있는 오른팔을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묻는다.
“... 정말 네놈의 끈질긴 투지에는 감탄을 금치 못하겠군. 하나만 묻겠다.
네놈의 무엇이, 너를 이토록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냐? 여기를 네놈이 죽을 곳으로 정
해놨기라도 했단 말이냐?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는, 도저히 네놈이 계속 내게 달려드는
이유를 난 이해할 수가 없다.”
흑령은 오른팔이 거의 정상으로 돌아온 듯, 흑도를 이리저리 휘두르고 있다. 답변은
애초에 바라지도 않았다는 태도다.
그러나 강천비는 도를 양손으로 꽉 움켜쥐면서 자신의 생각을 간단하게 읊는다.
“사이후이(死而後已)란 말이 있다. 죽은 뒤에야 일을 그만둔다는...
하지만 난, 내가 맡은 일이라면 죽은 뒤에도 그만둘 수 없다.”
“!!”
흑령의 눈빛에서 살기가 점차 희미해진다. 허나 강천비는 그를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
해서 자신의 생각을 읊어대고 있다.
“웃긴 일이지. 내가 생각해도 코웃음만 나올 뿐이니, 너라면 오죽하겠냐.
그런데... 정말 더 웃긴 것은, 너와 내가 바라보는 이상이 다르다는 것 때문에 실력차
도 안 되는 너와 이렇게 싸워야만 한다는 거다.”
“...”
“진실은, 사람 숫자만큼 있겠지. 그런데 너와 내 진실은 하나뿐이다. 우린 각자의 눈
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싸우고 있는 거고.
정말 웃긴 거지, 사람의 진실이란 건. 받아들이는 방법 하나만으로도 완전히 다른 게
돼 버리는 데도, 그 진실을 끝까지 잊지 못하고 불을 향해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행동
하니까.
인간의 진실이란 건... 만물의 최고등 생물이라 불리는 인간의 진실은, 겨우 이 정도
다. 그러나! 그 진실을 향해 목숨을 거느냐 마느냐에 따라, 그 진실의 가치가 결정되
기에... 난 네게 덤벼드는 걸 포기할 수 없는 거다!”
거의 비명을 질러대는 강천비의 대답에 동감하는 바가 있어설까? 흑도를 쥔 흑령의 오
른손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다. 그리고 그 떨림은 천천히... 조용하게 짙어져만 간다.
“큭... 큭큭큭... 그럼 네놈은, 네놈이 꿈꾸는 진실 덕택에 내게 덤벼드는 거냐? 표
연공주를 지켜주고 싶다는... 표연공주를 죽여야 하는 내 진실과 상반되는 현실 때문
에?”
“그래. 너무도 간단해. 내 진실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난 불나방이 될 수밖에 없는
거지.
그게 너보다 열 배는 더 고강한 사람 앞에서였다손 치더라도, 난 이렇게 행동했을 거
다. 내 진실을 내가 꺾어버리면, 난 이미 내 자신을 버린 거니까.”
흑령은 잠시 강천비의 말을 곱씹어본다. 자신은 과연 눈앞의 소년과 같은 상황이 된다
면, 이 소년처럼 행동했을지 아닌지를.
“... 어리석은. 목숨을 위해서라면 진실을 포기할 줄도 알아야지. 할 일이 얼마나 많
은데, 여기서 죽어서 젊은 인생을 날린단 말이냐.”
“어떻게 생각해도 좋아. 나 역시 우리 주군을 도와 이룩하고 싶은 일이 있지만 이렇
게 너와 부딪히고 있는 거니까.”
강천비의 대꾸에 흑령이 코웃음을 치더니 흘러가는 말투로 묻는다.
“큭큭. 그래, 그렇게 잘난 목숨까지 버려가며 지키고 싶은 일이 뭐냐?”
돌연 강천비의 눈빛이 굳건하게 바뀌더니, 너무도 당당한,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의
태도가 아닌, 승자의 태도로 흑령의 말에 또박또박 대답한다.
“무림통일! 중원무림 역사상 최초로 사파가 무림을 통일하게 될 날 까지 싸우는 게
내 꿈이다! 그리고 그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라면, 지금의 내 상태로라도... 아니,
더한 상태라도 네놈의 숨통을 끊어놓기 위해 달려들 거고!”
그 말을 남기고, 강천비는 마치 무서움을 모르는 황소처럼 흑령에게 전면전을 감행한
다. 하지만 여태까지 보여주지 않았던 투지와 자신의 승리에 대한 강한 확신이 담겨있
기에, 흑령은 결코 비웃지 못한다.
‘그래... 여기서 결정짓자. 네놈과 내 진실... 어느 쪽이 훨씬 거대한 것인지를!! 누
가 더 진실에 가까운 것인지를, 지금 여기서 판가름을 짓잔 말이다!!’
“주공, 여기도 시체 한 무더기가...”
“... 으음.”
“이번엔 수효가 꽤나 많습니다. 한두 명 차원이 아니라, 적어도 100은 훨씬 넘을 것
같습니다만.”
야풍(夜風) 덕택에 묵직한 목소리로 먼저 말을 꺼낸 마의청년의 옷이 이리저리 휘날린
다. 그 마의청년의 뒤에는 흰 전서구를 어깨에 얹힌 채로 걷고 있는, 한번 보면 잊혀
지지 않을 것만 같은 용모를 가진 흑의소년이 있다.
“문택, 혹... 전에 말했던 그 네 사람처럼 보이는 시신은 안 보이는 게 확실한 거요?
”
사문도와 금문택, 그들이다. 그들도 이제 시원하게 한판 벌였던 곳까지 다가온 것이다
.
“예, 주공. 일단은 그런 사람들의 시신은 안 보입니다만...”
그러나 시신을 이리저리 훑어보던 금문택의 눈에, 한 노인의 시신이 들어온다. 심장
부근이 참혹하게 갈기갈기 찢어져 있는, 다른 시신들과는 다른 분위기를 풍겨 내는 시
신이 말이다.
“아니, 주공. 정정하겠습니다. 그 네 사람 중 한 사람으로 보이는 시신이 막...”
금문택의 말에, 사문도가 얼굴빛을 고치고는 금문택의 곁으로 다가간다. 그리고 금문
택이 가리키는 시신과 대면한 사문도는 그만 할 말을 잃는다.
“... 대영반 나리...”
이세혁, 그가 참혹하게 난자당한 채로 당한 시신이다. 무엇이 그리 원통했던지, 무엇
이 그리 억울했던지 이세혁은 눈조차 감지 않은 상태다.
“한 시진도 전에 죽은 것 같습니다. 상처로 봐서는 상당히 무거운 장도(長刀)를 쓰는
자의 소행이라 판단됩니다. 사인(死因)은 역시, 심장 부근에 받은 상처에서 온 충격
으로 예상됩니다만...”
하지만 흑령의 존재를 아직 모르는 사문도기에, 이렇게까지 돼버린 현실이 답답해 미
칠 지경이다.
‘대영반 나리께서 이렇게 돌아가실 줄은... 장차 대명제국이 어떻게 흘러가려고 이렇
게 된단 말인가...!!’
사문도는 속으로 울분을 눌러 참으며 떨리는 손으로 뜨여 있는 이세혁의 눈을 천천히
감겨준다. 그리고는 흑령의 시신 앞에 정중하게 절을 올린다.
“대영반 나리... 이렇게 가셔야만 하셨던 겁니까? 아직 대영반 나리의 어깨엔 대명제
국이란 짐이 있지 않으십니까... 헌데 어찌하여...”
절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선 사문도의 얼굴은 어느덧 깊은 우수(憂愁)가 드리워져 있다
. 어깨에 앉아 있는 백룡은 사문도의 목에 기대어 낮은 소리로 지저귀고 있다. 주인이
우수에 잠긴 모습이 아무래도 보기 싫어서일 것이다. 백룡은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
는 전서구니 말이다.
이대로 있다가는 이곳에서 물러서지 않을 거라 여긴 금문택은 사문도에게 고개를 숙이
고는 자신의 생각을 건넨다.
“주공, 이대로 나머지 세 사람까지 잃으실 바에야, 한시라도 빨리 달려가는 것이 훨
씬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감상에서 이만 깨어나시고, 가야 합니다. 나머지 사람
들까지 잃고 싶지 않으시다면 말입니다!”
금문택의 말에 사문도는 이세혁의 시신을 정중하게 업고 멀리 북쪽을 바라본다. 말발
굽이 이어져 있는, 북쪽 산길을 바라보고 있는 사문도의 눈은 이미 전의(戰意)로 가득
찬 상태다.
“그 말이 옳은 것 같소. 가서 한바탕 사냥이라도 해야 할 듯하니, 만반의 준비를 해
주기 바라오.”
“염려 놓으십시오. 고독랑의 수하라는 점을 감안해서, 적당하게 몸이라도 풀어 보겠
습니다.”
금문택이 싱긋 웃으며 가볍게 대답하자 사문도는 염려스런 얼굴로 묻는다.
“등의 상처에 무리가 안 가도록 하시오.”
“염려 붙들어 매라고 했잖습니까. 이제 움직여도 별 탈 없으니, 주공께서나 조심하십
시오. 무공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시는 분이, 전장에 끼어들어서 어쩌시겠다고...”
금문택의 염려에 사문도는 힘없이 웃으며 먼저 경공술을 펼친다. 금문택은 그 뒤를 조
용히 따르며, 사문도가 지켜줬으면 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일지 기대해본다.
강천비와 흑령, 그들 둘은 자신의 이상을 위해, 자신의 목표를 위해 끊임없이 달리고
있다. 어느 쪽의 진실이 참과 더 가까운가... 하늘은 어느 쪽의 편을 들어줄 것인가를
놓고 현재 피튀는 접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아수라멸도!”
아수라멸도가 전개되자, 금세 강천비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떠오른다.
‘심심하면 저 기술만 써대는군. 막기가 장난이 아니던데, 젠장!’
도를 고쳐 잡은 강천비는 침을 탁 뱉고는 자신의 절기를 아낌없이 펼쳐본다.
“수라구류도!”
강천비의 도와 흑령의 흑도에서 일어난 두 마리의 아수라가 허공에서 충돌한다. 흑령
은 강천비와 붙기 전에 쓰던 아수라멸도의 위력과도 비슷한 위력이고, 강천비는 전에
흑령과 충돌할 때보다는 확실히 고강한 위력으로 수라구류도를 펼쳐내고 있다고는 하
지만 흑령의 숨통을 끊어놓기에는 아직 역부족인 듯하다.
‘빌어먹을, 이래서야 어떻게 이기겠단 말인가!?’
흑령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것을 지켜본 강천비의 열불이 터지는 건 당연한 이치
다. 그리고 바로 그때, 다시 한번 흑령의 아수라멸도가 흑도에서 전개된다.
저쪽 반대편에서 철기군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빙백신장을 쏴대던 모용화운은 여유가
잠깐 생기자 강천비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강천비가 점차 열세로 몰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게 되자, 모용화운은 점차 마음이 다급해지는 것을 느낀다.
‘안돼. 내가 상대하더라도 승리를 장담하지 못할 것 같은 상댄데, 어떻게 천비가 감
당을 해낼 수가...!’
모용화운은 자신이 어떻게 되든지 강천비를 도와주고 싶다. 허나 그랬다가는 저기 달
탄기와 자웅을 겨루고 있는 황보성은 물론, 겨우 겨우 철기군을 상대해 나가고 있는
금의위 대원들의 균형마저 깨질 것이다.
‘주군은 대체... 주군은 대체 어디서 뭘 하고 계시기에... 이렇게까지 안 오시는 거
야?!’
입술을 질끈 깨문 모용화운은 신경질적으로 빙백신장을 날린다. 이번 공세로 모용화운
에게 달려들던 두 명의 철기군 병사가 뒤로 나가떨어진다.
“...!!”
빙백신장은 명중했지만, 나가떨어진 병사를 본 모용화운의 얼굴엔 당황하는 기색이 역
력하다. 빙백신장의 능력이 이젠 현저하게 떨어져, 살상 능력까지 점차 잃어가고 있어
서다.
‘낭패다. 이대로는 앞으로 열명도 제대로 못 죽일 텐데...!’
현재 남아있는 철기군 병사들은 어림잡아도 서른이 넘고 있다. 그에 비해 금의위 대원
들의 생존 숫자는 겨우 일곱명. 황보성을 제외한 일곱명이기에, 모용화운이 전투불능
이 된다면 이들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덤벼들어라! 빙백신장의 능력이 많이 떨어진 게 틀림없다!!”
“저년만 쓰러트리면 이 전투는 우리의 승리다!!”
철기군 병사들이 내지르는 소리는 모용화운의 마음을 뒤집어 놓는다. 이미 숨을 헉헉
거리고 있는 모용화운의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지칠 대로 지친 모습이기에, 모용화운
의 곁에 삽시간에 스무명의 철기군 병사들이 말을 몰고 달려온다.
“척살이다!”
“저년만 잡으면, 1계급 특진이 눈앞에 있다!!”
승진에 눈이 먼 철기군 병사들은 불나방처럼 모용화운에게로 달려간다. 모용화운은 주
은비가 있는 쪽을 힐끗 보고 주은비가 있는 쪽으로 전음을 띄운다.
(주 소저, 절대 끼어들면 안 돼요! 설사 우리 모두가 어떻게 된다 한들, 절대 끼어들
지 마요!
이들은 주 소저가 대적할 만한 수준 이상의 실력을 소유한 자들이에요! 절대 경거망동
해서는 안 돼요!)
금의위 대원들 뒤쪽에서 검을 쥔 채 망설이고 있던 주은비에게, 모용화운의 말은 바늘
이 되어 가슴에 꽂힌다. 막 뛰어들려던 찰나에 모용화운의 충고가 떨어지자, 주은비는
흠칙하고 자리에 굳은 석상처럼 서 있다.
‘도박이다. 빙백신무를 전개시켜도 이들을 전멸시키지 못한다면... 난...!!’
북해빙궁 최강의 절기, 빙백신무마저도 성공하지 못한다면 모용화운이 사망할 확률은
9할 이상이다. 현재 모용화운은 생사(生死)의 도박에서 패를 집어든 것이다. 그것이
생의 패일지, 사의 패일지는 아는 자가 없을 뿐.
모용화운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달려드는 철기군 병사들을 노려본다. 빙백신장과는 전
혀 차원이 다른 무학(武學)이기에, 지금 가라앉아 있는 모용화운의 두 눈동자는 곧 일
어날 혈겁(血劫)의 위력에 대해서 절실하게 소리치고 있는 듯하다.
“빙백... 신무!!”
모용화운의 입에서 앙칼진 음성이 터지기가 무섭게, 모용화운이 오그리고 있는 손 정
중앙에 작은 빙환(氷丸)이 생겨난다. 그걸 손으로 꼭 쥔 모용화운은 잘게 흩어지는 빙
환의 파편을 사방으로 날리더니, 빙백신장을 쓰는 자세를 취한 뒤 다시 뾰족한 목소리
를 내지른다.
“지옥으로 가라!”
그러자 여태 날리던 빙백신장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냉기가 전장
을 메운다. 여름밤이지만, 마치 한겨울의 칼바람이 날리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다.
“죽여... 라...!!”
그들은 자신이 죽어간다는 것도 모른 채로 얼음덩어리가 된 채로 서서히 죽어간다. 주
변을 모조리 얼음으로 뒤덮을 만한 빙기(氷氣)가 철기군 대원들을 덮친 것이다.
“... 크윽...!!”
빙백신무를 펼친 모용화운은 별안간 입에서 핏덩어리를 토해내더니 바닥에 왼쪽 무릎
을 꿇는다. 내공을 무리하게 사용한 바람에, 기혈이 뒤집어져 몸속을 헤집고 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모용 소저!?”
주은비가 놀란 소리를 내지르자, 황보성을 비롯한 금의위 대원들의 시선이 모용화운에
게로 쏠린다. 피를 토하며 바닥으로 서서히 쓰러지는 모용화운의 모습은 금의위 대원
들의 마음 한구석에 충격이라는 이름을 가진 폭탄을 날리는 역할을 하기엔 모자람이
없다.
“한눈 팔 틈도 없다, 네놈들에겐!!”
“크아악!!”
한 금의위 대원이 철기군의 창에 가슴이 꿰뚫린 채 참혹한 죽음을 맞이한다. 그제야
하나같이 모용화운에게서 시선을 돌린 금의위 대원들은 다시 전투에 집중하려고 노력
한다. 그러나 팽팽하게 맞서던 이들은 이제 모용화운마저 기울어지자 방금 같은 박력
이 없다.
“됐다, 모용화운도 이제 기운이 다했다!”
“1계급 특진이다!!”
빙백신무는 결국 완벽하게 성공하지 못했다. 비록 열다섯의 인명을 앗아가긴 했으나,
나머지 다섯의 목숨은 챙겨 가지 못한 것이다.
‘이대로 죽을 순 없는데... 왜...!!’
모용화운이 절규하며 몸을 피하려고 있는 힘을 다해 일어서려 해 보지만, 이미 몸에는
힘이 다 빠져 움직이는 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태다.
“죽은 동료들의 복수다, 모용화운!!”
두두두두 하는 말발굽 소리가 모용화운의 귓전을 요란하게 때린다. 동시에 모용화운은
눈을 질끈 감으며 애써 그들의 창을 피해내려 몸을 숙인다.
이제 남은 거리는 불과 2장. 3초 안으로 모용화운은 살 것이냐 죽을 것이냐를 결정하
게 되는 것이다.
“모용 소저, 죽으면 안 돼요!!”
주은비가 비명을 내지르며 모용화운 쪽으로 달려간다. 모용화운은 그런 주은비의 태도
에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주먹을 꽉 움켜쥔다.
‘이런 어리석은... 그렇게 오지 말라고 했는데...! 강천비와 영감님의 뜻을 꺾어버릴
생각이란 말인가...!?’
이미 철기군 병사 다섯은 모용화운의 목을 창으로 꿸 준비가 끝난 상태다. 이제 창을
뻗기만 하면 모용화운은 그대로 황천행을 밟아야 하는 것이다.
“여인 하나에 건장한 사내 다섯이 달려들다니. 대체 정신이 있는 놈들이냐, 없는 놈
들이냐!!”
그러나 하늘은 모용화운의 편이었던 모양이다. 모용화운의 왼쪽에서 느닷없이 고함이
터지더니, 두 자루의 검이 허공에서 춤을 춘다.
“크아악!”
“히히힝!!”
인마(人馬)가 동시에 비명을 내지르고는 힘없이 자리에서 무너진다. 그들의 눈에는 아
직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는 듯, 억울함과 분함 등등의 기색이 담겨 있다.
“후우, 다행이군. 늦진 않았어.”
말과 사람의 시신이 바닥을 뒹구는 것을 보고서야, 두 자루의 검은 허공에서의 춤을
멈춘다. 언제나 마의를 즐겨 입고 다니는 사내, 철혈쌍검 금문택. 그가 칼날 위를 걷
고 있던 모용화운을 구해 낸 것이다.
“... 당신이 사망빙화, 모용화운 소저요?”
금문택이 모용화운의 곁에 꽂고 양손으로 부축해 모용화운을 자리에서 세운다. 어림짐
작이긴 하지만, 어쨌든 상대가 주은비가 아닌 모용화운일 거란 생각이 들어서다.
모용화운은 상대가 자신을 알고 있자 놀란 기색이다. 그러나 힘겹게 고개를 들어 상대
를 바라보니, 생판 처음 보는 사람이다.
“... 누구... 신지요...?”
“당신과 같은 사람을 섬기게 된 사람이오.”
“주군께서... 오긴 오셨군요. 늦은 감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때, 전장의 모습을 보기 싫었던지 구름으로 자신의 모습을 가리고 있던 둥근 달이
모습을 드러낸다. 별안간 전장에 달빛이 퍼지자, 모용화운의 얼굴은 달빛에 훤히 드러
난다.
“!!!!”
별안간 금문택은 모용화운을 부축하던 손을 부르르 떤다. 아니, 전신을 부르르 떨고
있다. 몸을 떨면서 금문택이 뱉은 말은 모용화운은 의문의 구렁텅이에 몰아넣는다.
“서... 서... 서휘경...!?”
너무 닮았다. 아니, 거의 똑같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금문택이 기억하고 있는 서휘
경의 모습과 지금 눈앞에 서있는 모용화운의 모습은 닮아 있다. 외모만 조금 차가운
기색을 띠고 있을 뿐이지, 전체적인 모습은 판이라도 박아놓은 듯한 모습이기에, 금문
택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서... 휘경...?”
하지만 모용화운이 서휘경이란 이름을 알 리가 없다. 모용화운은 그저 힘없이 왼손을
들어 입가에 묻은 피를 닦으며 경악하고 있는 금문택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 외엔 할
일이 없다.
모용화운이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듣고서야 금문택은 황급히 정신을 챙기고 고개를 몇
번 흔든다. 그리고 내공이 떨어져 비틀거리는 모용화운을 부근에 꿋꿋하게 서 있는 바
위 뒤에 기대어 앉혀주고는 낮은 목소리로 자신의 의지를 드러낸다.
“엄호(掩護)할 테니까, 운기조식이라도 좀 해 놓으시오. 내공이 바닥인 것 같던데.”
염려스런 눈길을 보내주는 금문택이 고마워설까? 모용화운은 고개를 한번 끄덕이다가
금문택의 옷깃을 잡고 묻는다.
“저...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모용화운의 갑작스런 질문에 금문택은 잠시 망설이다가 멀리 둥실 떠있는 달을 한번
바라보고는 모용화운의 두 눈을 바라보며 짧게 대꾸한다.
“금문택. 앞으로 그냥 금 대협이라고만 불러 주시오.”
금문택은 모용화운의 답변은 들을 생각도 않고 저기 강천비와 흑령이 자웅을 겨루고
있는 곳으로 달음질친다. 움직이면서도 금문택은 머릿속을 헤집어놓은 듯한 느낌에 고
개를 휘휘 내젓는다.
‘휘경이를 닮은 여인이라... 휘경이를...’
금문택의 눈에 야릇한 기색이 떠오르지만, 금세 깨끗하게 지워진다. 대신 두 눈에서는
서휘경을 잃었을 때와도 비슷한, 그런 처절한 눈빛이 마구 쏟아져 나오기만 할 뿐이
다.
한편, 황보성은 달탄기와의 자웅에서도 시종일관 대등한 전투를 벌여 왔다. 하지만 황
보성의 곁에 여러 명의 철기군 병사가 더 끼어들자, 이젠 대등하게 싸우기는 힘들다.
막기에만 바쁠 뿐이다.
금의위 대원의 현재 생존 숫자는 겨우 셋. 이 셋은 여섯의 철기군 병사들을 상대하고
있느라고 또 황보성을 지원할 수 없는 상황이다.
‘낭패다... 여기서 전원 쓰러진다면, 공주마마께오서는... 대체 누가 호위를 한단 말
인가...!!!!’
황보성은 오늘만치 하늘을 원망해본 적이 없다. 자신의 본분을 다할 수 없는 지경에까
지 이르게 돼버린 탓이다.
그때, 한 철기군 대원의 창이 황보성의 검의 흐름을 막아버린다. 그러자 동시에 달탄
기의 검이 황보성의 배를 꿰뚫기 위해 바람을 가르며 날아온다.
“젠장!”
짧게 욕을 뱉은 황보성은 가볍게 공중으로 도약한다. 하지만 뒤이어 남은 두 병사의
창은 그런 황보성을 꼬지구이로 만들어버릴 듯한 기세로 허공으로 날아온다.
‘내 인생도 여기서... 끝인가...!’
인생을 포기했기에, 황보성의 입가엔 옅은 웃음마저 드리워져 있다. 생각해 보니, 정
말 자신이 생각해도 파란만장한 인생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금의위에 입대한 뒤부터 이세혁에게 발탁되기까지 훈련을 땡땡이쳤던 일, 다른 대원들
과 몰래 술이나 마시고 놀던 때가 뇌리를 스쳐 지나가자, 황보성은 아예 눈을 감아버
린다.
‘공주마마... 금의위의 본분을 다하지 못한 소신을... 용서해...’
하지만 바로 이때, 허공을 찢는 듯한 비명이 황보성의 귓전을 때린다.
“크아아악!”
“끄악!”
황보성이 놀라서 감았던 눈을 떠보니, 달탄기를 비롯한 철기군 병사 셋이 허리가 절단
이 난 채 내장을 쏟으며 처참하게 널브러져 있다. 그 모습을 보고 황보성은 등에 소름
이 좍 돋는 것을 느낀다.
‘대, 대단하다... 다른 병사들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달탄기... 저놈마저 모를 정도
로 잠입을 해서...?!’
그러다가 문득, 한 자루 검을 탁탁 털고 있는 흑의소년을 보게 되자 황보성의 눈은 걷
잡을 수 없을 데까지 떨린다.
“일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까지 커져버리고 말았군요... 늦게 와서 죄송하다는 말씀
밖에 드릴 수가 없습니다, 황보 대협. 용서해 주십시오.”
“사... 사 소협...!!”
황보성은 포기했던 사문도의 출현에, 긴장을 풀어버린다. 그러자 뒤이어 찾아오는 것
은 노곤함과 함께 피곤함이다. 몸이 젖은 솜처럼 무겁게만 느껴진다 싶더니, 황보성은
검을 놓고는 정신의 끈을 놓아버린다.
떨어지는 황보성을 가볍게 한손으로 받은 사문도는 아직까지 생존해 있는 주은비와 모
용화운, 강천비를 보고는 겨우 한숨을 돌린다.
금문택이 강천비가 있는 쪽으로 달려가는 것을 본 사문도는, 주은비가 토끼눈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황급히 그리로 달려간다. 강천비를 비롯한, 금문택이 지긋지긋했던 이
작은 전쟁을 마무리 지을 거란 생각을 하면서...
흑령의 아수라멸도가 펼쳐지기가 무섭게, 강천비는 숨겨뒀던 내공을 서서히 꺼낸다.
흑령의 아수라멸도를 소멸시키기 위해서는 지금 투자하고 있는 내공으로는 역부족일
거란 생각이 머릿속에서 들고 일어난 탓이다.
‘내 능력을... 시험해 보겠다. 과연,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는지... 어디까지 성장했
는지!!’
강천비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묵섬을 일으키며 바람처럼 다가오는 흑령의 움직임을 읽
으면서 도를 꽉 움켜쥔다. 두 손에서는 이미 땀 흘릴 여유조차 잃어버린 상태다.
“생즉필사(生卽必死), 사즉필생(死卽必生)!”
도에 자신의 의지를 담았다. 그 도에는 이미 닿는 모든 것을 조각내버릴 정도로 살벌
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다. 하지만 그 기운은 흑령이 뿜어내는 모든 살기를 완벽하게
차단하고 있다. 아니, 흡수하고 있다고 표현하는 게 옳을지도 모른다.
“발도, 수라구류도!!”
강천비의 의지를 담은 수라구류도가 전개된다. 그제야 흑령은 강천비의 진정한 무공
수위를 깨닫고, 역시 전력으로 아수라멸도를 전개시켜 나간다.
‘찰합이부족의... 몽고의 부흥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이세혁에게조차 숨겼던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기로 한 흑령의 눈
은 살기가 아닌 투지로 불타오르고 있다. 단기간 만에 이 정도까지의 급성장을 이뤄낸
강천비에 대한 찬사이자 이 결투의 마무리 장식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펼치기로 결심
한 것이다.
‘내 목숨을 내놔서, 이 자식을 꺾을 수만 있다면...!!’
자신의 인생을 걸고 강천비를 죽이려 드는 흑령과, 자신의 인생을 버리고 흑령을 죽이
려 더는 강천비의 모습은 실로 많은 차이를 불러일으킨다.
어느덧 두 개의 기류가 둘의 사이에서 충돌을 일으킨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돌풍만
이 조금 일었을 뿐, 두 기류의 충돌로 인한 빛 따위는 아예 없다. 강천비의 수라구류
도가 흑령이 펼쳐낸 아수라멸도에서 일어난 빛을 모조리 흡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천비와 흑령 이 둘이 서로 똑같은 말을 속으로 부르짖고 얼마 뒤, 돌풍이 가라앉는
다. 돌풍이 가라앉은 뒤로 둘의 모습이 전장에 확연하게 드러난다. 금문택은 둘에게서
불과 2장을 두고 멈춰 방금 전에 일어났던 일을 곰곰이 되짚어보고 있다.
‘기류의 충돌이 있었다. 그런데 섬전은커녕 절기에서 펼쳐지는 섬광마저도 무척이나
약했다. 그렇다는 것은...’
금문택은 여기서 침을 꿀꺽 삼키고는 두 사람의 동태를 살펴본다.
‘최소한, 도에 있어서는... 이미 미치광이 수준을 넘어섰다는 말인가?’
이때 금문택의 눈에 피를 토하고 쓰러지는 강천비의 모습이 와 닿는다. 강천비가 가슴
을 부여잡으며 쓰러지자, 금문택은 검을 쥔 양손에 힘을 더하고는 한달음에 강천비에
게로 달려간다.
“크허헉... 쿨럭, 쿨럭...!!”
강천비가 쓰러지기가 무섭게 흑령 역시 흑도를 떨어트리고는 바닥에 왼쪽 무릎을 짚은
채, 일어서려고 안간힘을 쓴다.
“큭... 크큭... 저, 정말 놀랍다. 이세혁이란 늙은이보다... 이미 반 수는 위까지 올
라갔다니...”
강천비는 혼수상태에 빠졌는지, 죽어버렸는지 아무런 대답도 없다. 아니, 움찔거리는
것으로 봐서는 아직은 살아있는 모양이다.
금문택은 널브러진 강천비의 맥을 짚는다. 천상신의 밑에서 10년간 지내왔기에, 이런
사람 진단 정도야 할 수 있는 실력이 되기 때문이다.
‘출혈과다에다가 등에 있는 상처, 그리고 흉부의 상처가 생명을 갉아먹고 있다. 이대
로 갔다가는 한 시진 안으로 숨이 끊어지겠어.’
금문택이 얼굴을 굳히고는 전신이 상처투성이인 강천비의 혈도를 짚는다. 그대로 있다
가는 사태가 위중해질 듯싶어서 혈도를 짚어 일단 출혈을 막기로 결정한 것이다.
“네놈은... 누군데 갑자기 나타나서... 다된 밥에 재를 뿌리겠다는 거냐...?”
흑령이 너덜너덜해진 왼팔을 늘어트리고는 흑도를 거머쥔 채 금문택에게로 다가오고
있다. 금문택은 흑령이 다가오기 전까지는 이 말을 들은 체도 않고 치료에만 전념하다
가, 흑령의 발자국 소리가 뚝 멎고 나서야 귀찮은 얼굴로 가볍게 대꾸한다.
“이 소협과 같은 분을 섬기는 사람이다.”
“그걸로... 괜찮겠지...? 네놈이 여기서 뼈를 묻어야 할 이유가.”
“틀렸다. 여기서 벼를 묻게 될 놈은 내가 아닌 너야.”
자신의 또래 정도 됨직한 자가, 의원처럼 유순하게만 생긴 자가 이런 소리를 해오자
흑령은 기도 안 차는 모양이다.
“큭큭... 내 상태를 보고 헛소리를 지껄이는 모양인데... 이 정도로 쓰러질 내가 아
니다!!”
흑도가 기세 좋게 금문택의 목을 날려버리려고 날아오고 있다. 부상자라고는 믿기 힘
들 정도로 강맹하면서도 살아있는 공격이다.
금문택은 당황하지 않고 바닥에 꽂아뒀던 검 한 자루를 뽑는다. 그리고 목과 불과 한
치 떨어진 곳으로 그 검을 가져간다. 흑령의 공세는 여기서 완벽하게 차단된다.
“헛소리는 말이지, 네놈 집에 가서 부모님 앞에서나 지껄여 봐라!!”
뒤이어 금문택의 손이 재빨리 움직이더니, 무슨 말뚝을 뽑듯이 풍운검을 뽑아 쥐고는
번개처럼 흑령의 왼쪽 가슴에 박아버린다.
“끄... 끄으으... 끄윽...”
흑령의 눈이 뒤집어지더니, 입에서 더운 피를 쏟아낸다. 금문택은 흑령의 흑도를 밀쳐
내고는, 왼발로 흑령의 가슴팍을 짚더니 그대로 발을 멀리 뻗어버린다.
“네놈이 정상이었다고 한들, 난 네놈을 꺾을 자신이 있는 사람이다. 무식한 놈!”
흑령의 심장에서 피분수가 일어나 주변 바닥을 붉게 적신다. 찰합이부족의, 몽고의 중
원정복을 위해 다가온 흑령, 그가 꿈을 이루기 일보직전에서 너무도 허무하게 무너져
버린 것이다.
금문택은 강천비의 상처를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강천비의 얼굴을 한번 유심히 바라본
다.
“이 소협 역시 엔간한 괴물이군. 저런 괴물과 맞서 싸워서도 살아남다니.”
흑령의 널브러진 시신을 한번 바라보다가 쌍검을 허리춤에 집어넣은 금문택은 강천비
의 허리춤에서 도집을 풀어 거기에 강천비의 도를 꽂아준다.
“... 모두 끝났소?”
느닷없이 뒤편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금문택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다. 사문도아 앳
된 용모를 지닌 소녀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다.
“예, 주공. 완전히... 숨을 끊어 놨습니다.”
사문도는 강천비의 머리 곁에 가볍게 앉으며 흑령의 시선을 흘낏 바라본다.
“저 자가... 대영반 나리의 생명을 앗아간 자란 말씀이십니까.”
“... 네.”
주은비의 떨리는 목소리에, 사문도는 잔잔한 눈길로 흑령이라는 사내를 바라본다.
홍무극조차 그 진의를 몰랐던 이, 흑령. 홍무극은 이 흑령이란 자에게 완벽하게 이용
당한 것이다. 결국, 홍무극 그 자신은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모른 채로 황천으로 떠나
긴 했지만 말이다.
‘적이지만, 공주님의 말씀을 들어보자니... 실로 대단한 자임엔 틀림없다. 이런 자가
우리 대명제국의 금의위 대원이었더라면...’
사문도는 아쉬운 얼굴로 한숨을 내쉬다가 금문택에게로 시선을 돌려 묻는다.
“문택, 언제쯤 떠날 수 있겠소? 지금 바로 떠나도?”
“한 시진만 시간을 주십시오. 여기 이 소협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저기 모용 소저는
현재 운기조식을 취하고 있는 중인지라...”
금문택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오른손으로 모용화운이 있는 쪽을 가리킨다. 모용화운
의 진지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사문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공주님께서도... 동의하십니까?”
주은비는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사문도가 정중하게 안고 온 이세혁의 시
신이 놓은 곳으로 다가간다.
이세혁의 시신 앞에 멈춰선 주은비는 이세혁 앞에 털썩 주저앉으며 이세혁의 옷깃을
꽉 움켜쥔다.
“대영반... 대영반... 그렇게 기다리던 사 소협도 왔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
예요...!
우리 대명제국은 어떻게 하라고... 금의위 대원들은 이제 어떻게 살아가라고... 이렇
게 아무 말도 없이 혼자 간 거예요...?”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주은비의 눈에는 어느덧 눈물이 한가득 고여 있다. 그 눈물이 이
세혁의 얼굴에 또르륵 굴러 떨어지자, 주은비는 끝내 북받쳐 오르는 설움을 견디지 못
하고 울음을 터트린다.
“흐흑... 흑... 대영반... 대영반...!!”
이세혁은 자신의 친부(親父)만큼이나 자상했고, 친부 이상의 정을 베풀어준 사람이다.
한없이 부드러웠고, 한없이 자상했으며, 한없이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자신을 끔찍이도 위해주던, 자신이 황제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목숨을 바쳐 지켜주려
노력했던 이세혁이기에 주은비는 눈물을 아낄래야 아낄 수가 없다.
이세혁의 싸늘한 시신 앞에서 오열하고 있는 주은비를 바라보는 사문도의 마음은 괴롭
기만 하다.
‘대영반 나리...’
자신의 가신들 말고도 처음으로 존경이라는 감정을 가져다줬던 이세혁의 얼굴을 떠올
리며, 사문도는 서글픈 얼굴을 하고는 고개를 돌려 멀리 북경 쪽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겨본다.
“여기서 북경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알고 계시오?”
근처 주막에 짐을 풀고 새벽잠에 든 사문도 일행들은, 지긋지긋한 추격전이 끝난 탓인
지 모두들 늘어지게 잠을 잤다. 용케도 잠 많은 사문도는 잠을 푹 잤는지, 일찍 일어
나 주막 주인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북경이라면, 여기서 반나절도 안 걸립죠. 반나절이 아니라 바삐 간다면 세 시진도
안 걸릴 겁니다요, 공자님.”
“... 세 시진이라...”
혈도가 짚혀 시체처럼 늘어져 있는 강천비를 흘낏 바라본 사문도는 하늘에 걸려 있는
솜덩이같은 뭉게구름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아무래도... 더 이상 무리하게 방랑이나 하는 건 무리일 것 같아...’
강천비의 상태도 안 좋고, 모용화운 역시 장기간 긴장하고 있었던 터라 신진대사가 원
만하지 못한 상태다. 그리고 무엇보다 결정적인 건 바로 자신이 함부로 무공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천천히 귀환하자. 11월 안으로 악양까지 도착할 수 있도록...’
바로 그때, 문이 삐거덕 하고 열리는 소리에 사문도의 고개가 가볍게 움직인다. 곧이
어 시선이 방금 걸어 나온 금문택과 교차되자, 금문택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사문도
에게로 다가간다.
“주공, 일찍 일어나신 것 같습니다만.”
“아, 푹 자서 말이오. 문택, 당신이야말로 좀 더 쉬지 그러시오. 아직 상처가 완전히
나은 것도 아니잖소?”
“염려는 감사합니다만, 이제 무리한다 치더라도 지장도 별로 없습니다. 주공께서나
몸 혹사시키지 마시고, 좀 편히 쉬시지 그러십니까.”
금문택의 염려스런 제안에 사문도는 그저 가볍게 미소만 지을 뿐이다. 아직 생각해야
할 일들이 많다고 생각해서다.
‘북경에 도착하기만 하면, 더 이상 공주님 뒤를 호위하지 않아도 될 거다. 황보 대협
도 무사하고... 금의위 대원들도 몇몇은 살아 있으니까...’
지금 사문도에게 있어 뭣보다 중요한 건 강천비를 치료하는 것이다. 북경은 워낙 커다
란 곳인지라, 강천비를 치료할 의원은 아무래도 많을 거라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북경... 네 달 만인가...?’
사문도는 문득 한화경의 미소가 머릿속을 헤집고 지나가자, 고개 숙여 여기저기 피어
있는 민들레꽃을 바라보다가 생각에 빠진다.
‘천상신의 어르신께서 종남산 서쪽에 있는 나병촌으로 가서 화군백이란 분을 만나보
라고 하셨지. 과연... 그분은 천음절맥의 치유법을 알고 계실까?’
원래 북경에 도착하고 나서 곧장 종남산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모두의 상태가
썩 좋은 편도 아닌데다가 아직 한화경은 1년 4개월 정도는 더 살 수 있지 않은가?
금문택은 이렇게 스스로를 달래려는 사문도를 보자 불현듯 측은한 맘이 든다. 사문도
의 눈빛을 보니, 필시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많이... 많이 그리우실 거다. 첫사랑은... 열병보다 지독한 거니까.’
금문택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서서 평상으로 가 걸터앉는다. 한없이 뜨겁게 쏟아지는
아침햇살을 보며, 금문택은 고민이란 이름을 가진 구덩이 속으로 몸을 내던진다.
‘당분간 휘경이 생각에서 헤어나기는 글렀군.
정말, 세상엔 닮은 사람이 많다더니... 어쩌다가 여기서 그 닮은 사람을 만나게 됐을
까...’
창백하게만 보이던 모용화운의 얼굴을 떠올리며, 금문택은 고개를 내젓는다. 모용화운
의 얼굴을 볼 생각을 하니, 아무래도 바라보고만 있기는 힘들 것 같아서다.
[귀거래혜] 27.사천당문(四川唐問)의 야망
주막 주인 말대로, 사문도 일행은 세 시진 만에 북경에 입성했다. 그토록 기를 쓰고
도착하려던 북경에 도착하자 막상 허망한 듯, 황보성을 비롯한 금의위 대원들은 허탈
한 얼굴로 북경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있다.
“여기가... 그 말로만 듣던 북경이군요...”
모용화운은 화려하기 그지없는 고루거각(高樓巨閣)을 바라보고는 넋을 잃은 듯한 얼굴
을 한 채다. 강천비는 축 늘어진 채로 사문도의 등에 업혀 있다. 마지막으로 금문택은
그래도 북경에 와 본 경험이라도 있는 듯이 주변을 몇 번 훑어보기만 할 뿐이다.
‘대영반 나리께서도 함께 오셨다면 좋았을 것을...’
사문도는 속으로 고소(苦笑)지으며 4개월 만에 다시 방문하게 된 북경을 새로운 기분
으로 훑어본다. 주은비는 감회에 젖은 얼굴로 북경 여기저기를 훑어보다가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전에... 여기를 떠날 땐 병이란 병은 다 떼고 돌아올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는데...
”
정체는 모르지만 신비한 기운을 풍겼던 의원을 떠올리며, 주은비는 한숨을 내쉰다. 무
공을 익히는 게 꿈이었던 자신에게 무공을 전수해 주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던진
이세혁을 떠올리자 다시 주은비의 눈시울이 붉게 변해간다.
“... 이제부터는 힘내셔야 합니다, 공주님. 대영반 나리께서 쓰러지셨다고 하더라도,
공주님께서 풀이 처진 상태로 지낸다는 건 목숨 바쳐 공주님을 구한 대영반 나리의
일의 의미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사 소협...”
주은비가 울적한 듯한 모습을 내비치자, 사문도는 빙긋 웃으며 그런 주은비를 달래주
려 애쓴다.
“인정하시기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대영반 나리께서는 공주님을 구하고 전사하셨습니
다. 그런 대영반 나리의 뜻을, 의지를... 더 이상 무(無)로 물들이시면 안 됩니다.”
사문도의 당부에 주은비는 애써 울적한 기색을 지우며 빙긋 웃는다. 그리고 사문도의
등에 업혀 곤히 잠들어 있는 강천비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강 소협... 괜찮겠죠?”
“물론입니다. 그 정도로 쓰러질 녀석은 아니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말을 마친 사문도는 길게 늘어진 앞머리를 한번 쓸어 올리고는 모용화운과 금문택에게
로 시선을 돌려 눈빛으로 지시를 내린다. 이제 그만 가자는 뜻이 담긴 눈길이다.
“여기서 이별입니다, 공주님. 저희는 천비의 치료를 끝내고 바로 북경을 떠날 생각입
니다.”
“...”
“연줄이 닿으면, 분명 다시 찾아뵐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까지 부디 옥체 보중하
시고 건강하게 지내셔야 합니다.”
주은비는 떠나려는 사문도를 잡을 의사가 없는 듯, 꾸벅 고개 숙여 포권하는 사문도의
모습을 바라보더니 사문도와 시선을 맞추지 않으려고 애쓴다.
“황보 대협, 그리고 금의위 대원 여러분들도 여기서 이별이군요. 그간 미흡한 점도
잘 참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여기서 이별이란 점이 아쉽기는 하지만, 각자의 뜻하신바 모두 잘 이뤄지길 빌어드리
겠습니다.”
“미흡한 점이라니, 너무 뛰어나서 오히려 저희가 황송할 지경이었습니다.”
“공주마마를 위해 싸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사 소협.”
이런저런 답변에 사문도는 황송한 듯 미소를 띠우며 어깨에 머리를 기대어 자고 있는
강천비를 가리키며 말을 이어 나간다.
“감사라면... 저보다 화운이나 이 녀석에게 하시는 게 더 옳을 거예요. 제가 한 것이
뭐 있어야 말이죠. 결국 흑령의 수작에 놀아나 그놈 안중에도 없던... 대영반 나리를
잃어 버렸으니...”
“아니오, 사 소협. 모두 소협과 한 가족들이 아니오. 군웅대회에서 사 소협을 만나지
못했다면, 우리는 공주마마마저도 잃고 말았을 것이오. 정말 고맙소.”
황보성의 얼굴에 피어나 있는 따스한 웃음에, 사문도의 얼굴에서도 금세 부드러운 미
소가 되살아난다.
“... 소협이 무림에서 뜻하는 바를 이루게 될 때까지 응원해 드리겠소. 부디... 최선
을 다 해주시기 바라오.”
“예.”
황보성이 목례를 하고 돌아서면서 주은비의 앞장을 선다.
“공주마마, 자금성까지 안내하겠사옵니다.”
“... 네.”
주은비가 짧게 대꾸하자, 황보성은 사문도가 바라보는 쪽으로 발길을 옮기기 시작한다
. 뒤이어 주은비가 그 뒤를 따르고, 주은비의 뒤를 이어 금의위 대원들이 철통같이 뒤
따라간다.
“명의 금의위... 정말 대단한 조직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금문택이 눈을 번뜩이며 철통처럼 주은비를 호위하고 사라지는 황보성을 바라보며 감
탄을 터트린다. 하지만 사문도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을 굴리며 심각한 표정을 짓
고 있다.
‘금의위... 금의위 이상의 실력을 가진 군대가 필요하단 말야...’
일반 관군들과 달리, 정예병들로만 이뤄진 금의위의 특수 구조를 골똘히 따져보며 무
슨 고민에 잠겨 있다.
황족들이라면 목숨까지도 바쳐가면서 호위하려고 애쓰는, 그런 참된 충성심을 가진 이
들만의 집합체를 만들 생각으로 분주하게 머리를 굴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 이 일은 역시... 곽 군사님과 상의해 보는 게 제일 낫겠지.’
거기까지 생각을 미친 사문도가 주변에서 어정쩡하게 서있는 금문택과 모용화운을 바
라보고는 먼저 가자는 눈길을 보낸다.
“갑시다. 천비, 이 녀석은 치료해야 할 거 아니오.”
사문도의 발언에 금문택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사문도의 뒤를 따른다. 모용화운도
다섯 걸음 정도 뒷전에서 이 둘의 뒤를 따라 걷는다.
‘사파에서 금의위를 능가하는 부대를 만든다는 건 힘든 일이다. 하지만 성공한다면..
. 무림통일에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되지.’
금의위를 능가할 부대 생각은 여기서 접기로 하고, 사문도는 번화가로 발길을 돌린다.
이번 방랑은, 생각보다 수확량이 상당하다는 것을 몸소 느끼면서 걷고 있는 사문도의
발길은 가볍기만 할 뿐이다.
사천당문은 사천성(四川省) 일대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는 무림세력이다
. 그 일은 송대(宋代) 이전부터 지속된 일로, 원(元) 시절 때도 꿋꿋하게 관군에 맞서
싸워 중원무림의 저력을 알린 적이 있다.
사천성 내에서는 중원무성 이상의 권력을 지니고 있는 사천당문. 하지만 중원무림은,
중원무성은 믿고 있던 사천당문에서부터 정파무림은 점차 기울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사천당문의 내전. 그곳엔 문주인 당세천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중년인 하나가 앉아 있
다.
차(茶)를 마셔가며 즐거운 얼굴로 담화를 나누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그냥 봐도 보통
사이가 아니란 걸 짐작할 수 있다.
“호오... 임 족장(族丈)의 계획대로라면, 이 나라는 필시...”
“그렇습니다. 당 문주님도 짐작하시겠지만, 명은 멸망합니다.
지금 한창 기세를 떨치고 있긴 하지만, 건주여진은 명의 공세를 감당해낼 수 없을 겁
니다. 그때 우리 찰합이부족은 만리장성(萬里長城)을 넘어 북경을 공격할 거고 말입니
다.”
변발에다가 호복을 걸친 중년인이 대답한다. 이미 복장이나 머리 형태만 봐도, 이 중
년인은 한족이 아니다.
“임 족장께 전해 주시오. 정말로 명과 건주여진이 맞붙는다면, 내 기꺼이 벽력탄 100
상자를 족장께 내드리리다.”
당세천의 답변에, 찰합이부족 중년인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하하하!! 역시, 당 문주님은 대화가 잘 통하는 분입니다.”
“허허, 벽력탄 100상자는 그냥 선물이오. 그리고 차타륵(叉朶肋) 장군, 절대로 잊어
서는 아니 되오. 우리가 내건 조건은, 분명히 중원무성 괴멸이오.”
“믿어주십시오. 결코 문주님을 실명시켜 드리지는 않을 거니 말입니다!”
몽고인, 차타륵의 자신 있는 답변에도 불과하고 당세천은 인상을 찌푸린다.
“분명히 충고하건데, 중원무성은 결코 얕볼 만한 곳이 아니오. 300년 동안 무림의 지
존세력으로 군림해 온 곳이니, 분명 그만한 저력이 숨겨져 있단 말이오.”
“족장님께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북경을 공격하여 점령한 뒤에, 저희 찰합이부족
의 철기군 10만으로 중원무성으로 진격시키는 안을 말입니다.”
철기군 10만이란 말에, 그제야 당세천의 인상이 다리미로 편 옷처럼 누그러진다. 당세
천의 얼굴이 누그러지는 것을 본 몽고인, 차타륵은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문주님.”
차타륵의 말에 당세천도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득의의 미소를 짓는다.
“무사히 귀환하길 빌겠소.”
“당 문주님께서도, 만수무강 하십시오. 조만간 다시 찾아뵙게 될 겁니다.”
차타륵이 몽고식으로 당세천에게 예를 표하고는, 그대로 바깥으로 발길을 내딛는다.
사라져가는 차타륵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당세천은 한없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속으
로 중얼거린다.
‘몽고를 이용해서 중원무성을 괴멸시킨다... 중원무성만 사라진다면, 중원무림은 우
리 사천당문의 손아귀로 들어올 수가 있게 되지.’
당세천은 현재 실로 무서운, 중원무성을 괴멸시킨 뒤에 무림에서 가장 권위 있는 자리
에 자신이 앉겠다는 꿈을 꾸고 있는 중이다.
‘무림정복을 위해서라면, 벽력탄 100상자 정도야 공짜나 다름없지. 중원무성을 괴멸
시키고... 무림의 최강자로 등극하게 된다면 말이지...’
당세천은 시종일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바깥 풍경을 바라본다. 이미 당세천, 그의
얼굴에는 무림지존의 좌에 앉는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지는 듯, 그 싸늘하기 그지없는
미소는 지워지지 않고 있다.
사천성의 하늘에 불온한 기온이 황혼처럼 덮이고 있을 무렵, 당세천의 무남독녀인 당
설란은 이날도 빠짐없이 무공 수련이 심취해 있다.
“파앗-!”
놀랄 만큼, 당설란의 용모는 성숙해져 있다. 폭우이화침을 전개시키고 있는 두 눈은
별처럼 반짝이고 있으며, 분칠이라도 한 듯이 뽀얗기만 한 피부, 그리고 유달리도 가
녀린 당설란의 모습은 화용월태(花容月態)란 말을 떠올리게 함은 부족함이 없다.
당설란의 입술에서 일갈이 터지고, 섬섬옥수에서는 섬전처럼 빛줄기가 퍼져 나간다.
과거 당설란의 실력과는 가히 비교도 하기 힘들 지경이다.
“... 휴우...”
폭우이화침을 전개한 당설란은 이마에 흐르는 땀줄기를 닦으며, 바위에 털썩 주저앉으
며 한숨을 쉰다.
‘답답해... 미칠 정도로 무공에 심취했는데도, 마음 한구석의 빈구석은 채워지질 않
고 있으니...’
주먹을 꼭 움켜쥐고 왠지 모르게 서글픈 표정으로 있는 당설연의 전신에는 이미 짙은
고독감이 흐르고 있다. 모를 일이다. 공주 이상의 대접을 받으며 살아가는 당설란의
얼굴에 고독이라니.
“... 쳇, 또 그 녀석 생각이야.”
뭐가 그리 인정하기 힘든지, 당설란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평정심을 되찾으려고
애쓴다. 하지만 평정심을 되찾는다는 게 마음먹은 대로 된다면 지금 주먹을 꼭 움켜
쥘 필요는 없다.
4년 전, 당설란은 동정호에 부친 당세천과 휴양 차 갔다가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만하기만 한 소년의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주려다, 오히려 된통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당설란의 그 독존적인 자존심을 처음으로 짓밟은 소년이 사문도란 사실은 너무도 뻔한
사실이다.
‘그 녀석을 꺾기 위해 4년 전부터 오늘까지 무공에만 심취해 왔다. 하지만... 하지만
그 녀석이 그리워지는 이유는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거지?’
언젠가, 당설란은 무공에 심취해 있던 자신을 발견했다. 그때는 이미 3년이라는 시간
이 흐른 뒤였다. 그때부터 왠지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허전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다시 1년이 지나, 그 원인을 깨달았다.
다름 아닌, 그때 만난 오만하기만 한 소년을 마음 한구석에서는 좋아하고 있었던 것이
다. 콧대를 꺾어주겠다는 다짐 하에 오늘까지 무공 연마를 하며 지내왔건만, 알고 보
니 그 소년을 좋아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무림에 사문도란 이름을 가진 소년이 돌아다니고 있다던데... 그 녀석이 아닐
까...?’
무공을 겨뤄보고 싶다는 생각을 버린 지도 얼마 됐다. 오로지 만나고 싶다는 일념 하
나만으로, 당설란은 이렇게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부터 자신도 인정하고 만, 사문도란 존재를. 첫사랑이란 존재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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