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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6월 22일 주일 낮 설교)
성경 : 시편 42:1-11(구약 833)
시편 42편은 고라 자손의 마스길 이라고 되어 있는데 ‘마스길’ 이란 말은 교훈이란 뜻입니다. 고라 자손은 다윗에 의해서 성전의 문지기 직임을 맡았습니다. 고라 자손들은 성전 문지기의 직무를 맡아서 감당하면서 때로는 찬양을 하는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고라 자손 중에는 찬양을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고 또한 많은 찬양을 지어서 불렀습니다.
시편 42편은 고라 자손 중에 누군가가 지은 찬양 가운데 하나입니다. 시편 42편의 역사적인 배경은 성전의 문지기로 봉사하는 직분을 맡은 고라 자손이 현재 예루살렘을 떠나서 포로가 되었거나 또는 어떤 이유에서 먼 타국에서 나그네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 집니다.
성전에서 문지기의 일을 하거나 성가대의 일원으로 찬양을 드리며 살았던 고라 자손 중에 어떤 사람이 먼 이국 땅에서 나그네 또는 포로가 되어서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서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지은 시로 보여 집니다.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먼 타국에 있는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향해서 창문을 열어놓고 기도를 하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으로 다니엘이 그렇게 매일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해 창문을 열어놓고 기도했습니다.
오늘 시편 42편의 저자도 먼 타국 땅에서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늘 기도하면서도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하나님을 예배하게 되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이 시를 지은 것으로 보여 집니다.
지금은 먼 나라에서 살고 있지만 언제나 예루살렘 성전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자신이 살고 있는 땅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면서 기도하고 찬송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인을 비롯해서 많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나라가 멸망당하고 다른 나라에 포로가 되어 끌려가서 사는 상황임에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언제나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 있었지만 자신들이 살고 있는 땅에서 느끼는 낙심과 절망감이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이 있었지만 한 편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만 하는 것인가 하는 절망을 느꼈던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어느 순간 마음에 절망과 좌절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는데 여전히 힘들고 어렵게 살아가는 것을 보고 “너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조롱할 때도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고 주변에서 정말 하나님이 계시냐고 묻는 소리를 들으면서 어느 순간 믿음이 흔들릴 때도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계신 걸까?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신다면 나는 왜 이런 상황을 겪는 것일까? 이런 마음을 품게 될 때가 있습니다.
고라 자손 중에 한 사람이 고백한 이 고백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질문과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해서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시인의 고백 중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1. 누구나 낙심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고, 기도하면서 열심히 살아가면 모든 것이 형통하고 잘 되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과 기독교 역사를 보면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낙심하는 상황이 올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6절을 보면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시인은 우리가 열심히 하나님을 예배하고 성전에서 봉사를 했는데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면서 낙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낙심하게 되는 가장 큰 원인은 하나님의 침묵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의 부재 상황이라고 느껴질 때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살아계신다고 믿는데 우리 삶의 현장에 하나님께서 안 계신 것처럼 느껴지는 상황들이 있습니다.
3절을 보면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레위지파로서 하나님의 성전에서 문지기의 일을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던 성가대원 이었던 시인이 어느 날 갑자기 포로가 되어서 또는 도망자가 되어서 타국 생활을 하는 모습을 보고 이방인들이 조롱하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고라의 후손아 네가 믿는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이 말은 하나님을 조롱하는 소리이고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는 고라 자손을 조롱하는 소리입니다. 그런 조롱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슬퍼서 눈물이 주야로 음식이 되었습니다. 이 말은 음식을 먹을 때도 가슴이 아파서 눈물이 흘러 눈물이 빵을 적셔서 눈물에 젖은 빵을 먹는다는 말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드릴 수 없는 것도 가슴이 아픈데 이방인들이 또는 원수들이 조롱을 합니다. “너희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너희 하나님은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 분이다.”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없는 것만큼이나 하나님을 조롱하고 시인의 믿음을 조롱하는 사람들의 그 조롱하는 말 때문에 눈물이 마를 날이 없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9-10절을 보면
42:9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42:10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9-10절에서도 같은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믿고 의지하고 성전에서 찬양하고 봉사를 했는데 지금 나에게 주어진 현실은 하나님이 나를 잊으신 것 같은 상황이고 원수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서 우리를 힘들게 함으로 우리가 슬프게 다니고 있습니다. 라고 눈물의 고백을 합니다.
이런 상황은 영적 탈진이라고 묘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헌신했는데 하나님은 침묵하고, 하나님 부재 상황이라는 생각으로 낙심하는 상황이 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감정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시인은 과거와 현재를 비교할 때 낙심이 된다고 고백합니다. 4절을 보면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시인은 과거에 성전에서 즐겁게 찬양하고 예배드리던 때를 회상하면서 지금 자신의 처지와 과거를 비교하면서 마음이 상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과거에는 사람들과 함께 즐겁게 성일 즉 안식일과 절기에 기쁘게 감사의 찬송을 드렸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은혜를 받고 감동을 받아서 찬양을 하고 찬양 팀에서 성가대에서 함께 기쁘고 즐겁게 찬양하던 때가 있었는데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은 그 때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하면서 마음이 상했다는 것입니다.
그 때는 분명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역사하시고 인도하신다고 믿었고 그런 감동과 감격이 있었는데 지금은 과연 하나님이 살아 계신 걸까? 하나님이 계신다면 왜 나에게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마음이 상한다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그 때처럼 기쁘고 찬양하고 하나님을 예배드리고 싶은데 지금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이 내 마음을 상하게 한다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주어진 상황은 낙심할 만한 상황이지만 그러나 시인은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합니다. 라고 고백으로 이 시를 시작했습니다. 1-2절을 보면
42: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42: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시인은 자신은 지금 사모하는 마음으로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은 성전에 가서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상황인 것으로 보여집니다.
주어진 상황은 모든 것이 낙심할 수 있는 상황이고 하나님을 예배드리고 찬양했던 자신들이 지금 겪는 일은 하나님이 계신가를 의심할 만큼 힘든 상황이지만 그러나 영혼 깊은 곳에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있다는 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갈망한다는 말의 의미는 그리워한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오랫동안 떨어져 있게 되면 서로를 보고 싶어 하게 됩니다. 이것을 그리움이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갈망은 그런 그리움입니다. 사랑하는 부모님을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을 오랫동안 만나지 못해서 그리워하는 마음과 같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기를 갈망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는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되든지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이것을 종교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내면에 종교성이 있어서 사상이나 철학이나 어떤 특정한 것을 신을 섬기듯 따르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면서 겪는 이런저런 일들이 우리를 낙심하게 만들기고 하고, 절망감을 느끼게도 만들고 영적 탈진 상태를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모든 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사모하는 갈급함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구하면 그분은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2. 영혼에게 선포하라
시인은 절망 속에서 낙심한 자신을 향해서 이렇게 선포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포로가 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시인은 그런 절망 속에서 하나님이 침묵하시고 하나님이 계신가를 의심하는 상황에서 자기 자신에게 불신을 극복하고 낙심을 이겨내기 위해서 선포한다고 말하는데 시인이 자기 영혼에게 선포한 이 선포는 우리가 우리 영혼에게 선포해야 할 외침입니다.
시인이 자기 자신에게 선포한 내용은 5절과 1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5절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11절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인이 자기 영혼에게 선포한 첫 번째 선포는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낙심하다. 는 말의 문자적인 뜻은 ‘어찌하여 네가 숙이느냐’입니다.
여기의 ‘숙인다’는 것은 대중 예배 때에 기도하기 위하여 자세를 숙이는 것을 의미하지만 여기서 시인이 낙심하다라고 표현한 것은 슬픔의 무게 때문에 슬픔 깊은 곳으로 가라앉은, 심히 우울하고 슬픈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시인의 이런 고백은 신앙으로부터 온 믿음과 마음에서 나오는 불신의 상태 사이의 갈등을 보여주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 부터 온 믿음과 자신이 처한 현실인 우울과 어두운 상태의 갈등으로 인해서 생긴 낙심의 상태에 머물지 말라고 자기 자신에게 선포하고 다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낙심할 일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이렇게 외쳐야 합니다. 내 영혼에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느냐 낙심을 극복하고 다시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시인이 두 번째 선포한 것은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불안이란 단어의 의미는 소리를 내며 솟아오르거나 가라앉는 바다의 파도를 묘사할 때 사용하는 표현으로 시편 저자의 영혼이 성난 파도처럼 이리저리 밀려다니고 요동하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신이 지금 믿음과 불신앙의 사이에서 요동 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긴 자신들이 지금 겪는 시련은 마음이 흔들리고 요동 칠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불안함을 느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파도의 물결치는 것처럼 요동치는 상황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불안하고, 신앙적으로 불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해 하지 말라고 자신의 마음을 다독이고 있습니다.
시인의 세 번째 선포한 것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는 것입니다. 지금 시인이 처한 현실은 절망이고 낙심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런 상황에서 내 영혼이 하나님을 찾기에 갈급하다고 선포하면서 자기 영혼에게 이 절망에서 소망을 하나님께 두라고 외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망을 하나님께 두어야 할 이유는 하나님께서 마침내 나타나셔서 우리를 도우실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리는 것은 하나님이 소망 이시고 희망 이시기 때문에 다른 것을 생각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 안에서 희망을 갖고 나아가라는 말입니다.
렘 29: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3.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인은 자신이 처한 현실은 힘들고 어렵고 절망적이고 낙심이 되기도 하지만 그러나 나는 여전히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찬양은 우리의 영혼을 회복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찬양을 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시인은 여전히 하나님을 찬송하겠습니다. 라고 고백하는데 모든 것이 다 잘 되고 형통하는 것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찬양하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에 대해서 낮에는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찬송이 있다고 고백합니다. 8절을 보면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낮에는 인자하심을 베푸신다는 말의 원어의 문자적인 뜻은 ‘낮에게 여호와는 그의 자비를 명령하실 것이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비 혹은 은총을 명령하거나 지시하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이 베푸시는 자비와 은총이 임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여기 언급된 ‘낮’(요맘)이란 용어는 번성을 암시하는 단어로 언젠가 번영의 시기가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자를 베풀어 주셔서 다시 낮과 같이 번영하는 때가 올 것이기에 절대 자포자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인자라는 단어는 헤세드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값없이 주어지는 사랑이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기 때문에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값없이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우리에게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이 인자 또는 자비입니다.
비록 지금은 힘들고 절망적인 것 같지만 반드시 하나님이 주실 번영의 시기가 올 것이라고 믿고 그러므로 밤에는 즉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찬송이 흘러나온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밤과 같은 힘든 시간을 이기는 것은 찬송입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렵고 절망적일 때 찬송으로 그런 어둠의 영역을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나이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8절을 다시 보면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생명이신 하나님이란 말은 나를 살려주신 하나님이란 의미와 오늘도 살아계신 하나님이란 의미와 함께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 되신다는 의미를 포함입니다. 시인은 나의 생명을 살려주시고, 내 생명의 주인 되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찬송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찬송과 기도로 주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모든 절망에서 건져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믿음의 끝은 찬송과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찬송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어떤 절망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망과 희망을 주십니다.
낙심할 수 있습니다. 때론 신앙적인 갈등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 영혼에게 이렇게 선포합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느냐?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불안해 하느냐?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이 말씀을 굳게 잡고 믿음 안에서 승리하는 복된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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