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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698
3월13일 [사순 제3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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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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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DWyOACwQ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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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 앞에 언제나 부당한 죄인인 우리들이 눈만 뜨면 드려야 할 기도는 세리의 기도입니다!>
누군가와 대화를 할때 마음이 상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대화가 진솔하거나 순수하지 않고 권모술수나 잔머리 굴리는 냄새가 풀풀 풍길 때입니다. 마음 속 깊은 곳 생각과는 전혀 다른 대화, 겉도는 대화를 나눌 때입니다.
하느님과의 대화인 기도 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을 꽤뚫어보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속마음과는 전혀 다른 기도를 장황하게 늘어놓을때, 하느님께서도 결코 달가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가감없는 진솔한 대화를 좋아하실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차라리 반항적인 예언자 예레미야의 기도가 돋보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를 예언자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은 저를 아주 바보로 만드셨습니다.”
하느님께 건넨 욥의 대화는 더 솔직합니다. “저는 너무나 비참해서 주님께서 저를 만든 날을 저주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조차도 하느님 아버지께 솔직한 내면의 심정을 가감없이 말씀하셨는데, 이 보다 더 진솔한 기도는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입니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오늘 복음에서 비교대조의 달인이신 예수님께서는 기도하러 성전으로 올라간 두 사람의 기도 자세를 소개하고 계십니다. 두 기도자의 태도는 극명하게 구분됩니다.
바리사이의 기도를 보십시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 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루카 복음 18장 11~12절)
교만과 자만으로 똘똘 뭉쳐진, 기가 차지도 않은 바리사이의 기도입니다. 그가 바친 기도의 가장 큰 문제점은 겸손의 결핍입니다. 성찰과 자기 인식의 부족입니다.
바리사이의 마음속에는 자신이 ‘무익한 종’이라는 의식보다 ‘유익한 종’이라는 의식이 강했습니다. 하느님께서 큰 자비와 은총을 베푸셔서 티끌 같은 자신을 축복하셨음을 까마득히 잊고 순전히 자신의 힘으로 오늘 여기 있다는 그릇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바리사이처럼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고 자신이 대단하다고 믿는 사람은 하느님 은총을 통한 의화(義化)가 전혀 필요하지 않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느님은 필요 없으며 결핍과 한계와 모순투성이의 인간인 자신에게만 의존하므로 그 길의 끝은 결국 멸망이요 죽음인 것입니다.
‘바리사이’란 말 마디 자체가 ‘~으로부터 분리되다’란 의미를 지닙니다. 바리사이들의 머릿 속에는 언제나 자신들이 거룩하다는 의식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불결한 사람들, 죄인들, 세리들, 이방인들과는 달리 자신들은 깨끗하고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거룩한 사람들이라는 선민사상과 우월감이 대단했는데, 그런 바리사이들의 모습이 예수님 보기에 웃기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아직 갈길이 까마득한 바리사이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모범으로 세리의 기도를 소개하십니다.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습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 복음 18장 13절)
자비하신 주님 앞에 언제나 부당한 죄인인 우리들이 눈만 뜨면 드려야 할 기도가 세리의 기도입니다. 언제나 죄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리가 틈만 나면 쏘아올려야 할 화살 기도가 세리의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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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fquJs7MheC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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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면 모든 사람에게 친절할 수 있다.>
오늘 복음은 바리사이와 세리가 성전에서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바리사이는 자신을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을 세리와 비교하는 것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과 만남은 그냥 자신이 이미 내린 결론을 확증 받는 것일 뿐입니다.
하지만 세리는 자신의 의로움은 하느님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게 자신이 믿는 바대로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남과 비교해 이미 자신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하느님 앞에 나올 이유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심판관이시고 그 사람을 의롭게 만드는 구원자이심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의롭게 된 사람은 하느님이 필요 없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 기도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그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는 왜 사람들과 비교하며 자신을 비교우위에 놓으려고 했을까요? ‘열등감’ 때문입니다.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남을 심판하는 버릇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남과 비교해 올라가고 싶다는 말은 자신이 아래 있다는 뜻입니다.
열등감은 ‘자존감’이 부족한 데서 옵니다. 스스로 자존감을 키우려고 하면 남과 비교하게 됩니다. 이것이 자존심입니다. 남과 비교하려다 보면 옳고 그름을 많이 따지게 됩니다. 자신이 옳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바리사이-율법학자가 됩니다. 그들은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당대는 그르다고 말합니다.
영화 ‘원더’(2017)는 부모의 사랑이 자녀의 자존감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그리고 그 자존감이 없는 사람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어떠한 단절을 경험하는지 잘 보여 줍니다.
‘어기’는 특별한 외모로 안면에 장애를 지니고 태어나 27번의 성형수술을 받아 겨우 눈, 코, 입을 알아볼 수 있는 모습이 됩니다. 부모는 아이가 상처받을까 봐 학교에 보내지 않습니다. 하지만 평생 그렇게 살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 과감하게 학교에 입학시킵니다.
물론 어기를 좋아해 주는 ‘잭’이란 친구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도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 자기가 어기처럼 태어났으면 자살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 친구도 교장 선생님의 부탁으로 힘겹게 어기와 친해지려 했던 것입니다. 어기는 그 말에 상처받지만, 그가 이전의 친구 집단에서 소외되지 않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고 서로 화해합니다. 잭도 자신이 속해 있던 친구들과 싸우며 어기 편을 들어줍니다. 그리고 그를 싫어하는 친구들도 점점 그의 편이 되어갑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지쳐도 부모만은 어기편이 되어 줍니다. 그리고 누나인 ‘비아’도 항상 어기편입니다. 그래서 어기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누나 비아가 오히려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습니다. 절친 ‘미란다’로부터 갑자기 따돌림을 당하며 힘들어합니다. 그러면서도 부모의 관심을 위해 힘들어하는 어기를 챙겨야 합니다. 하지만 비아에게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할머니가 계십니다. 할머니는 힘들어하는 비아를 안아줍니다.
비아의 절친인 미란다는 어기에게 헬멧을 선물한 사람입니다. 이것은 미란다가 어떤 사람인지 잘 보여 줍니다. 미란다는 좋지 못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비아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항상 부러워했고 질투까지 했습니다. 이 열등감이 어기에게 헬멧을 선물하게 했습니다. 자신과 같은 처지인 어기는 사람들 앞에서 헬멧을 쓰고 다녀야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하지만 헬멧을 쓰고 다니던 사람은 미란다 자신이었습니다. 그 열등감이 남에게도 헬멧을 씌워 움츠러들게 만들고 비아도 따돌리며 열등감을 느끼게 했습니다.
하지만 미란다도 연극부에서 인정을 받고 또한 비아 부모의 사랑도 받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해주는 부모의 딸인 비아의 마음을 슬프게 한 것이 아파서 연극에서 자신의 주인공 역할을 일부러 비아에게 돌려줍니다. 그렇게 모두가 행복하게 영화는 마무리됩니다.
어기에게는 잭이 있고, 비아에게는 미란다가 있습니다. 잭과 미란다는 어기와 비아의 친구이지만 열등감이 있는 친구들입니다. 잭은 그 열등감을 이전의 친구 집단에서 극복하려 했고, 미란다는 연극에서 능력으로 비아를 이기려 했습니다. 이런 상황이 바리사이가 세리에게 헬멧을 씌우려 하는 오늘 복음의 모습과 같습니다.
하지만 세리는 굴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도 하느님 자녀의 자격을 갖췄음을 믿었고 그 자격은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 남을 끌어내려 자신을 높이려는 마음은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 것에 기인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하느님 아버지가 계십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자주 말하십시오. 특별히 “아빠!”라고 해 보십시오. 아빠라는 말은 친자녀라는 뜻입니다. 아버지는 세상에서 연세 많으신 분들에게 붙일 수 있는 말이지만, 아빠라는 말은 친아버지에게만 쓸 수 있는 말입니다. 친아버지와 함께라면 그 자존감 때문에 굳이 자신을 남들과 비교해 자신을 들어 높이려 하지 않습니다.
운동회 날 장애를 지니고 태어난 친구를 위해 함께 손을 잡고 걸어서 결승선까지 들어온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이 친구들은 자신들의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장애가 있는 친구를 이길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고 있었습니다. 굳이 친구를 이기면서 극복해야 할 열등감이 없었던 것입니다.
영화에서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하는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너희들이 옳음과 친절함, 둘 중의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친절함을 선택하라.”
옳고 그름을 따지는 사람은 열등감이 강한 사람입니다. 상대가 그르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만들기 위해 항상 남에게 씌워줄 헬멧을 들고 다닙니다. 하지만 “아빠, 아버지!”가 있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누구에게나 친절합니다. 자신들에게 함부로 대한 사람들에게까지 친절합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 하느님을 부모로 인정하지 않는 바리사이의 몫이라면, 친절함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하느님 자녀라는 자존감을 가진 이들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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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3월13일 [사순 제3주간 토요일]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폄하하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이다. 내가 먼저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신학을 공부하여 교사가 되었기 때문에 이런 교만에 빠진 사람들이 염두에 두어야 할 말씀이다. 바리사이는 하느님께 기도하러 간 사람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가 하느님을 향하여 감사기도를 바친다고는 하지만 실은 자기 자신을 향하여 기도한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찬사를 하느님 앞에 올리러 간 사람이었다.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한다는 핑계로 허영에 빠져 교만하고 이기적인 사람이 된다면 단식이 그에게 무슨 득이 되며, 십일조를 바치면서 자랑하고 그것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는 남을 비난하고 단죄한다면 그 십일조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바리사이는 계속 ‘나는 다른 인간들과 다르다.’라고 칭찬하기에 바쁘다. 바리사이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 자신의 교만을 늘어놓고 있다.
주님의 이름을 고백하며 찬양의 제물을 하느님께 바치는 사람은 자신 안에 숨어있는 사악한 자를 경계해야 한다. 우리가 감사 찬양을 드리는 바로 그때 우리를 덮치려고 사탄이 몸을 숨기고 있다. 바리사이에게 한 것처럼 행실로 우쭐거리게 하지 않고 다른 교만으로 우리를 취하게 할 것이다. 아마 아직도 자신의 행위로 우쭐거리게 하는 것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세리는 감히 눈도 들지 못하고 ‘멀찍이 서서’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기죽은 태도가 보이는 것 같다. 하느님의 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방종한 삶을 살아온 자신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느님이 두려웠던 것이다. 우리는 그의 몸짓에서 자신의 악행을 책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어리석은 바리사이는 뻔뻔스럽게 눈을 치켜뜨고 꼿꼿이 서서 제 자랑을 했지만, 세리는 자신의 행동을 부끄럽게 여긴다. 자기 죄를 고백하고 의사에게 자신의 병을 알리며 자비를 간청한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주님께서는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14절) 바리사이가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다. 그는 교만하게 자기 자랑을 했고 세리는 겸손하게 자기 죄를 고백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바리사이의 자선보다 세리의 고백을 더 기꺼워하신 것이다.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돌아간 것은 그가 겸손했기 때문이다. 바리사이의 교만한 기도는 하느님의 진노를 불러 일으켰고, 세리의 겸손한 기도는 더 큰 힘을 발휘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이웃과 비교하여서는 안 된다. 우리가 보고 또 비교하며 따라야 할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다. "내가 남들만큼 선한가?"가 아니라, "내가 하느님 앞에 선한가?"이다. 즉 우리들의 선행이나 신앙생활이나 그 기준, 척도는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마 우리가 우리의 삶을 예수님의 생과 비교할 때는 우리도 "오, 하느님! 이 죄안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할 것이다. 이 사순절이 우리에게 큰 은총의 기간이 될 수 있도록 이런 삶을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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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내비게이션에서 길을 잘못 들어섰다고 하며 유턴하라는 말이 계속하여 들려옵니다. 자주 다녔던 길이고, 이 시간이면 내비게이션이 가라는 방향은 차가 막혀 더 늦을 것 같아 이를 무시하고 자신의 길로 들어섭니다. 그러나 선택한 길도 이내 주차장처럼 막힙니다.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따르지 않은 것을 괜히 후회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선택은 언제나 똑같습니다. 자신의 잘못과 실수를 인정하지 않으면 쉽게 그 선택을 바꾸지 않습니다. 지금 잘 살고 있다고, 자신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느끼지 못하면 지금의 인생 방향도 되돌리지 않습니다. 지금의 선택에서 방향을 바꾸어 유턴하는 것을 우리는 ‘회개’라고 합니다. 세상의 가치로 삶을 살아가다가 어느 순간, 어떤 기회에 자신의 삶이 잘못되고 있음을 깨닫고 하느님의 가치로, 예수님의 신념으로 방향을 돌리는 것, 그래서 그 가치가 구원으로 이끄는 힘임을 믿는 것, 그것이 우리의 회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강도들이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 세리와 같이 살고 있지 않다고 자신하며 자신의 삶이 최선이라 자부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언제나 옳은 판단과 행동만을 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런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부터가 오만이고 교만일 따름입니다.
하느님과 눈을 맞추고 예수님을 따르는 방향을 자신의 목표로 삼는 회개의 시작은 먼저 자신의 나약함을 알고 오만과 교만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리는 이제 회개를 시작합니다. 자신을 낮추고 잘못을 인정합니다. 유턴을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매 순간 하느님을 바라보며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회개의 출발선에 서려면 자신의 나약함과 죄스러움을 바라보는 것이 선행되어야 함을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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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조선은 일본에 사절단을 보냈습니다. 일본의 상황을 직접보고 판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사절단의 의견이 달랐습니다. 한쪽은 일본의 지도자가 야망이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군인들의 사기가 높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일본의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쪽은 일본의 지도자가 눈이 작고, 키가 작다고 하였습니다. 오랜 내전이 끝난 뒤라서 조선을 침략할 여유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똑같은 상황을 보았지만 전혀 다른 내용으로 보고하였습니다. 당시 조선은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었고, 전쟁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결과는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일본의 침략이 있었고, 조선의 왕은 피난을 가야했습니다. 많은 백성이 일본군에 의해서 죽었습니다.
비슷한 이야기를 성서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 전에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정탐꾼의 보고는 달랐습니다. 한쪽은 가나안 땅에 사는 사람들이 강하다고 보고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가나안 땅을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은 마치 메뚜기처럼 보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은 실망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쪽은 하느님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신다고 보고하였습니다. 주님 마음에 들기만 하면, 그분께서는 가나안 땅으로 데려가셔서 그곳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라고 보고하였습니다. 가나안 땅에 사는 사람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이끄심에 따라서 용기를 내었던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코로나19에 대해서도 판단이 달랐습니다. 한국은 메르스를 경험했기 때문에 코로나19의 심각성을 알았고, 철저하게 대비하였습니다. 마스크 착용이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확산의 방지를 위해서는 진단키트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였고, 진단키트의 생산을 긴급 승인하였습니다.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서 역학조사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검사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중환자를 위한 병상을 미리 확보하였습니다. 코로나19에 대한 방역의 모범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부 국가는 코로나19의 심각성을 몰랐습니다. 당연히 거리두기를 소홀히 했습니다. 마스크 착용도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코로나19는 소리 없이 확산되었고, 엄청난 피해를 감수해야 했습니다. 코로나19와 같은 바이러스에 의한 감염병은 국제적인 연대가 중요합니다. 백신과 치료제는 공공재로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기도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하나는 바리사이파의 기도이고, 다른 하나는 세리의 기도입니다. 바리사이파는 기도할 때, 자신이 무엇을 하였는지를 이야기 하였습니다. 단식을 하였고, 봉사를 하였고, 십일조를 충실하게 바쳤고, 율법을 잘 지켰고, 죄인들과 함께 하지 않았다고 하느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렇게만 살아도 그다지 나쁜 것 같지 않습니다. 사실 그렇게 살기도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세리의 기도입니다. 세리는 자신이 무엇을 하였는지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얼마나 잘 하였는지, 무엇을 얼마나 잘못했는지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고, 판단하시는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였습니다. 나의 행위로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세리의 기도를 더 높게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봉헌’을 하느님께서는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세리의 겸손한 기도’를 잘 들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예수님을 봅니다. 묵묵히 그분의 십자가를 지고 갔던 시몬을 봅니다. 예수님 얼굴에 흐르던 피와 땀을 닦아 드리던 베로니카를 봅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주님 저를 기억해 주세요.’라고 했던 죄인을 봅니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신의입니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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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성전이라는 말을 들으면 흔히 제사를 떠올립니다. 성전에서 바치는 예배를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이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전은 제사만 드리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많은 기록들이 성전을 기도하는 장소로 표현합니다.
우리가 감실에 모셔진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 기도하고 성체 조배를 하는 것처럼 유다인들도 성전을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집으로 생각하고 그곳을 찾아 기도를 바쳤습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갑니다. 유명한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입니다. 바리사이의 기도는 감사의 기도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며” 기도를 바칩니다. 그는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기에 하느님 앞에서 “꼿꼿이 서서” 기도합니다. 감사 기도이지만 다른 이들과 비교하며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합니다. 그의 눈은 자신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향하고 그들의 죄를 향합니다.
반면에 세리는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자비를 청합니다. 그의 눈은 자신을, 하느님 앞에서 한없이 부족한 자기 자신을 향합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나’의 대화입니다.
의롭게 되어 돌아간 사람은 세리입니다. 의로움은 스스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과 비교해서 의로운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의로움을 구원이라는 말로 바꾸어서 이해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은 스스로 쟁취하거나 다른 이들과 비교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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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두 사람의 의로움을 보고 있습니다. 하나는 바리사이의 의로움으로 나무랄 데 없는 신앙생활과 희생을 바치는 사람의 것입니다.
외형적으로는 참으로 의로운 사람이었지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자랑합니다. 그는 기도 중에 자신을 죄인과 비교하며 훌륭한 사람으로 자처합니다. 죄인과는 다른 존재라는 우월감에 기초한 그의 삶은 교만에 빠져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다른 하나는 세리의 의로움으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느님의 구원과 자비를 간청하는 사람의 것입니다. 겸손한 세리의 기도는 하느님의 자비를 끌어와 영혼의 구원을 이룹니다.
바리사이의 기도에는 자신의 욕심으로 하느님께서 자리하실 여지가 없지만, 세리의 기도에는 영혼의 문이 열려 있어 하느님의 자비가 내리도록 만듭니다.
거룩하신 하느님 없이는 그 누구도 의롭지 않으므로 바리사이의 의로움은 거짓이 되지만, 세리의 의로움은 하느님과 함께한 진실이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섬기면서 자주 자신이 만든 희생 제물과 번제물을 바치려 합니다. 하느님께서 마련하시고 즐겨 받으시는 제물은 통회와 겸손의 제물입니다. 뉘우치고 억눌린 마음은 자신의 교만과 허영심을 벗어 던지고 하느님 앞에 자신을 낮추는 지혜를 갖게 합니다.
세리의 위대함은 낮춤과 비움에 있습니다. 세리의 기도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자신의 생활을 반성하고 뉘우치는 의로움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세리처럼 자신의 공로가 미약함을 인정하고 의로우신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신앙인은 치유받고 의로운 사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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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염철호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루카 복음 16장 14절-15절은 그들을 두고,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로 사람들에게는 높이 평가받지만 하느님 앞에서 혐오스러운 자들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런 바리사이가 오늘 비유에서는 “꼿꼿이 서서” 자신이 다른 사람들, 곧 강도 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 간음하는 자와 같지 않다는 것에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자신이 다른 이들과 다르다는 것에 감사드리는 이 기도 방식은 유다인들이 초세기부터 고유하게 바치던 기도 방식 가운데 하나였는데,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는 같이 기도하고 있던 세리를 지목하며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며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일주일에 두 번이나 단식하며, 십일조를 낸다고 자랑합니다.
바리사이와 달리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느님께 간청합니다.
이 모습을 두고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높일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질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죄인임이 드러나 하느님 앞에서 혐오스러운 자로 여겨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세리처럼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이웃을 업신여기는 법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웃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사랑합니다. 그런 사람만이 하느님 앞에서 의롭다고 불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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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를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에는 대조를 이루는 두 인물, 곧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여기는 죄인인 바리사이와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여기는 의인인 세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보는 ‘눈’이 서로 달랐습니다. 첫째는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서로 달랐습니다. 바리사이의 눈은 자신을 의롭다고 보는 눈이고, 세리의 눈은 자신을 죄인이라고 보는 눈입니다. 곧 한편에는 자신을 높이는 눈이 있고, 다른 편에는 자신을 낮추는 눈이 있습니다.
둘째는 타인을 보는 눈이 서로 달랐습니다. 바리사이의 눈은 타인을 업신여기는 눈이고, 세리의 눈은 타인을 중히 여기는 눈입니다. 곧 한편에는 꼿꼿이 서서 하늘을 향하는 눈이 있고, 다른 편에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눈이 있습니다. 그래서 타인의 가슴을 치는 이가 있고, 자신의 가슴을 치는 이가 있습니다.
셋째는 눈이 누구를 향하여 있는지가 서로 달랐습니다. 바리사이의 눈은 자신을 향하여 있고, 세리의 눈은 하느님을 향하여 있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는 스스로 의롭다 자신하고 혼자말로 기도하지만, 세리는 자신의 가슴을 치며 하느님을 향해 기도합니다.
그렇습니다. “바리사이는 혼자말로 기도했습니다.”
이 말의 원어를 직역하면, “자신을 향해 기도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루카 18,11)라고 말하지만, 실은 긴 독백으로 하느님께 설교하려 들었습니다.
그러니, 그는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자신을 위해 있어야 했습니다. 곧 하느님이 자신의 가치 확인과 자화자찬을 위해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우러르기보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자신을 앞세웁니다.
그러나 세리는 하느님을 향하여 있으며, 자신과 하느님의 거리를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그분을 감히 올려다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분 앞에서 자신이 진실로 누구인지를, 곧 죄인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가슴을 치고. 회개의 마음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에 자신을 맡깁니다.
시나이의 성 이사악은 말합니다. “자신의 죄를 아는 이가 기도로 죽은 이를 살리는 이보다 위대하다. ~자기 자신 때문에 한 시간 동안 우는 이가 온 세상을 통치하는 이보다 위대하다. 자신의 나약함을 아는 이가 천사들을 보는 이보다 더 위대하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겸손’은 하느님 앞에 있기에, 자기를 비하하거나 경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자비가 필요함을 알고 그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낮추되, 결코 자신을 하잖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을 중히 여기고 자비를 구하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도 귀중하게 여기고 중시합니다. 그러기에, 겸손은 자신을 낮추기만 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우러르며 존경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실은,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중시 여기지 않는 사람은 오히려 교만한 사람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마치신 다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8,14)
그러니 언제나 주님 앞에 서 있고, 주님을 향하여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분의 자비를 입고서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자비가 아니면 살 수가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필요한 것은 당신의 자비, 그 외엔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가슴을 치며 하느님을 향해 기도합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루카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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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8,14)
주님!
낮추는 이가 되게 하소서.
타인의 평가나 꾸짖음을 물리치지 않게 하소서.
인정할 줄을 알고 굽힐 줄을 알게 하소서.
타인을 차별하지도, 업신여기지도 않게 하소서.
존중하고 존경하게 하소서.
언제나 당신 앞에 서 있는 자 되게 하소서!
제 자신을 내세우지도, 숨기지도 않게 하소서.
용서를 청하고 자비를 구하게 하소서.
오, 주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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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 18,13b)
<겸손과 자비!>
'겸손과 자비'는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언어'입니다.
오늘 복음은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자신은 죄인이 아니며,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친다는 자신의 의로움을 늘어놓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둘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이렇게 마무리 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8,14)
완전하신 하느님 앞에서 내가 늘어놓을 수 있는 자랑거리가 과연 있을까? 우리를 위해 당신의 전부를 내어놓으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앞에서 자신만만한 사람이 과연 있을까?
사순시기는 마음을 모아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을 기억하면서, 이 사랑 안에 머무는 시기입니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 앞에서 우리는 죄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돌아온 탕자와 세리와 같은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루카 15,21)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 18,13)
그렇기 때문에 지금 나에게 꼭 필요한 것은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이 자비가 나를 구원으로 이끄는, 나를 살리는 힘이며 근본입니다.
오늘도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나에게 주어진 성소에 최선을 다하고, 겸손하게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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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을 만난 사람>
루카 18,9-14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하느님을 만난 사람>
스스로 의롭다하는
바리사이가
하느님을 만나러
길을 나섰답니다
그 길에
강도짓을 하는 사람
불의를 저지르는 사람
간음을 하는 사람
세리 같은 사람을
만났답니다
그리고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치는
너무나도 잘난 자신을
만났답니다
그러고는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왔답니다
하느님을 만나지 않고
하느님을 만날 필요도 없으니까요
그저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칠 수밖에 없는
세리는
하느님을 만나러
길을 나설 수조차 없었답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다만 제 자리에서
숨죽이며 읊조릴 수밖에요
하지만 세리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하느님을 만났답니다
바로 그곳에 하느님께서 계시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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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저는 새벽마다 샤워합니다. 만약 샤워하지 않으면 괜히 몸에서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찝찝한 기분이 듭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새벽, 그날도 새벽 운동을 하고서 샤워를 하는데 문득 어렸을 때가 생각났습니다. 그때는 샤워를 잘 하지 않았습니다.
학교에서 신체검사가 있을 때만 목욕탕에 가서 목욕했고, 겨울에는 뜨거운 물이 아깝다고 커다란 빨간색 고무 다라(‘다라이’가 일본말이지만, 이렇게 써야 더 쉽게 이해될까 봐 그냥 씁니다)에 받아놓은 뜨거운 물에 나이순으로 온 식구가 목욕하곤 했습니다.
늘 마지막 차례였던 제가 목욕했던 물을 깨끗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그때에는 더럽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한 달에 한두 번 목욕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지금 사람들은 대부분 매일 샤워를 합니다. 그래서 늘 깨끗한 몸을 유지합니다. 하지만 마음이 깨끗하기 위한 노력은 얼마나 하고 있을까요? 어렸을 때 연중행사로 목욕하는 것처럼, 일 년에 두 번 판공성사 하는 것으로 깨끗하고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요?
분명히 깨끗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깨끗하다고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자신은 옳고 남은 틀렸다며 너무나 많이 판단과 단죄를 반복하는 우리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사이가 바로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스스로 아주 잘난 줄 아는 바리사이는 오만과 자만에 빠져서 자기가 가장 큰 죄인인 줄 모르고 터무니없이 남만 비난하고 있었지요. 이 바리사이는 찬양 제물로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이 빠지기 쉬운 교만의 위험을 잘 보여줍니다.
그는 참회라는 유익한 치료제를 통해 자기 병을 고백하는 대신, 자신은 건강하고 다른 사람들은 병든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그에 반해서 세리는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오히려 가슴을 치며 자신의 죄가 많음을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그의 기도하는 자세는 커다란 겸손을 보여줍니다. 그는 자비를 간청했고 의로움을 인정받았습니다. 그는 남과 견주어 자기가 더 낫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가 가장 비천한 죄인임을 알고 고백합니다.
자신의 의로움을 고백하기보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가 더 어려운 법입니다. 이렇게 용기 있게 자신을 낮추어 죄를 고백하는 사람에게 이런 원칙의 말씀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누가 더러운 물속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이 물에서 나올 생각은 하지 않고 계속 그 안에 있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볼까요? 그렇다면 지금 내 마음은 어디에 있는지 보십시오.
혹시 더러운 죄와 악에 빠진 것은 아닐까요? 당장 빠져나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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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잘못할 수 있습니다.>
어느 고속버스 기사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어가면서 안내 방송을 합니다. “잠시 후, 이 차는 여러분의 목적지인 부산을 향하기 전에 잠시 쉬어 가도록 하겠습니다.” 이 안내 방송에 승객들은 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납니다. 그들은 부산이 아니라, 광주로 가야만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승객 자신들은 스스로 잘못 탔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버스 기사가 잘못 탄 것이었습니다. 버스에는 분명히 ‘광주행’이라는 행선지가 적혀 있었습니다.
버스 기사가 잘못 탔던 것입니다. 다행히 휴게소에 가느라 잘못된 점을 알게 된 것이지, 안 그랬으면 모두가 광주가 아닌 부산에 갈 뻔했던 것이지요.
우리는 모두 실수할 수 있고, 또 잘못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늘 겸손한 모습으로 이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실수와 잘못을 인정하면서 살아갈 때, 우리가 가야 할 목적지인 하느님 나라에 서로서로 고쳐 주며 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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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밥맛 떨어지는 사람>
초등학생의 눈에는 어떤 사람이 제일 싫은 사람일까요? ‘잘난 척하는 사람, 자기 자랑하는 사람이 제일 밥맛 없답니다.’ 자기 자랑을 하는 사람은 결코 현명한 사람이 아니며, 사람들은 자기 자랑 하는 사람을 싫어합니다.
자기를 드러내고 남을 깎아내리기 좋아하는 사람은 인정받지 못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그럼에도 자격지심에서 자기를 내세우지 못해 안달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하고 가슴을 치는 세리와, “저는 세리와 같지 않고 일주일에 두 번씩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하고 자랑하는 바리사이 중 누가 하느님께 의롭게 인정받은 사람인가?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집니다.
자기만 옳은 줄 믿는 것은 무지에서 나오는 과오요, 남을 업신여기는 것은 교만에서 오는 죄입니다. 사람들은 겉모양을 보고 ‘의인이다, 불의한 사람이다.’ 판단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속마음을 보십니다.
인간은 겉모양을 보지만 하느님께서는 속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자신을 포장하지 않고 중심을 보시는 주님의 눈에 들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람에게 기대지 말고 주님께 의탁해야 합니다.
루카 복음에 보면 베드로는 밤새 고기잡이에 실패하였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후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고 그것을 통해서 주님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깊은 곳에 그물을 치라는 한 말씀에 예수님을 모시기에 너무도 부족한 자신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이제 고기가 보이지 않고 주님만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루카 5,8) 하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도 주님 안에서 자신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람들은 장애물이 밖에 있으면 쉽게 피해 다닙니다. 그러나 장애물이 자기 안에 있으면 그 장애물을 피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맙니다. 밖에 있는 큰 장애물보다 안에 있는 장애물이 더 무섭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장애를 거두어 주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나의 장애를 없애 주시고 나를 통하여 당신의 일을 하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뜻에 응답하는 데 있어 주저함이 없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행여 자기만 옳다는 잘못이나 남을 무시하는 죄는 짓지 않기를 바랍니다. 모쪼록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하는 은총의 사순절이 되길 희망합니다.
‘자기를 높이면 남들이 낮아지고 낮아진 사람들이 그를 또한 끌어내립니다. 자기를 낮추면 남들이 높아지고 높아진 사람들이 그를 더욱 높여 올립니다. 주는 대로 받는 것이 세상의 어김없는 법칙이기 때문입니다.’(이현주)
마리아는 외쳤습니다.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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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너 자신을 알라>
-회개, 겸손, 지혜-
가톨릭 교회 인사중 교회 밖에 널리 알려져 있는 명망있는 분은 아마 강우일 베드로 주교일 것입니다. 주교의 잊혀지지 않는 지혜로운 말마디가 있습니다. 자기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하느냐? 방법을 물었을 때 “절대 반응하지 않고 ‘그러려니’ 하고 그냥 지나친다.” 하신 답변입니다.
어제는 한겨레 신문에 ‘그리움이라는 능력’이란 주교의 긴 칼럼이 있었습니다. 일부 인용합니다. 고정 필자로서 주기적으로 글이 오릅니다.
“요즘 내 안에서 도대체 ‘그리움’이란 뭘까 하는 물음이 자꾸 떠오른다. ‘그립다’라는 말의 뿌리에는 ‘사랑’이 자리 잡고 있다. 인간에게 그리움이란 능력이 있음은 대단한 긍정적인 에너지다. 그리워함은 사랑하는 존재를 향해 나아가는 영혼의 에너지다. 시련과 도전에 시달려 좌절하고 의기소침해 있다가도 사랑하는 이에 대한 그리움은 에너지가 작동하면 포기하지 않고 원기를 회복할 기력이 생긴다. 임종을 맞아 체력이 다하고 마지막 숨을 몰아쉬던 병자도 그리운 혈육이 돌아와 이름을 부르면 감고 있던 눈을 뜨고 마지막 사랑의 시선을 보낸다.”
참 곱고 깊고 아름다운 순 우리말 ‘그리움’이요, 믿는 이들의 궁극의 그리움의 대상은 하느님입니다. 이것이 결정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임종어입니다. “하느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성녀 소화 데레사의 임종어였고, “보라, 신랑이 오신다!” 환호와 더불어 임종한 성녀 젤투르다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근원적 실존적 ‘외로움’에 대한 유일한 처방은 주님께 대한 그리움뿐입니다. 사실 저는 외로움을 느껴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외로움은 즉시 주님께 대한 그리움으로 전환되기 때문입니다. ‘수도자란 누구인가? 라는 제 글의 일부를 인용합니다.
“하느님을 찾는 갈망이 있어 수도자다. 하느님을 찾는 갈망이, 그리움이 사라지면 수도생활은 몰론 영성생활은 끝이다. 하여 수도자를 갈망의 사람, 그리움의 사랑이라 부르기도 한다. 하느님을 찾는 갈망이, 그리움이 있을 때 저절로 깨어있게 되고 기도하게 된다.”
아무리 세월 흘러 나이들어도 주님께 대한 그리움은 날로 깊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영혼의 젊음의 비결도 주님께 대한 날로 깊어지는 그리움에 있습니다. 바로 사순시기는 주님께 대한 그리움을 회복하는 시기입니다. 이런 주님을 찾는 그리움은 회개로 표출되기 마련입니다.
우리만 주님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도 우리를 그리워하십니다. 사랑의 시인이자 신비가이고 예언자인 호세아는 그리운 주님께 돌아갈 것을 호소하십니다. 바로 그리운 주님께 돌아가 주님을 만나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자, 주님께 돌아가자. 그분께서 우리를 잡아 찢으셨지만 아픈데를 고쳐 주시고, 우리를 치셨지만 싸매 주시리라.---그러니 주님을 알자. 주님을 알도록 힘쓰자. 그분의 오심은 새벽처럼 어김없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비처럼,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시리라.”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봄비처럼 오시어 그리움에 목마른 우리 마음을 촉촉이 적셔 주시는 주님의 은총입니다. ‘봄비’하면 떠오르는 제 짧은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마음을 촉촉이 적시는 봄비
하늘 은총
내 딸 아이 하나 있다면
이름은 무조건 봄비로 하겠다”-2005.3
영원한 그리움의 대상인 주님을 만날 때 해갈되는 그리움입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인 절망이나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도, 무지와 무의미의 마음병에 대한 유일한 처방도 주님뿐입니다. 하여 매일미사가 그렇게 고맙고 기다려지는 것입니다. 하느님 주신 참 고마운 선물이 이 거룩한 미사입니다.
바로 이런 주님께 대한 그리움으로, 가난한 빈 마음으로 주님을 찾는 아름다운 영혼이 바로 복음의 세리입니다. 봄비를 목말라하는 메마른 대지처럼 주님을 향해 활짝 마음을 열어 기도하는 가난한 영혼의 세리입니다.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합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우리가 궁극에 바칠 마지막 기도는 이 자비송 하나뿐입니다. 미사 시작전 세 번 연속되는 자비송도, 동방수도승들이 바치는 ‘예수님 이름을 부르는 기도’도 이 말씀에 근거합니다. 바로 이런 주님의 자비를 청하는 빈 마음으로 미사에 참석하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다음 주님의 말씀이 참 통쾌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봄비와 같은 주님 은총으로 촉촉이 젖은 의로운 영혼이 되어 귀가한 겸손한 세리입니다. 참으로 자기를 아는 회개와 겸손, 지혜의 사람이 세리입니다. 정말 회개를 통해 자기를 아는 자가 겸손하고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참으로 자기를 알면 알수록 주님의 은총에 감격하게 되고 날로 너그럽고 자비로워져 결코 남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합니다.
하느님도 모르고 자기도 모르는 무지에 대한 유일한 처방은 회개뿐임을 깨닫습니다. 하여 사순시기 그리도 많이 강조되는 회개입니다. 하느님 없이는 회개도 없고, 회개 없이는 자기를 아는 겸손과 지혜도 불가능합니다.
세리와 대조되는 바리사이의 기도가 참 꼴불견입니다. 자기를 전혀 모르는 무지한 기도입니다. 똑같이 “오, 하느님!”으로 시작합니다만 세리와는 너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 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결정적으로 회개와 겸손이 없습니다. 참으로 회개가 힘든 것이 이런 바이사이처럼 외적으로 죄가 없어 보이는 모범적 종교지도자들입니다. 이건 주님과 소통의 대화의 기도가 아니라 일방적 자기자랑, 자화자찬의 독백입니다. 말그대로 하나마나 기도요 오히려 안했으면 좋을 기도입니다. 기도한다면서 남 판단하는 죄를 짓습니다. 바로 이런 이들에 대한 호세아를 통한 주님의 탄식 말씀입니다.
“에프라임아, 유다야, 내가 너희를 어찌하면 좋겠느냐? 너희의 신의는 아침 구름 같고, 이내 사라지고 마는 이슬같다.”
너무나 피상적인, 깊이가 전혀 없는, 알맹이가 없고 온통 껍데기만 번지지르한 무지한 바리사이들을 향한 말씀같습니다. 참으로 끊임없는 진정한 회개를 통해 날로 겸손하고 지혜로워지고 깊어지는 영혼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심중을 그대로 대변한 호세아를 통한 주님의 마지막 말씀 역시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
참으로 주님께서 바라시는 바 당신을 알고 나를 아는 신의와 예지, 겸손과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시간 회개한 우리 모두의 고질적 마음의 병인 무지와 허무, 절망을 치유해 주시고 신의와 예지, 겸손과 지혜를 선사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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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진심을 아는지 물으십니다.
"아픈 데를 고쳐 주시고 ... 싸매 주시리라. ... 살려 주시고 ... 일으키시어 우리가 그분 앞에서 살게 되리라."(호세 6,1-2)
주님과 맺은 계약에 불충했던 이스라엘이 그분께 매를 맞아 몰락과 유배의 쓴 잔을 마시지만, 주님은 머지 않아 당신 계약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되돌려 주십니다. 주님은 벌을 위해 벌을 내리시는 게 아니라 그들을 주님 백성의 자리, 순결한 신부로 되돌리시려고 잠시의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이지요.
"주님을 알자. 주님을 알도록 힘쓰자."(호세 6,3)
그래서 호세아 예언자는 주님을 알자고 독려합니다.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가 무엇인지 알자고 말입니다. 그분은 작은 실수도 엄벌에 처하시는 무섭고 혹독한 하느님이 아니라 자비와 사랑이 넘치는 분이심을 인식할 때 백성과 주님와 관계는 크게 달라질 것이니까요.
"오, 하느님! 제가 ... 저 세리와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루카 18,11)
종교와 학문으로 백성의 윗자리를 차지하는 바리사이들은 실제로도 율법을 열성적으로 지키는 금욕적인 이들입니다. 그들은 당장 하느님 앞에 선다 해도 그다지 죄송하거나 두려울 일이 없는, 그래서 구원을 따논 당상처럼 여겨도 이상하지 않은 이들입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 18,14)
같은 기도의 현장에서 전혀 다른 고백이 들립니다.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주님께 아룁니다. 세상이 손가락질하는 자신의 부정함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지요. 세리는 율법상으로도 죄인일뿐 아니라 실제로도 가난한 이들을 등쳐 제 배를 채우는 탐욕스런 악인이니, 주님의 자비밖에는 기댈 곳이 없는 사람입니다.
바리사이와 세리, 성전 안에서 하느님 현존 앞에 선 이 두 사람의 기도가 이처럼 다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이 비유로 바리사이의 평소 열성을 비난하시거나 세리의 잘못을 두둔하시려는 게 아닐 겁니다. 사람의 기도에는 그들이 하느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또 알고 있는지가 드러나기 마련이니, 이 기도를 통해 진정한 의로움이 어디에 있는지 숙고하도록 초대하시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비유 속 바리사이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자신이 완벽하고 철저해야 하느님께서 보아주신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인간적인 힘을 총동원해 사람에게도 주님께도 인정받는 존재가 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요. 그리고, 의도만큼 자기 관리가 되면 스스로를 하느님의 도움이 필요치 않는 존재로 여깁니다. 그래서 그의 기도는 자기 업적과 공치사, 험담과 고발의 혼잣말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반면 세리와 같은 이는 하느님의 자비 밖에는 희망이 없는 존재입니다. 세상에도 고개를 들 수 없고 하느님께도 늘 송구한 죄악에서 벗어나려 해도 그때만 반짝하다가, 또다시 자기 죄의 웅덩이에 몸을 담그고 뒹구는 가련한 실존의 소유자입니다. 그런 주제에도 하느님을 영영 떠나지 못하고 부정하고 불결한 몸과 마음인 채로 자석에 끌리듯 다시 주님 앞에 섭니다. 그리고는 고개도 못 들고 가슴을 치며 통회하고 슬퍼하지요.
비록 율법을 지키지도 않고 신학도 모르는 죄인이지만 세리는 하느님이 무한히 자비하신 분이심을 압니다. 그래서 염치없지만 다시 돌아오길 반복하지요. 그렇다고 자비를 믿고 죄를 즐기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의 기도는 진정으로 통회하는 겸손한 영혼의 그것이니까요.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8,14)
예수님은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간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겉보기에 그럴듯하게 모범적인 바리사이의 독백보다 세리의 자비 청원이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적 질서를 제대로 담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하느님은 당신 앞에 나아와 기도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속삭이십니다. " 내 앞에서는 완벽하려 하지 않아도 된다. 부족하고 때 묻고 일그러지고 깨져 있어도 괜찮다. 보잘것없이 작아도 된단다. 아니, 작으면 더 좋다."
사랑하는 벗님! 주님 앞에 머무르는 우리 각자의 기도를 깨어 의식해 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인식하는지에 따라 기도의 색깔과 온도가 참 많이 다르겠지요. 주님이 작고 낮추어진 우리 영혼을 사랑으로 보듬는 분이심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기도 안에서 그분과 더 친밀해지고 뜨거워질 것입니다. 자비이신 분 앞에 엎드려 자비를 간청하는 이는 참으로 복됩니다. 벗님이 바로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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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두 개의 그네를 건너기 위해 지금 잡은 그네의 손을
믿음을 갖고 놓고 허공으로 몸을 날려야 한다.
헨리 나웬 신부가 모처럼 아버지를 모시고 서커스를 구경 갔는데,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뛰는 서커스를 하고 있었습니다. 두 개의 그네를 타기 위해 이쪽 그네에서 저쪽 상대의 그네로 건너뛰기 위해서는 지금 타고 있는 그네를 움켜잡은 두 손을 놓고,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을지도 모르는 두려움 속에서도 저쪽 그네에 있는 사람이 잡아 주리라는 믿음(확신)을 갖고 온몸을 던지는 것입니다.
♣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댔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러자 베드로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다.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졌다. 그래서 물에 빠져들기 시작하자,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다. 예수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고,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그들이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마태 14,2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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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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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C88VANVeykM&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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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루카 18, 14)
나의 기도는
어떤한지를
성찰하게 된다.
오늘 우리는
저마다의
삶에서
기도와 함께
살고있다.
자신을
제대로
알고 있다는
착각과 교만을
치유하는
기도이다.
이 모든 것에
앞서
하느님을
생각하게 하는
은총의
사순시기이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가장 큰
은총이며
행복이다.
하느님을 통해
우리자신을
제대로
보게 된다.
제대로 보아야
제대로 사랑할
수 있다.
기도와 사랑
기도와 창조는
떨어질 수
없는 하나이다.
기도는
정직한
자기고백이다.
부족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참된
기도이다.
또한 기도는
비참함과
거짓 속에
살고있는
거짓 자아와의
결별이다.
결별없이는
결단도 없다.
그래서
기도는
자기만족이
아니라
자신을
버리고
비워내는 것이
기도의 여정이다.
무너진 기도를
회복하는 것은
우리의
정직한 성찰이며
진실한 고백이다.
우리의 내면을
만나지 않고서는
기도는
깊어질 수 없다.
우리의
마음까지
모두
열어드리고
내어드리는
기도로
우리는
새로워진다.
진심어린
일상의 기도가
일상을 살리는
회개임을
믿는다.
정직하게
봄꽃이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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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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