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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7일(월) 맑음
오전 9시 10분 우에노역 출발, 열차로 역사의 서울, 매화의 서울로 유명한 미토(水戶)를 방문했다.
미토에 도착한 것은 오전 11시,42분이었다.
미토는 에도 바쿠후(江戶幕府)의 신판(親藩)인 미토한(水戶藩)이 설치되어 있었던 곳으로, 통우호쿠(東北) 제번(諸藩)에 대한 첫째 방어지로서 요충지였던 것이다.
오늘날은 이바라기(茨城) 현청의 소재지로 역사의 서울에 걸맞은 조용한 작은 도회지다.
우리는 먼저 토우쇼우(東照)신사에 참배하고, 유서 깊은 코우도우칸(弘道館)을 방문했다. 코우도우칸은 도쿠가와 나리아키(德川齊昭)(烈公)가 창설한 것으로, 한시(藩士)에게 문무를 강론한 곳이다.
그리고 렛코우(列公)가 코우도우칸을 창설한 동기는, 선대의 통치자인 기코우(義公)가 국학을 설치할 의지가 있었으나, 그때가 아직 오지 않아서 이루지 못한 것을 렛코우(烈公)는 조상의 의지를 잘 승계하여, 이것의 실현을 유신(儒臣)들에게 자문을 얻어 코우도우칸을 창설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리하여 친히 기문(記文)을 찬(撰)하여 건학의 큰 뜻을 서술한 것이다.
그것과 관련 된 기문을 들면,
弘道者何, 人能弘道也, 道者何, 天地之大經, 而生民不可須臾離者也, 弘道之館何爲而設也, 恭惟, 上古神聖立極乖統, 天地爲焉, 萬物育焉, 其所以照臨六合, 統御宇內者, 未嘗不由斯道也, 寶祚以之無窮, 國體以之尊嚴, 蒼生以之安寧, 蠻夷戎狄以之率服, 而聖者神孫, 尙不肯自足, 樂取於人以爲善, 及若西土三代之治敎, 資以贊皇猷, 於是斯道愈大愈明, 而無復尙焉, 中世以降, 異端邪說, 誣民惑世, 俗儒曲學, 捨此從彼,皇化陵夷, 禍亂相踵, 大道之不明於世也, 盖亦久矣, 我東照宮, 揆亂反正, 尊王攘夷, 允武允文, 以開太平之基, 吾祖威公, 實受封於東土, 夙慕日本武尊之爲人, 尊神道, 善武備, 義公繼述, 嘗發感於夷齊, 更崇儒敎,明倫正名, 以藩屛於國家, 以來百數十年, 世承遺緖, 沐浴恩澤, 以至今日, 則荀爲臣子者, 豈可弗思所以, 推
弘斯道, 發揚先德乎, 此則館之所以爲設也, 抑夫祀建御雷神者何, 以其亮天功於草眛, 留威靈於玆土, 欲原始報基本, 使民知斯道所由來也, 其營孔子廟者何, 以唐虞三代之道, 折衷於此, 欲欽其德資其敎, 使人知斯道之所以益大且明, 不偶然也, 鳴呼我國中之士民, 夙夜匪懈, 出入斯館, 奉神州之道, 資西土之敎, 忠孝無二, 文武不岐, 學問事業, 不特其効 敬神崇儒, 無有偏黨, 集象思宣群力, 以報國家無窮之恩, 則豈徒祖宗之志弗墜, 神皇在天之靈, 亦將絳鑿焉, 健斯館, 以統其治敎者誰, 權中納言從三位, 源朝臣齊昭也.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기록은 바로 미토학(水戶學)의 기원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또 황도유학의 확립이 부르짖어 지고 있는 오늘날에, 우리는 이 기록을 귀감으로 하고, 재삼 음미하여, 미토학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관내에는 노매화가 그 옛날을 말하듯 서 있다. 이 노매화의 사이를 자세를 낮추어 지나가면서 관 흔적을 거니는 것도 어쩐지 풍류가 있었다.
먼저 공자묘가 보였다. 여기에는 공자 한 좌만 모시고, 위패가 안치되어 있다.
이 한 가지 사실만 미루어 보아도, 렛코우가 얼마나 유도의 진흥에 정성을 바쳤는지 엿볼 수 있다.
또 카시마(鹿島)신사가 있었다. 여기에는 공의 보도를 수납하여, 신체(神體)로 삼았다고 한다.
관의 기념비는 이 사(社)쪽에 있으며, 공의 붓에 관계있다고 한다.
다음으로 관내의 문무교장의 제도를 살펴보기로 한다. 교장은 문무 두 관으로 나누어져서, 무관은다시 병학(兵學), 군용, 검술, 창술, 이아이(居合),173) 나기나타(薙刀),174) 자루가 긴 칼, 유도, 마술(馬術), 포술 등 여러 분야에 나누어졌으며, 문관은 거학(居學), 강습, 구독(句讀), 기숙(寄宿) 등의 네 개의기숙사를 두고 있다.
다음은 코우도우칸이 있었던 터 참관을 끝내고, 석유(碩儒) 후지타 도코(藤田東湖) 선생의 묘소를 참배하고 토키와(常盤)공원으로 향했다. 고래로 일본의 세 공원으로서는, 오카야마(岡山)의 코우라쿠엔(後樂園)과 카나자와(金澤)의 켄로쿠엔(兼六)공원 및 미토의 토키와 공원이 나란히 불렸다고 한다.
그런데 이 공원의 내력을 살펴보자. 1832년 번주(藩主) 렛코우가 이곳의 풍광을 사랑하여, 유식소(遊息所)로
173) 한 쪽 무릎을 세우고 있으면서 빨리 칼을 뽑아서 적을 베는 기술.
174) 칼끝이 휘어진 칼로 긴 손잡이를 붙인 칼.
정한 것으로 시작된다.
그리하여 렛코우는 매화나무를 수천 본을 원내에 심고, 또 잔디밭에는 싸리(萩)나 철쭉을 심어서, 스스로 카이라쿠엔(偕樂園)이라고 명명하여, 널리 서민의 유람에 제공하고 함께(偕)즐겼다고 전하고 있다.
수천 주나 되는 늙은 매화나무는 생전의 렛코우를 생각나게 하고, 노송은 그 사이사이에 점철하며, 또 싱싱한 이끼는 그 뿌리들을 뒤덮어서 원내의 심오함을 더하여 한층 고아(古雅)한 취향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고아진진(古雅津津)한 원내를 소요하는 일행은 장도의 곤핍도 잠시 잊은 듯 유유자적하며 시상이라도 떠 올리는 듯 보였다.
우리는 먼저 그 이름에 걸맞은 토옥천(吐玉泉)의맑은 물로 입안을 헹구고, 몸을 한층 맑혔다.
그리고 호문정(好文亭)에 이르렀다. 카이라쿠엔의 가경(佳景)은 여기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상(亭上)에 올라가서 선파호(仙坡湖)의 벽파여려(碧波麗驪)한 흰 돛배를 띄운 경치를 바라보면 몸이 도원의 선경에 있는 듯한 느낌을 일으키게 한다.
그리하여, 누구나 그 미경의 형용에 괴로워할 것이다. 오직 한 편의 시나 다름없다.
한 폭의 그림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가천(嘉川) 씨는 이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상찬하여,
好文亭上客徘徊, 滿目平湖一鏡開, 秋色橋村仁樹暮, 漁郞一一貫魚回.
라고 읊었다.
또 이 호문정에는 선제(先帝)폐하가 동궁이었을 때 계시던 때의 옥좌가 있다.
다음으로 우리는 별격 관폐사(官幣社) 토키와(常盤)신사에 참배했다.
이 신사는 카이라쿠엔의 동쪽 구석에 있으며 1931년에 건조된 것이다.
제신은 구 번주인 미나모토노 미츠쿠니(源光圀, 義公)와 미나모토노 나리아키(源齊昭, 烈公)의 두 분 신이다. 메이지대제께서는, 두 공이 앞뒤로 서로 이어받아, 황도의 천명, 강상(綱常)175)의 뿌리박음을 했기 때문에, 메이지유신의 융성이 열림과 동시에, 국가의 기초를 공고하게 한 것은 실로 천고에 탁월한 공덕을 가상하시어, 1869년에는 종(從) 일위(一位)를 보내시고, 1873년에는 두 공의 사당에 토키와신사라는 호를 주신 것이다.
또 다시 기코우(義公)에게는 1900년에 마찬가지로 정(正) 일위를 주신 것이다.
다음은 쇼우코우칸(彰考館)을 참관했다. 쇼우코우칸은 토키와신사의 남쪽 낭떠러지 아래에 있으며,도쿠가와가(家)의 문고가 있다. 그리고 유신 이전에는 성중(城中)에 있었으며, 대일본사의 편찬소였던 것이다.
이 창고(彰考)라는 두 글자는 좌전서(左傳序)에 창왕고래(彰往考來)라고 하는 데에서 나왔다는 것으로서, 현재 있는 쇼유코우칸의 액자는 서산공(西山公)의 필치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옆에 있는 문고진열실에는, 대일본사(大日本史)의 초고가 있으며, 고인(古人)의 위업을 생각나게 한다.
이 외에도 대일본사의 판목, 의편공집(義編公輯)의 예의류전(禮儀類典), 코우도우칸 학생의 답안 등이 참관자의 눈을 끌고, 특히 독일병서와 난독(蘭獨)자전의 사본 같은 것은, 오직 고인의 노고에 다만 머리가 숙여질뿐이다.
우리는 쇼유코우칸의 참관을 끝내고, 선파호반에 있는 숙사 청향정(淸香亭)에서 몸을 풀었다.
또 밤 8시부터는 토키와신사 사무실에서, 당지의 중학교교장 혼다(本多) 씨의 미토학에 대한 강연이있었다.
○ 미토 도중에서
好文亭上客徘徊, 沸目平湖一鏡開, 秋色橋村紅樹暮, 漁郞一一貫魚回. 가천구사(嘉川久士)
175)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을 아울러 이르는 말. 곧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이른다. 삼강오상.
萬千景物一束收, 白首萍鄕作遠遊, 湜興付吟忘旅苦, 畵中看過幾名州. 가천구사(嘉川久士)
○ 미토 카이라쿠 공원을 전망하면서
玉泉湧出瑞龍山, 梅樹淸香衣不寒, 蘆鷹沙鴎無數下, 千波斜日一帆閒. 부산삼(富山森)
○ 미토 토키와(常盤) 신사
義烈兩工崇拜時, 尊王大道自然知, 水戶古蹟何處見, 忠碑文庫在於斯. 청하달빈(淸河達斌)
○ 미토 공자 묘(廟)에서
水戶文明何事施, 先崇萬世帝王師, 藏書七萬誰知否, 皇道情神儒學思. 청하달빈(淸河達斌)
‘미토학(水戶學)의 진수(眞髓)’[토키와(常盤)신사 사무소(社務所)에서]
이바라키(茨城)중학교장 혼다 후미오(本多文雄)
저는 지나 각지는 여기저기를 걸어서 보았습니다만, 불행히도 아직 조선은 본적이 없기 때문에 조선에 관한 사정은 완전히 장님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한 점을 언제나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가까운 장래에 한번 찾아뵙기로 하고, 그때는 잘 부탁합니다.
또 조선에는 친구도 많이 있고, 천하의 명승인 금강산도 있음으로, 꼭 가보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내지에 오셔서, 성지참배를 한다는 것은 매우 고마운 일입니다. 특히 이곳은 유교와 관계가 깊은 곳임으로 조선의 유림 층의 여러분이 이곳을 방문하신 것은 의의가 더한층 깊은 무엇이 있습니다.
저는 이 시간을 이용하여 대일본사 편찬을 중심으로 미토학이란 어떤 것이냐를 조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 미토는 도쿠가와의 막내를 책봉하여 미토한(水戶藩)이 있었던 곳으로, 지금은 이바라키(茨城)현청의 소재지입니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약 5백년전에는 아시카가(足利)학교가 있었던 곳으로, 문교 방면은 비교적 일찍 열렸던 것입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서 생각해 보면, 지금부터 1천년도 전에 츠쿠바산(筑波山)에 덕일(德一)이라는 법사가 있었는데 이 스님이 불교를 이곳에 가져온 것입니다. 그때부터 조금 지나서 카시마(鹿島)에 있는 덕일의 친구 최선(最仙)이라고 하는 스님이, 최선사(最仙寺)를 건립하여 크게 문화를 열게 된 것입니다.
즉 이러한 사람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미토문화를 여는 지반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최선은 사회사업을 크게 벌려서 지방 개발에도 적지 않는 노력을 한 것입니다.
또 덕일도 걸식을 하면서 불교전도에 전념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러한 고인의 신고(辛苦)가 무르익어서, 여기에 츠쿠바(筑波)의 문교가 발달하고, 또 미토의 문화발전에 기여한 것입니다.
불교가 차차 포교되어감에 따라 유교문화도 겨우 들어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무엇이라고 해도 불교의 경문이 한문인 관계로 불교가 들어오면 자연의 추세로 유교도 들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대체로 오래된 곳은 불교가 앞서서 발달하고 있습니다.
7백 년 전에 홍간지(本願寺)의 신란쇼닝(親鸞上人)이 츠쿠바 아래에 암자를 갖추고 벽에는 교행신증(敎行信證)이라고 하는 문구를 쓰고, 여기에서 정토진종(淨土眞宗)을 연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시의 사람들은 이 근처에 도서관 같은 책을 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카마쿠라(鎌倉)까지 가서 대장경을 보았던 것입니다.
불교에 이어서 유교가 미토에 들어왔습니다만, 정말로 유교가 미토에 들어온 것은 지금부터 3백년전입니다.
즉 도쿠가와의 막내인 도쿠가와 요리후사(德川賴房)가 초대 번주(藩主)에 봉해졌을 때부터입니다.
이코우(威公)는 35만석으로, 부가 충분하지 않는 성주로서 미토한의 통치를 담당했으나, 그 당시에는 번민(藩民)의 사기도 부력도 볼만한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다만 이코우는 경신사상이 강하고 또 학문을 좋아 했기 때문에 번민의 환심을 끌고 있었습니다.
이때로부터 점점 문교도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코우(義公, 光圀)의 대가 되어서는, 번민의 사기는 높아지며, 번민을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코우를 미토 코우몬(水戶黃門)으로서 숭배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미토학은 바로 기코우 대부터 싹트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제9대의 렛코우[烈公, 齊昭(나리아키)]가 번주가 되면서부터는, 미토학은 최성기가 되어, 번민은 물론 널리 국민이 기레츠(義烈) 두 공을 아울러 호칭하게 된 것입니다.
이 두공이 미토 번주의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기레츠 두 공은 국민숭배의 표적이 되었기 때문에 메이지 초년 조정에서는, 두 공의 사당에 토키와신사의 호를 하사했던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보신 쇼우코우캉은, 기코우의 대에 세우진 것으로서, 대일본사를 편집할 때 수집한 7만여 책의 일한서(日漢書)의 사료가 장치되어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수많은 진귀한 책이 있으며, 숫자로 보면 동경제대의 도서관에는 떨어지지만, 그 질로 보아서는, 뛰어난 것이 있습니다.
그와같이 미토학은 기코우의 힘에 의하여 토대가 만들어졌음으로 미토라고 하면 기코우, 기코우라고 하면 미토를 생각나게 할 만큼, 미토와 기코우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기코우는 대일본사의 편찬에 몰두한 것일까, 그 동기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 동기는 대일본사의 서문에도 표시되어 있는 것처럼, 기코우는 18세 때 백이전(伯夷傳)을 읽고, 결연하게 그 높은 충절을 사모하게 되고, 그 절개에 완전히 감화되어 대의명분을 추궁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결심한 것입니다. 라고 말씀드린 것은, 여러분도 이미 아시는 바와 같이, 주(周)의 무왕(武王)이 은(殷)의 주왕(紂王)을 치고 천하를 자기 손아귀에 넣었기 때문에, 백이숙제의 두 사람 형제는 무왕의 거사에 분개하여 주속불식(周粟不食)을 결심하여, 수양산에 은거해서 고사리를 먹으며 절개를 지켰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기코우는 백이숙제의 주검을 걸고 대의에 순사(殉死)한데 감격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대일본사를 만들게 된 첫째 동기인 것입니다.
또 내면적인 사정으로서는, 기코우는 일본 천하에 장군이 나서서 전제정치를 하는 것은 일본의 국체에 비추어 불합리가 천만부당이라는 것을 주장한 것입니다. 할아버지 이에야스(家康)공이 장군이 되어 정권을 쥐고, 천자는 은거하여 천황친정을 할 수 없는 것은, 일본국체에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장군을 넘어뜨려 국체의 본연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며, 그 당시로서는 완전히 얼토당토 않는 주장을 한 것입니다. 오늘날에로 말하면 진실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그 당시의 정세로 보아서말씀드리면, 격론 중의 격론이었던 것입니다.
기코우의 역할은 동북지방의 여러 번(藩)을 방어하고, 장군을 보좌해야할 미토 번주로 있으면서, 대의멸친(大義滅親)을 하지 않으면 참다운 일본의 모습은 밝혀지지 않을 것이라고 함으로, 대일본사를 만들 결심을 한 것입니다.
혹시 다른 수단을 써서 전쟁을 일으키고, 장군가를 멸망시킬 수도 있으나, 그렇게 되면 또다시 전국시대가 계속할 걱정도 있으며, 또 조정에서도, 그와 같은 내의(內意)를 내시(內示)하였음으로 현재는 실현이 불가능하다고 해도, 장래의 실현을 기대하여, 자연히 해결을 기다린다는 온건한 수단을 취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국민을 사상적으로 선도하여, 막정(幕政)의 잘못됨을 설명하고, 국체를 명징(明徵)하는 것이 이 문제해결의 첩경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대일본사 편찬의 동기인 것입니다.
기코우는 63세에 은거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동경대학의 아카몬(赤門)의 북쪽 제1고등학교가 미토 번주의 저택이 있었던 곳입니다.
매우 검소하고 보잘것없는 저택이었으나, 여기에서 은거생활을 하며, 또 모친을 위하여 구창사(久昌寺)를 건립하고, 그곳에 부속학교도 세운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정신도장 같은 것입니다.
대일본사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를 본받아서, 기전체(紀傳體)(입체적)라고 하는 체제를 채택한 역사입니다.
역사자료는 역역(歷歷)한 학자를 전국에 파견하여 수집한 것입니다.
그중에는 조선역사 동국통감 50권이 복간된 것도 있습니다.
그와 같이 기코우가 얼마나 학문을 즐겼느냐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도 동국통감의 활판본을 한 질을 갖고 있습니다.
대일본사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사마천의 사기를 본받아 만든 것이지만, 그 내용은 진무(神武)천황부터 고코마츠(後小松)천황에 이르는 사이의 천황기(天皇紀)(本紀)와 제신전(諸臣傳)(列傳)으로 되어 있어서 기코우가 재세 중에 엮은 초고는 기코우의 사망 후 15년에, 본기(本紀)와 열전(列傳)의 교정을 시작한 것입니다.
또 교정에 즈음하여서도 학자 간에 이론이 많아서 좀처럼 결착이 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또한 고인의 자손이 고충이나 항의를 신청 해 오기 때문에, 그 교정은 일대난관에 부딪힌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막부로부터는 대일본사의 편찬은 미토번으로서는 쓸데없이 재미없는 일이라고 미움을 받고, 또 조정에서도 시기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함으로써 반대를 했기 때문에, 기코우가 재세 중에 정리한 초고도 교정을 하지 못하고 지지부진하게 진척되지 못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4대, 5대,6대의 약 7십년간은 대일본사 편찬의 침체기로 보아야 하는 것으로, 여기까지를 전기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이었음으로, 수사(修史)의 책임을 맡고 있던 학자들도 일이 없었기 때문에 낮잠이나 자고 세월을 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학자의 실력도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그 후 분코우(文公)의 때에 이르러서는 대일본사 편찬 열이 부흥한 것입니다. 타치하라 수이켄(立原翠軒)(東里)이 후지타 유우코쿠(藤田幽谷)와 함께 일본사의 교감(校勘)176)을 하게 됨으로서, 이 편찬 사업은 순조롭게 진전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첨가해서 말씀드리면, 뒷날 수이켄과 유우코쿠와는 학문상 의견과 태도를 달리하여 양립하게 되어, 드디어는 유우코쿠는 수이켄의 문하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즉 양 선생의 주론은, 수이켄은 공리공론이나 영시(英詩) 서화를 좋아 하는 이른바 하이칼라 문예방면에
176) 비교해서 생각함.
치달은 면이 다분히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우코쿠는 이와는 반대로, 실학을 주장하고, 학문은 모두 다 인간생활에 도움이 되는 실학을 주장했던 것입니다. 결국 그 당시의 세태는 유우코쿠의 실학을 환영했기 때문에, 실학파가 이기게 되었습니다.
유우코쿠 선생을 중심으로 하는 세이란샤(靑藍社)에는 아이자와 세이시사이(會澤正志齊)와 토우코(東湖)의 양 선생이 중진이었으나, 이때 나리아키(齊昭)(烈公)가 번주가 되어, 이들 존황론자(尊皇論)와존황양이(尊皇攘夷)를 부르짖은 것이다. 그러나 바후쿠(幕府)는 기코우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아니라, 공의 주장을 정면에서 반대하고 견제했던 것입니다.
더욱이 당시의 바후쿠는 여러 번의 강경정 책에는 완전히 반대하여 수용하지 않았던 시대입니다.
이러한 정세였기 때문에, 드디어 존황양이론자의 일당은 모조리 유폐되었던 것입니다.
유폐된 기코우는 관복을 단정히 입고 종일 변하지 안 했다고 전해지지만, 그렇게도 기코우는 청렴고결한 분이었습니다.
후지타 토오코 선생도 마찬가지로 유폐되어, 저 유명한 정의가를 만든 것입니다.
그와 같이 유명한 존황론자가 많았기 때문에, 대일본사의 편찬도 마침내 순조롭게 진척하게 된 것입니다.
미토학은 대일본사 편찬 외에도 코우도우칸을 개설하여, 일본정신과 유교를 나란히 강구하여, 번정(藩政)에 도움 되게 함과 동시에 문교 향상에 기여한 것입니다.
또 한편에서는 조정에서 미토번에 대해서 해방(海防)을 명령했기 때문에, 렛코우는 번정의 경비를 절약하여 이것을 군비에 충당함과 동시에, 통치구역 내의 사원 분종을 징발하여 대포를 주조, 혹은 우옥통(又玉筒)(현재 동경의 유슈우칸에 보존) 등을 제조해서 해방에 힘을 기울인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천하정세는 아래다 위다 하고 들쭉날쭉이었기 때문에, 여론은 렛코우가 하고자 하는 일에 비방하는 것은 물론, 바후쿠는 영, 미, 러 등의 여러 나라가 침략함에도 불구하고, 렛코우를 중심으로 하는 양이론을 고집스럽게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해방을 위한 군비를 바후쿠는 렛코우가 모반한다는 혐의로 렛코우를 유폐한 것입니다.
좌우간 미토번에서 일어난 미토학은 대일본사의 편수와 왕정 부흥을 일으킨 힘이었습니다.
그리고 메이지유신이 되어 도쿠가와 바후쿠(德川幕府)가 대정(大政)을 봉환한 다음으로는, 도쿠가와가의 사업으로서, 대일본사의 편수를 계속하기로 하여, 쿠리타 히로시(栗田寬), 시미즈(淸水正健) 등의 학자들이나와서 이것을 담당했던 것입니다.
본기(本紀) 열전(列傳)은 모두 지(誌)와 표가 있어서, 본기의 지에는 진무(神武)천황으로부터 고코마츠(後小松)천황에 이르는 2천년간의 조정의 의식, 제도, 법률, 식산과 흥업 등의 자세한 것을 한문으로 쓴 것입니다. 여기에 또 공적이 있었던 사람은 아사카 단파쿠(安積澹泊)입니다.
단파쿠(澹泊)는 대일본사 논찬(論纂)을 지은 사람입니다.
또 기코우의 대에 도요타 텐코(豊田天功)라는 대학자가 나와서 많은 지(誌)를 썼다는 것은 특필할 사실입니다. 그중에서도 모든 책을 독파하여, 예를 들면 1500년 전의 무슨 천황의 시대에는 조세제도가 어떻게 되었다든지, 산업상태는 어떻게 되었나를 일일이 자세히 조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애석한 것은 도중에서 붓을 놓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여기에 첨부해서 말씀드려 놓고 싶은 것은, 역사편찬의 전기는 주위의 정세를 보아서 침체기에 들어 갔다고 했습니다만, 이 시기를 조금 지나서 어느 해에 불의의 화재가 일어나서, 중요사료를 태우게 된 일이 있습니다.
이것이 대일본사 편찬을 더욱 더디게 한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학자들도 열심히 연구하지 않게 되고, 다만 놀면서 녹을 먹고 있었던 상황이 된 것입니다.
아까 말한 바와 같이, 유우코쿠(幽曲) 선생 때에 와서 비로소 역사편찬사업은 발흥되었으나, 아이자와(會澤泊民)나 도요타 텐코 등의 학자들이 지(誌)를 많이 쓰고, 메이지에 들어와서는 쿠리타 히로시,시미즈(淸水正健) 등의 유명한 학자가 담당하여 수사(修史)에 노력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표가 완성 됨으로서 비로소 대일본사는 완성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조정으로부터 대일본사라는 이름을 하사받은 것입니다.
여기에 황송하게도, 일본의 천자님 중에는 역사에 나타나지 않았던 분이나 사실(史實)이 불명했던 분이 있었으나, 이러한 분은 렛코우가 열심히 사신(史臣)들과 상의해서 이것을 명백하게 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진구황후(神功皇后)가 역대천황에 보태져서, 15대에 나열되어 있었던 것을 황후는 천조(踐祚)한 사실(史實)이 없기 때문에 황비전(皇妣傳)에 넣은 일, 오우토모오우지(大友皇子)를 본기(本紀)에 든 일 등이 이러한 것입니다.
즉 오우토모오우지는 신기(神器)를 받고 즉위한 사실이 명료하기 때문에, 텐지(天智)천황의 다음 자리에 서열한 것입니다.
또 6백년 전의 남북조의 정윤(正閏)문제를 정확하게 판정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정윤론은 지나의 한(漢)나라에도 있었습니다만, 이것은 오행설에 의하여, 예를 들면 금생수(金生水)이기 때문에, 금(金)의 천자 다음은 수(水)의 천자가 즉위한다고 하는 오행설에 표준을 두고 정윤을 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는 병력이 강한 쪽이 천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그러한 이치로써 정윤을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일본에는 삼종(三種)의 신기(神器)가 있어서, 이것이 황실의 증표가 되어 있습니다. 즉 신기는 신대(神代) 이래 천재불마(千載不磨)의 대전(大典)이기 때문에, 이 신기가 있는 곳이 정위(正位)이며, 신기가 없는 곳이 윤위(閏位)입니다. 이것은 이치가 아닙니다. 일본국체의 숭고한 나타남입니다.
하늘에 두 개의 해가 존재할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는 두 분의 천자님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국민은 삼종의 신기가 있는 황실에 천자님의 적자(赤字)로서 모여드는 것입니다.
그러한 황실의 전범(典範)이 있기 때문에, 신기가 있었던 남조(南朝)를 정통으로 받들고, 북조를 윤위(閏位)로 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대일본사를 편찬하는데 있어서, 전국의 일본의 한학자를 불러 모아서 연구하게 했다는 것은 아까도 말한 대로입니다만, 그중에서도 유명한 사람은 주순수(朱舜水)라는 절강성(浙江省) 여요(餘姚) 사람으로 왕양명과 동향사람입니다. 명(明)나라가 망하고 청조(淸朝)로 바뀌니, 주순수는 청나라 좁쌀을 먹지 않겠다고 해서, 나가사키에 건너와서 명나라의 재건을 도모한 사람입니다.
이때 기코우는 주순수의 그 현명함을 듣고 주순수를 초빙하여 빈사(賓師)로 모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친히 제자의 예를 갖춘 것입니다. 주순수의 묘는 즈이류우산(瑞龍山)에 있습니다만, 약 15년 전에자손이 와서 묘에 참배한 일도 있습니다.
그 외에도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많이 있습니다만, 장도의 여행에 피곤하시리라 믿고, 간단하지만 이상으로 제 이야기는 끝내겠습니다. 경청을 깊이 감사드립니다. (문책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10월 28일(화) 맑음
오전 9시 51분에 미토역을 출발하여 천하의 명승지 닛코(日光)에 향했다. 우츠노미야(宇都宮)에서 닛코선으로 바꾸어 탔다. 기차는 삼(杉)나무 가로수가 울창하게 우거진 칙사(勅使)가도를 따라서 달린다.
이 삼나무는 지금부터 3백년 전에 마츠다이라 마사츠나(松平正綱)가 심은 것이라고 알려져, 지금은 구름을 찌르듯이 성장하여 옛일이 생각난다. 기차는 바야흐로 후바사미(文挾)역을 지나 이마이치(今市)에 도착한다.
이 근처부터 닛코의 산용(山容)은 산뜻하게 나그네의 눈에 비친다. 드디어 기차는 해발 6백미터의 지점에 있는 닛코역에 다다랐다. 역에서 전차를 타고 카미하시(神橋) 조금 앞에서 내려서 점심을 들었다.
여기에서 서쪽으로 나아가면 다이야가와(大谷川)의 맑은 흐름이 있고, 왼쪽에 카미하시를 바라본다.
카미하시의 주란(朱欄)금주(金珠)는 푸른 물에 비치고, 화려한 그림을 보는 것 같다.
카미하시는 닛코샤지(日光社寺)의 입구 및 닛코국립공원의 관문에 해당하며, 다이야가와는 케곤(華巖)의 하류가 된다. 다리를 건너면 오른쪽의 긴 비탈을 오르면 오른쪽에 린노우지(輪王寺)가 있다. 린노우지는 고홍보우(御本坊)라고 불리며, 닛코 제불(諸佛)도장의 총괄지인 것이다. 절에서 나와, 노 삼나무 사이를 한동안 가면, 눈앞에 돌로 만든 홍살문이 높이 솟아있고, 정면에는 별격 관폐사(官幣社) 토우쇼우구우(東照宮)가 있다.
토오쇼우구우의 제신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공(德川家康)[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 공을 합사]이며, 이러한 유래를 문헌에 따라서 자세히 보기로 한다.
1616년 도쿠가와 이에야스 공이 순푸(駿府)에서 서거하자, 그 유해를 수루가노쿠니(駿河國) 쿠노우산(九能山)에 장사를 지냈으나, 유명(遺命)에 따라서 또 다시 그 묘(廟)를 시모츠케노쿠니(下野國) 닛코산(日光山)에 점을 쳐서, 사전(社殿)을 세우서 봉천(奉遷)하고, 비로소 토우쇼다이곤겐(東照大權現)이라고 불렀으나, 얼마 안 있어 선하(宣下)로 토우쇼우구우(東照宮)로 고쳐져서, 1873년 별격 관폐사(官幣社)에 참가하게 되었다.
지금의 사전(社殿)은 3대 장군 이에미츠(家光)공이 스스로 막대한 비용을 투입하여, 개축한 것으로 낙성한 1636년부터 금년으로 마침 306년이 지났으며, 본전(本殿), 배전(拜殿), 요우메이몬(陽明門)을 비롯하여 홍살문, 깔은 돌 등 수백에 이르는 조영물이 전부 국보로 지정되고, 금은을 입히고, 단청을 했으며, 그림이나 조각 등 모든 예술의 극치를 다 하고 있다.
참배 순서에 따라서 조금 더 설명을 하기로 한다. 돌 홍살문 서쪽에 오중탑이 있다.
먼저 이 홍살문은1618년 쿠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후작이 멀리 치쿠젠(筑前)의 땅으로부터 운반하여 봉납한 것으로,
높이 27척 남짓, 중앙의 토우쇼다이곤겐(東照大權現)이라고 적은 고미즈노오(後水尾)천황의 친필이 있다.
오중탑은 1650년 사카이 타다카츠(酒井忠勝) 후작이 기증한 것으로, 1815년 벼락불로 타 없어져서 현재의 건물은 1818년 그의 집안에서 봉납된 것으로 높이는 25척에 달한다. 홍살문을 들어가, 국보인깔은 돌길을 통과하면 표문(表門)에 도착한다.
표문을 들어가면 삼신고(三神庫)가 있다. 어느 것이나 아제쿠라(校倉)식으로, 이 안에는 춘추의 도어제(渡御祭) 때에 사용하는 만물 갖춤 천인행렬의 제기와 도구가 격납되고 있다고 한다. 몇 걸음 걸어가면 금벽(金碧)이 현란한 요우메이몬(陽明門)이 있다.
이 문은 가장 이름이 높은 건물이다. 삼수선조(三手先造) 사방당풍조(四方唐風造)로, 이 기둥은 모두 느티나무의 둥근기둥을 써서, 천장의 오르는 용, 내려오는 용은 카노우 탕유우자이(狩野探幽齊)의 화필로 묵흔(墨痕)임리(淋漓)177)가 천하의 일품(逸品)인 것이다. 기타 동식물의 조각이 있으며 아름다움의 극치이다.
일명 히구라시몬(日暮門)이라고 불리는 것도 참배객이 이 문의 아름다움에 도취하여 해가 지는 것도 잊어버린다고 하는데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또 히다리 진고로(左甚五郞)의 작품이라고 일컬어지는,
177) 묵흔은 필적을 뜻하고, 임리는 그림 등이 힘이 넘치는 모양을 말한다.
말하지 말고, 듣지 말고, 보지 말고의 세 마리 원숭이도 있다.
다음은 요우메이몬에서 수 칸 떨어져서 당문이 있으며, 사방의 건물이 당파풍(唐破風)으로 정면의 파풍 위의 집, 동(棟)에 당동(唐銅)으로 만든 털 진드기(恙)라고 하는 벌레의 모양을 장치하고 있다.
문 좌우에 한 가락의 낮은 울타리가 있으며, 길게 본전(本殿) 및 배전(拜殿)을 둘러싸고, 도금(鍍金)으로 접은 5단계의 계단이 배전에 통하고 있다.
배전은 그 구조가 장려하여, 검은 납색의 고란(高欄) 및 빈상(濱橡), 홀금(惣金) 접이의 전내(殿內)의 기둥, 고조(高彫)금으로 채색한 승진(承塵)당초(唐草)의 시회(蒔繪)를 그린 당문 등 그 교치(巧緻)한 아름다움은 참으로 현란한 것이 보인다.
당문에서 나오면 고양이 문이 있으며, 그 위에 조각한 네무리네코(眠猫)는 히다리 진고로우의 작품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여기에서 돌계단을 올라가면 토우쇼우구우의 오쿠샤(奧社)가 있다. 보탑은 그 배전의 정면에 있으며, 이에야스(家康) 공의 신령은 영원히 잠들고 있는 것이다.
토우쇼우구우를 나와서 서쪽으로 백 미터 쯤 가서, 우리들은 후타아라(二荒)신사에 참배했다.
이 신사는 국폐중사(國幣中社)로 오우나무치노미코토(大己貴命)를 제사 지내는 1천년의 역사를 갖는 오래 된 신사이다. 다음으로 3대의 이에미츠(家光) 장군의 유골을 장사지낸 타이유우인묘(大猷院廟)를 참배하고, 보물관을 배관했다. 보물관에는 제신의 재세 중 사용한 물품과 신보(神寶)를 비롯하여, 아악 용구와 고문서 등 많은 국보를 수록하고 있으며, 후타아라신사 및 린노우지(輪王寺)의 귀중한 보물도 진열되어 있었다.
우리는 또다시 전차에 탔다. 전차는 다이야가와(大谷川)를 따라서 거슬러 올라가, 우마가에시(馬返)고개까지 갔다.
그 사이의 산의 모양이나 물의 경치의 아름다움은, 그 진수를 모아서, 찬탄하지 않을수 없는 곳이 많이 있었다. 봉우리와 폭포의 수려함은, 금강산을 방불케 하였다. 우마가에시고개에서케이블카에 바꾸어 탈 때는 날은 이미 어두워졌으며, 산의 정기가 몸에 와 닿는 느낌이었다. 케이블카에서 또다시 버스로 바꾸어 타고, 추우젠지코(中禪寺湖)호반에 있는 숙소 미전(米田)여관으로 향했다.
숙소에 들어가면 앞에는 추우젠지코가 바라보이며, 동쪽에는 난타이산(男體山)의 웅장한 모습이 어두컴컴하게 떠올라 온다.
밤이 되니 한기가 방 안에 스며들어 상당히 몸이 차가워 왔다. 일행은 저녁을 먹고 난 후 화로를 둘러싸고 좌담회를 열면서 오늘까지 몸으로 체득한 것을 화목하게 이야기하며, 밤이 새는 줄도 잊었던것이다.
또 좌담회의 내용은 별도 항목에 적은 것과 같다.
제2회 좌담회
일시 : 10월 8일(오후 8시 반부터 10시 50분까지)
장소 : 닛코 추우젠지코 추우구우지 우타가하마(日光 中禪寺湖 中宮祠 歌ケ濱) 미전(米田)여관
○ 영전(永田) 단장 계속되는 여행에 여러분이 피곤하시겠지만 예정대로, 지금부터 제2회 좌담회를 열겠습니다.
전회에 이어서 허심탄회하게 소감을 이야기 해 주시기 바랍니다.
죽성(竹城) 씨와도 이야기한 것이지만, 이번 성지참배가 끝나서, 고장에 돌아가면 여러분이 성지참배에서 체득한 바의 감상을 고향사람들에게 한 사람이라도 많이 들려 줄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여러분으로부터 라디오방송에 의하여 감상담을 해 주시기 바라는 바입니다. 경성, 대구, 평양, 함흥 등지의 방송국에 부탁하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약 15분간 동안의 시간으로 이야기할 정도로 준비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동래에서 열리는 좌담회에서, 그 구체안을 결정하고자 합니다.
그 뜻을 포함해서 오늘밤의 좌담을 부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전날에 이어서, 카시하라(橿原)신궁, 진무(神武)천황 능 참배로부터 오늘가지의 감상에 대해서 시간이 허락하는 한 이야기 해 주시기 바랍니다.
○ 산가(山佳) 경북 강사 성지를 참배하여 감득한 것은 누구나 갖게 된 커다란 감격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명하기 보다는 각자가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 하도록 합시다.
○ 죽성(竹城) 사성 이세(伊勢)신궁과 카시하라신궁을 참배할 때 마다 느낀 것이지만, 지금까지의 카시하라신궁과 진무천황 능은 이세신궁, 모모야마(桃山)능에 비하여 너무나도 검소한 것을 느낌을 가져왔으나 다행히도 이번에 대규모의 건조가 시행되어 참으로 고마운 극치가 되었습니다.
○ 영전 단장 저도 1938년 3월에 카시하라신궁, 진무천황 능에 참배했으나 죽성 씨와 같은 느낌을품었습니다.
카시하라신궁은 메이지천황의 세대에 와서 1890년, 카시하라황궁이 남긴 터에 관폐대사(官幣大社) 카시하라신궁을 창건했으나 그 신전은 메이지천황의 예려(叡慮)로 쿄토 어소(御所)의 내시소(內侍所) 건물을 기증한 것으로 국보 건조물인 것입니다. 제신은 진무천황과 히메타타라이스즈히메(媛蹈鞴五十鈴媛)황후의 두 분이십니다. 기원 2천 6백년의 봉축사업으로서 1937년부터 대규모 사전(社殿) 축조에 착수함과 동시에 능의 참배도도 확충정비된 것입니다.
물론 카시하라신궁이 이세신궁보다 규모로 보아 작다고 하는 것도, 한편 이세신궁이 신궁의 종가라는 것을 생각하면, 바른 도리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메이지유신 초를 맞이하여 경신존왕(敬神尊王)의 사상을 앙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 메이지대제의 명령으로, 카시하라신궁을 건조했으나, 그 당시는 조정의 재정이 풍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규모의 사전(社殿)을 건조할 수 없었던 것이라고 배찰(拜察)하는 것입니다.
○ 가천(嘉川) 경기 강사 저희들은 과거 20년간 진무천황제에 나무심기를 해 왔습니다. 그것이 지난번 진무천황 능을 참배하여 그 능역에 수목이 울창하게 우거진 것을 보고 더 한층 감격스러운 것이 있었습니다.
유림단이 성지를 참배하는 것은 당국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를 일단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저희들 성지참배유림단은 소위 향토의 지도계급으로서 당국에 지목되어, 향토민중을 지도하는데 사회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성지참배를 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자타가 모두 양지하고 있는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효과가 당국의 뜻에 맞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오로지 저희들 노력 여하에 달려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언제나 생각하고 있는 것이지만, 조선은 경신사상이 철저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고 혼자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조선은 내지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향상시키기 위하여서는 사회의 정신통일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적어도 내선일체를 구현시키기 위해서는 반도민중의 정신통일이 급선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선일체의 구현은 50년 혹은 백년이 지나도 바라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들은 부지런히 내지의 경신사상을 반도민중에게 선전할 필요가 있습니다.
과거 30여 년간 내지의 성지참배를 한 사람은 백 명·천 명뿐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이 성지를 참배하여 과연 반도에 무엇을 가져왔는가. 저는 이것이 의문입니다.
어찌하여 더 내지의 그 숭고한 경신사상을 고루한 향토의 인사에게 선전하지 않았는지, 저는 반도의 정신통일이 하루라도 빨리 실현할 것을 간절히 바라는 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번 성지참배가 끝나면, 미력이나마 곧바로 향토민중에게 내지의 경신사상을 선전하고, 사회의 정신통일에 미력을 다 하고자 하려고생각합니다.
○ 영전 단장 이야기는 정말 그렇습니다.
그러나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내선일체의 구현은 50년이나 백년 기다리지 않아도, 지금 구현되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그것의 완전한 실현도 머지않은 장래에 있는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지난 만주사변 이래, 가깝게는 지나사변 이래 특히 미나미 총독각하가 국체명징(國體明徵), 내선일체, 교학쇄신 등을 제창한 이래, 조선인의 사상은 호전해 왔습니다. 그 한 예를 말씀드리면, 조선신궁참배자를 조사 해 보면 1938년에는 267만9304명, 1939년에는 그 추세를 보아도 알 수 있는 246만 5918명, 1940년에는 215만 8859명으로서 아마도 금년에도 2백 수십만을 헤아릴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추세를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 강본(康本) 평남 대표 저는 카시하라신궁을 참배하여 가슴에 와 닿은 감상을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나라가 개국된 이래 유구 2천 6백년 이것을 기념해야 할 신궁을 대대적인 규모로 조영한 것은, 위에는 황실부터 아래에는 신민에 이르기까지 혼연일체가 되어 황조의 신령을 편하게 받드는 것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진무천황 능을 참배하고 오는 도중에 참배도의 양쪽에 잔디를 심고 있는 부녀자를 보았습니다만, 그들의 태도가 경건하였으며 신역에서 봉사하는 것을 얻은 영광을 자랑하는 것처럼 그들의 진지한 활동상은 오직 감격했습니다.
이것을 보아도, 진무천황의 성덕이 얼마나 위대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 산가 경북 강사 저는 이세신궁, 카시하라신궁을 비롯하여 각 성지를 참배하고 더한층 신국일본의 위대함을 강하게 느꼈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야마토(大和)민족의 정신통일 즉 경신사상이 국민 전반에 침투하고 위 황실에 봉공하는 신념에 불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반도민중이 신정 이래 황국신민화 했다고 말해도, 내지의 황민화에 비교하면 그 정신적인 면에서 천양지차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반도민중 중에는 가끔, 내선일체 운운은 입술에 발린 소리다, 실제로는 내선차별을 하고 있지 않느냐고 하는 고충을 말하는 사람이 있으나 이것은 크게 잘못된 인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사인(私人) 관계를 보아도, 같은 부모로부터 태어난 형제 중에 부모로부터 받는 애정의두텁고 얇음은 스스로 달리하는 것입니다. 부모에 대하여 효도를 다 하는 자식에 대해서는 부모로부터 받는 애정이 두텁고, 난폭한 자식에게 대해서는 애정은 물론 얇게 되는 것이 도리입니다.
우리가 황국신민이 되었다고 해도, 내지의 황민이 볼 때는 훨씬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내선인이 차별이 있는것은, 조선인이 완전한 황민이 되기까지에는 어쩔 수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되도록 빨리 충량한 천황폐하의 적자(赤子)가 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우리 자손을 위해서도 우리는 별단의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을 이번 성지참배로 강하게 느꼈습니다.
○ 가천 경기 강사 저도 완전히 동감입니다. 조선인은 무엇이라고 말해도 정신통일이 긴요하다는것은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그러나 유감인 것은 조선인에게는 아직 민도가 낮은 것입니다.
즉 생활안정이 모자라고 있습니다. 옛 말에 있는 것 같이, 의식이 족하여야 예절을 아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도민중의 정신을 선도하여 통일해 나가는 한편 잊지 말아야할 것은 생활안정의 확보입니다.
내지인은 의식에 불안이 없기 때문에 경신숭조의 관념이 강한 것입니다. 저는 한 가지 단정해서 말하고자하지만, 조선인이 정신통일을 할 수 없는 것은 생활이 불안정하기 때문이며, 생활이 불안정한 것은, 우리들 조선인이 지금까지 태만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더욱더 근로정신을 함양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 산가 경북 강사 소위 유림이라고 내세우는 사람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일본정신에 어두운 것입니다.
신국이란 무엇인가고 질문을 받을 경우 대답할 수 있는 유림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으로, 당국에서는 이러한 대책으로, 신국을 알기 쉽게 해설한 책자가 있다면 일반유림에게 나누어주워서 읽게 할 것, 실제로 내지를 보일 것, 이 두 가지가 긴요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점을 단장께서 의견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 영전 단장 참 맞는 말입니다. 내지인은 조손이 이어받아서 유구 2천 6백 년 동안 내지인에게는 국민정신으로서 신국의 숭고한 정신이 침투하고 있지만, 조선인은 천황폐하의 적자가 되어 신국일본의 정신을 입은 것은 불과 30년 밖에 안 되었음으로, 경신사상이 철저하지 못한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내지 7천만 민중은 2천 6백년간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 정신이 투철하고 있는 것은 교육의영향도 있겠지만, 저는 교육의 영향보다도 이것은 신의(神意)에 의하여 국민을 그렇게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조국(肇國)의 정신, 팔굉일우의 정신도 교육에 의해서 천하에 보급했다고 하기 보다는 신의에 의하여 실현되었다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들 2천 4백만 반도민중에게도 굵고 큰 신의의 힘이 내지와 마찬가지로 침투해서 언젠가는 팔굉일우의 정신은 조선에서 지나대륙으로, 나아가서 지나대륙으로부터 멀리 전 세계를 뒤덮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여러분이 내선일체의 구현에 관해서 걱정하고있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만,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진행 중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실현이 될 것임으로 추호도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다음으로 저는 카시하라신궁에 참배한 감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카시하라신궁에 참배한 것은 이번으로 세 번째입니다.
처음에는 여러분이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신궁의 사전(社殿)이 황조 진무천황의 신령을 모시고 있는 신궁으로서는, 그 규모가 작은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작년의 기원 2천 6백년 기념식을 계기로, 국민의 진무천황에 대한 흠앙(欽仰)하는 생각은 감연하게 끓어올라, 새로운 사전을 조영하게 하는 등 그 정성은 비상한 것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우리국민성의 위대함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느낀 것이지만, 신직(神職)에 있는 여러분이 친절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2천 6백년간 우리나라의 정신인 사랑의 일체생활이, 오늘날에 와서는 가장 잘 이것이 앙양되어, 신직의 여러분도 이러한 정신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에 신직에 있는 여러분에게 감사해 마지않는 바입니다.
다음은 나라(奈良)의 도읍은, 제도(帝都)가 헤이안쿄(平安京) 지금의 쿄토에 천도될 때까지는, 제도로서 자랑하는 곳이었으나, 나라의 고적명승지를 돌아보시고 그 감상은 어떻습니까.
○ 서촌(徐村) 충남 강사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하지만, 조선에서 듣던 것과, 자신이 직접 와서 본것과는 완전히 틀립니다. 참으로 2천 6백년간의 문화는 웅대하고 찬연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반도인도 내지문화 수준까지 도달하기 위해서는 경신사상을 하루라도 빨리 보급해야 되겠습니다.
지금 젊은 연배의 사람들은 일본정신·일본국체가 어떠한 것인가를 알고 있지만, 중견유림이라고 자처하는 계급의 사람들에게는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방면의 서책을 번역하여 읽게 하는것이 좋으리라고 생각합니다.
○ 영전 단장 대단히 좋은 의견입니다.
그것에 관해서는, 총독부에서도 국체명감(明鑑)한 것을, 지금 만들고 있음으로, 완성이 되면 바로 여러분 앞에 배달해 드릴 예정입니다.
○ 강본 평남 대표 서촌님에게 여쭈어 보고 싶은데 아까 중견유림을 계몽하는 것은 어렵다고 했으나, 그중견이란 어떠한 사람들을 가리켜서 말한 것입니까.
○ 서촌 충남 대표 제가 중견유림이라고 말한 것은 나이 많은 사람을 가리켜서 말한 것입니다.
○ 강본 평남 대표 저도 적어도 중견유림이라고 자칭하는 자는, 유학에 조예가 깊은 것은 물론, 여기에다 사회의 일반상식을 갖춘 사람에 한해서 중견유림이라고 내세울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산가 경북 강사 유림 중에서 중견인물은 사회에서, 명예라거나 덕망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며, 또한 이러한 사람들이 앞에 서서 일하지 않으면, 효과를 잘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실제문제로서는 반드시 그러하지 아니합니다.
향토에서 유림이라고 지목되는 인사는, 우리들과 같이 사회에 출입하는 사람보다도 오히려 두문불출의 인사가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관청으로부터 무슨 지시가 있어도 마을사람들은 먼저 이와 같은 인사에게 의논하고, 이것에 협력해야 되느냐 마느냐를 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두문불출의 유림의 향토에서의 지반은 엄청난 것입니다.
그럼으로 단장께 부탁을 하나 하고자 합니다. 즉 본부(本府)에 예산이 있다면, 그러한 유림을 모아서 내지를 시찰시켜
내지 사정을 보인다면, 그 효과는 놀랄 만한 것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 영전 단장 이 문제에 관해서는, 뒷날 좌담회에서 시찰단 조직방법 등에 대해서 의견을 여쭈고자 생각하고 있음으로, 그때에 이야기를 부탁합니다. 이번에는 나라에서 체득한 감상을 들을 예정이었으나, 화제가 바꾸어졌기에, 본래로 돌아가서 나라에서의 감상담을 발표 해 주시기 바랍니다.
○ 정(鄭) 경남 강사 저는 나라에 도착한 뒤, 맨 먼저 느낀 것은, 신록(神鹿)이 친절하게 맞이해 주는것과 같이, 우리들에게 친숙하게 와 닿은 것이 인상에 남아 있습니다.
○ 영전 단장 나라는 조선과 인연이 깊은 곳입니다. 즉 조선 문화와의 교류가 있었던 곳입니다. 특히 불교가 그렇습니다.
○ 산가 경북 강사 불교문화의 내선교류에 관해서는, 쿄토에서 각 불사를 순배했을 때도 느꼈던 것이지만, 내지의 불교는 유교와 마찬가지로 조선을 거쳐 들어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조선보다 훨씬 진보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지는 현대국가로서 물질문명이 넉넉하게 융성하지만, 정신문명은 이것에 지지않게, 물질문명의 이면에서 뿌리가 튼튼하게 숨어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특히 미토에 가소 미토학(水戶學)의 개략을 청강하여, 내지의 정신문화는 표면에는 보이지 않지만, 이면에서는 위대한 힘이 잠재하고 있는 것을 보고 오직 감격했습니다.
○ 영전 단장 내지의 불교는 쿄토에서 본 것만으로 알 수 있듯이, 불교문화는 참으로 찬연함이 있습니다.
지나의 문화는 제왕중심의 문화라고 할 수 있으나, 내지문화는 조선과 마찬가지로 불교중심 문화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불교문화가 우월한 것입니다.
백제 성명왕(聖明王)(제25대)은 킨메이(欽明)천황(552년)에게 불교를 권해주었음으로써 비로소 불교가 전래된 것이나 내지에서는 대승불교가 대단한 세력으로 발전을 이루고 있어서 세계적인 불교 국이 되어 대승불교의 총본산으로 열매를 거두고 있는 것입니다.
즉 남방불교로서 세일론, 미얀마, 태국, 월남, 캄보디아 등의 지방에 유포되고 있었으나 지금은 유적으로 남아 있을 뿐인 곳이 많습니다.
불교교세를 바라보면서 내지와 조선과를 비교해 보면, 내지에서는 불교신도 수가 4,175만 명쯤 되지만 조선은 조선인의 신도 수가 불과 19만 5천 명밖에 없는 것입니다.
조선에서는 내선불교의 교류를 생각해서 조선불교의 발전을 계획하고 있습니다만, 또한 지나사변 이후에 내지불교의 대륙진출이 활발해 짐으로써 불교의 빛도 동쪽으로부터라고 하면서 불교의 총본산의 열매를 거두고 있는 것입니다.
○ 고산(高山) 평북 대표 저는 이번에 내지를 시찰하여 느낀 것은, 불교도 유교도 그 발원지는 어떤 경우에는 인도, 혹은 지나입니다만, 그것이 일본에 들어오면 섭취(攝取) 창조되어 일본의 불교, 일본의유교가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모르지만, 동경의 유시마(湯島) 성당을 배관해도, 쿄토와 나라의 각 불사를 배관해도, 남김없이 신국화(神國化)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신동아 건설에 많은 역할을 다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백천(白川) 황해 강사 나라에서는 저도 인력거를 타고 시내를 돌아보았습니다만, 차부(車夫)가 친절한 것에는 감격했습니다.
저는 국어를 말하지 못하기에 차부에게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대불당(大佛堂) 앞에 와서 인력거는 멈추어서 저를 내려 주었으나, 대불당에 들어가서 보았더니 참으로 대불은 웅대했습니다. 차부가 대불당 앞에 내려준 데 대하여 지금 생각해 보면, 차부가 평소에도 얼마나 대불을 숭상해 왔던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불교를 믿고 대불을 평소부터 숭상해 왔기 때문에,외지에서 멀리 찾아 온 사람에게 꼭 대불만은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마음 씀씀이가 있었음으로써 저를 인력거에서 내려 준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말씀드리면, 조선의 민중은 일반적으로 산 속의 암자나 절의 불상에 대해서도 절은 하지만, 공자묘에는 참배하고자 하는 관념이 없는 것처럼 보이고있습니다.
○ 영전 단장 일반적으로 그런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나, 다만 유교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도 알다시피, 일상생활에서 인륜을 설명한 것으로, 마치 인간이 대기 중에 살고 있으면서 대기의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유교의 고마움 또는 공자에 대한 감사의 생각은 얼핏 잊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민중의 부처에 대한 관념은 인력으로는 불가항력인 어떤 것을 부처 앞에 빌어서 부처의 도움을 염원하는 것과 같은 이른바 종교적인 신념에서 부처를 숭상하는 것일 겁니다.
○ 산가 경북 강사 유교관계는 그와 같이 먼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유불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합니다.
공부자의 제자 자공(子貢)도 서역에 성현이 있다고 말한 것도, 그 성현은 석가를 가리킨 것입니다.
또 유교를 존경하는 참다운 대학자는 불교의 교리에 통달하고 있으며, 불교를 존경하는 참다운 대승은 유학에 철저했던 것입니다.
○ 영전 단장 유교가 당송시대부터 불교의 영향을 받고 철학적인 체계를 갖추며 온 것은 정주(程朱)의 설을 읽어 보면 잘 알게 됩니다.
다음은 이세신궁에 참배하여, 어떤 감상이 있었는지 이야기 해 주기 바랍니다.
○ 죽성 사성 저는 이세신궁의 신 앞에서 머리 숙여 황국신민의 서사를 소리높이 제창한 것이 지금도 가슴이 뛸 정도로 벅차게 저미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황국신민이 된 것은, 지금부터 47년 전 즉 일청전쟁의 때로부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때로부터 또 일로전쟁 이후에는 메이지천황의 은덕이 점점 반도에 미쳐서, 결국은 한국이 병합되어 완전한 황국신민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늘 비로소 이세신궁에 참배하여 황국신민의 서사를 제창한 것은, 가슴이 저미는 것과 동시에, 한편으로서는 이제와서야 비로소 신 앞에 맹세하는 것이 부끄러운 생각이 나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저는 매일 아침에 가족과 함께 궁성요배를 마치고, 황국신민의 서사를 제창하려고 생각합니다.
○ 영전 단장 도리에 맞습니다.
○ 강본 평남 대표 저는 이세신궁에 참배하고 느낀 것은, 이세신궁의 제신이신 아마테라스 오우미카미의 신덕(神德)이 얼마나 영묘한가를 깨달았습니다.
그리하여 국체관념을 한층 명징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통감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지금까지 저는 무의식적으로 신궁이나 신사를 참배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신사에 대한 것을 충분히 연구하여 철저한 경신관념으로써, 신궁이나 신사에 참배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관(神官)을 통해서 신도에 대한 강연회들을개최하여 민중에게 철저한 경신사상을 불어넣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아가서는 이러한 것이 국체명징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조선으로 돌아가서, 신사나 신사(神祠)를 많이 건조해서 민중을 참배시켜, 경신관념을 철저하게 불어넣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 산가 경북 강사 신관(神官)은 기독교의 목사와 같은 자격을 얻는 기관이 있습니까.
○ 영전 단장 있습니다. 중학 정도의 것과 대학 정도의 것도 있습니다. 국학원이라거나 황도관대학이 그것입니다.
○ 산가 경북 강사 신관에 대한 관제(官制)가 있습니까.
○ 영전 단장 신관은 국가의 대우관리로 신직(神職) 관제가 있습니다. 신직에는 아시다시피 궁사(宮司), 권궁사(權宮司), 예의(禰宜), 주전(主典)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관폐대사(官幣大社)에의 궁사는 칙임대우, 권궁사는 주임대우, 예의, 주전은 판임대우로 되어있으나, 보통 관국폐사(官國幣社)의 궁사는주임대우입니다.
○ 산가 경북 강사 쿄토의 토요쿠니(豊國)신사에 조선청년이 있었습니다만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 영전 단장 그 청년은 금본영환(金本英煥) 군인데, 조선신궁에 매일 참배한 경신사상이 독실한 청년입니다.
금본(金本) 군을 매일 참배하는 것을 발견한 사람이, 지금 토요쿠니신사의 요시다(吉田) 궁사이며 요시다 궁사가 조선신궁 권궁사를 하고 있을 때 이 청년이 인정을 받고, 꼭 이 반도청년은 신관을시켜야 되겠다는 결심을 갖고, 자신이 내지에 전근하는 기회에 데리고 온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신문에 보도된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밤은 이 정도로 끝내고, 다음 좌담회에서 또 감상을 들어보려고 생각합니다.
장시간 이야기를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10월 29일(수) 맑음
해가 밝으니 쾌청의 신선한 아침이었다. 늦은 가을의 기분 나쁜 아침바람을 몸에 느끼면서 호반을소요했더니, 아침 햇살을 받고 호수 면에 은비늘로 덮여진 추우젠지코(中禪寺湖)가 황양(洸洋)178)하게 꿈과 같이 눈앞에 펼쳐져, 마치 속진을 떠난 느낌이 든다.
여기에다 한 술 더 떠서, 닛코 연산의 주봉인 난타이산(男體山)의 선이 풍부한 신성한 모습이 의연히 서 있고, 그림자를 호면에 비치고 있는 풍치는
178) 물이 깊고 넓은 모양.
천고의 꿈을 감추고 있는 듯이 보였다. 닛코에 오는 자는 반드시 추우젠지코에에 와서, 난타이산과 잘 조화된 산수의 아름다움에 황홀해서 떠나기를 잊을 것이다.
여기에서 추우젠지코와 난타이산의 유래를 간단히 적어 보기로 한다.
추우젠지코는 일명 추우구우시코(中宮祠湖)라고 불리며, 옛날 메이지천황이 동북 순행할 즈음에 행복의 호수의 이름을 하사하고, 또 하나는 난타이산의 남쪽기슭에 있음으로써 미나미노에(南湖)라고도 옛사람들은 부르고 있다 한다.
그 넓이는 동서 20리, 남북 30정(町)179)이나 되는 호수이다.
키소지즈카이(木曾圖會)라는 서책에는, “……나무가 우거져 호수를 뒤덮는다 해도, 낙엽 하나도 수면에 뜨지 않고, 바닥이 깊지만, 고기비늘이 하나도 깃들이지 않으며……”라고 되어 있으며, 또 항산실기(晃山實記)라는 서책에는 “…… 추우구우시코에 맑고 더러움의 하나의 티끌이 없음으로서, 옛날부터 전해 오기를 인충(鱗蟲)이 끊어지고 살지 않으며……”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옛날에는 고기 종류가 없었던 것 같으나, 유신 후부터 잉어, 곤들매기(嘉魚), 송어 등의 고기를 놓아서 지금은 일대 어장이 되었다고 한다.
난타이산(男體山)은 표고 2천 5백 미터나 되며, 일명 쿠로카미산(黑髮山)이라고도 불리며, 이것은 흑신(黑神)의 뜻으로, 신산의 나무 빛이 울창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오우마나코산(大眞名子山), 코마나코산(小眞名子山), 뇨호우(女峰), 아카나기(赤薙)의 여러 봉우리는 동북으로 이어지며, 타로우다케(太郞嶽), 온센다케(溫泉嶽)는 서북으로 이어졌으며 또 서쪽에는 센조우가하라(戰場之原), 유코(湯湖), 유다키가와(湯瀧川)의 낮고 좁음을 건너서 멀리 시라네야마(白根山)를 마주보며, 난타이산은 바로 닛코연봉의 주봉인 것이다.
우리는 아침을 먹고 숙사를 나왔다. 그리고 만고의 영기(靈氣)를 감추고 있는 신비경, 신화시대인 채로 있는 추우젠지코의 거울과 같은 조용한 호수 위에 한 잎의 작은 배에 맡겨서 사방의 풍광명미한 산수를 바라보기로 했다.
배는 호수 위의 가을 바람을 받으면서 천천히 달린다. 대자연은 아무 소리도 안내며, 대기는 티끌하나 미진(微塵)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극락의 정토가 있다면, 여기보다 더 나을까.
배는 또 경승지를 찾아 달린다. 경승지는 다 끝나지 않는다. 취람(翠嵐)에 홍대홍지(紅黛紅脂)를 치장한 호반의 연봉이 취운(翠雲)과 잘 어울린다. 물속에 비친 아름다운 영상은 그 심미(審美)가 무엇이라고형용하기 어려우며, 오직 꿈 세계에서 노니는 기분이 든다. 이러한 선경에서 떠나기 애석해 하는 표정이 역력히 읽을 수 있다.
일행은 배에서 내려서, 후타아라산(二荒山) 상쇼(三所)신사에 참배하고, 황산(晃山) 72폭포의 으뜸이라고 일컬어지는 케곤(華巖)을 향했다.
이 폭포는 다이야가와(大谷川)의 원류를 이루고, 또 추우구우시코가 낭떠러지를 급히 흘러내려, 이러한 기관(奇觀)을 이룬 것이다. 폭포에 가까이 가니, 대폭포의 물기운은 튀어 날며 지축(地軸)도 진동시킬 듯 노호(怒號)하여, 들여다보기에도 몸이 움츠려 든다.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폭포 아래에 내려갔다. 폭포는 내려다보기보다 우러러보는 것이 전체가 잘 보여서 장관이다.
비류직하(飛流直下) 3천 척이라는 것은 이것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비폭(飛瀑)은 물이나 물이 아닌 것처럼, 구슬이 되어 흩어져 떨어지며, 연기가 되어 흩어지는 풍경은 이 세상의 기관이라고 할수 있다.
그리고 비폭 노호의 위세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귀를 먹게 하고, 눈을 어둡게 하며, 간담을
179) 1정은 약 109미터.
서늘케 한다. 오호라! 위대한 조물주의 작품. 우리는 케곤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케곤의 웅장하고 위대함에 다만 감탄하면서 돌아오는 길에 올랐다. 일행 중 고산(高山) 씨는 숙소의 계단에서 굴러서 차골(蹉骨)을 다쳤다.
오후3시 닛코역에서 열차를 타고 동경 경유로 오사카를 향했다. 우에노역에 도착한 것은 동 6시 25분, 전철로 바꾸어 타고 동경역에 도착하니 병 때문에 남아있던 청하(淸河) 씨가 마중해 주었다.
일동은 역 구내식당에서 저녁을 들고, 동 9시 40분 열차로 곧장 오사카로 달렸다.
○ 추우젠지코(中禪寺湖)
鏡湖秋水淨朝暉, 滴翠山光點客衣, 駕一葉舟凌萬頃, 此遊正似挾仙飛. 가천구사(嘉川久士)
山下瀑聲山上湖, 口難盡說亦難圖, 世人苦問東洋事, 此地名勝第一區. 청하달빈(淸河達斌)
平湖山上日光輝, 米屋初寒曉拂衣, 遙看紅葉廻扁棹, 玉瀑華岩白雪飛. 부산삼(富山森)
10월 30일(목) 맑음
오사카에 도착한 것은 30일의 오전 9시 7분이었다. 일행은 오사카역전의 스테이션호텔에 들어갔다.
숙소에 들어가니 아침식사 시간이 지났기에, 점심을 미리 당겨 11시경이 되어서 먹었다.
이러한 일은 내지 여행 중에 처음 있는 경험이다. 전시 하 국민의 긴장됨이 불쑥불쑥 나타나서 누구하나 없이 마음이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오사카라고 하면 연기의 서울이 연상될 만큼 공업이 발전하여, 공업도시로서는 이미 세계에 알려져있다.
옛날부터 지역의 이점과 근대공업화로서, 이제는 우리나라의 2대 공업화를 이루고, 코베와 함께 소위 한신(阪神)지대의 중심이 되고, 서일본 산업을 대표하여, 동일본의 케이힌(京濱)과 상대하고 있는것이다.
또 물의 고장이라고 일컬어져, 육상운수는 물론 수운도 대단히 발달하여, 공업발전을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물의 고장은, 숲처럼 서있는 굴뚝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연기로 하늘을 뒤덮고, 맑은 날씨라고 해도 어두컴컴하여, 햇빛마저 흐리고 있다.
오전 11시 30분에 부(府)의 협화회(協和會)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오사카성 견학에 향했다.
오사카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축성한 천하의 명성이다. 이제 오사카성의 유래를 간단히 적어보기로 한다. 오사카성은 무로마치(室町)시대에 축조된 이시야마혼간지(石山本願寺)의 옛터이다.
이 절은 혼간지(本願寺) 제8세의 렌뇨(蓮如)가 이시야마어당(石山御堂), 또는 오사카어방(御坊)으로 세운 것으로, 정치적인 수완을 갖고 있는 그는 이 땅을 근거지로 요새로 만든 것이다.
그리하여 쇼요(證如) 때는,완전히 무력 본위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게 고통을 준 것은 너무나 유명한 사실(史實)로 되어 있다.
또 켄뇨(顯如)의 때에 이르러서는, 칙(勅)을 받들고 노부나가(信長)와 화친을 맺고, 이 이시야마(石山)를 물러났다.
그런데 그의 자식 쿄우뇨(敎如)는 그 화친에 동의하지 않고 또다시 거사를 시도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화친하여 성을 명도를 하였다. 그 후 노부나가(信長)가 혼노우지(本能寺)에서 쓰러지고, 유명을 받든 히데요시(秀吉)가 천하를 호령하자, 노부테루(信輝)를 대신하여 오사카를 거두었다.
노부나가(信長)의 1주기를 쿄토 다이토쿠지(大德寺)에서 치르고, 얼마 안 되어 오사카에 와서 새로이 이 땅을 근거로 해서, 나라 내외에 비교할 수 없는 오사카성을 축조한 것이다. 이 위대한 성은 히데요시의 명성을 올림과 동시에, 멀고 가까운 여러 성주들은 스스로 공사에 자진해서 나와서 큰 돌과 거석(巨石)을 날라서, 7개월 만에 텐슈(天守) 공사가 끝났다고 한다.
공사를 계속하여 1584년 8월에 히데요시가 입성하게 되었다.
성루(城樓)와 성벽을 둘러싼 제루(堤壘)는 하늘 높이 솟아, 오사카성 아래를 부감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은 선(善)과 미(美)를 다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오사카성이 축조되기 전까지는, 사카이(堺)항만으로도 매일 2백 척의 배가 돌을 싣고 입항하며, 어떤 때에는 1천 척이나 되는 석선(石船)이 만범(滿帆)에 바람을 안고 장관을 보인 때도 있던 것 같다.
오사카성의 견학을 마치고, 텐마바시(天滿橋)의 노다야(野田屋)에 향하여, 오사카부 주최의 간담회에 참석했다.
간담회에 즈음하여 먼저 주최 측을 대표하여 사카모토(坂本) 주사(主事)의 인사가 있었으며,이에 이어서 영전(永田) 단장의 답사가 있었다. 사카모토(坂本) 주사 및 영전 단장의 인사의 요지를 간단히 적으면,
사카모토(坂本) 주사의 인사말
한 마디 인사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 반도 유림의 대선배 분들이 이 곳을 시찰 온 것에 대해서는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오사카는 시찰하실 만한 명소는 없지만, 다만 오사카성이라거나 조폐국(造幣局)이 볼만할 것입니다.
특히 여러분이 보아 주실 것은, 오사카시의 협화사업입니다.
여러분도 알고계시리라 생각하지만, 오사카에는 반도출신 사람이 33만 살고 있습니다. 내지 전체에 살고 있는 반도인
수는 약 110만이라고 일컬어지고 있기 때문에, 오사카만으로 그 3분의 1이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같이 많은 반도인이 살고 있음으로서, 이에 따르는 협화사업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사업에 관하여서는, 나중에 이 사업에 직접 관여하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설명이 있을 것이지만, 협화회의 경비는 연간 어림잡아 31만 엔을 요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임시비를 가산하면 상당한 액수에 도달합니다.
그리고 해마다 반도출신의 분들이 늘어나기 때문에 이에 비례하여 경비도 해마다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府)로부터 보조금을 받거나 기부금을 모집하거나 해서 부족분을 보충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지부는 각 경찰서 단위로 설치되어 있어서, 지부장에는 서장이 각각 겸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오사카부가 경영하고 있는 린포칸(隣保館)이 있어서, 주로 반도인의 생활안정을 도모하고, 자제교육, 보호구료에 이르기까지 뒷바라지를 해 주고 있습니다. 현재 린보칸의 수는 열군데 있으며, 나중에 여러분이 실제로 보시면 알게 될 것이지만, 그 사업이나 시설은 훌륭해서 그것의 이용자도 많고 한마디로 좋습니다.
저는 유림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지만, 오직 유림은 사회의 상층부에 있으며, 정신적으로 사상적으로 민중을 지도하고 있는 지위에 계신다고 하는 것만은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협화사업의 내용을 충분히 시찰하시고 조선에 돌아가서 반도민중의 지도에 도움이 되도록 특별히 부탁합니다. 그리고 협화회를 통하여, 경제적으로나 사상적으로 또는 학술적으로 반도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여러분의
힘과 더불어 영향력을 믿습니다.
이와 같이 협화회의 사업은 국가적인 견지로 보아서, 매우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내지에 있는 우리들도 반도에 있는 2천 4백만 민중도, 진지하게 이와 같이하여 문제를 속히 현실화시켜서, 내선일체의 구현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그리하여 2천 4백만 반도민중의 정신력은 유림이 지배하고 있다는 점으로 보아서, 여러분의 책임은 중차대한 것입니다. 내선일체의 구현은 협화사업의 충실화로서, 또 협화사업은 반도의 상층부에 계시는 여러분의 협력에 의하여 비로소 유종의 미를 거둘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오사카에는 유람을 할 만한 곳이 적지만, 협화사업만큼은 확실하게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협화사업의 내용을 오사카의 토산품으로서, 조선에 가져가 주시기 바랍니다.
시간은 많지 않으나, 시간이 허락하는 한 여러 가지를 보아 주시고,내지시찰의 유력한 힘을 얻으시기 거듭 부탁합니다.
변변찮은 자리를 마련하고 여러분의 왕림을 바란 것을 사과드립니다. 또 오늘은 두 번에 걸쳐 협화회 주최로 아사히(朝日)회관에서, 협화회원을 위하여 최승희(崔承姬)님의 무용을 무료로 공개하기로 되어 있는 관계상, 저는 그곳으로 가 보지 않으면 안 됨으로 여러분을 안내할 수 없습니다.
미안하지만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무쪼록 시간이 허락하는 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간단하지만, 이상으로서
인사에 대신하고자 합니다.
○ 영전 단장 인사
우리들이 이번에 성지참배를 한 것은 조선유도연합회 행사의 하나이며, 본 연합회는 1939년 10월에 조선유림의 총의로 결성된 것입니다.
이 연합회가 결성 된 것은 고 윤덕영(尹德榮) 자작 각하의 노고로 이루어진 것으로, 윤 자작은 윤비(尹妃)의 숙부에 해당하시는 분이나, 노구이심에도 불구하고, 이 대사업을 이루어 낸바 본 회의 은인입니다.
지나사변 이래 조선 2천 4백만 민중의 지도적인 입장에 있는 유림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요청되었기 때문에, 미나미 총독을 비롯하여 오노 정무총감은, 전선유림의 대동단결을 윤 자작에 종용함으로써, 윤자작은 전선 2백만 유림에게 호소하여, 유림대회를 경성에 초집했으니, 이 자리에서 조선유도연합회가 힘차게 태어난 것입니다.
이번에는 10월 15일의 추계석전제를 계기로 하여 제2회 총회를 열어서, 매년 중견유림대표를 선발해서 성지참배를 시키기로 결의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제1회의 성지참배단으로 오게 된 것입니다.
각지에서 그 고장의 유지와 간담을 가지게 되었으나 열렬한 환영에는 오직 감격할 따름입니다.
이러한 일에 보답하고자 우리도 성지참배의 취지를 잘 체득하여, 신국 일본의 진수를 파악하려고 노력해 온 것입니다. 또 오늘도 이와 같이 성대한 환영의 자리를 만들어 주신 것은참으로 감사하는 바입니다.
이후에도 아무쪼록 중견유림 성지참배단을 위하여 뒷바라지 해 주실 것을꼭 부탁해 마지않습니다.
오사카는 진토쿠(仁德)천황이 전도(奠都)하신 옛 도읍입니다만, 진토쿠천황은 유교를 대단히 숭상하신 분으로서, 왕인(王仁)이 논어와 천자문을 야마토(大化)조정에 헌상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너무나 유명한 일이나 이 왕인은 또 나니와(浪速)에서 수리를 일으켜 식산흥업에 힘썼습니다.
그러한 의미로 보아서도, 조선의 유림단이 오사카를 방문했다는 것은, 뜻 깊은 인연이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특히 아까 사카모토 주사로부터 이야기를 들어보니, 내선일체의 이상을 현실화시키기 위하여, 조선동포의 보호통일을 도모하는 협화사업이 철저하게 시행되고 있는 듯 하며, 우리들로서는 감격해 마지 많습니다.
또 향토에 돌아가서도, 사카모토 주사가 말한 것처럼, 협화회 사업내용을 자세히 선전하고, 내선일체의 실현에 도움 주고자 생각합니다. 또 내지에 살고 있는 반도인은 옛날보다는 자질도 향상되고, 전시 하에 생산력확충의 국책에 순응하여, 산업전사로서 일하며, 또 내지에 계시는 여러분의 지도 아래 충량한 황국신민이 되어 가는 것은, 우리들로서 참으로 기쁘기 한이 없습니다. 이후에도 반도인의 내지로 오는 도항자가 늘어날 것으로 생각하오니 더욱 더 적절한 지도가 있으시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는바입니다.
또 오늘은 이와 같이 환대까지 해 주셔서 감사 해 마지않습니다. (이상)
○
이것이 끝나고, 주객이 함께 화기애애하게 점심을 들면서 간담에 들어갔다. 먼저 협화회의 상무이사 타니무라(谷村靈眞) 씨가 동 회의 내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었다.
○
협화회의 내용에 대해서 간단히 말씀드립니다. 협화회는 부령(府令)으로써 1923년에 만들어 진 것으로, 그 목적하는 바는 조선인의 지도교화가 주된 것입니다. 이 기관이 만들어지기까지에는 내지에 살고있는 조선인들은 자칫하면, 내지인으로부터 불온사상을 품고 있는 자들이라고 비난받거나, 혹은 불량한 도배들이라고 지목되어 온 것입니다.
그럼으로 일시동인이라는 성지(聖旨)에 비추어, 어떻게 해서라도 조선인의 지도기관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하는 것을, 사회문제로 채택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로지 조선인을 황민화에 유도하고자 협화회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조직망은 전국적으로 펴내어, 각 부현(府縣)에 각각 협화회가 결성되도록 된 것입니다.
그때부터 1939년에는 동경에 중앙 협화회가 설립되고, 협화사업의 중추기관으로서 각 부현(府縣)에 부현 협화회가 연락협조를 맡도록 된 것입니다.
또 본 협화회 아래에는 각 경찰서를 표준으로 59개의 지부가 있으며, 또 그 아래에는. 호수 2백, 인구 8백을 단위로 분회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이 분회에는 지도원을 임명하여 보호교화를 담당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도원에는 반도출신자가 1천 5백 명이나 있습니다.
아까 주사가 말한 것처럼, 오사카에는 반도출신자가 33만 명이나 살고 있으며, 하나의 커다란 시 정도의 인구가 됩니다. 후쿠오카시의 인구가 30만이기 때문에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도출신자가 33만이라고 함으로, 오사카에는 내지인 5명에 조선인 1명의 비율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협화회 기구도 정비하고,사업도 설비도 완비하고 있습니다.
또 시국의 진전에 따라서 협화사업이 좋은 성적을 올리고 있는 것은 참으로 다행이며, 반도인이 경제적으로도 정신적으로 여유가 생긴 것입니다. 협화회가 탄생해서 20년 내외입니다만, 그 사이에 수십만 엔의 자산가도 공장주인도 나오게 되어, 경제적으로 우선 성공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정신적으로도 종래의 태만한 생활상은 청산하고, 근검하게 일에 열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오사카에 살고 있는 조선인은 해마다 5천 명 정도가 자연증가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다가 또 근래2, 3년간에 유입해 들어 온 자만해도 2만 명 정도가 되기 때문에, 가까운 장래에 50만을 돌파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협화사업은 경제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일단은 성공한 것이라고 보아야 하나 근래에 와서 새로 이주하는 자가 많기 때문에, 이러한 자들의 지도보호가 곤란한 상황입니다.
지금까지의 경향을 보면, 반도출신자로 내지에 오는 사람은 고향을 떠나 벌이 나온 정신으로써, 돈벌이해서 성공하면 조선으로 돌아갈 작정으로 온 사람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왕에 내지에 온 이상은 내고향이라고 생각하며 즐겁게, 이 땅에 뼈를 묻는다는 생각으로 일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강인한 정신력을 가지는 것이 내 몸을 위하여 도움이 되고, 협화사업 달성에 협력하는 것이 되는것입니다.
시국의 진전에 따라서, 협화사업도 현재보다 확대하여 확충할 작정입니다.
예를 들면 지금 50만 엔의 예산으로써 협화회의 도장(道場)을 건설하고자 하는 것이, 사업 확충의 한 예입니다.
현재 대체로 그 설계가 되어 있기 때문에, 내년 이맘 때 쯤에 여러분이 오신다면, 그때는 보여드릴 수가 있다고 생각합
니다.
이 도장은 반도청년의 정신수양도장으로서 기대되는 것이 있습니다만, 좌우간 반도동포는 일본정신을 체득하여, 하루라도 빨리 황국신민으로서의 자질을 향상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러한 의미로 볼 때, 도장이 갖는 사명은 한 없이 큰 것입니다. 또 반도민중의 지도적 입장에 계시는 여러분이 성지참배를 하시는 것도 그 의의는 심대한 것이 있습니다.
협화사업의 상세한 것은 나중에 현장에 가서 보여 드리기로 하고, 이상으로 설명을 마치고자 합니다.
○
그의 설명이 끝나고 나서 간담에 들어가서, 다음과 같은 문답을 교환했다.
∇ 오사카 협화회에서 부여신궁(扶餘神宮) 건조의 근로봉사를 신청하였으나, 아직 아무런 회답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 영전 단장 근로봉사는 내년 4월까지이기 때문에, 그때까지 무엇인가의 통지가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 오사카에 살고 있는 반도청년들은 지원병에 지원하기 위하여, 호적등본을 각자의 고향에 부쳐주도록 의뢰한 것 같은데, 좀처럼 부쳐주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영전 단장이 귀임해서는 각도에 통첩을 하도록 담당자에게 부탁하기 바랍니다.
∇ 오사카에서는, 반도청년에게 1주에 2번씩 훈련을 시키고 있습니다. 미나미 총독각하도 이 훈련을시찰하고, 매우 감격했습니다.
○ 영전 단장 조선청년단지도요강이 있음으로, 이것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참고하기 바랍니다. 오사카에 살고 있는 조선인이 33만이라고 했습니다만, 평양인구가 25만임으로 경성 다음에 오사카가 되는셈이지요.
∇ 반도에서는 적령아동이 전부 취학을 할 수 없는 상황인데, 오사카에 살고 있는 반도아동은 내지인 아동과 마찬가지로 국민학교에 입학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에서 새로이 건너 온 사람 중에는, 의무교육의 적령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취학 못한 아동이 있음으로, 부에서 구청에 지시하여, 국민학교를 이용하여 야학을 보내도록 하였으나, 현재 10군데로 수강자는 2천 3백 명이나 됩니다.
그중에는 24세나 되는 자도 있습니다. 또 국어를 해득하지 못하는 부인들을 위하여 협화국어독본을 만들어서,이것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간담이 있었으며, 끝나고 나서, 오후 2시에 츠루하시(鶴橋)의 린보칸(隣保館)으로 향했다. 린보칸의 사업방침은 오사카에 살고 있는 반도인을 교화 선도하여, 생활의 향상개선을 지도하고,내지동화의 철저를 도모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사업종별의 대략을 적어보면,
1. 교화사업
(1) 유아보육, 유아를 내지화 보육을 해서, 국민학교에 입학시킬 준비를 한다.
(2) 간이국어강습, 내지 말과 글자를 해득하지 못하는 남녀청소년을 위하여 쉬운 국어강습을 한다.
(3) 호주 강좌, 한 집안 중심인물인 호주에게 국민사상함양을 위하여 본 강습을 한다.
(4) 호주의 경신숭조와 신사참배, 각 가정에 신단을 설치하여 아침저녁으로 예배시키는 외에 매월1일에 부근 신사에 참배시키고, 신사 앞에서 경신숭조에 관한 훈화를 한다.
(5) 주부강좌, 주부의 내지화 촉진을 위하여 본 강좌를 특설한다.
(6) 주부의 음식물 조리법강습, 음식물의 내지화와 시국하의 대용영양식의 조리법을 체득시키기위하여 본 강습회를 개설한다.
(7) 청년 수양 강좌, 장래에 충량한 황국신민으로 서야 할 청년에게 국체관념의 양성, 국민정신의도야에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본 강좌를 개설한다.
(8) 청년의 경신숭조와 체력향상, 청년의 경신숭조와 체력향상을 돕기 위하여 매월 1회 걸어서 신사참배를 실시한다.
(9) 여자청년복장개선과 재봉강습, 장래 가정주부가 될 여자 청년 부원에게 의복의 내지화 촉진을위하여 본 강습회를 개설한다.
(10) 조합원간담회, 조합사업의 보급철저를 기할 목적으로써 매월 1회 조합원간담회를 개최한다.
(11) 보육소 여러 의식 및 행사, 어린애 보육을 통하여 보호자 및 그 가족을 교화할 목적으로 보육소의 여러 의식 및 각종 행사가 있을 때 마다 반드시 보호자를 참가시킨다.
(12) 어머니회의 여러 행사, 어머니회 주최의 각종행사 및 회합을 이용하여 가정의 어머니로서 수양,육아연구 외에 내선 양자 간의 말, 풍속, 습관, 감정 등의 틀림을 융화시키고, 내선일체의 열매를 거두도록 노력한다.
2. 생활개선사업
(1) 주택경영, 생활개선지도시설의 하나로서 주택경영을 한다.
(2) 신용조합사업, 근검저축과 생활향상안정을 꾀하는 목적으로써 본관에서 ‘오사카 협화신용구매이용조합’의 업무를 집행하고, 구역 내에 사는 반도인으로서 해당하는 자를 가입시켜서 그 이용을 장려해 나가고 있다.
3. 보호구료사업
(1) 무료진료소 개설(수시)
(2) 무료진료권 교부(빈곤자에게)
이상과 같은 사업을 해서, 반도인의 생활향상과 안정을 도모하고 있는 것이다.
일행은 츠루하시(鶴橋)의 린보칸에서 나와서 오이케바시(大池橋)의 사업구 시찰에 나섰다.
이 사업구는 조선인의 모범부락이다. 건물의 양식은 물론 복장도 내지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내지화 된 것이다.
쓰는 말도 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반드시 국어를 상용하기로 하고, 복장도 조선 옷은 되도록 입지 않기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이 내선일체는 ‘일상생활부터’라는 신조 아래, 일상생활양식의 모든 것을 새로 세우고 있다.
그중에는 아직 조선 옷을 입고 있는 부인도 가끔 눈에 뜨인다.
조선 옷의 한 부인을 불러내어, 협화회의 직원이 그 이유를 물었더니, 불충분한 국어로 여러 가지 구실을 말하고 있었다.
오이케바시의 사업구 시찰 외에도 일정은 있었으나, 시간관계로 중지하고, 오사카에서 가장 번화한 신사이바시(心齊橋)의 견학을 하고 숙소에 돌아 왔다. 또 해산 후는 아사히회관에서 최승희 씨의 무용회를 관람했다.
◎ 오사카 협화회
內鮮協力幾年施, 同化情神徹底期, 七萬會員總出動, 盡忠報國覺於斯. 청하달빈(淸河達斌)
10월 31일(금) 맑음
오전 8시 오사카 출발 열차로 마쓰에(松江)로 향했다. 일행 중 죽성(竹城)·윤(尹)·고산(高山)의 세사람은 귀국하기로 되고, 매일신보의 송원(松原) 씨는 회사명령으로, 또한 동경에 특파되기 위하여 우리 일행과 작별하게 되었다. 그래서 단원은 6명이 줄어 어쩐지 쓸쓸하게 되었다.
동 11시 57분 쿠라시키(倉敷)에서 하쿠히(伯備)선에 갈아탔었다. 이 하쿠히선은 풍광명미한 계곡을 누비며 달리고 있다.
특히 다이센(大山)은 산세가 웅장하여, 한번 바라보는데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기개가 보였다.
때문에 예부터 신령이 몸을 기대게 되어 수험(修驗)을 하는 자는 이 산을 쿠마노(熊野),킹포우(金峰)에 비유하여 영봉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다이센은 본토의 중앙을 차지하는 일대 산 뭉치로 그 절정은 똑바로 세우면 5천 6백 피트나 되며 산인도우(山陰道)의 최고봉이다.
오후 6시 18분 마쓰에에 도착했다. 마쓰에는 구 시마네(島根)와 오우(意宇) 양군의 교계(交堺)에 해당하며, 북쪽에 성곽이 있고, 남쪽에는 상가가 있다.
또 오오하시가와(大橋川)는 시내를 뚫고 나가기 때문에 배가 다니는 편리가 있다. 또 오오하시가와에는 마쓰에 항이 있어서, 동서 약 418미터가 되고, 암벽에는 5백 톤 급의 선박이 기항하며, 신지코(宍道湖)와 나카우미(中海)의 연락을 할 뿐만 아니라, 사카이코우(竟港)를 거쳐서, 오키(隱岐), 조선 등의 물자를 집산하고 있다.
또 마쓰에시는 시마네(島根)현의 현청소재지로, 마쓰에는 산인도우(山陰道)의 중앙도시인 것이다.
생각하건대, 마쓰에는 16세기 후반에 호리오(堀尾) 씨의 막내아들에게 성을 짓게 하여, 강 속의 명산인 농어(鱸)에 빗대어, 한(漢)나라의 송강(松江)을 생각해내서 새로이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또 마쓰에의 이름은 호리오 씨의 새로운 호가 아니며, 타이헤이키(太平記)에 보이고 있다고 하니, 어느 것이 맞는 것인지 모르는 것이다.
오늘은 늦게 마쓰에에 도착했음으로, 시내 시찰도 할 수 없었고, 숙사에서 계속되는 여독을 풀었다.
11월 1일(토) 맑음 가끔 흐림
아침밥을 먹고, 우리일행은 죠산(城山)공원과 마쓰에 성터를 보러갔다.
죠산공원은 카메타(龜田)성산의 일곽이며, 산인(山陰)지방의 유일한 텐슈카쿠(天守閣)가 솟아있고, 맨 위의 텐구(天狗) 칸은 마쓰에시를 전망하는 좋으며, 부근에는 마츠다이라 나오마사(松平直政)의 첫 출전기념 동상이 있으며, 또 마츠다이라 나오요시(松平直亮) 찬(撰)의 마쓰에 비(碑)가 있고, 세이난(西南) 전쟁 때의 운석은(雲石隱)전공기념비가 있다.
또 텐슈카쿠에서 내려오면, 축성할 때 옛날을 이야기하는 한 그루의 소나무가 있다.
(옛날은 두 그루였으나 지금은 한 그루가 되었다.)
마쓰에성터는 카메타산(龜田山)에 있으며, 일명 천동성(千同城)이라고도 불린다.
이 성은 1601년 호리오 요시하루(堀尾吉晴)가 여기에 축성한 것으로, 뒤에 1633년 호리오 씨의 후사가 끊어졌기 때문에,쿄우고쿠 타카츠구(京極高次)가 이에 대신했다. 1636년에 타카츠구가 죽고, 다음 해 마츠다이라 나오마사에게 이봉(移封)되었으며, 이후 자손에게 세습되어, 10대 233년 동안에 걸쳐 거성(居城)하고 있었다.
호루(濠壘)는 완존하고 있고, 텐슈카쿠(天守閣)는 16세기 후반 당시의 유구(遺構)라고 하며, 그 바닥은 동서가 22미터, 남북이 20미터, 높이는 27미터의 5층 누각으로 맨 위 단에 솟아있다.
우리가 숙소에 돌아오니, 현청의 배려로, 마쓰에 시내의 유지 5, 6명이 우리가 돌아올 것을 기다리고있다.
우리가 유림이기 때문에, 모인 사람들도 유교를 숭상하는 사람들이다.
그중에는 87세의 고령자도 있으며, 마쓰에나 이즈모(出雲)의 유서를 간절하게 설명 해 주었다.
완전히 감탄하면서 들었다.
다른 사람들도 내선동근론을 이야기하는 사람, 혹은 옛날부터 내선 간에는 문화교류가 빈번히 있었다는 것을 실례나 사실(史實)에 입각하여 설명하는 사람도 있어서, 그 분위기는 조용하고 화목했다. 구술요지를 기념으로 게재해 두기로 한다.
향계(香溪) 다나카(田中莊次郞) 구술 요지
제가 장년일 때, 우리 이즈모나라(出雲國)의 깊은 곳인 니타군(仁多郡)에서 학교 교편을 잡았으나, 그
군은 이즈모 개척의 조신(祖神)인 스사노오노미코토(素盞鳴尊)와 깊은 연고를 가지며, 신화지(神話誌)
및 전설을 실지 지명으로 비추어 고증하고 있는 일이 있어 지금 그것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스사노오노미코토(素盞鳴尊)는 신화시대 이즈모의 히강(簸江) 위에 내려서 (현재의 센츄잔(船通山)이
라고 부른다) 야마타노오로치(八岐大蛇)를, 8개의 옹기에 술을 채워서 먹게 하여 취하게 하고, 잘라 죽
여서 양민의 고통을 없애고, 이나타히메노미코토(稻田媛命)와 결혼하여 야에가키(八重垣)(장벽을 몇 겹
으로 만드는 것)를 설치하여 가정을 꾸미고, 국토개척에 노력했다고 전해지며, 이러한 것이 카미요지
(神代誌)에 기록이 되고 있다.
또 8개의 계곡부락은 센츄잔 기슭 방면에 분포하는 카메타케(龜嵩), 요코타(橫田), 오호로(大呂), 오
우야카와(大八川), 오우마키(大馬木), 코마키(小馬木), 아이(阿井), 민타니(民谷)의 8부락이다.
오로치(大蛇)라는 것은 일본 발음으로 노야(老爺)를 오야지라고 하면, 유력한 족속의 뜻인 것이다.
지명 카메타케(龜嵩)란 일본발음에 유사한 카메자케(甕酒)가 바뀌어 즉 카메(甕)에 술을 가득 부은
것이 아닌가.
카미요지(神代誌)에 코시(高志)의 야마타노오로치(八岐大蛇)로 되어 있으며 또 카메타케(龜嵩) 마을
내에 타카다(高田)의 지명이 있는 것은 글자의 잘못, 즉 시(志)를 다(田)로 뒷날 잘못 쓴 것이 아닐는지.
이 타카다(高田) 부락에는 현재 천연의 커다란 가로 굴이 있으며 또는 대사족(大蛇族)의 괴수와 그
일족이 칩거한 지점이 아닌가 하며, 만약 그렇다면 대사족(大蛇族)의 본거지인 느낌이 든다.
그 마을의 카메타케(龜嵩)천(川)의 연안에 내를 끼고 치하라(千原) 및 시오하라(鹽原)라는 지명이 있
으며 시오하라(鹽原)는 그 지방 사투리로 숀바라라고 부르며, 표준말은 치(千)는 치(血)로 통하고 시오
(鹽)는 시오(潮)로 통한다. 즉 치하라(血原), 시오하라(潮原)로 전면적으로 치시오(血潮)의 하라(原)로 바
뀐 것으로 상상이 되어 이 지점은 아마도 스사노오노미코토(素盞鳴尊)와 오로치(大蛇)족이 큰 싸움을
벌인 장소라고 생각한다.
이웃마을 후세(布勢)마을에 마바세(馬馳)라는 지명이 있다. 또 그곳에는 마니와(馬庭) 씨라는 구가
(舊家)이며, 이 집안은 신화시대 스사노오노미코토(素盞鳴尊)의 마필을 다룬 집안이라고 전한다.
또 그 마을의 초우자야시키(長者屋敷)라는 지명이 있어서 생각하면 고대에 세력가의 주거 흔적이라
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건너 작은 마을 야토(八頭)에 야에가키(八重垣)신사가 있으며, 지금 야에가키신사는 오오
하라군(大原郡) 및 야츠카군(八束郡)에도 있으며, 어느 것이나 스사노오노미코토(素盞鳴尊)의 결혼 유
적이라고 하나 카미요지(神代誌)에는 야에가키(八重垣)신사는 니타군(仁多郡)에 있다고 전한다. 그렇다
면 이 야에가키신사를 신적(神跡)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곳의 북쪽에 접하는 오오하라군에
히노보리 무라(日登村)에 히노타니(肥乃谷)라고 하는 지명이 있는데 히노타니(肥乃谷)는 히노타니(火乃
谷)가 아닌가. 비(肥)와 화(火)는 일본발음이 같기 때문이다.
옛날 고대의 투쟁에서는 화공(火攻)으로써 한 예가 있다. 저기 야마토 타케루노미코토(日本武尊)가
동쪽으로 쳐들어 갈 때 스루가(駿河)노보노(能褒野)에서 적들이 불을 놓아서 타케우노미코토를 공격한
일이 있다 (이곳은 현재의 시즈오카(靜岡)현 야이즈(燒津)라고 함). 그러기 때문에 이 히노타니도 신화
시대 화공(火攻)의 터였다는 것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이곳으로부터 약 2, 3십리 하류의 히이가와(斐伊川)180)의 연안 오오하라군 히이무라(斐伊村)
에 핫퐁스기(八本杉)라는 지명이 있으며, 이 지점에서 오로치족(大蛇族)이 전멸했다고 전하며, 지금 아
직도 8그루의 삼나무가 있으나, 이것은 고대로부터 이어 심은 것으로 오로치족 멸망 지점을 후세에 전
하려고 한 것이다.
또한 일설이 있는데, 1877년경 문부부 소속 다나카 요시아쓰(田中義康)라는 사람이 지은 고대사에서
말하기를, 야마타노오로치(八岐大蛇)라는 것은 지세를 감안할 때, 요호로(大呂), 요코타(橫田), 시타요코
타(下橫田), 오야카와(小八川) 등의 큰 못으로서 이 수문의 지명을 키리도우시(切通)라고 했으며, 동서
의 산자락을 잘라내서 그 물을 히이가와에 흘려내려, 그때 못 물을 준설했더니 한 보검을 얻었다. 즉
아메노무라쿠모(天叢雲)의 검이라고 하는 설이 있다. 이것 역시 일설을 이룬다.
이상과 같이 사견을 설명했으니 여러분이 참고하시기 바란다.
1941년 11월 1일 마쓰에 임수(臨水)여관 조선유림 숙박 환영연 석상
향계(香溪) 다나카(田中莊次郞) 씀
180) 히메카와 : 簸川을 말함.
부봉(芙峰) 호리가메 고로(堀龜五郞) 구술 요지
저희들은 이곳에서 미숙하나마 문예에 뜻을 둔 자들이나, 이번에 조선에서 명망이 높으신 유학자 여
러분이 성지참배 도중에 이곳에 두르셔서 이와 같은 환담의 기회를 얻게 된 것을 충심으로 기쁘게 생
각하는 바입니다.
옛날부터 우리 이즈모(出雲)는 신화시대에 개벽을 맞아 개척의 조신(祖神) 스사노오노미코토(素盞鳴
尊)가 이즈모가 좁다는 것을 인정하셔서 다른 나라의 잉여부분을 끌고 와서 봉합하여 확장을 도모한
바, 첫째로 조선의 잉여부분을 끌고 와서 봉합하여 확장한 것을 현재의 오우야시로쵸우(大社町)지방으
로 삼고, 이것을 쿠니비키(國引)181)라고 말하며, 마치 국토를 끌어온 것 같은 느낌이 있으나, 이것은 모
든 분야의 문화나 물자 수입을 동반한 이민이라고 해석되고 있으며, 이 지방 각처에 전설도 남아 있고,
이 시대의 왕래교류는 상당히 친밀했던 것으로 상상이 됩니다. 이후 3천년 조선 사람들의 피도 흐르고
있으며 우리 산인(山陰)사람들에게 혼입되어 오늘날에 이르게 된 것도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귀 지방의
사람들과 연고 없는 타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고, 마치 동족친척과 같은 느낌을 품고 있습니다. 아무쪼
록 장래에 한층 친밀하게 서로 제휴하여 공영에 매진하고자 생각합니다.
또 제가 기연이라고 생각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약간은 저희 집안 일로 송구하다고 생각합니다
만 돌이켜 보면 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 즉 1887년 전후에, 마침 제가 11, 12세 경이라고 기억합니다만,
저희 집안은 이즈모(出雲)의 남부 이이시군(飯石郡)의 카케아이(掛合)라고 하는 산속 작은 시가지의 임
시 주거에 살고 있는 중에 일어난 일로서, 어느 날 우츠키(杵築)항에, 즉 지금의 오우야시로초에 조선
사람들이 표착하셔서, 그 당시는 교통이 불편했던 시대로 관청으로부터 보호를 하며 조선으로 송환하
기 위해 도보로 히로시마에 향하는 도중 카케아이초(掛合町)의 이와타(岩田)여관에서 1박한 일이 있었
습니다.
일행은 대충 10명 내외로, 잎사귀가 떨어진 나무에 가끔 싸락눈이 휘날리는 쓸쓸한 날이었다고 생각
합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국회 개설 기운으로 한촌벽지에 이르기까지 청년들은 의기가 몹시 왕성하여 지
조연마의 단체가 일어나고 있는 중인 시대로, 당시에 그 군청에 봉직하고 또 그 단체를 주도하고 있었
던 친형 육봉(六峰)이 주창하여 동지 몇 명을 동반하고 표류해서 지친 적막을 달래기 위해 몇 접이 되
는 곶감을 가지고 그날 밤 조선에서 온 여러분을 이와타여관에 위문하며, 말은 통하지 않았으나, 글이
같은 우의로 필담을 교환, 한시를 주고받으며 일행 중 대표되는 분은 경상도 어떤 곳(지명은 잊음)의
한림학사 모씨(이름은 잊음)로서 석상에서 즉흥의 기구(起句)에 가로되 “去國難家看白雲”라고 하였으
며, 제가 어린 마음에도 표류하여 지친 가슴속을 잘 짐작하게 하고, 지금껏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단,
햇수가 많이 지났기 때문에 이어받은 구(承句)이하는 잊었으나 여관을 찾아서 곶감을 보낸 호의를 감사
하는 뜻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아우인 제가 지금 여기에 여러분을 환영한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인연을 느끼며 감개무량한
것이 있습니다.
181) 나라를 끌어 오다.
여기에 인사와 아울러 50년 전의 비화를 한 토막 드릴 겸 피로했습니다.
1941년 11월 1일 마쓰에 임수여관 조선 숙유(宿儒) 환영 아집(雅集) 석상
부봉(芙峰) 호리가메 고로 씀
계속해서 예정대로 시회(詩會)를 개최하여 다음과 같은 아작(雅作)을 얻고, 이번 여행기가 한층 이채
를 첨가한 것을 기뻐했다.
○ 松江雅集
白髮朱顔似老仙, 詠吟武伴夜縣縣, 延縣米壽身倍健, 獨樂兒孫繞膝前. 전중장(田中莊)
數聲漁笛動高秋, 客上名區第一樓, 邂逅新知傾盖地, 暗消萬里旅人愁. 서촌재극(徐村載克)
綠江十里浪花秋, 一把靑襟共倚樓, 數幅瓊琚多厚意 同來慰我望鄕愁. 가천구사(嘉川久士)
水國蒼葭白靈秋, 山陰名士集湖樓, 無數片帆松島向, 逍遙半日滌塵愁 부산삼(富山森)
松江江上菊花新, 同志相逢此一樓, 披瀝胸衿如舊識, 却忘千里旅窓愁. 강본봉훈(康本鳳薰)
內鮮白髮弄淸秋, 樓下水中水上樓, 今日松江分手後, 爲民爲國是吾愁. 청하달빈(淸河達斌)
楓菊正姸九月秋, 技桑名春聚江樓, 維新隣好非凡爾, 肝膽相傾忘旅愁
또한,
漁船無數泛江湖, 始見玄灘第一區, 張翰東萊何意味, 十年隱逸不忘鱸. 백천훈영(白川壎榮)
紅葉黃花九月秋, 郡賢來訪泛湖樓, 慇懃談笑淸無限, 前路斜陽使我愁. 정순현(鄭淳賢)
○ 소화(昭和) 신기(辛己)년에 조선노유(老儒) 일단에게 임수정(臨水亭) 석상에 드림.
煙水滄茫萬頃湖, 湖樓迎客對名區, 漁歌一曲惹吹興, 欄外時跳三尺鱸.
또한,
共倚碧空湖畔樓, 仙掌呈媚嫁洲羞, 松江有此風光勝, 賴恢諸賢詩思不. 마쓰에(松江素雲)
十五年前御客裝, 遊蹤印在古平壤, 今迎高士談曾昔, 故態慚吾詩酒狂.
(계림명사를 맞이하여 느낌) 요시마츠(吉松吉樹)
鷗鷺訂盟湖上秋, 群賢迎得倚高樓, 明朝大社期參拜, 東道知無風雨愁.
(迎鷄林儒宗) 나가오(長眉一夫)
鷄林寄寓幾春秋, 相遇舊知登當樓, 半日淸淡歡不盡, 詩適何用說新愁. 후카츠(深津精)
正是碧雲湖畔秋, 鷄林耆宿共凭樓, 風流唱和淸談興, 半日閑遊慰旅愁.
(鷄林詞宗歡迎雅集席上公賦呈偶得諸賢次韻成原唱) 호리 마코토(堀誠孝)
蓼紅蘆白入秋新, 湖畔淸遊迓雅賓, 媛嶺仙峰迄一揖, 山靈亦是似相親.
倚盡湖樓眺望淸, 遠來賓客結吟盟, 詩情酒思風蓙外, 鷺地鷗天肝膽傾.
(鷄林詞宗歡迎雅集席上卽事) 호리샤(堀謝孝)
○ 마쓰에(松江) 즉경(卽景)
萬里風烟一眼前, 松江秋色碧連天, 詩情遙入迷茫處, 數黙閑雲雁鴨邊. 가천구사(嘉川久士)
○ 이즈모타이샤(出雲大社)
入社先祠祈願期, 年年十月最靈知, 百八六神都會地, 邦家祝福不違時. 청하달빈(淸河達斌)
주객이 점심을 함께 하고, 우리는 이즈모타이샤(出雲大社)의 참배로 향했다. 마쓰에를 출발한 기차는
경치가 그림 같은 신지코(宍道湖)호반을 달려서, 약 40분만에 신가와(新川)를 건넌다. 또 다시 기차는
히이가와(斐伊川)의 철교를 건넌다. 히이가와는 옛날 히메카와(簸川)라고 했으며, 이 강의 상류에는 신
화로 유명한 오로치(大蛇) 퇴치의 유서 깊은 곳이 있다. 기차는 이마이치(今市)에 닿았다. 이마이치라는
지명의 유래는, 하나조노(花園)천황의 시대, 호우토쿠(寶德) 연간(15세기 후반)에 인접한 곳으로부터 서
로 모여, 일상용품의 시장을 열고, 사람들이 “이마 이치가 하지맛다.(지금 시장이 열렸다)”라고 외치면
서 서로 호응하여 집합했다는 것에서 드디어 지명이 되었다고 한다.
이마이치에서 타이샤(大社)선으로 바꾸어 탔다. 타이샤역에 내려서 우카바시(宇迦橋)를 건너면 큰 홍
살문이 있다. 이것을 지나쳐서 비탈길을 올라가면 둘째 홍살문에 이른다. 여기부터는 참배도가 되어,
중앙에는 몸을 맑히는 다리가 있다. 참배도 좌우에는 노송이 길게 이어져서 엄숙한 신비감이 넘친다.
더 나아가서 벽동(碧銅)의 큰 홍살문을 지나면 금단의 경지에 이르며, 사방을 거친 울타리로 두르고,
안에 배전사무소(拜殿社務所), 사무소, 팔족문(八足門), 누문, 신찬소(神饌所), 제화전(齊火殿), 관제루
(觀祭樓)를 비롯하여, 타이샤의 섭사(攝社)나 말사가 가지런히 서로 바라보고 있다.
이즈모타이샤(出雲大社)의 제신은 오오쿠니누시노미코토(大國主命)이다. 미코토(命) 또는 이름은 오
우나무치노미코토(大己貴命), 오오모노누시노미코토(大物主命), 오오쿠니누시노미코토, 야치호코가미
(八千矛神)라고도 일컬어졌으나, 즉 미코토에게는 귀한 신위(神威)와 신덕이 광대무변하게 있었기 때문
이다.
미코토는 일찍이 국토를 경륜하고 사신(邪神)을 소탕하시고, 인민을 길들여서, 농업을 가르치고 의업
(醫業)과 금염(禁厭)의 법을 창제하여, 국가 성립의 기초를 정하셨다는 것이다. 마침 그때 아마테라스오
우미카미(天照大神)는 사신 건어뢰명(建御雷命)을 오오쿠니누시노미코토에게 보내서 “이 아시하라노
나카츠쿠니182)는 우리의 자손이 통치할 땅이다”라고 하는 칙령을 전했다고 한다. 미코토는 사신에게
“나는 원래 그것을 부정하며 받들 마음이 없다, 우리 아들 고토시로누시노미고토(事代主命)과 의논한
후 회답하겠다”고 응답했다. 이때 고토시로누시노미고는 치료받기 위하여 미호사키(美保崎)라는 곳에
있었으나, 사신과 함께 급히 돌아와서, 부군(父君)에게 “항송하도다! 말씀하신대로 받들기 바란다.”고
말했었다. 이때 오오쿠니누시노미는 “이 아시하라노 나카츠쿠니(葦原乃中國)를 황손에게 받쳐서 영원
히 하늘의 후사(後嗣)에게 지키게 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신고(辛苦)경영의 나머지 이루어진 국토를 통
182) 葦原乃中國 : 일본.
틀어 헌환(獻還)하셨다. 아마테라스오우미카미는 이것을 기꺼이 여겨, 천황의 황궁과 같은 궁거(宮居)
를 주었다. 이것이 즉 이즈모타이샤(出雲大社)의 기원인 것이다.
우리는 먼저 사무소에 들러, 참배자 명부에 서명하고, 정식 참배를 했다. 참배를 마치고 신직(神職)
당담자로부터 타이샤에 관한 간단한 설명을 들었으며, 이어서 보물전을 참관했다. 여기에서 참관한 것
중에 제가 가장 눈을 부릅뜬 것을 두세 가지 들어서 설명해 보자.
1. 수구(燧臼), 수저(燧杵)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발화기(發火器)로서, 그 기원은 멀리 오오쿠니누시노미가 나라를 만들 때,
선부183)였던 수호신(水戶神)의 손자 개팔옥신(櫛八玉神)이 해포(海布)의 자루와 해존(海尊)의 자루로써
수구저(燧臼杵)를 만들어서 불을 만들어내고, 그 뒤에 해초대신에 나무를 가지고 하게 되었으며, 노송
을 수구(燧臼)로, 묘목(卯木)을 수저(燧杵)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개팔옥신(櫛八玉神)의 자손인 별
화생(別火姓)에서, 조신의 유업을 계승하여, 타이샤에서 제작하게 된 것이다. 그 재목은 타이샤 본전 뒤
의 우가산(宇伽山)에서 채취한 것으로, 그 규격은 수구(燧臼)가 길이 2자 6치, 폭 6치, 두께 1치, 수저(燧
杵)는 길이 2자 1치, 직경 4푼 5리(길이와 폭은 다소 변경이 있기에 반드시 일정하지 않다)인 것이다.
2. 돌도끼(石斧)(雷斧)
1893년 10월 20일 공학사 오오하라 진노스케(大原甚之助)가 이즈모타이샤(出雲大社)에 참배하여, 경
내를 순배할 때 이것을 발견하여 셍케(千家) 궁사(宮司)에게 기증한 것이나, 돌도끼는 석기시대의 유물
로서 여러 가지가 있으나, 이것은 마제 돌도끼라고 일컬어지는 것이다. 돌도끼를 뇌부(雷斧)라고 말하
는 것은, 뇌우(雷雨) 때문에 토사가 유출하여, 가끔 이러한 유물이 사람 눈에 띌 정도로 노출하게 된
것을 뇌신(雷神)이 던져내린 것으로 생각하여, 뇌부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3. 고대 엄옹(嚴瓮), 3종 6개
엄옹은 고대에 제사에 쓰인 도기로서, 그 질에 의하여 연대(年代)를 나누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중
한 종류는 진무(神武)천황기에 천지향구산(天之香具山)의 적토(赤土)로써 80옹기를 만들었다고 하는 것
과 마찬가지로, 즉 그때의 나라 만들기가 이즈모타이샤의 오오카미(大神)를 받드는데 쓰인 것으로, 가
장 오래 된 것이다. 한 가지는 5, 6세기 경의 것이며, 또 한 가지는 9, 10세기 경의 것이다.
4. 봉납선
1781년 10월 17일(약 160년 전) 토사(土佐)의 고장 야마모토(山本助藤)라는 호랑이 띠 사나이가 이즈
모타이샤의 오오카미의 영험이 뛰어남으로서, 시주한 보답을 받고자 바라며, 작은 통나무배를 만들어,
그 배속에 관영전(寬永錢)(엽전) 15문을 넣어서 집 앞 작은 개천에 띄어 보낸 것이 2년의 세월을 거쳐
1784년 4월 27일 키츠키(杵築)의 이나사(稻佐) 바닷가에 표착한 것이다. 이것을 마을의 도부신우위문(渡
部新右衛門)이라는 자가 습득하여, 당시의 출운국조 천가준수(出雲國造千家俊秀)에게 헌납한 것이다.
보물전의 참관이 끝나고, 나라 지키기 담판으로 유명한 이나사(稻佐) 바닷가에 갔었다. 이나사 바닷
가는 타이샤의 서쪽 약 7백 미터의 해안 일대의 모래사장을 말하는 것이다. 그 옛날, 오오쿠니누시노미
코토 대(對) 타카마가하라(高天原)의 사신 신경진주(神經津主), 무뢰(武雷)의 두 신과의 담판에 얽혀 있
183) 膳夫 : 요리하는 사람.
는 여러 신화는 여기에 흩어져 있는 작은 바위, 작은 섬에 감추어지고 있는 것이다. 물가에 서서, 북쪽
에 어기산(御碕山)의 비취색 풍경을 등지고, 남쪽은 멀리 삼병(三甁)의 빼어난 봉우리를 향하여, 옛날을
추억하는 듯 이곳에서 엄격하게 대립하여 담판했던 신들의 모습이,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과 같다. 또
밀려오는 파도소리는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는 듯 하다.
이나사의 해변을 보고 나서, 죽야옥(竹野屋)여관에 들어가서 저녁을 먹었다. 오늘밤은 기차 안에서
자지 않으면 안 된다.
11월 2일(일) 맑음
산인(山陰)선에는 침대차가 없다. 그만큼 뒤(裏) 일본은 문화수준이 낮다고 하겠다. 그리하여 우리들
일행은 좌석에서 견디며 하룻밤을 할 수 없이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기차가 시모노세키에 도착하니 오전 6시 12분이었다. 일행은 역전 산요(山陽)호텔 식당에 들어가 아
침밥을 먹고, 또다시 동 8시 15분에 출범하는 칸몬(關門)을 연락하는 작은 기선을 타고, 토목일본의 개
가가 올랐던 칸몬대터널은, 이 해저를 잘도 뚫었다고 생각하면서, 동 30분에 도착했다.
동 9시에 모지(門司)를 출발한 기차는 약 2시간 반에 온천의 고을로 유명한 벳부(別府)에 도착했다.
간밤은 숙면을 못한 탓인지, 철도연선의 경치를 가끔 놓친 것 같다. 참으로 유감이다. 가끔 본 것으로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노약자나 부녀들이 젊은이를 대신하여 들판에 나가서 일하고 있는 정경이다.
때마침 수확기였기 때문에, 여기저기에 이러한 정경이 보여서 저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벳부는 익켄기행(益軒紀行)에 따르면 “이것은 120년 전의 일인데, 벳부지방 지진으로서, 옛날 벳부는
마을이 완전히 바다가 되고, 옛날의 벳부는 지금 거리의 수백 미터 동쪽에 있었으며, 그 당시 마을의
서쪽인 온천은, 지금 썰물자리 속에서 나왔다. 또 옛날 벳부의 북쪽 가까운 곳에, 히사미츠(久光)라는
마을이 있었으나, 이것 역시 지진으로 바다가 되었다. 지금은 없다…….” 이 문헌에 의하여 보아도, 벳
부는 상전벽해의 변고가 거듭된 것 같이 생각되지만, 그러한 천재가 있었음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온천
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한다.
벳부가 온천지대라고 하는 것은 남쪽의 오오이타(大分)시의 타카사키산(高崎山)에 인접하고, 북쪽은
토요오카초(豊岡町)를 잇는 동서 8킬로, 남북 4킬로, 면적 약8만 평방킬로미터의 온천지대를 말하는 것
이다. 이 지역에는 벳부, 하마와키(濱脇), 가메야마(龜川), 가카이지(觀海寺), 근석(根石)184), 묘반(明礬),
간나와(鐵輪), 호리타(堀田)의 각 온천장이 있으며, 유후인(由布院), 츠카하라(塚原) 각 온천도 함께 대
벳부 온천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그중에 시영온천이 32개탕, 기타 46탕, 개인소유를 합쳐서 용출하는
온천 구가 1,916구, 증기를 뿜어내는 구멍이 714, 하루의 용출량은 약 30만 섬에 도달한다. 벳부시의 관
광과에서는 벳부를 다음과 같이 자기소개를 하고 있다. ― 전시(全市)의 2천 남짓 출구에서 용출되는
온천 김은, 유후츠루미(由布鶴見)의 고봉으로 강풍을 막고 있는 종용한 산기(山氣)에 화합하며, 또 푸른
물결의 오존을 나르는 신선한 바다기운과 일망천리 급하지 않는 비탈의 가로누운 초원에 비치는 햇빛
184) 시바세키(紫石)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임.
은 사계절 빛나고 산수자연의 묘함에 녹아서, 유감이 없으며 우리 벳부시의 전체 모양은 보건과 요양,
관광과 유람의 이상향으로서 약동하고 있는 것이다. ― 이 문장은 다만 미사여구를 나열만 한 것이 아
니고, 벳부의 진상을 보는 자는 반드시 이 문장을 배반할 것이다.
우리는 해안거리에 있는 여관 청풍장(淸風莊)에 여장을 풀고, 온천에 들어가서 20일간에 걸친 여독을
풀었다.
밤에는 또 지난번에 이어서 좌담회를 열었다. 좌담회의 내용은 별항과 같다. 또 좌담회 도중에 미나
미 총독의 매제인 육군소령 무라타(村田) 씨가 내방 해 주었다.
○ 벳부온천
溫泉今日洗雀軀, 俯仰中間多別區, 綺山八景顔前鏡, 溪谷三勝背後圖. 청하달빈(淸河達斌)
聖域拜觀名勝遊, 露花霜葉適時秋, 若草斜陽馴在鹿, 松江朝日泛來鷗.
黃金老佛幾千寺, 碧樹神宮第一州, 須曳浴罷淸風閣, 海國靑山散不收. 부산삼(富山森)
제3회 좌담회
일시 : 11월 2일 (오후 8시부터 동 10시까지)
장소 : 벳부시 키타하마(北濱)해안 청풍장
○ 영전(永田) 단장 지금부터 제3회 좌담회를 열겠습니다. 여러분 연일 피곤하시리라 생각합니다만,
예정된 일이기 때문에 무리라고 생각하면서, 오늘밤 회합으로 수고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이세신궁참배 이래의 감상을 전회와 중복되지 않을 정도로 이야기 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
이세신궁에 참배하고 ‘오카구라(御神樂)’를 봉납할 때는, 일행 중에 참가 못했던 가천(嘉川), 청하(淸河),
죽성(竹城) 세 사람에게는 몹시 곤란하고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참가하신 분은 그 감상을 아울
러 이야기 해 주시기 바랍니다.
○ 산가(山佳) 경북 강사 음악에 대해서는 저보다 선배 되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저부터 카구라(神樂)
를 들은 감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젊을 때부터 음악에는 각별한 취미를 갖고 있었기에, 카구라를
들었을 때에도 흥미 깊은 바가 있었던 것입니다. 일본 고래의 음악이나 서양음악을 연구한 일은 없었으
나, 그러면서도 듣는 것은 흥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왕직에서 연주하는 아악도, 경학원의 석전제 때의
연주하는 제악도 고아하며 엄숙하지만, 카구라도 매우 고상한 음률이 떠돌고 있었습니다. 그 카구라의
고상한 음률을 듣고 있을 때,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참으로 형언하기 어려운 소위 신묘(神妙)한 경지
에 들어간 듯한 기분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음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부산(富山) 함북 강사 옛날 신라궁중의 악(樂)에도 신인이화지곡(神人以和之曲)이 있다 하지요.
○ 강본(康本) 평남 대표 저도 카구라를 듣고 조선 고래로 전해지는 조선 아악과 이 카구라 사이에
유사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특히 악기의 고(鼓), 생황(笙簧)과 같이, 또 춤 같은 것도 그 복장이 조선과
유사했습니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 보아도, 오랜 옛날부터 내선 간에 문화교류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 산가 경북 강사 저도 카구라를 듣고 내선일체는 이론이 아니며, 확고한 근거 아래에 세워진 사실
이라는 것을 통감했습니다. 옛날부터 그 악(樂)을 듣고 그 정(政)을 안다고 하고 있지만 완전히 그대로
입니다.
아까도 말한 것처럼, 저는 음악에 취미를 갖고 있음으로 평소 생각하고 있던 것을 한 마디 말씀드립
니다. 내지도 조선도 그 악기는 대륙으로부터 전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음계에 대해서 말하면, 궁
(宮), 상(象), 계(稽), 계상(稽象), 각(角), 치(齒), 우(羽)의 7음계가 있습니다. 그럼으로, 조선의 가야금으
로 서양 악보를 탈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제가 아까 카구라를 듣고, 내선일체는 이론이 아니며 확고한 근거를 갖고 있음이 사실이라고 말
했으나, 카구라에 맞추어 춤추는 것을 보고, 이 느낌은 더 한층 깊게 되었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이
무악은 오양선무(五羊仙舞)와 잘 닮았습니다. 오양선무는 오늘날에도 경주 근처에 가면 가르치고 있으
나 그것을 보면, 그것의 나아가고 물러서는 동작이 양쪽 모두 닮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
다. 이것을 보아도 내선문화는 그 근거가 같고, 따라서 지금까지 피상적으로 생각해 온 내선일체 관념
은, 비로소 내선은 태고적부터 이어짐이 깊고, 어디까지나 내선일체는, 이론이 아니고 확고한 근거를
가진 사실인 것을, 마음속으로부터 느낀 기분이 들었습니다. 지금 역사를 통하여 내선관계를 생각해 보
면, 이조시대는 내선 간의 교섭이 소원했던 듯한 느낌이 있으나, 그 이전의 역사 특히 백제와 일본과의
관계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한 나라와 같은 느낌마저 들도록 밀접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백제인이 내지에 귀화한 자가 몇 만이나 된다고 말함으로, 그 자손은 오늘날 놀라운 숫자에 이르렀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 영전 단장 다음은 나고야 성을 참관하고, 어떤 감상이 일어났는지 그 감상을 이야기하기 바랍니다.
○ 강본 평남 대표 나고야 성을 본 감상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절실하게 느낀 것은, 축성방
식이 조선 것과 방불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도 아마도 대륙의 축성방식을 조선으로 가져와서, 내지
는 또다시 조선에서 수입했겠지만, 그 기술적인 가치로 말한다면, 여러분도 스스로 보셨기 때문에, 잘
아시리라 생각하나, 조선의 축성방식과 비교해 보면, 나고야 성은 참으로 웅대하고 또한 그 기술이 치
밀한 점으로, 조선의 성보다도 훨씬 우수합니다. 대체로 모방한 것이나 수입한 것은, 상식적으로 말하
면 방불하거나 또는 떨어지게 되어 있으나, 나고야 성은 그 방식을 조선으로부터 채택하고, 그 기술적
인 가치는 조선보다 훨씬 나은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다른 곳에서 수입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하
는 노력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말을 바꾸어 하면, 남의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이것을 통째로
삼키지 않고, 잘 씹어서 버릴 것은 버리고, 채택해야 할 것만 섭취하기 때문입니다.
○ 영전 단장 성의 형식도 많은 것 같습니다.
○ 산가 경북 강사 나고야 성과 경주 성이 같은 것 같습니다.
○ 영전 단장 부여의 황산성에 터에 올라 가보아도, 천주각(天主閣)의 흔적 등이 있습니다. 나고야
성도 임진란 이후의 축성이기 때문에, 백제식을 가미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음은 제도(帝都)에 들어가서의 감상을 먼저 니주우바시(二重橋) 앞에 가서 궁성에 배례한 감격을
이야기 해 주십시오.
○ 산가 경북 대표 성지참배 출발 이래 단장님의 지도로 조선에서 궁성요배시각에 궁성요배를 했을
때도, 궁성이 가까운 느낌이 들어 궁성요배의 뜻이 깊은 것을 느꼈으나, 니주우바시 앞에서 공손히 나
아가서 궁성을 향하여 받들어 절을 했을 때는, 오직 감격에 가슴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또
궁성을 참관하여, 쿄토의 도요쿠니(豊國)신사의 궁사인 요시다(吉田) 씨의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요
시다 궁사가 말한바 “일본에는 지나와 같은 대규모의 성곽이 필요 없는 것은 신민이 모두 성곽이 되고
있으며 모두가 지키고 있다는 것”을 머리에 연상하며, 궁성을 참관해 보면 과연 그렇구나, 황공한 일이
지만, 그렇게 규모가 웅대하지 않은 기분이 들었습니다만, 그러나 매우 삼엄함이 있음을 느꼈습니다.
또 전차를 타고 보아도, 승객은 궁성 앞을 지나칠 때는 모두 습관적으로 궁성 쪽을 향하여 배례를 하는
데는 놀랐습니다. 그중에서도 파마를 한 여성 즉 물질문명에 현혹되어 정신적인 면은 등한하리라고 생
각했으나, 그렇지 않고 참으로 정중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배례하고 있는 것을 보고, 더욱 요시다 궁사
의 이야기를 생각해 내었습니다. 즉 일본문화는 외면만으로는 진실을 보기 힘들다. 그 내용을 보지 않
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파마여성을 예로 끄집어내는 것은 마땅하지 않을지 모르
나, 그 여성도 외면적으로는 과연 서양풍에 찌든 것 같이 보이나, 그 정신만은 일본여성의 알맹이를 갖
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 강본 평남 대표 궁성요배는 언제나 해 온 것이나, 니주우바시 앞에서 황궁을 향하여 받들며, 경
건하게 경례를 했을 때는, 무어라고 말할 수 없는 고마움을 느꼈습니다. 저희들이 동경에 들어 왔을 때
는 마침 방공연습 중이었으나, 궁중에서도 연습의 의식이 있었는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으며,
참으로 황송하게 생각했습니다. 지존의 땅, 궁중에 있어서도, 그와 같이 방공에 진념(軫念)하신다는 것
은 오로지 황공함의 극치였습니다.
○ 부산(富山) 함북 강사 니주우바시 앞에서 황궁에 배례했을 때는 마치 지척 앞에서 용안을 뵙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 영전 단장 다음은 메이지신궁에 참배한 그 감상은 어떠했습니까.
○ 서촌(徐村) 충남 강사 국가의 대사업은 메이지대제의 대에 이르러서, 크게 떨쳐서, 동아공영권의
확립의 싹틈에도 메이지대제의 대로부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물론 조국(肇國) 정신이 팔굉
일우의 이상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동아공영권도 필경 조국 정신의 발로임으로, 그 정신을
메이지대제에 있어서, 비로소 해외에 선양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땅하게 메이지중흥을 해낸 명군
임을 생각할 때, 신전(神前)에 머리 숙이는 순간 성은이 끝없는 것을 새삼 느끼는 것입니다.
○ 영전 단장 그야말로 이야기대로입니다. 진무(神武)천황이 즉위한 이래 메이지대제의 대에 이르
기까지 참으로 2천 5백여 년이 되지만, 조국(肇國)의 대이상이 대제의 시대가 되어 비로소 부흥한 것입
니다.
○ 백천(白川) 황해 강사 메이지신궁 경내에 있는 성덕기념회화관을 참관해서, 대제의 성덕을 더
한층 강하게 느꼈습니다.
○ 영전 단장 그러면 유시마(湯島)성당을 참배하여, 어떤 감상이 일어났었는지 이야기를 부탁합니다.
○ 가천 경기 강사 저희들이 유시마성당을 참배하여, 느낀 것은 먼저 경학원과 비교하여, 그 규모가
웅대한 것, 건축물이 청초한 것에 놀란 일입니다. 저는 성당에 참배하여 시를 한 편 만들었습니다. 졸작
이지만 가슴이 메는 것이 있기 때문에, 하나 피로해 보고자 합니다.
東巡聖駕仍留東
後學林林敎化中
瞻仰千秋多感慕
靑衿簫灑杏壇風
공자님이 철환천하(轍還天下)185)를 하셨다고 하지만, 공자님이 오늘날 천하를 주유하셨다면, 반드시
동경에 머물러 계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곡부(曲阜)에 있는 공자묘가 장개석 군의 총탄을 맞고 황폐
화된 것을 본다면, 공자의 영혼이 아마도 불안해 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것과 반대로 일본의 공자에 대
한 존앙심은 주객이 전도된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지나인보다 훨씬 강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 산가 경북 강사 성당은 참으로 청정해서 저절로 머리가 숙여지게 되지요.
○ 가천 경기 강사 저는 석전제를 보고 느낀 것을 말씀드립니다. 석전 때 보면, 대성전(大成殿)에서
제관은 엄숙하게 성의를 보이고 있으나, 문묘의 동서무(東西廡)를 보면, 부끄러운 일이나, 성의가 없고
통제가 없지 않습니까. 어찌하여 이러한 것을 개혁통제하지 않고, 일사불란한 질서 바른, 제전다운 제
전이 이루어지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봄 가을 두 차례밖에 없는 석전제를 그렇게 무성의하게 집행하
는지, 감독을 맡은 사람의 심리가 알 수 없습니다. 시례되는 말이지만, 봉작(奉爵) 헌작(獻爵) 같은 것은
다만 형식적으로 어린애 장난 같이 보일 때는 참으로 분개마저 느껴집니다.
○ 서촌 충남 강사 대성전 집사들은 어떻든, 동서양무(東西兩廡)의 집사는 가천 씨가 말한 것처럼,
보기에 견딜 수가 없을 만큼 통제가 되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나, 저는 그렇게 된 원인은 제관이 일
정하지 않고, 또 집사들의 훈련이 모자라는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 영전 단장 그 점은 저도 유감이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차차 개선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 강본 평남 대표 유시마성당에 참배한 감상을 말씀드립니다. 유시마성당을 중심으로 조직된 사문
회(斯文會)는, 내지의 유학계의 일대 추진(推進)대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사문회를 중심으
로 유교를 숭상하고 유학을 연구하는 대동문학원을 설립하는 등 이 길을 진흥하기 위하여 눈부신 활동
을 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경하해야 할 고마운 일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참 마음으로 유도를 숭상함으
로서, 유시마성당도 저절로 엄숙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문회의 간주나 위원들도 상당
한 권위자와 학자를 망라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사문회에서 발간한 ‘현대일본의 유학’이라
고 하는 큰 책을 보아도 관계자가 어떻게 황도에 기초를 둔 유학 즉 일본적 유학을 규명하고 있는가,
그 열심과 유학에 대한 조예의 깊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할 때에, 소위 유림대표로
추천되어 성지참배까지 오게 된 자신을 되돌아보면 부끄럽습니다. 50세나 된 유림으로서, 지금까지 유
교의 진수를 연구할 기회를 못 가진 것은, 부끄럽다고 하기보다 오히려 중견 유림으로서 성지참배를
할 만큼의 자격이 없다고 단언하고 싶어집니다.
다음은 누군가 말한 것처럼, 경학원의 석전뿐만 아니라, 지방의 각 문묘에서 경전제(經奠祭)를 거행
하는 것을 보아도 대동소이하고, 참으로 유감스러운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것은 종래의 유림
185) 수레를 타고 천하를 돌아다닌다는 뜻으로, 세계 각지를 여행함을 이르는 말. 공자가 교화를 위하여 중국천하를 돌아다닌 데서 유래한다.
이 자칫하면 형식 만에 얽매어 실천을 가볍게 본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요는 우리들은 실천유교를 중하
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 산가 경북 강사 저도 동감입니다. 우리는 종래에 형식에 구애받은 유교로부터 탈피하여, 황도정
신에 따른 실천유교를 수립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 가천 경기 강사 각 지방유림이 집합할 경우에는, 반드시 그 지방의 향교에 집합해야 된다고 생각
합니다. 왜냐하면, 각 향교가 황폐하고 있는 것은 여러분도 알고 계시는 바와 같으나, 유림이 그 황폐한
정황을 직접 눈으로 보지 않으면, 유림은 그 책임을 느낄 기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 영전 단장 유시마성당에는 배향(配享)186)이 없는 것 같습니다.
○ 가천 경기 강사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송우암(宋尤奄), 이퇴계, 이율곡과 같
은 여러 선생은 당연히 배향해야 되지만, 배향된 분 중에는 우리들이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 있음으로,
제 생각으로는 오히려 그런 분은 배향하지 않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실례가 될지 모르지만….
○ 강본 평남 대표 조선의 문묘는 여러분이 알고 계신대로, 안문성공(安文成公)이 지나로부터 그 제
도를 본 받아 온 것으로서, 그 제도에 다만 조선의 명유(名儒)를 배향했을 따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천 씨도 말한 것처럼, 문묘에 배향된 분들 중에는 우리들로서는 반드시 받들어 올려야 한다는 (물론
배향하는 것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분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 가천 경기 강사 경학원에 내지의 명유를 배향하면 어떨까요.
○ 영전 단장 저는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유시마성당에도 배향하지 않는데 오로지 조선에서만
배향한다는 것은 어떨지 하고 생각합니다.
마침 이때, 이곳의 유지로서 이름 있는 육군소위 무라타(村田恰) 씨가 찾아왔다. 그는 재향군인으로
서 지방발전에 적지 않는 분투를 하고 있다는 듯, 또 우리 일행이 그의 내방을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은, 그가 총독각하의 매제라고 하는 것으로, 조선에서 온 사람이면 꼭 만나고 싶다고 함으로, 참으로
넘치는 온정으로 우리를 방문해 주었던 것이다. 또 그는 이곳 조선인의 뒷바라지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를 보았을 때는 어쩐지 마음이 뿌듯함을 느꼈다.
그는 좌담회가 중단된 것이 마음에 걸려, 충분한 이야기도 못하고 자리를 떴던 것이다. 이러한 점이
참으로 유감이었다.
일동은 그가 사양하여 떠난 후, 뜻밖의 진객 내방에 오직 감사함과 동시에 그의 각별한 조선인에 대
한 후의에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우리들은 그의 조선인에 대한 후의에 보답하여, 그의 건강을 축복
했다.
○ 청하 함남 강사 간단하게 저의 감상을 말씀드립니다. 유시마성당에 참배하고 나서는 과연 그렇
구나 하고 머리가 숙여지는 점은 많이 있습니다만, 특히 제가 가장 감명 깊었던 것은, 사문회에 있어서
‘공자송덕의 노래’를 제정했던 것입니다. 이 노래는 문부대신의 인가까지 거쳐, 음악학교에 의뢰하여 작
곡도 마친 것 같습니다. 다만 제가 염원하는 것은, 이 노래가 하루라도 빨리 일반에게 보급되어, 전국
방방곡곡 이 노래가 소리 높이 불려 퍼질 것을 간절하게 바라마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온갖
186) 학덕이 있는 사람의 신주를 문묘나 사당, 서원 등에 모시는 일.
물질적인 시설보다 훨씬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필자 주] 덧붙여서 ‘공자송가의 노래’는 문부대신의 인가를 받은 것으로, 시모히라(下平末藏) 씨 작사,
나카타(中田章) 씨 작곡이다. 작사 4절을 들어 본다.
(1) 태산만고(泰山萬古)는 구름에 서고
사천천세(四川千歲)의 물은 서두르지 않고
공자의 위업성덕은
산하와 함께 다하지 않을 것이다
(2) 효제충신 백가지 행동을
뚫는 길은 하나이기에
수신제가 만민을
이끌어 주는 근본은 인(仁)에 있다
(3) 전해 준 길은 시키시마(敷島)187)의
야마토 고코로(大和心)188)를 윤택케 하고
색과 향기도 묘하게 피어나서
나라의 꽃이여 윤택하게
(4) 유시마의 언덕에 높이 솟는
대성전(大成殿) 속에서
사람들이 행복한 세상에서
평화의 빛이 빛나리.
○ 영전 단장 고려신사에 참배하고 그 감상은 어떻습니까.
○ 산가 경북 강사 이조 오백년 이전은 내선이 바다 건너 한 나라와 같은 친밀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이번 고려신사에 참배하여 절실히 느꼈습니다. 그리하여 고려신사를 참배해서 제일 먼저 우리들이 깜
짝 놀랄 느낌을 일으키게 한 것은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의 팻말이 서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홍살문
대신에 신사 앞에 서 있는 것은, 바로 내선 간이 옛날부터 친밀한 관계를 말 해주는 좋은 예가 됩니다.
문헌을 보아서도, 고려촌의 유래는 참으로 오래된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고구려는 당나라와
싸워서 멸망했기에, 고국을 떠나서 일본에 귀화한 사람이 많이 있었던 것입니다. 조정에서는 이들 귀화
인을 우대해서 특히 고려촌을 하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활동도 조정의 우대책에 보답하는 위대
함이 있었다고 합니다. 저 광막한 무사시노(武藏野)를 개척한 사람은, 위의 조상이었던 것입니다. 이러
한 것을 생각하면, 고려신사를 참배한 것은 참으로 뜻이 깊었다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 영전 단장 이야기대로, 고려촌은 내선일체의 성지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신라는 당나라
와 짜고 연합군을 만들어 고구려를 친 것입니다. 고구려는 패망하였음으로 장병과 고관을 비롯하여 많
은 민중이 일본에 귀화해 왔음으로 무사시노(武藏野)의 한 귀퉁이 땅을 조정으로부터 하사받고, 이 땅
187) 일본국의 별칭.
188) 일본인 마음.
을 열심히 개척한 것입니다. 또 황무지를 옥토로 변하게 하고, 또 내지인과의 결혼도 왕성하게 되어 그
자손으로부터는 많은 무사를 내게 된 것입니다. 저 유명한 카마쿠라(鎌倉)무사 가운데도 그와 같은 혼
혈아가 많다는 것임으로, 그때부터 우리 조상은 혼연하게 내지인화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칸누시(神
主)의 자손은 성을 고려씨로 하고 방계는 다른 성을 쓰게 된 것입니다.
○ 산가 경북 강사 조선 안에 살고 있는 내지인에게도 이와 같은 문헌상의 사실과 역사적인 사실의
내선일체를 두루 알리는 것이, 우리들의 책무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 영전 단장 미나미 총독 각하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내선일체라고 하는 것은, 총독정치의 최고
목표이며, 또한 중앙정부의 방침이라는 것을 천명하고 있기에, 내선인은 함께 이 노선에 따라서 매진하
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 정(鄭) 경남 대표 저는 1910년에 고려촌에 간 일이 있으나, 그때도 주민이 대단히 환영 해 주었습니다.
○ 영전 단장 신직(神職)에 계시는 여러분들은 우리들을 마치 고향에서 찾아 온 사람아리라도 접대
하는 것처럼 환영해 주었으며, 매우 유쾌하게 느꼈습니다. 그리고 중추원의관 일동이 증정한 돌로 만든
코마이누(高麗狗)를 보았을 때는, 제가 관계하고 있기 때문에 기뻤습니다.
○ 정 경남 대표 아까 고구려가 당나라에 패배하여, 내지에 귀화한 사람이 많다고 말했으나, 가까운
이조시대에도 귀화한 사람이 있습니다. 내지에 카사이(河西) 씨가 있습니다만 이 카사이 씨는, 전남의
명문 하서(河西) 선생189)의 아들이 내지에 귀화하여, 자신의 부친 호로써 성으로 삼은 것입니다. 즉 내
지의 카사이 씨는 하서 선생의 후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영전 단장 코다마(兒玉) 대장 등도 고려촌 출생이라고 합니다.
○ 정 경남 대표 이조시대에 내선관계가 소원해 진 것은, 지나 때문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 산가 경북 강사 저는 철도연변의 농가에서 감을 말리고 있는 것을 보면, 풍속이 이렇게도 닮았구나 하고 깊이 생각하며 느꼈습니다.
○ 영전 단장 다음은 미토(水戶)의 감상을 이야기 해 주십시오.
○ 강본 평남 대표 저는 무엇보다도, 대일본사의 초고를 보고 감개무량했습니다. 도쿠가와 막부 3백
년 동안의 공적은 많이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대일본사 편찬 사업이 제일 눈에 띠게 됩니다. 대일본사
편찬은 대의명분을 천명하는 것이 목적임으로, 메이지유신의 대업이 성취한 것도 대일본사가 일어나서
힘이 있는 것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 영전 단장 도쿠가와 막부는 다이묘(大名)의 충성을 북돋웠고, 그 충성으로 넘어진 것입니다. 허
나 왕정복고의 대의가 완수된 것입니다, 요는 개인의 명리(名利)를 초월한 것입니다. 미토학의 발흥과
대일본사의 대성(大成)은 도쿠가와 막부의 커다란 공적인 것입니다.
○ 산가 경북 강사 미토는 역사의 고장답게, 한적하고 편안해서 좋았지요.
○ 가천 경기 강사 내지인이 고적이나 보물을 귀중하게 여기는 것은, 조선인은 이에 훨씬 못 미치지요. 옛날 우가키(宇垣) 씨가 조선총독으로 재임하고 있을 때에, 어느 재벌댁의 정원에 훌륭한 사리탑이
189) 하서 김인후(金麟厚)를 말함. 1510~1560년.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장식되어 있다는 것을 듣고, 그 출처와 유래를 물었더니, 그 출처가 조선이라는 것을 알고, 그러면 이것
을 꼭 원래의 곳으로 돌려주기 바란다고 하였으며, 경주불국사로 돌려받았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7
만 엔이라고 하는 거액을 내서, 공양비라거나 운반비용으로 충당했다고 합니다.
○ 백천 황해 강사 쇼우코우칸(彰考館)에 있는 대일본사의 목판을 보고, 해인사의 대장경 목판을 생
각해 냈습니다. 해인사에 있는 목판은 7백년이나 되었다는데도 변하지 않고 있답니다.
○ 강본 평남 대표 석유(碩儒)로서의 후지타 도코(藤田東湖) 선생의 묘는 너무나도 빈약했지요.
○ 영전 단장 다음은 닛코(日光)를 보신 그 감상을 말씀해 주십시오. 옛날부터 닛코를 보지 않고 켓코(結構)라고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과연 좋았지요.
○ 산가 경북 강사 그 경치는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장관이었습니다. 특히 화엄(華嚴)190)의 폭포는 금강산의 구룡폭포와 좋은 대조가 되었습니다. 닛코도 금강산과 비교해서 생각해 보면, 닛코는 인공
의 아름다움이 있으며, 금강산에는 자연미가 있다고 한마디로 말할 수 있지요. 금강산에도 인공미를 보
태면 금상첨화라고 말할 수 있지요.
○ 강본 평남 대표 오늘까지 내지의 많은 사찰을 보아 왔습니다만, 닛코에서 본 토우쇼우구우(東照
宮)는 참으로 웅대하고 장엄했습니다. 특히 수백에 이르는 영조물(營造物)이 전부 국보로서, 또 모든 예
술의 극치를 이루었다는 것은, 도쿠가와 막부의 문화가 얼마나 우수했는지를 이야기 해 주고 있는 것입
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의 눈을 끈 것은 조선의 예조판서 이직(李稙) 씨가 토우쇼유구우의 완성을 경하
한 명(銘)이 조각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 영전 단장 토우쇼우구우는 도쿠가와 시대의 예술의 진수를 모은 것으로서, 도쿠가와 막부의 사
치풍조를 엿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닛코를 보시고, 그 감상은 가슴 가득히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간도 늦었고, 내
일 예정도 있고 하니 오늘밤은 이쯤으로 끝내고 다음 기회를 엿보기로 하겠습니다.
11월 3일(월) 맑음
오늘은 내지를 떠나는 날이다. 어쩐지 이별이 힘들고 마음이 남는 기분이 들었다.
오늘 일정은 맨 먼저 지옥순례이다. 벳부를 찾는 자는 반드시 지옥순례를 한다고 할 만큼 유명한 곳
이다. 그 여정은 약 20킬로나 되며, 소요시간도 약 2시간 반이라고 하니까, 그 지역이 넓다는 것을 짐작
케 한다. 우리 일행은 카메노이(龜之井) 유람버스를 타고, 소녀차장이 연도의 명소를 안내하면서 지옥
에 도착했다.
먼저 회오리(龍卷) 지옥을 보았다. 이 지옥은 염류천(鹽類泉)으로 온도는 백도(분천 할 때 측정) 용출
(湧出) 개소의 면적은 약 25평, 목욕용의 유노하나(湯花)를 산출한다. 다음의 피 못(血池) 지옥은 황산화
철분을 함유하고, 온도는 77.5도(분천 측정) 면적은 367평 있으며, 피 못 고(膏), 피 못 염색, 목욕용의
유노하나(湯花)를 산출한다. 다음은 중머리 지옥을 보았다. 이 지옥은 칼슘이온을 함유하고, 온도는
98.5도[분니(噴泥)측정], 면적은 4개소에 80평, 중머리 만두, 삶은 달걀 등을 팔고 있다. 다음은 바다 지
190) 케곤(華巖)의 오기로 보임.
옥을 보았다. 온도가 85.9도(분기측정), 산성천이다. 이 면적은 3개소로 1,580평이나 되며, 지옥 염색 옷,
삶은 달걀 등을 판다. 다음은 도깨비 중머리 지옥은 온도가 99도(분기측정)로, 칼륨이온, 나트륨이온,
칼슘이온 등을 함유하고 있다. 면적은 2개소로 약 90평이 된다. 또 위장약을 조제하여 팔고 있다. 다음
은 아궁이 지옥은 온도가 98도(분기측정) 염류천(鹽類泉)이다. 면적은 4개소에 1백평, 아궁이 빵, 목욕
소(素), 위장약 등을 팔고 있다. 다음으로 도깨비산 지옥을 보았다. 이 지옥은 온천 악어 양식장이며,
온도는 알 수 없고, 염류천(鹽類泉)이다. 면적은 3개소에 120평, 악어가죽 가공품을 팔고 있다. 다음에
흰못 지옥은 칼슘, 라듐을 함유하고, 온도는 94.5도(분기측정), 면적은 1개소에 70평이다. 다음은 하치만
(八幡) 지옥은 라듐, 유황성분, 탄산성분을 함유하고, 온도는 91도(분천측정), 면적은 4개소에서 약 70평
이 된다. 특산품은 야와타(八幡) 지옥 고(膏), 치명고(痔命膏), 진통액 등이다. 츠루미(鶴見), 무켄(無間)
의 양 지옥은 단순천으로 온도도 67도(분천측정)이다. 면적은 1개소가 40평, 또 1개소가 30평이다.(이상
은 어느 것이나 섭씨온도이다.)
점심 때 넘어 지옥순례를 끝냈다. 이것이 끝나고 우리 일행은 시의 관광과 초대의 오찬회에 참석했
다. 이 자리는 매우 화기애애하였으며 주객이 함께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찬회가 끝나고 일행은
자유행동이 되어 삼삼오오 떼를 지어 시내 견학을 했다.
오후 6시 22분에 뱃부역 출발의 열차로 모지(門司)로 향했으나 승객은 글자 그대로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차 칸이 꽉 찼었다. 할 수 없이 모지까지 선 채로 왔다. 시모노세키(下關)에 도착한 것은
동 9시 30분, 동 10시 50분 출발의 제2편 연락선으로 내지를 떠났다.
○ 여행 중 읊다
何幸衰年做遠遊, 他鄕又是菊花秋, 數旬樂意遷喬鳥, 萬里閒踪泛水鷗.
物外林泉多絶景, 畵中樓閣幾名州, 旅勞無暇詩腸飽, 觸處風烟未登收. 가천구사(嘉川久士)
○ 귀로에 시모노세키 뱃속에서
北望鄕園路幾千, 海雲不見水連天, 一帆夕照蒼小外, 萬葉秋高白雁邊.
遠志猶存名利地, 壯遊不愧老衰年, 今行偏感皇恩重, 槿域春光在眼前. 가천구사(嘉川久士)
11월 4일(화) 맑음
부산에 상륙한 것은 오전 6시를 지났을 때다. 본도의 산업부장 김대우(金大羽) 씨는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우리 일행을 마중 나왔었다. 또 부장은 일행을 부산호텔에 초청하여 아침식사를 대접
해 주었다. 아울러 감사하는 바이다.
여기에서 황해도의 백천(白川) 강사는 가사 사정으로 하루 빨리 귀가하여 나머지 단원일행은 동래로
향했다. 일행은 동래관에 들어가서, 낮부터 밤에 걸쳐 앞 뒤 두 번의 좌담회를 열었다. 좌담회 내용은
별도 항목과 같으나, 단원 여러분은 약 20일에 걸친 장도의 여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에는 조금도
피로한 기색을 보이지 않으며, 성지순례로 체득한 가슴에 벅찬 만감을 감추지 않고 술회하여, 이번 행
사로 하여금 더욱더 유종의 미를 거둔 것이다.
○ 동래온천
昨今兩日弄溫泉, 泉亦有緣同內鮮, 渡東所得將何用, 忠勇倍揚守北邊. 청하달빈(淸河達斌)
제4회 좌담회
일시 : 11월 4일(오후 1시부터 동 4시 40분까지)
장소 : 경남 동래 봉래관
○ 영전 단장 오늘은 예정대로 제4회 좌담회를 열었으면 합니다. 그 사이 20일에 걸친 성지참배 예
정을 유쾌하고 또한 충분한 효과를 거두고, 오늘로써 일단 해산하기로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유종의
미를 거둘 수가 있었던 것은 오로지 여러분의 성의에 의한 것입니다. 이점을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는
사실 단장으로서, 모든 면에서 불충분한 점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점 나쁘게 생각지 마시고 관용을
베풀어 주시도록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전 회에 이어서, 전부를 종합해보고자 합니다. 또 지금까지 한 번도 감상을 말하지
않았던 분들도 계시는 것 같은데, 꼭 감상을 말씀 해 주시기 바랍니다.
○ 산가 경북 강사 저는 오늘아침에 신문기자에게 이번 성지참배에서 체득한 감상을 단편적으로 말
했습니다만, 솔직히 말하면 감상이 어떠하냐? 라고 질문 받았을 때는 즉석에서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총론적으로 말하면, 이번 성지참배를 계기로 해서는 이전에는 표면적으로 혹은 물질적인 면만 보
고 온 내지를, 이면이나 정신적으로 살필 수가 있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지참배를 하는 한편 특
히 이번에는 내지의 지명(知名)인사로부터, 일본고유문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었기 때문
에, 신국일본의 진수를 다소라도 터득한 것 같습니다. 이것만이라도 우리들은 커다란 수확을 얻어서 우
리들 사명을 다 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우리는 통틀어 단체훈련을 받은 적이 없는 사람들임으로, 단체행동에는 부자유가 있었습니다. 그
만큼 단장을 비롯하여 간부 여러분에게는 대단한 폐를 끼쳤다고 생각합니다. 이점은 일동을 대신하여
사과 말씀드립니다. 또 이 말은 단장님 면전에서 말씀드리는 것은 실례가 될지 모르지만, 이번 20일 간
에 걸친 긴 여행에 단장님의 원만 무결한 인격에, 저 개인으로서는 크나큰 교훈을 얻었습니다. 특히 단
원 중에는 단체행동에 거스르는 행동이나 언동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한 번이라도 그것을 내색하
는 일이 없었습니다. 완전히 단장님의 수양에는 감격했습니다.
○ 단원 일동 그 점은 동감입니다.
○ 영전 단장 말씀은 황송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면 도쿄에서 진재(震災)기념당을 참관한 감상을 이야기 해 주십시오.
○ 서촌 충남 강사 저는 관동대진재가 비참했다는 것은 귀로 듣고 왔으나, 이번에 기념당 안에 걸어
놓은 그림을 보았을 때는, 참으로 코를 막아야 할 정도의 느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진재에 희생
이 되어 돌아가신 영혼을 그렇게도 웅대한 기념당을 만들어 위로해 모셨다는 것은 뜻 깊은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산가 경북 강사 재해에서 가장 혹독했던 이 땅을 밟았을 때는, 이재민이 아우성치는 소리마저
들려오는 기분이 들어서, 무엇이라고 형용하기 어려운 느낌이 패부를 찔렀습니다.
○ 영전 단장 되돌아보면, 1923년 9월 1일 정오, 관동일대에 지진이 일어나, 그 피해야 말로, 지금까
지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동양 제일을 자랑하고 있던 도쿄는(그 당시 7백만의 인구를
안고 있었으나),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변한 것입니다. 도쿄시 가운데도 가장 피해가 많았던 곳은, 현재
진재기념당이 있는 구 피복창의 공터였던 것입니다. 거기에서만 목숨을 빼앗긴 사람이 3천 8백 명이나
있었다고 듣고 있으나, 실지에 가 보면 아직도 이재민이 울부짖는 곡성과 피에 물든 시체를 밟고 넘어
가, 우왕좌왕 했으리라고 생각되는 그 처참한 정황이 눈앞에 보이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어쩔 수가 없
었습니다. 그것을 생각할 때는, 비쳐지는 해도 어쩐지 음울하게 보여서, 엄숙한 그 무엇이 내 몸을 감싸
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제1차 세계대전에 칭타오(靑島) 공략이나 해군의 지중해 파견 등이 있으며, 혁혁한 활동
이 있었으나, 특히 연합국에 특히 러시아에 군수품이나 생활필수품도 수출하여, 일약 수출 초과국이 된
것은 특기할 만합니다. 그래서 각 회사는 백 할(割)의 배당까지도 있었다고 하나, 이렇게 하여 국민의
사치심은 높아가고, 물건은 비싼 정찰을 붙이지 않으면 안 팔린다고 하는 소위 화미(華美)의 첨단을 걷
는 경향이 되어 갔던 것입니다. 거기에 진재가 일어났기 때문에 지도 요로에 있는 사람이나 지도계급의
사람들은 매우 걱정을 했습니다. 외국에서는 수도 도쿄에 대진재가 일어나서 순간적으로 잿더미로 바
뀐 것을 보고 장차 도쿄의 재건은 어려울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으나, 야마토다마시이(大和魂)는 여기에
서도 발휘되어, 대 도쿄건설계획은 불과 5년으로, 진재 전의 도쿄에 비교해서 몇 배 훌륭한 대 도쿄가
실현되어서 세계의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일본 국력에 탄력이 풍부했던 것입니다.
또 1931년에 만주사변이 일어나고, 만주제국의 건설과 함께 대 신경(新京)의 실현을 본 것도, 대진재 후
대 도쿄 건설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1923년 11월 10일 선제(先帝)폐하께서는, 국민정신의 진작(振作)에 관한 조서(詔書)를 천하에 발포한
것입니다. 이 조서는 1908년 10월 13일에 공포한 무신(戊申)조서와 함께, 국민정신의 강건(剛健)을 도모
한 조칙(詔勅)으로서, 무신조서는 국민정신이 전승의 기분에 자칫하면 실리를 잃고 꽃만 피는 것처럼
주색에 빠지고 할 일에 게을러지는 것을 경계하기 위한 조칙으로, 국민정신 진작에 관한 조서는 최근에
학술이 날이 갈수록 진전되어 감에 따라, 국민의 기풍이 점점 더 부화(浮華)방종해지고, 경망스러워 짐
에 흘러가려고 할 때에 마침 관동대진재가 일어나서, 국민정신이 더욱더 황폐할 우려가 있었음으로, 견
실강건, 순박하고 올바른 길로 안도하게 된 고마우신 조칙입니다.
이와 같이 진재 직후 황공하게도 선제폐하께서는, 국민정신 진작에 관한 조서(詔書)를 내리시자, 국
민은 오로지 공구(恐懼)감격하여, 전국 모든 곳에 교화단체를 조직하고, 성지에 따라 받드는 활동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매년 11월 10일을 기해서, 국민정신 진작주간을 설정한 것은 여러분도 잘 아
시리라 믿습니다만, 이와 같은 운동으로 국민은 더욱 더 굳게 결속하게 된 것입니다. 요는 국민은 대진
재에 대단히 큰 충격을 받고, 더욱 더 단결을 굳게 하였으나, 이것은 야마토(大和)민족이 아니면 기대할
수 없는 결과인 것입니다. 진재기념당은 그러한 교화단체의 합의에 의하여, 사회사업으로 설립된 것입
니다.
○ 산가 경북 강사 진재기념당 건립에 내탕금(內帑金)이 하사되었습니까.
○ 영전 단장 하사되었다고 생각합니다.
○ 산가 경북 강사 지금 단장님으로부터도 이야기가 있었습니다만, 세계의 열국이 일본은 현재의국력으로는 도쿄를 재건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바, 일등국에 부끄럽지 않는 대동
아건설을 본 것은, 일본민족이 훌륭한 것입니다.
○ 강본 평남 대표 곤란을 극복하고 비약하는 것이 일본민족의 정신이라고 불려지지요.
○ 영전 단장 진동이 시작된 것이 마침 점심준비를 한창 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화재가 많았습니다.
이때 각자가 불 단속에 주의했더라면, 이렇게 큰 재해는 없었을 것이지만, 당황하여 큰 짐만 끄집어내
고, 불 단속할 생각이 미쳐 미치지 않았습니다. 지금과 같은 비상시국 아래에서는, 그러한 점에도 심심
한 주의를 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 영전 단장 지진이 빈번하게 일어남으로, 도쿄의 대 건축물은 전부가 철근콘크리트로 세워졌습니다.
○ 산가 경북 강사 아사쿠사(淺草)에 있었던 12층 고층건축물이 넘어질 때의 모양을 그린 그림이진재기념당에 있었지요. 이 그림을 보았을 때는 창상(滄桑)의 변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 영전 단장 다음은 야스쿠니(靖國)신사에 참배한 감상은 어떠했습니까.
○ 강본 평남 대표 야스쿠니신사는 황공하게도 천황폐하가 친히 참배하신다는 것은, 호국의 영령에
대하여 얼마나 고마우신 생각으로 대우하고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국방관이나 유슈우
칸(遊就館)에 들어가서, 현대 무기가 얼마나 우수한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고도국방국가체제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꼭 다른 나라를 능가할 만큼의 우수한 병기가 필요하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임으로, 이것에 의하여 국민의 부담은 당연히 가중될 것이라고 믿는 바입니다. 특히 현실적으로 우리
나라는 동서남북 사방에 적이 있음으로, 국민은 충실하게 국책 수행에 매진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저는 통감했습니다.
○ 영전 단장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프랑스의 대통령 크레만소는 이미, 국방상 가솔린 한 방울은피 한 방울에 필적한다고 말했습니다만, 어떤 조사서의 통계에 의하면, 열국의 철 생산고는,
(1938년 현재)
미국 2,800만 톤
독일 2,300만 톤
소련 2,100만 톤
영국 1,000만 톤
프랑스 600만 톤
이어서, 프랑스가 독일에 진 것은 그 하나의 원인으로서, 철 생산이 독일에 뒤져 있었다는 것을 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와 같이 철은 중대성을 띠고 있음으로서, 철의 보고라고 일컬어지는 미국마저도,
1939년에는 스크랩의 수출금지, 혹은 고철의 재생산 등에 의하여, 4,600만 톤의 생산을 본 것입니다. 요
는 철의 존귀함을 일반 민중에게 알리기 위하여, 국방관 등을 보이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생산량 확충에 일로 매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 산가 경북 강사 호국의 영령을 영세에 걸쳐 잊지 않기 위하여, 야스쿠니신사가 만들어 진 것이나,
이러한 예는 외국에도 있을까요.
○ 강본 평남 대표 기념비 혹은 기념탑으로서는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나라의 야스쿠니신사와 같이
위패를 모시고, 대원수폐하가 친히 참배를 비롯하여, 각 왕 공족, 국민상하가 거족적으로 참배한다는
것은 아마도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 영전 단장 경성의 장충단이 야스쿠니신사와 그 정신이 대략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 형식은 다른 것 같지요.
○ 산가 경북 강사 제가 유학생 시절에는 야스쿠니신사 경내에, 노획한 러시아 병기가 있었으나, 그
병기를 메이지신궁에 옮겼지요.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 강본 평남 대표 훈공이 있는 군마가, 사람들이 오고가는 거리를 쳐다보고 있는 것을 볼 때에, 저
는 인간으로서 저 말보다 뒤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 영전 단장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사랑정신으로 보면 말이라고 할지라도 그 공훈은 크게 칭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 강본 평남 대표 저는 평양부에서 매년 1회 수혼제(獸魂祭)를 집행하고 있는 것은 매우 잘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위령제와 그 정신은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존귀한 정신을 모르는
사람들은 조소하고 있지만, 전 인류가 살기 위해서는, 무수한 동물을 희생시켜 이것을 먹지만, 당연히
수혼제를 거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러한 것이 인류가 훌륭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 영전 단장 유슈우칸(遊就館)의 유슈우(遊就)란 병법에 유격급취(遊擊急就)라는 문구에서 따 온
것 같으나, 유슈우칸에 들어가 보면 노기(乃木)대장을 비롯하여, 오오야마(大山), 테라우치(寺內) 대장
과 같은 군신이나 성장(聖將)의 훈장이 눈에 띠게 되니, 이와 같이 위대한 분의 공훈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일본이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할 때, 참으로 감격과 감사에 더 할 바가 없었습니다. 또 전몰
한 젊은 장병의 사진도 걸려 있었으나, 앞에서 말한 널리 알려져 있는 위인의 공훈 뒤에는, 이와 같은
무명용사의 공이 반드시 숨어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처럼 젊은 장병의 영령이 우리나라의 주춧돌이
되어 있다는 것을 지금 더 한층 느꼈던 것입니다. 그러한 사진 앞을 지나칠 때는 스스로 머리가 숙여졌
습니다.
다음은 이즈모타이샤(出雲大社)에 참배한 감상은 어떻습니까.
○ 강본 평남 대표 안내하던 신관(神官)의 설명에 의하면, 타이샤의 조영 형식은 다른 신궁이나 신
사와 그 취향을 달리하고 있다고 했으나, 어떤 설에 의하면, 사전(社殿)이 서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은, 타
이샤의 제신인 오오쿠니누시노미코토(大國主命)는 평소부터 부모를 따르고, 서쪽을 동경하고 있어서,
사전을 서쪽에 향해서 조영한 것 같습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해 보면, 내선은 완전히 동조동근의 관
계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상근동춘(桑槿同春) 황위(皇威)가 반도에 미친 것도 결코 우연이 아
닙니다.
○ 영전 단장 1910년에 한국이 병합이 되었으나, 이 병합도 정신은 이미 신화시대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 산가 경북 강사 보물전에 진열된 신의 보물을 참관해 보면, 경주박물관에 비장된 보물과 유사한것이 많이 보였습니다.
○ 영전 단장 신화 같은 이야기입니다만, 저는 오오쿠니누시노미코토(大國主命)를 꿈에 본 일이 있
습니다. 1927년경의 일입니다만, 제가 경북의 장학관을 하고 있을 때, 곳에 따라서는 교통이 몹시 불편
했기 때문에, 자전거를 이용하여 출장을 갔었습니다. 그때 달성 관내의 출장이 약 2주간 있었는데 전부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녔었는데 이것이 잘못되어 가슴통증을 앓고 고생했습니다. 그날 밤 꿈에 현실처
럼 역역하게 오오쿠니누시노미코토가 와서, 그 가슴통에는 부들강아지를 구워서 초를 묻혀서 바르면
낫는다고 해서, 그 약을 구하였더니, 마침 옆집에 있어서 곧 집사람을 시켜 만들어 쓴 결과 이틀 쯤 지
나서, 완전히 나은 것입니다. 이것은 옛날이야기 같습니다만 이즈모타이샤를 참배할 때마다 감격으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일은 한 평생 잊을 수가 없음으로 오오쿠니누시노미코토을 모시는 신사를 참배할
때는 어쩐지 감사하는 마음에 가슴 벅찬 바가 있습니다.
○ 산가 경북 강사 단장님은 평소부터 일본역사를 자세히 연구하시고, 또 일본정신의 체득 및 경신
사상(敬神思想)이 철저하고 있음으로, 그런 꿈을 꾼 것이지요.
○ 영전 단장 또 우연히도 오오쿠니누시노미코토는 농업과 의약의 신으로 계시기 때문에, 불가사의
한 일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되겠지요. 뒷날 들으니 버들강아지는 해열제였습니다.
또 보물전에서 여러분도 봉납선(奉納船)이라고 하는 것을 본 일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 봉납선의
유래를 참고로 말씀드리면, 지금부터 약 160년 전 토사(土佐)의 고장에 모토야마(本山村助)라는 범띠
사나이가 난치병에 걸려서, 이즈모타이샤 대신(大神)의 영험이 뛰어난다는 것을 듣고, 작은 통나무배를
만들어 여기에다 시줏돈의 뜻을 품어 엽전 15문을 싣고 집 앞의 작은 시내에 떠내려 보냈는데, 이것이
우연하게도 2년의 세월을 거쳐 1783년 4월 27일 이나사(稻佐) 바닷가에 표착한 것입니다. 이것을 마을
사람이 주워 당시의 출운국조 천가준수(出雲國造千家俊秀)에게 납입했습니다. 이러한 점을 고증해 보
아도, 이즈모타이샤의 제신으로 계시는 오오쿠니누시노미코토는 의술의 신으로서 세상에 알려져 있습
니다.
○ 강본 평남 대표 평양의 대동강에서도 정령(精靈) 떠나보내기를 하고 있습니다만, 이것도 봉납선
과 마찬가지 성질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영전 단장 정령(精靈) 떠나보내기라고 하는 것은 불교를 믿는 집안, 거기에다가 오래된 집에서
죽은 사람 즉 부처가 많은 집안에서 우란분(于蘭盆)191)의 행사로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8월 3일은 정
령맞이 날이 되어 있어서 그날 한밤중에 부처님이 오신다고 하여 불단 앞에 제등(提燈)을 매달고 제등
을 켜고 제물을 차려서 스님을 모시고 독경하면서 정령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8월 15일은 정령
이 돌아가기 때문에 제등을 배 보양의 그릇에 넣어 제물을 싣고 근처 강에 흘려보내서 부처님을 성대
191) 아귀도에 떨어진 망령을 위하여 여는 불사(佛事). 목련 존자가 아귀도에 떨어진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석가
모니의 가르침을 받아 여러 수행승에게 올린 공양에서 비롯한다. 하안거(夏安居)의 끝 날인 음력 칠월 보름
을 앞뒤로 한 사흘간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들어 조상이나 부처에게 공양한다.
하고 편안히 보내는 것입니다. 강본 씨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그 뜻이 다른 것입니다.
○ 서촌 충남 강사 유우키군(結城郡)에 다케우치(竹內善之助)라고 하는 소학교 선생이 있었으나, 이
사람이 어느 날 저에게 헌책을 가지고 와서, 그 안에 “天使載五穀云云, 始以爲農”라고 하는 곳을 보이면
서 이것은 조선에서 오곡의 종자를 갖고 왔다는 것을 말한다고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만, 그 고서의 이
름은 지금은 확실하게 기억하지 못하지만, ‘일본고사기’가 아니었던가 생각합니다. 이러한 것을 보아도,
오랜 옛날부터 내선 간에는 문화교류가 있었던 것을 살필 수 있습니다.
○ 산가 경북 강사 이것은 몇 차례나 거듭 말씀드리지만, 내선의 문화는 그것이 근거하는 바, 또는
그 출발점은 완전히 같다고 하는 것은, 모든 문헌이나 풍속 습관, 역사적인 사적 등으로 보아서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같은 문화가, 내지에서는 이것을 잘 일본화 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온 데
반하여 조선에서는 부분적이나 말초적인 곳에만 구애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 내선 간의 문화에
는 커다란 간격이 생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선악이 개오사(善惡皆吾師)라고 하는 말이 있
습니다만, 조선에서는 선이라고 생각하면 어디까지나 이것을 존중해서 조장해 왔으나, 악이라고 알게
되면 모조리 배척하여, 아무튼 악을 좋은 방면으로 이용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조선
문화는 퇴보의 길을 더듬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영전 단장 보수와 진보라고 하는 두개의 정신이 양 바퀴가 되어서 문화라고 하는 수레를 움직여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은 너무나도 보수적이 아닌가 하는 경향이 있지요. 한 예를 들면, 이조
시대는 오로지 주자학 일색으로 다른 학파는 이단시하여 배척했던 점을 들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또
문화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향상심이 모자라는 예는, 그렇게 유명한 청기와는 그것을 창조한 사람만이
그 제조법을 알고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전수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우수한 예술품을 어찌하여 후세
에 전하려고 하지 않았는지 그 심정을 이해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 산가 경북 강사 조선에는 옛날부터 독대비방(獨對秘方)이라고 하는 말이 전해지고 있으나, 이 말
이야 말로 발전성이 결핍하고 있는 것을 표현한 말입니다. 옛날 경상도의 곤실(困谷)이라는 곳에 명의
(名醫)가 있었는데, 위장병에는 아무리 난치병이라고 해도 2, 3첩의 약으로 고칠 수 있을 만큼 유명한
의사였습니다. 그러나 그 약의 처방은 뒷날 사람들이 전연 모르고 있습니다. 다만 그 약을 발견하게 된
동기라고 하는 것은 매우 재미있습니다. 그 명의라고 하는 사람은 관찰력이 예민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기 집 닭이 알을 낳으면 어느덧 뱀이 와서 먹는 것을 알고 이것을 어떻게 해서라도 골탕을 먹여야
되겠다고 생각하여, 닭이 알을 낳자마자 알을 주워 내고, 미리 만들어 놓은 나무로 만든 알 같은 것을
바꾸어 놓았더니, 뱀은 이것을 모르고 나무로 만든 알을 통째로 삼키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진짜 달걀
처럼 쉽게 소화될 까닭이 없음으로, 뱀은 이전처럼 대추나무가 있는 곳에 가지 않고, 풀 숲속으로 급히
가는 것을 뒤쫓아 가서 보았더니, 뱀은 어떤 종류의 풀을 먹고, 한참 있으니까 배가 불렀던 부분이 차차
줄어지고, 나중에는 그 뱀이 기운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명의는 기뻐하며 그 풀을 채취하고 와서, 여
러 가지 연구를 하여 훌륭한 위장병의 약을 발명한 것입니다. 이러한 약이 현대까지 전해져 왔다면, 그
것이 공헌하는 바가 매우 위대했을 것이 틀림없을 것이나, 참으로 유감스럽습니다. 요는 이것은 독대비
방으로, 후세에까지 전수하고자 하는 마음이 모자랐기 때문입니다.
○ 강본 평남 대표 그때는 현대와 같이 특허권이 없고, 이러한 종류의 발견이나 발명을 정부로부터
옹호하고 장려하는 제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현대의 특허권이라는 것은 참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 영전 단장 그러면 다음은 산인(山陰)지방을 거쳐서 왔음으로 무엇인가 느낀 것이 있으면, 이야기
해 주십시오. 제가 산인지방을 거쳐 오면서 느낀 것은, 첫째로 상요(山陽)연선의 모든 시설보다 검소하
고 어두운 점이 눈에 띱니다. 그리고 농촌을 보았을 때는, 자주 조선을 생각나게 하는 고풍이 있었지요.
○ 산가 경북 강사 저도 산인(山陰)지방을 거쳐서 느낀 것은, 방금 단장님이 말한 것처럼 조선의 철
도연선의 풍경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 여러가지 눈에 띠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논 가운데서 수확하는 풍
경 같은 것은 완전히 조선과 닮은 것이 있어서 조선 안의 농촌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 영전 단장 또 산인지방을 보고 유감으로 생각한 것은, 상요지방보다 문화시설 등이 발전되지 않았
던 점입니다. 우리나라가 태평양을 중심으로 해외에 발전할 때는, 상요지방이 중요성을 띠고 있습니다만,
대륙경영에는 산인지방이 중요성을 띠고 있음으로, 보다 더 시설이 필요하지 않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 강본 평남 대표 제가 생각할 때는, 우리나라의 식량문제는 산인지방을 빼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고 여깁니다.
다음으로 이즈모타이샤입니다만, 신궁의 설명에 의하면 이즈모타이샤는 신의 총본부 격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만, 지금도 10월을 카미나즈키(神無月)라고 말하는 것도, 그 말의 유래는 전국의 신들이 이즈
모타이샤에 전부 모이시는 데서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즈모타이샤의 사격(社格)이 존귀한 것을 알 수 있
습니다. 즉 음력 10월 11일부터 17일까지는 이 곳에서 신재제(神在祭)가 있습니다만, 제일 중에는 전국
의 신들이 이곳에 모여서, 인연 맺기나 신들이 관장하는 토지에 관한 것을 의논한다고 하니까, 속된 말
로 바꾸어 말하면, 오늘날 제국의회가 이곳에서 열린 셈입니다. 그래서 경내에 있는 19칸의 복도 건물
은 모인 여러 신의 숙소로 충당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도 일본은 신국임을 알 수 있습니다.
○ 영전 단장 벳부에 가는 도중에 우사(宇佐)역과 타테이시(立石)역 사이의 연선을 보았었는데, (이
것은 좌담회에서 여러분에게 꼭 말씀드릴 작정이었습니다) 산의 나무를 벌채하여, 그 자리에 묘목을 바
둑판식으로 심고 또 그 아래에는 산 풀이나 짚 등을 비료를 주는 것을 보고, 그렇구나! 하고 감탄을 했
습니다. 이러한 일은 조선에서는 볼 수 없는 일입니다. 내지의 임상(林相)이 좋다고 하는 것도, 그와 같
이 노고가 숨어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물론 기후관계나 또는 조선과 같이 벌채하지 않는다는 조건도
갖추어졌지만, 내지는 치림(治林)에 비상한 관심을 갖고 있음으로 임상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러한 점에 착상하지 않으면 안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에서는 어떻습니까. 풀을 베고 와서 비료를
만들고자 하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않고, 오히려 산에 있는 풀은 물론 낙엽까지도 긁어모아 연료로 하
기 때문에 임상이 나쁜 것은 당연이 지나칠 정도로 당연한 것입니다. 이런 일이야 말로 조선식림장려의
한 자료입니다.
○ 산가 경북 강사 채벌허가는 내지 식으로 식림한다는 조건부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가천 경기 강사 여러분이 내지의 산림을 보고 여러 가지 감상을 말했습니다만, 저도 완전히 동감
입니다. 조선에서도 약 10년 전부터 치림문제가 일어나서, 온돌폐지론까지 나왔습니다만, 제 생각으로
는 온돌이 있으면 치림 운운은 무모하다고 생각합니다. 용인군에 모범산림이 있습니다만, 이것도 군청
인근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군민은 밤에 도벌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겨울에 추운데 온돌을 떼지 않을
수도 없기에, 아무리 군청 이웃에 있는 모범산림일지라도 도벌은 어쩔 수 없는 사정인 것입니다. 저도
용인군에 50정보 정도의 산을 갖고 있습니다만, 아무리 도벌을 방지하려고 노력해도 효과는 추호도 없
습니다. 이러한 일은 개인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일로, 국가적으로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됩니
다. 치수사업도 치림과 직접관계가 있음으로, 온돌문제는 커다란 문제입니다.
○ 영전 단장 그러나 조선의 기후는 온돌이 아니면 견딜 수 없습니다.
○ 가천 경기 강사 온돌폐지는 어렵다고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온돌은 개량해야 할
점이 많이 있습니다. 보다 더 과학적으로 온돌을 개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 영전 단장 도요쿠니(豊國)신사의 요시다(吉田) 궁사의 이야기는 의미심장했습니다.
○ 산가 경북 강사 요시다 궁사의 이야기는 참으로 참고가 되었습니다. 요시다 씨의 이야기 중에
우리 황실은 성이 필요 없다고 하는 설명은 우리 국체가 어떤 것인가를 단적으로 규명한 명언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즉 국민 전부가 대군의 방패이며 국가를 지키는 군사이기 때문입니다.
○ 강본 평남 대표 일본은 군민(君民)이 일체가 되어, 경신애민의 통치와 경신존황의 봉사에 의하여,
우리나라는 오늘날의 융성을 보게 되었던 것이나, 이번에 요시다 궁사의 이야기를 듣고 보다 더 강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각 차도에 관한 이야기도 일본정신의 일단을 요령 좋게 설명했다고 생각합니다. 차
도라는 것은, 오직 기호품으로서 마시는 것이 아니고, 차를 마시면서 정신수양과 우아한 풍류심을 기른
다고 하는 고상한 하나의 취향입니다. 일본정신의 고상함은 차도에 의하여 알 수가 있습니다.
○ 영전 단장 지나의 아방궁이나 만리장성은, 그 시대는 국민에게 호세를 보이고, 또 다른 민족을
위압했는지는 모르나, 후세에까지 그 호세와 위압은 계속하지 않았습니다. 지나는 인위적인 국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도덕국가이기에 지나의 제정시대의 사고방식이나, 하는 방식이 다른
것입니다.
○ 산가 경북 강사 일본은 표면만 보는 것으로는 참다운 일본의 훌륭함은 알 수가 없지요.
○ 영전 단장 이끼를 사랑하는 것과 같은 한적미(閑寂美)적인 풍류는 일본민족의 동중정(動中靜)을
구하는 경지이겠지요. 또 우리가 요시다 궁사에게 만강(滿腔)의 사의를 아끼지 않는 것은 그가 조선반
도의 민중을 정신적으로 인도하여, 내선융화에 심혼을 바치겠다는 것입니다. 쿄토에서 우리를 돌봐 준
김본(金本)군도 요시다 씨의 뒷바라지로 신학을 공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척무차관 키타지마 켄지로우(北島謙次郞) 씨의 인사말은 매우 고맙게 들었습니다. 여러분 감
상은 어떻습니까.
○ 서촌 충남 강사 척무대신 토오고 시게노리(東鄕茂德) 씨의 후의에는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 강본 평남 대표 우리는 척무성으로부터 우대를 받아서 감사함과 동시에 우리는 가일층 책임을 느
끼는 바입니다. 성지참배를 마치고 향리에 돌아간 후에는 조선유림계에 무엇인가를 공헌해야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또 우리는 척무대신이 성지참배단만을 초청한 것이 아니라, 전선의 유림전체를 초청
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더욱 더 결의를 굳게 하고 유도진흥에 진력해야 되겠다는 것을 통감했습니다.
○ 영전 단장 다음은 유시마성당의 우노(宇野) 박사의 강연을 듣고의 감상은 어떻습니까.
○ 강본 평남 대표 우노 박사의 강연은 참으로 간결하고 요령을 얻은 것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되겠
습니다. 박사의 강연요령은 참고로 말씀드리면 공자의 도는 실천도덕이기 때문에 오륜의 길을 명백하
게 할 것, 또 오륜은 인(仁)으로써 실행한다는 것을 설명하고, 또 선생은 논어의 어구를 인용하여, ‘有朋
而自遠方來不亦悅乎’라고 공자가 말한 것은, 오늘 우리가 유시마성당의 일당에 모여서 유도를 논의할
때의 기분을 여실하게 명언한 어구라고 말하는 것을 들을 때, 그때의 모임이 어쩐지 화목한 느낌이 들
었습니다. 또 사문회(斯文會)가 일어나게 된 국내의 정세를 자세하게 이야기 했는데, 즉 사문회가 일어
난 당시의 국내정세라고 하는 것은, 3백년간에 걸친 쇄국주의는 메이지유신의 대업이 이루어짐에 따라
모습을 감추고, 이것에 대신하여 태서(泰西)의 소위 물질문명이 노도와 같이 밀려들었기 때문에, 국민
은 이 물질문명에 도취되어, 자칫하면 황국의 찬연한 고유문화는 헌신처럼 깡그리 버리고, 심한 자는
국어폐지론까지 말하기에 이르렀음으로, 황도정신을 중심으로 하는 동양정신문명을 보다 한층 앙양하
고, 그러한 과격사상을 시정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사문회를 설립했다는 것을 자세하게 설명한 것입니
다. 나아가서 메이지대제는, 일본국민이 날아갈 방향을 명백하게 나타낸 교육칙어를 하사하셨음으로,
일부 식자 중에는 사문회의 존폐를 운운하게 되었으나, 오늘날의 세계동란이 일단 평상시로 돌아가면,
또 어떤 과격사상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사문회의 책임은 더욱 더 가중되는 것이라고 강조한 점이
매우 감명 깊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사문회의 취지에 따라 사상 선도에 만 유감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영전 단장 방금 교육칙어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만, 당장에 생각난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나라는 3천년의 옛날 이미 국민도덕의 대본이 정해지고, 또 국민교화의 국가적인 대의가 정해진 것입
니다. 그러나 교육칙어가 발포된 1890년경은 마치 저 메이지유신, 메이지중흥의 대업이 시초가 된 때이
나, 이와 동시에 구미의 호화스러운 문물이 들어와서, 그 결과 국민에게 미친 영향이나 사상혼란의 사
유가 되어 어떤 경우는 교학의 본의에 역행하는 듯한 경향이 많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명(聖明)
하신 메이지대제께서는, 일찍이 이러한 시정과 이것들의 배제에 진념(軫念)하시어, 우리나라의 고유정
신에 따른 교학 내지 국민도덕의 쇄신과 진흥에 신념(宸念)하셔서 3천 년의 오래된 국민도덕을 성문화
한 것이 즉 교육에 관한 칙어인 것입니다. 이 교육칙어의 기초한 사람은 시강(侍講)이라는 지위에 있던
모토다 나가자네(元田永孚) 선생입니다만, 특명을 하사받은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 씨와 전후 17회에
걸쳐 그 초안을 교정하고, 마지막으로 황송하게도 메이지대제께서 친필을 가필하셔서 결정된 것입니
다. 기조를 한 모토다 나가자네 선생은 큐슈 치쿠고(九州筑後)의 오오쓰카 타이야(大塚退野) 선생의 학
통을 받아들인 사람으로서, 이 타이야 선생은 조선의 이퇴계 선생의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한번 보
자마자 명확하게 퇴계선생의 학설에 공명하고 또한 사숙(私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아호(雅
號)까지도 퇴계선생의 퇴(退)자를 따 붙인 것입니다. 즉 교육칙어 기초자는 퇴계선생을 사숙하고 있던
사람의 학통을 섭취한 제자임으로, 퇴계선생의 손자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또 교육칙어는 제국헌법과
함께, 바로 만고불후의 성전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나에도 육유(六喩)와 같은 것이 있습니
다만, 우리나라 교육칙어에 비교해 보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정비가 안 되어 있습니다. 우노 박사는
책을 통해서만 잘 듣고 있었습니다만, 직접 뵈옵는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참으로 겸양하시고 온공
(溫恭)하신 학자였었지요.
다음은 미토(水戶)로 옮겨가서, 다나카(田中) 교장의 강연을 듣고 감상은 어떻습니까.
○ 산가 경북 강사 저는 씨의 강연을 듣고 먼저 느낀 것은, 씨가 허심탄회하고 또 솔직히 역사이야
기를 하는 데에 만강의 사의를 나타내고 싶습니다.
○ 강본 평남 대표 다나카 씨의 이야기는 쉽게 풀이를 해서 일본역사에 어두운 우리에게도 잘 납득
할 수가 있었습니다. 기코우는 도쿠가와(德川)가의 막내임에도 불구하고,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고, 오
로지 문교방면에 전념하고 특히 지나의 춘추, 조선의 동국통감(東國通鑑)을 연구하여, 정사(正邪)를 따
지고 또 권징(勸懲)에 뜻을 두게 되었음으로, 대일본사 편찬에 착수했다는 것은, 참으로 뜻이 깊다고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또 남북조의 정통을 논하는데 신기(神器)를 받들고 있습니다. 남조(南朝)
를 정통으로 하며, 신기를 받들지 않는 북조는 황통을 계승하지 않는다고 구별한 것 등은 국사상 불멸
의 공적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 영전 단장 다나카 씨는 시종일관 정좌하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참으로 감탄했습니다. 마
쓰에(松江)에서 87세의 노옹이 향토애의 마음으로, 신화 같은 향토비사를 이야기하는 것과 같이, 다나
카 씨도 사도(史都)로서 미토의 면목을 눈앞에 나타내도록 노력하는 점은, 우리로서는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자신이 태어난 향토를 다른 사람에게 소개하고자 하는 그 아름다운 마음가짐을 존경
해야 할 것입니다. 또 중학교 교장으로서 틈이 없는 직책에 있으면서, 그만큼 지명에 조예가 깊다는 것
은 비범한 노력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미토학이라 하면, 미토(水戶) 제2대 번주(藩主) 도쿠가와 미츠쿠니(德川光圀) 경(卿)이 제창한 학문으
로서, 절대관의 존황(尊皇)을 본의로 하는 학문입니다. 즉 부모에 대한 효도도 스승에 대한 보은도, 모
든 것을 초월하여 일천만승(一天萬乘)의 천황폐하에 충의를 다 함으로써, 일본민족의 지상(至上)의 실
천을 도덕관으로 하는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 산가 경북 강사 마쓰에에서의 시회(詩會)에서는 유명인사가 다수 참석해 주셔서 성황을 보인 것
에 우리들로서는 깊은 감명을 받은 바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문필은 내지보다도 조선이
본가라고 하며 우리를 칭찬해 주신 것은, 즉 내선 간은 친밀한 문화관계가 있었다는 증거를 내세우게
된 것입니다.
○ 영전 단장 이번에는 평산 간사에게 성지참배 감상을 여쭈겠습니다.
○ 평산 간사 그러면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에 20일간에 걸쳐 여러분과 함께 성지순례를
하였으나, 저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여러분의 뒷바라지를 완전히 다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부족한 탓으로 오히려 여러분에게 폐를 끼친 적도 여러 차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점은 참으로
죄송스러운 바입니다. 변명의 여지는 없으나, 여러분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면 안 될 이유도 있었습니다.
먼저 출발에 즈음하여, 여러 가지 복잡한 일도 있었음으로, 완전한 준비를 할 수 없었던 것이 제일
큰 원인입니다, 라고 하는 것은, 출발 전에 각 성지에 관한 유서라거나 역사를 각 책에서 발췌해서 여러
분에게 참고자료로 드리지 않으면 안 되고, 또 간단한 지도도 드리면서 여행에 불편이 없도록, 모든 예
비지식을 넣어드리고 싶었으나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철도수송관계가 있기 때문에, 출발예정기일이 지
연되고, 마침 모든 행사가 폭주하고 있을 때에 출발 일정이 결정된 것입니다. 즉 유림대회, 효자열녀
표창 등이 있었기 때문에 충분한 준비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점 나쁘게 생각지 마시고 양해하심을
부탁드립니다. 또 상사의 명령에 의하여 특별히 직원을 각지에 사전조사를 위하여 파견해서, 세부에 걸
쳐 준비도 하고, 각 부현(府縣) 당국에 편의를 줄 것을 부탁도 해 두었으나, 아까도 말씀드린 대로 손도
발도 낼 수 없을 만큼 바빴음으로 그 직원과 충분한 타합도 하지 못하고, 서류들의 인계도 할 수 없었
으며, 여러 가지 계획이 앞뒤가 당착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출발한 이래 오늘까지 안심
하고 구경도 못하고 또 유시마성당과 미토의 강연도 잘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를 들면 미토에서 중
학교 교장 선생의 강연 때도, 자동차로 마중과 전송을 하지 않으면 시간을 맞출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교섭을 하기 위하여 참으로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불안도 있었기 때문에 강연이 귀에 들어 올
까닭이 없습니다. 또 유시마성당에서 우노 박사가 강연했을 때도 점심 준비가 마음대로 되지 않는데
시간은 자꾸만 가고 또 고려신사 참배가 예정되어 있어서, 서지도 앉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러한 상태니, 강연을 듣는 것은 2차 문제로 예정을 진행시키는 것만으로 벅찬 일이었습니다.
다음으로 지나간 경험에서 느낀 2, 3가지를 말씀드려 보고자 합니다. 저 개인의 일입니다만, 1933년
경 까지에는, 물론 신궁이나 신사참배를 몇 차례나 했으나, 참배할 때에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
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즉 말하자면 격에 안 맞는 것 같은 기가 들어, 2배 2박수 1배를 하는 것이 오
직 이것은 형식적이라고만 생각이 든 것입니다. 이것은 아직 황국신민으로서의 의식이 철저하지 못했
던 탓입니다. 1934년에 제가 농촌지도를 담당하게 되어, 농촌지도자의 내지시찰단에 참가하여 성지참
배를 하는 한편 농촌시찰을 하게 되면서, 경기도 내의 농촌에서 1년간 실지로 경험을 했습니다. 그때
비로소 내지농촌을 방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만 실제로 내지농촌을 보고 다만 머리가 숙여질 뿐이었습
니다. 그리하여 자금까지 갖고 있었던 사고방식은 틀렸었다는 것을 통절하게 느낀 것입니다. 오해를 깨
달은 것입니다. 불평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 또 불평을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고방식을 고치도
록 역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맹세하였습니다. 같은 국민으로서, 반도에 살고 있는 국민은 정신
적으로 불구자인 것을 절실히 느낀 것입니다.
또 저는 도회지에서는 볼 수 없는 정황을 본 일이 있습니다. 의정부에 있는 농민도장에서 양성한 12
명의 청년을 데리고, 내지의 출정군인 유가족의 지원을 위하여 간 일이 있었는데, 그때는 일행 12명에
게 내지의 예의동작을 상세하게 가르쳐서, 불단(佛壇)을 배례하는 방법까지 철저하게 가르쳐 주었던 것
입니다. 12명 중에 한 사람일지라도 우리가 내지에 가는 목적과 상반되는 언행이 있으면, 이것은 12명
의 수치일 뿐만 아니라, 반도 2천 4백만 민중의 수치를 내지동포에게 폭로하는 것임으로, 목적에 상반
되는 일이 있으면 3가지 방법을 취하기로 한 것입니다. 즉 첫째로 현해탄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둘째
에는 할복자살을 한다, 셋째는 내지에서 돌아오지 않는다, 라고 하는 3가지 조건을 12명의 청년에게 맹
세하게 해서, 한 치도 틀림없도록 한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목적에 상반되는 일이 있으면, 세 가지
중에 한 가지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극단적인 이야기를 하고, 목적달성까지에 시종일관 긴장
하며 호령 아래 행동하도록 한 것입니다. 우리가 지원으로 나간 곳은 오이타현(大分縣) 구스군(玖珠郡)
노카미마을(野上村)이 됩니다만, 현청에서 촌장님을 불러내어 함께 타합을 하거나, 여러가지 이야기를
해 보았으나, 촌장님은 참으로 애국의 화신이라고 할 만큼 훌륭한 분이었습니다. 촌장으로서는 아까운
인격의 소유자로 국회의원이 되어서 직접 정치에 참여할 만큼의 자격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
이 촌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 농촌은 매우 경제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윤택하고, 또 여유가 넘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농촌에는 농가로서 1등급의 세금을 납부하는 50만 엔의 자산가가 있습니
다. 이 농가에는 70에 가까운 노부부와 22살 되는 딸이 있습니다만, 아침식사가 끝나면 한 집안이 함께
일하러 나갑니다. 이 농가의 노부인과 청년들이 문답을 했는데, 청년들이 당신은 생활에 무엇 하나 불
편한 점이 없는데, 왜 고생을 하고 있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그 부인이 모습을 바꾸면서 말하기를, “우
리가 한 집안을 통틀어 일하는 것은 무슨 돈벌이를 하기 위해서는 결코 아닙니다, 농촌에서 태어나, 농
촌에 살고 있는 농민으로서 농사를 위하여 일하는 것이 그 사명인데다가 지금은 국가존망의 전시인 것
이다, 전시에 전선후방에 식량의 불안을 없애는 첫째 책임자는 농민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책임을 다
하기 위하여 열심히 일하는 것이다. 지금 가령 증산된 한 톨의 쌀은 전쟁을 이기기 위한 쌀이다, 라고
생각할 때 농민으로서 이러한 국가비상시국에 꼼짝 않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늙은이나 젊은이도 일할
수 있는 자는 힘껏 일하는 것이 일터 봉사이며, 대정익찬(大政翼贊)이기도 하다, 만약 이때에 성실하게
일하지 않는 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사명을 잊고 천직을 스스로 버리는 것이기 때
문에, 그 이상 무거운 죄가 없는 것이다.”라고 말했음으로 청년들은 얼굴을 붉히고 반성했다는 것입니
다. 이와 같이 농민의 혼이 다른 것입니다. 이러한 점이 반도농민과 내지농민이 근본적으로 다른 점입
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정신적으로 불구자인 사연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종래의 정신적인
불구를 청산하여, 내선인이 혼연일체가 되어, 내지인의 정신을 우리 정신으로, 내지의 민도와 동일선상
으로 끌어 올리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내지의 농촌에서는 남녀노소가 일함으로써, 최고의 국민적인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조선에서는 어떻습니까. 될 수 있는대로 힘든 일을
피하고자 하지 않습니까. 그뿐만 아니라 일하는 것을 불명예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은 이번
성지참배를 계기로 더 한층 느낀 것입니다. 노인은 청년에게 질 수 없다는 기백이 있음으로써, 청년의
모범이 되고 사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번에 가장 강하게 느낀 것은 이세신궁의
옥 조약돌을 밟으면서, 숭고한 일본정신을 새삼스럽게 강하게 느낀 동시에, 우리는 철저하게 황국신민
이 되고, 또 일시동인의 고마운 성지를 받들어 내선일체의 열매를 거두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책임감을
느낀 것입니다.
○ 영전 단장 평산 씨의 이야기는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 있습니다.
<붙임> 좌담회는 3시간 남짓에 걸쳐 계속되었으며, 각자의 감상담은 끊임이 없었다. 해는 서산에 기울고 방안도
컴컴해졌다. 여기에서 좌담회는 일단 휴식에 들어가, 저녁식사 후 다시 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