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란 무엇인가 /이재무
좋은 시란 무엇인가?
시만큼 취향과 기호의 스펙트럼이 넒은 장르도 없을 것이다. 저마다 좋아하는 시편이 다른 것은 이 때문이다. 이것은 세계와 대상에 대한 인식 차이에 따른 것이다. 인식 차이는 저마다의 유전적 형질, 계급, 지역, 성별, 세대, 경험의 총체 등의 요소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데 이러한 인식 차이가 문채(文彩/文綵)를 결정짓는다. 즉, 어떤 대상이나 세계에 대한 동일한 인식이 장식적 수사의 차이로 인해 다른 문채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대상이나 세계에 대한 인식(세계관, 가치관, 역사관의 차이)의 차이가 다른 문채로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문채는 곧 그 사람이라 말할 수 있다.
문학(시)에 대한 취향이나 기호가 다른 것은 저마다의 세계관, 인생관, 역사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취향이나 기호에 대한 차별과 억압은 개별 주체자의 세계나 대상에 대한 인식(세계관, 가치관, 역사관)을 차별하거나 억압하는 야만 행위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물과 세계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 따른 천차만별의 취향이나 기호의 실현이 당대 패러다임의 자장 안에서 작동된다는 것을 부인하기 힘들다. 이 말은 아무리 스펙트럼이 넒은 시 장르라 할지라도 그 시대가 요구하는 묵시적인 합의가 있게 마련이고, 좋은 시란 이러한 범주 안에 자리하고 있다는 뜻이다. 즉, 누구도 패러다임의 범주 바깥에서 활동하기가 용이치 않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전제 속에서 나는 좋은 시의 요건 몇 가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좋은 시는 발견의 미학이 들어 있어야 한다. 발견이란 감각이나 현상 너머의 이면적 진실을 포착하는 행위 속에서 이루어진다.
성당의 종소리 끝없이 울려 퍼진다
저 종소리 뒤편에는
무수한 기도문이 박혀 있을 것이다
백화점 마네킹 앞모습이 화려하다
저 모습 뒤편에는
무수한 시침이 꽃혀 있을 것이다
뒤편이 없다면 생의 곡선도 없을 것이다
천양희, 시, <뒤편>, 전문
종소리 뒤편의 기도문, 화려한 마네킹 뒤편의 시침을 보는 시인의 시선이 깊다. 현상 너머의 이면적 진실이 우리를 아프게 한다. 이미지와 실체가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일부 정치인들이나 연애인들의 일탈 행위 속에서 우리는 표리부동의 진실을 확인할 때가 있다. 종소리가 우리에게 위안을 줄 수 있는 것은 침묵을 우려냈기 때문이다. 시시때때로 종소리가 울린다면 그것은 소음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종소리가 공중에 파문을 내며 번지어 가다가 꽃을 만나면 웃음을, 풀과 나무를 만나면 푸름을 피워낸다. 환하고 둥글고 푸른 종소리. 하지만 그 종소리 뒤편에는 결핍과 부재를 앓는 누군가의 간절한 기구가 있다는 사실을 이 시는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마지막 연의 잠언은 현상 너머의 진실을 읽어냈기에 가능한 언술이다.
둘째, 좋은 시란 ‘낯설게 하기’가 들어 있어야 한다. 이것은 1930년대 쉬클로브스키 등의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주창한 내용으로 문학언어는 “일상언어에 가해진 조직적인 폭력”이며, 문학언어를 다른 담론 형식들과 구별해 주는 것은 그것이 일상언어를 다양한 방식으로 변형시키고 뒤틀어 놓는다는 것이다. 문학 장치들의 압력을 받고 변형된 일상언어는 낯설게 되고 생소화된 언어이다. 일상언어의 규격화된 상투성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현실인식이나 현실지각이 습관화되고 자동화되어 버린다. 낯설게 하기란 비록 낯익고 진부한 대상이나 세계라 할지라도 그것에 대하여 주체 나름의 새로운 의미나 가치를 부여하는 행위를 말한다.
늘 푸르다는 것 하나로
내게서 대쪽 같은 선비의 풍모를 읽고 가지만
내 몸 가득 칸칸이 들어찬 어둠 속에
터질 듯한 공허와 회의를 아는가
고백건대
나는 참새 한 마리의 무게로도 휘청댄다
흰 눈 속에서도 하늘을 찌르는 기개를 운운하지만
바람이라도 거세게 불라치면
허리뼈가 뻐개지도록 휜다 흔들린다
.......(중략)
아아, 고백하건대
그놈의 꿈들 때문에 서글픈 나는
생의 맨 끄트머리에나 있다고 하는 그 꽃을 위하여
시들지도 못하고 휘청, 떨며 다만,
하늘 우러러 견디고 서 있는 것이다
복효근, 시, <어느 대나무의 고백>, 부분
예로부터 대나무는 사군자의 하나로 시문학에서는 ‘절조“의 표상으로 일컬어져 왔다. 하지만 일인칭 고백 형식의 위 시편에서는 절조가 아닌 지극히 불안한 실존적 자의식을 읽을 수 있을 뿐이다. 이 시가 우리에게 울림과 공감을 주는 배경은 바로 대나무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대나무에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통념은 대개가 거짓이나 위선일 때가 많다. 사물과 세계를 낯설게 볼 때 진실이 구현된다. 우리 시대 비둘기는 더 이상 평화의 상징이 아니다. 비둘기는 공원에서 먹이를 구하고 잠자리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암회색 정장 한 벌로 평생을 산다는 면에서 볼 때 노숙자에 가깝다. 또한 오늘날 국화는 대나무처럼 더 이상 절조가 아니며 서정주 시편 <국화 옆에서>에 나오는 것처럼 소쩍새나 천둥 번개 무서리를 만나지 못한다. 오늘날 국화는 비닐하우스에서 한 날 한 시에 태어나 꽃 피자마자 장례식장으로 달려가야 하는 비극적 운명을 지녔다. 자동화된 의식에서 벗어나 사물과 세계를 낯설게 바라볼 때 우리는 습관적이고 무의식적인 우리의 지각이나 반응을 새롭게 갱신할 수 있다.
셋째 언어에 대한 자의식을 가져야 한다. 글쓰기란 한 마디로 줄여 말하면 ‘언어의 선택과 배열’이라고 말할 수 있다. 대체 불가능한 최상급의 언어를 선택하여 최선으로 배열하는 것이 글쓰기의 요체인 것이다. 시인은 언어 조합 능력이 있어야 한다. 또한 일상 어법의 중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을 경주하여야 한다.
시의 언어는 일상어와는 그 쓰임새가 다르다. 일상어는 의미 전달이나 개념을 제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이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시 언어는 그 자체가 목적성을 띠기 때문에 다른 것으로의 교체가 불가능하다. 가령 일상어에서는 ‘연인’이라는 말 대신 애인, 님, 혹은 자기라는 말을 쓸 수가 있지만 시 언어에서는 기표마다 환기되는 정서가 다르기 때문에 교체해서 쓸 수가 없다. 서정주 시인의 시편 <자화상>에 나오는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었다”에서 ‘팔 할’ 대신 ‘80%’를 쓸 수는 없는 일이다. 또 박목월 시편에 나오는 구절 ‘남도 삼백 리’ 대신 ‘남도 360 km’를 쓸 수는 없다. 시적 표현에서는 전후좌우 그것이 아니고는 다른 것으로 채울 수 없는 유일의 적정어가 놓여야 한다.
물 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김종삼, 시, <묵화>, 전문
“물 먹는 소 목덜미에/할머니 손이 얹혀졌다”라는 시행은 문법에서 일탈한 비문이다. 문법에 맞게 쓰려면 “물 먹는 소 목덜미에/할머니가 손을 얹었다”라고 써야 한다. 하지만 문법에 맞게 쓰면 오히려 시의 맛이 나지 않는다. 비문이 더 시의 울림을 준다. 이렇게 시의 정서적 효과를 위해 일부러 비문을 쓰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시적 허용이라 한다. 이는 사투리도 마찬가지이다. 김소월의 시편 <진달래꽃>에서 “사뿐히 즈려밟고”에서 ‘즈려밟고’는 그의 고향 평안북도 구성 지역의 사투리이다. 표준어로는 ‘짓밟다’이다. 이 경우는 ‘사뿐히 짓밟고’보다는 ‘사뿐히 즈려밟고’가 더 효과적이다.
각설하고 위 시편에서 마지막 행의 ‘적막하다’라는 관념 형용사를 대체할 수 있는 시어는 없다. 가령 ‘고요하다’ ‘고적하다’ ‘쓸쓸하다’ ‘고독하다’ ‘외롭다’ 등속의 가족 유사어 들이 있지만 ‘적막하다’를 대체하기에는 그 어느 것도 마땅치 않다. 이 시에서 ‘적막하다’는 유일의 적정어인 셈이다.
이 시에서 ‘적막하다’는 플로베르가 주장한 ‘일물일어설’에 해당된다. “한 사물의 특성 혹은 한 가지 생각을 표현하는 데는 한 가지 말밖에 없다”는 ‘일물일어설’이 뜻하는 것은 글쓰기에 있어 최상의 언어, 최적의 언어 즉 적정한 유일어를 찾으라는 것을 뜻한다.
시는 무엇보다 기의보다는 기표 우위의 장르라는 것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언어에는 형식이나 기호를 뜻하는 ‘기표’와 내용과 의미를 뜻하는 ‘기의’가 있는데 시는 전자의 ‘기표’를 더 중시하는 장르이다. 왜냐하면 기의가 같더라도 기표의 차이에 따라 정서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서적 밀도가 강한 언어에는 무엇이 있을까? 꽃, 나무, 곡식, 강, 산 등의 일반어보다는 국화 목련 칸나, 참나무 소나무 자작나무, 백마강 한강 낙동강, 남산 한라산 지리산 등의 특수어가, 자유 평화 본질 등의 추상어(관념어)보다는 바람 촛불 구름 종소리 등의 구체적 감각어가, 표준어보다는 사투리가 더 정서의 밀도가 높고 강하다. 즉, 학습을 통해 습득한 개념어보다는 생활 현장에서 귀로 들은 구체적 생활 감각어가 정서적 실감을 가져다준다.
내 귓속에는
얼어터진 배추를 녹이기 위해
제 한 몸 기꺼이 태우는
새벽 농수산물시장의 장작불 소리가 있고
리어카 바퀴를 붙들고 늘어지는
첫눈의 신음소리가 있고
좌판대 널빤지 위에서
푸른 수의를 껴입은 고동어가 토해놓은
비릿한 파도소리가 있고
고영, 시, <달팽이집이 있는 골목>, 부분
시적 주체의 경험적 진실이 잘 녹아든 시편이다. 시적 공간에는 체험을 우려낸 다양하고도 생생한 소리들이 살고 있는데 이것들은 하나같이 구체적인 형상을 띠고 있다. 그것들은 세상에서 밀려난 작고 보잘 것 없는 소리들이다. 이 시는 개념어나 추상어가 아닌 구체적 감각어로 경험 현실을 재구성하여 독자에게 울림과 공감을 주고 있다. 시는 설명의 욕구로부터 멀리 벗어나 있을수록 진실에 핍진하게 다다를 수 있다.
2021.5.20 페이스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