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망디 인상, 31×42㎝, 혼합재료에 먹과채색, 2020.
앙드레 말로 미술관.
■ 佛노르망디 소도시 르아브르
‘작은 파리’ 별명 미술도시
해질녘 붉은 빛 바다 절경
‘소설가·시인’ 앙드레 말로
장관 시절 강력한 문화행정
해안에 아담한 미술관 세워
‘모네 스승’ 부댕 작품 많아
색채로 빛·사물 표현 ‘압권’
인상주의 출발 씨앗 된 듯
프랑스 여행자들은 흔히 남부의 아름다움을 많이 이야기하지만 파리 북서부 노르망디 쪽 역시 독특한 매혹을 풍긴다. 남쪽이 부드럽고 섬세한 여성적 풍광을 자랑한다면 북부는 보다 남성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해안선 따라 펼쳐지는 작은 도시들은 인상파의 그림 속으로 들어선 듯 아름답다. 리옹역에서 출발해 일망무제의 초록색 초원을 보며 가는 북서쪽 기차여행이 일품인 것은 가다가 몽생미셸이나 르아브르, 도빌이나 생말로 같은 곳에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본디 노르만족이 세웠대서 붙여진 이름의 그 노르망디 중에서도 르아브르는 ‘북쪽의 작은 파리’라고 불릴 정도의 미술 도시로 유명하다. 이번에 나는 기차가 아닌 승용차로 한적한 노르망디행 도로를 타고 간다. 신기하게도 파리를 벗어난 지 얼마 안 됐는데 직선도로는 지나치는 차도 볼 수 없을 만큼 한산했다. 들길을 가다가 슬며시 방향을 틀어 아름다운 작은 도시 페캉과 샹티이성을 둘러보는 호사를 맛보기로 했다. 예정에 없던 일정이었다. 페캉의 시민들이 들고나온 손때 묻은 물건들을 파는 길거리 작은 시장을 구경했는데 가끔 이 장터에서 옛 명화들이 나온대서 유명해진 즉흥 시장이다. 숲길 따라 고성(古城) ‘샹티이’로 간다. 영화에도 가끔 나온다는 이 전원 속의 샤토 미술관에는 방마다 라파엘의 ‘성모상’을 비롯한 엄청난 미술품들이 빼곡하게 걸려 있는데 특히 중세 미술품이 많다. 마치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을 만난 듯한 느낌이다. 클로드 모네는 바로 이 성 가까운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전해지는데 물론 이 성의 미술품들을 소년 모네도 보지 않았을까 싶다. 옛날에 왕족들이 이 근처 숲에서 꿩과 사슴 사냥을 자주 하곤 했다는데 그 전통 때문인지 지금도 가까운 식당에서는 주문하면 이 두 가지 고기를 먹을 수 있다고 한다. 출구로 나오는데 숲 사이를 빠르게 달려가는 노루가 보인다. 샹티이성에서 나와 자동차로 푸른 들판을 달리다가 드디어 만난 것이 르아브르 클레망소 거리의 앙드레 말로 미술관.
그런데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이 겸손하고 아담한 주택의 2층 미술관에 왜 소설가 말로의 이름이 붙어 있을까. 그가 문화부 장관으로 있던 시절에 지어진 것인 데다 만년에 홀로된 말로가 화려한 파리 시절을 뒤로하고 미술관과 가까운 근교에서 은둔의 삶을 살다가 작고한 인연 때문이라고 했다. 그야말로 성채 같은 우람한 명성의 말로였지만 이제 사람은 가고 파리 북쪽으로 그의 이름이 붙은 단아한 집 한 채가 내 눈앞에 있다. 그는 불세출의 시인, 소설가, 미술평론가, 정치가, 행정가 그리고 무엇보다 예술 애호가였다. 특히 미술이론가이자 평론가 그리고 행정적 후원자로 그 이름이 높았던 르네상스적 인물이었다. 그런가 하면 행동주의 문학인으로서 1936년의 스페인 내전 때에는 공화파 의용군으로 참여했고 1944년에는 베르제 대령이라는 이름으로 직접 전선에서 레지스탕스를 지휘하기도 했다. 프랑스의 체 게바라, 파리의 헤밍웨이로 불릴 만했다. 그가 자신의 주군이었던 평생지기 샤를 드골을 만난 것도 전선에서였다. 특이한 것은 그의 이력 가운데 ‘동양’을 빼놓을 수 없다는 점. 일찍부터 중국어, 베트남어를 공부해 장제스(蔣介石)의 상하이(上海) 쿠데타를 주제로 한 ‘인간의 조건’으로 공쿠르상을 받았으며 중국 국민당의 광둥(廣東) 혁명을 배경으로 한 ‘정복자’는 여행보고서이자 역사 기록적 정치소설이라는 새로운 형식으로 각광받을 정도였다. 그런 그에게 전체주의는 혐오의 대상이었다. 히틀러의 나치즘을 역사의 불길한 징조로 보고 ‘모멸의 시대’를 썼던 그는 그 히틀러 군대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탈출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는 그 모든 재능 중에서도 뜻밖에 예술행정에서 유감없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드골의 1, 2차 집권 때 공보부 장관과 문화부 장관을 지냈던 그는 대통령의 전폭적 지원을 받으며 프랑스 역사상 가장 혁신적이고 강력한 문화예술행정을 펼치게 된다. ‘국가는 예술을 감독하기 위해서가 아닌, 오직 예술에 봉사하기 위해 존재할 뿐’이라는 자신의 사적 신념을 공적 논리화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이어령 교수가 초대 문화부 장관이 됐을 때 한국의 말로가 되기를 염원했던 것도 그가 내세웠던 문화입국을 이 교수가 실천해 주길 바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미술평론가이자 애호가였던 그는 장관 시절 여러 미술관을 세웠고 르아브르의 앙드레 말로 미술관 또한 그중 하나였다. 파리 외곽으로 밀려날 것으로 예상되던 현대미술관 퐁피두를 도심인 마레 지구에 세우는가 하면 다양한 미술 지원 정책을 펼쳤다. 국적을 불문하고 두각을 드러내는 재능 있는 미술가들을 지원하며 파리 시민권을 주기도 했다. 낮에는 행정가로 밤에는 화가나 문인들과 어울리는 예술인으로 살았던 그는 방대한 미술평론서인 ‘예술의 심리, 전 3권’을 1947년부터 1950년까지 써낸 다음 ‘침묵의 소리(1951)’ ‘신(神)들의 변모(1957)’ 같은 예술 평론서를 써냈다. 진실로 그는 파리가 세계 미술의 수도가 되기를 원했던 듯하다. 그러나 질풍노도 같은 그의 삶은 드골의 퇴장과 소설가였던 아내 루이즈 두빌모랭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함께 꺾이게 된다. 파리에서 스스로 자취를 감추며 은둔 상태로 들어가게 된 것.
그러나 이렇게 곡절 많은 이름인 말로의 문패를 단 미술관은 들어가 보면 마냥 평화롭기만 하다. 우선 외젠 부댕(Eugene Louis Boudin, 1824∼1898)의 작품이 압도적으로 많아서 미술관에 말로보다 그의 이름을 붙이는 편이 어울릴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부댕은 모네의 스승으로 알려져 있는데 모네가 17, 18세 무렵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다가가 코치를 해주면서 둘의 인연이 시작됐다고 한다. 시골의 그 이름 없는 화가는 소년에게 빛과 풍경의 조화, 시간의 흐름과 사물의 변화를 색채로 낚아채는 요령에 대해 가르쳐 주었고 이것이 인상주의의 씨앗이 됐다. 그래서 진정한 인상주의의 출발을 이 노르망디의 무명화가 부댕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미술관 안에서 그의 그림은 주로 소품들이었는데 유난히 구름과 바다가 많이 보인다. 그리고 눈자위에 검은 테가 둘린 노르망디 소 떼들의 전원 풍경화가 많다. 물론 모네의 ‘수련’도 보이고 카미유 피사로의 작품도 보이지만 미술관의 주인은 단연 부댕이었다. 초야의 지방 화가였던 그는 먼 훗날 말로의 도움으로 고향에서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유리로 된 미술관의 한 벽면으로는 바다가 보인다. 예컨대 노르망디 화파라고 불러도 좋을 부댕의 풍경화들은 바로 이곳의 둥둥 떠가는 흰 구름과 바람, 그리고 햇빛과 물이 만나 이루어진 것들이었다.
말로의 이 전원 속 미술관을 둘러보며 마음에 감미로운 평화와 따뜻함이 번져온다. 허다한 미술관이 사람을 소외시켜버릴 정도로 위압적이거나 지나친 건축적 상상력으로 피곤하게 하는 데 반해 미술 본래의 잔잔한 위로와 기쁨을 주는 집이었기 때문이다.
천둥과 불꽃의 삶을 산 말로. 어쩌면 그의 영혼도 생전 그토록 사랑했던 미술품들과 함께 이 작은 집에서 행복한 안식을 누리고 있을 것 같다.
김병종/ 화가, 서울대 명예교수, 가천대 석좌교수
■ ‘앙드레 말로 미술관’은…
항구·초원 그린 ‘초기 인상파’ 작품 많아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미술평론가, 정치가, 행정가였던 앙드레 말로(Andre Malraux, 1901∼1976·사진)가 문화부 장관 재직 시 노르망디 르아브르시를 위해 지어준 미술관으로 이곳 출신의 외젠 부댕을 중심으로 한 초기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들을 주로 소품 위주로 소장하고 있다. 특히 빛과 시간 등을 구름과 바다와 바람 등으로 포착해내는 부댕의 화법은 그의 제자인 클로드 모네에게 전수됐고 이후 본격적인 인상파 회화로 자리 잡게 된다. 노르망디 특유의 자연 풍광들, 초원과 소, 항구 등을 주제로 그린 그림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