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전처리 투수
- 이승희
나는 그게 마음에 쏙 든다 지는 것에도 순서가 필요하다는 것 질 때
까지 잘 지기 위해 남은 시간을 책임져야 하지 날마다 길어지고 연장되
는 절망에도 놓을 수 없는 마음이 있다는 것은 담장 아래에 꽃을 심는 마
음 같은 걸까 글러브 속에서 공을 만지는 손가락들이 설렌다 내가 지나온
모든 끝은 당겨쓴 나의 청춘들이어서 당신을 만나면 나는 이제 줄 게 없
어서 공을 던진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 대안도 갖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심
들로만 서 있다. 갈색 약병 속에서 웅크린 여름, 그 속으로 흩어진 마음들
여기가 분명 끝이었는데 나는 또 어디로 밀려가나 이제 알아서 달아날 곳
이 없어 다행이다 지금은 오직 한 끝 손가락 끝에서 날아간 공은 중심에서
늘 비껴간다 중심을 눈앞에 두고 떨어진다 땅바닥을 치고 간다 아무도 내
공을 치지 않는다 내가 원한 것은 이제 그만 끝내는 것 당신들에게 내가 졌
다고 인정받는 것 이런 세상 따위는 다시 내게 돌아오지 않게 하기 위해 여
기 서 있다 보이는 끝이 자꾸만 멀어질 때 끝에 닿을 수 없어서 썩지도 못할
때 나는 아무도 죽이지 못한 채 혼자 죽어가는 사람 어떤 끝은 끝없이 연장된
다 나의 전력투구는 그렇게 끝으로 던져지는 것 나는 이미 세상에 읽힌 기억
이지만 견뎌낸 기억들이 둥글게 모여 하나의 공이 된다 모든 끝은 손가락 끝
에서 시작되고 끝날 것이다 지는 건 두려운 게 아니라 우리가 닿아야 하는 시
작 나는 다시 중심을 바라본다 끝은 늘 중심에 있는 한 점이다
ㅡ『공정한 시인의 사회』(2015.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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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들 가운데 정규 텔레비전 시청을 멀리하는 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아예 멀리하는 것은 아니어서 체육 문화관련 채널만 보고 있다고 합니다
미국 농구와 야구, 5대 리그 축구, 국내 농구와 배구를 즐겨 본다네요
며칠 전부터 프로야구 룰을 수정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면서 기대된다고 합니다
야구에는 질 게 뻔한 경기에 마무리로 내세우는 투수를 패전처리 투수라고 하는 모양입니다
어차피 9회말까지 가야 하니 힘껏 던지되 지고 오라는 명령에 따른답니다
야구만큼 역할이 미리 주어지는 스포츠는 없는 듯합니다
선발과 중간계투 그리고 마무리로 나뉘는데, 패전처리 투수가 가장 서글프겠네요^*^
좋게 포장하면 '희생양'이 되는 것인데 누군들 그렇게 되기 원하지는 않을 겁니다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교체되는 고위공직자나, 사건시고의 책임을 지고 쫓겨나는 이들도
우두머리를 위한 패전처리용 투수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시인은 요즘 젊은이들이 그렇게 보인다고 읊었습니다
지든 이기든 살아있다는 것은 늘 시작인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