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은 2026. 2. 23. 월요일.
날씨가 자꾸만 흐려진다. 늦겨울바람이 불어 은근히 춥다.
오후에 서울 송파구 잠실에 있는 석촌호수로 나갔다.
서호쉼터 돌벤치 위에는 노인들이 앉아서 바둑, 장기를 둔다.
평소에는 구경꾼 노인들이 제법 많았는데 오늘은 별로 없었다.
은근히 추웠기에.
등허리뼈 아픈 나는 어기적거리며 호수 한 바퀴(2,563m)을 돈 뒤에 귀가했다. 1시간 반쯤 걷기운동을 한 셈이다.
귀가한 뒤에 컴퓨터를 켰더니 <불혹의노래(40대이상)> 카페가 뜬다. '우리 삶의 이야기방(언덕에 올라)'에서 아래 글을 보았다.
퍼서 여기 <국보문학카페>에 올린다.
'남의 글을 마음대로 퍼서 옮기면 안된다. 자칫하면 큰일난다. 범죄자로 처벌될 수 있다'.
그런데도 나는걱정하지 않고는 퍼 왔다.
내 글이었기에.
위 카페에서 나는 해마다 나이 많은 축에 들어갔기에 ... 2017년 경에 내가 떠났다.
초창기부터 무척이나 인기 많고, 중년 회원들 간에 무척이나 화목한 카페이였다.
나는 지금은 노인세대이다.
중장년시절에 내가 활동했던 카페 숫자는 .... 엄청나게 많다.
지금은 다 접고는 두 군데에서만 활동한다.
내 고교여자 친구의 카페 ... 지금은 나 혼자서 활동하며, 내 글 저장창고로도 활용한다. 또 하나는 <한국국보문학카페>이다. 문학카페이기에 나는 날마다 늘 들락거린다.
내가 2008년 6월 말에 직장을 떠난 지가 만17년을 더 넘었다. 서울에서는 할일이 없기에 무기력한 나....
이쯤 줄이며 <불혹의노래> 카페에 올렸던 내 글을 다시 읽었다.
<국보문학카페>에 올렸기에 글 더 다듬어야겠다.
2026. 2. 23. 월요일. 최윤환
어머니 지갑과 나
산다
'엄니 집나이 아흔일곱살이 된 지 며칠 뒤 먼길 여행 떠났지요.
엄니가 꼬기작거리며 억지로 쑤셔넣은 작은 지갑/ 알록달록한 지갑 속에는 만원권 두 장, 천원짜리가 열아홉 개.
치매 걸려서 장터에 나갈 수 없는 긴 세월인데도 지갑 속에 돈이 들어 있데요.
엄니 돌아가신 뒤 그 돈 써야 하는지를 고민하다가 서랍에 넣고는... 오래 생각했지요.
일제시대 1920. 2. 19(음12. 30. 섣달 그믐)에 태어나서 고생 지지리한 엄니라면?
'다 쓰는 거야...' 이 생각으로 나는 다 썼지요.
'돈주머니와 나'라는 잡글에 이어서 글 써야겠습니다.
엄니는 2014년 6월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을 거쳐서, 충남 <보령아산병원>로 이동. 장기간 입원하셨기에 중환실에서 일반병실로 왔다 갔다 하면서 연명치료를 받았다. 아무런 가망도 없는 치료. 마지막에는 아무런 느낌도 감각도 없는 상태에서 고작 한 달간 버티다가 병원 특실에서 맥을 뚝 떨어뜨렸다.
엄니는 병원 특실에서 섣달그믐 생일을 맞이했고, 다음날 음력설을 지냈고, 며칠 뒤 자정 가까운 밤중에 먼 여행길 떠나셨다.
보령시 웅천읍 죽청리 선산에 매장하는 날(2015년 2월 27일) 아침나절은 왜그리 춥던지. 검은 양복(상복)을 입은 상주인 나는 덜덜덜 떨었다. 아비 무덤을 반쯤 파고는 아비의 석관 곁에 엄니를 묻었다.
엄니 떠난 시골집은 빈 집.
엄니가 다섯 살 때인가. 충남 보령군 남포면 용머리(갯마을)에서 이사 온 뒤로 평생을 한 곳에서만 살았던 옛집.
안방 엄니의 머릿말에 있는 작은 빼닫이 서랍에서 갓난애기 손바닥보다도 더 작은 지갑을 보았다. 알록달록한 헝겁으로 꽤맨 꽃지갑. 실끈을 잡아당기니 그 속에는 만원권 두 장, 천원짜리 지폐가 몇 겹 접쳐져서 담겨져 있었다. 돌돌 말린 종이돈은 스물한 장.
써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를 오랫동안 고민했다.
엄니의 삶을 더듬는다. 엄니는 일제시대 때인 1920년 1월(음 기미년 섣달 그믐생)에 갯바다 남포면 용머리에서 태어났다.
한때 용머리 부자라고 불렸다는 외할아버지는 친척 배 사업(어선)에 저당잡혀 보증을 섰다가 사업은 망했고, 외할아버지도 덩달아 망해서 고향을 떠나 이웃 면의 산골, 곶바래(웅천면 구룡리 화망 花望)로 이사했단다.
왜정 때였다. 구장이 소학교 입학 통지서를 가지고 왔는데도 외할아버지는 돈이 없다는 이유로 어린 딸을 학교에 보내지 않았단다. 어린 딸은 골방에서 몇날 며칠을 틀었어도 끝내 학교에 가지 못했단다.
가난한 게 무엇이라는 것을 어렷을 때에 이미 안 엄니였기에 평생에 돈 모우기에 힘썼다. 돈 쓰는 것에는 더욱 망설이었다.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이다. 엄니는 울 밖 텃밭에 모시대를 기르고, 해마다 세 차례나 모시대를 낫으로 잘라서 모시껍질을 벗겼다. 이빨로 모시 줄기를 여러 차례 째서 실처럼 가늘게 삼았다. 실 꾸러미를 만든 뒤에 작은 골방 베틀대에서 찰가닥 소리를 내며 모시 천을 짰다. 몇날 며칠 동안 베를 짰다. 충남 서천군의 한산세모시로 알려진 바로 그 천이다. 하얗게 바랜 세모시 천을 머리에 이고 십리길 웅천장에 가서 팔았다.
집에 돌아온 엄니의 손에는 알사탕 몇 개. 알사탕 한 알을 다듬이돌 위에 올려놓고는 방망이로 내리쳐서 잘게 뽀갰다. 큰 것은 쌍둥이 큰아들, 둘째로 큰 것은 작은쌍둥이 아들, 세 번째로 큰 것은 막내딸, 둘째딸, 큰딸, 그리고 엄니 것은? 없었다!
나는 큰쌍둥이었고, 큰아들이었기에 가장 먼저, 가장 큰 사탕 쪼가리를 먹었다. 식구 누구도 온전한 알사탕은 먹지 못했다.
내가 2008년 6월 30일에 직장에서 벗어나 시골에 내려가서, 엄니와 다시 함께 살던 때였다.
엄니는 뜬금없이 입을 열었다.
"배 곪려서 미안하다."
나는 전혀 기억도 안나는 옛이야기였다. 사실말이지, 엄니는 무척이나 키가 작고, 몸매도 호리호리 깡말랐다. 그러니 젖은 늘 부족할 터. 작은쌍둥이는 암죽(밥을 이빨로 잘근잘근 씹어서 만든 죽)을 전혀 먹지 않고 젖만 찾았고, 큰쌍둥이인 나는 아무 거나 넙죽넙죽 받아 먹었다고 한다. 내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또다른 옛이야기.
그래서일까? 1969년 8월 10일. 집나이 스물두 살 때 뱀 물려서 죽은 작은쌍둥이, 동생은 형인 나보다 체구가 훨씬 컸다.
나도 그렇다. 내가 젖먹이일 때 덜 먹어서 키 크지 못한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외할아버지를 닮았단다. 키가 작고 깐깐했다고 한다. 그러면 그렇지. 내가 굶주려서 못 큰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아흔살도 더 먹은 엄니는 늙어가는 자식인 나한테 미안해 하셨다.
학교 문이 어디에 붙었나도 모르는 무학의 엄니라도 돈이 무엇인지를 아신다. 남의 빚 보증을 잘못 서서 망한 친정아버지, 하도 가난해서 일제시대 소학교마저 보내지 않았던 아버지를 그 당시에도 원망하지 않는다고 말씀했다. 내가 모르는 외할아버지네 이야기이다.
이런 한이 있었을까? 엄니는 돈을 정말로 소중히 아끼고, 모았다. 당신이 텃밭 세 자리에서 밭일해서, 걷어들인 들깨, 참깨를 머리에 이고는 시골장, 5일장(웅천장)에 나가서 돈으로 바꿨고, 모시대 길러서 베틀로 삼베를 삼았고, 산에서 칡넝쿨을 잘라서 잿물로 껍질 벗긴 다음 그 줄기로 청홀치를 삼았다. 어렵사리 번 돈을 베게 속에 넣고는 실로 꼬맸다. 때로는 마을사람한테 빚도 놓았다.
시골 아낙이 밭일을 해서 번다면 얼마나 벌었을까? 이런 밭일도 중년의 아낙이었을 때나 하는 일이다. 70, 80, 90대의 시골할머니로 변해가던 엄니한테는 더 이상 일할 것도, 팔 것도 없었다.
오래 전부터 엄니는 주머니에 돈이 있어도 시골 장에 갈 수 없었다. 십리길, 면 소재지에 있는 장에 걸어다닐 수가 없었다. 높은 고개마루가 두어 개나 있는 신작로를 오르락 내리락 할 수가 없었다.
지방도로는 자꾸만 넓어졌다. 서해안고속도로 '무창포톨게이트' 진입로가 앞산에 들어섰고, 무챙이(무창포해수욕장)으로 오가는 차량도 부쩍 늘었다. 차량이 질주하는 행길은 극도로 위험해져서 쇠잔한 할머니로서는 엄두가 나지 않는 세상, 겁나는 세상으로 변했다.
엄니가 시내버스를 타고 시장에 나갈 수 없는 이유는 또 있었다. 차 멀미를 그토록 심하게 했기에 차를 탈 수가 없었다. 늙어서 병원에 갈 때에도 하나뿐인 아들인 내가 자동차를 천천히, 쉬엄쉬엄 운전하는데도 엄니는 자주 토했다. 길가에 차를 세워놓고 ... 사정이 이러하니 엄니는 먼 길이라도 그냥 걸어다녀야 했다. 너무나 늙은 뒤에는 이조차도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렇게 여든 살을 넘기고, 아흔 살을 넘기고, 이제는 더 늙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세월에 와 있었다.
또 다른 이유다. 엄니 말년에는 뇌신경 이상으로 팔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고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이런 저런 이유로 내가 엄니의 돈을 관리했다. 내가 하루 쯤 휴가를 내어서 시골 읍내에 나가 '웅천농협'에 맡거나 만기일에 재입금했다. 하도 늙어서, 치매증세가 진행될 수록 엄니는 통장 액수는 모르고, 그냥 통장 갯수만 이따금씩 나한테 물으셨다. 더 나중에는 엄니의 통장도 나한테 다 넘겼다.
엄니가 마흔두 살의 중년일 때 쌍둥이형제는 어린 나이로 타지(대전)로 나가서 컸다.
나는 서울에서 직장 다녔고, 결혼했고, 네 명의 자식(2녀2남)을 두었을 때에는 엄니는 많이도 늙었다. 내가 격주마다 고향으로 내려가서 이것저것 생활용품을 사다가 쟁여 놨기에 엄니가 지팡이를 집고 걸어서 새장터 웅천장에 나갈 일은 없었다.
나도 늙었다. 2008년 6월 30일부로 직장을 벗어나 고향 시골로 내려가서 아흔 살인 엄니하고 둘이서 함께 살기 시작했다.
엄니한테는 돈 쓸 데가 아예 없어졌다. 그래서일까? 엄니 말년에는 통장에 대해서는 말이 없었다.
이따금 "맛 있는 거 사 먹으라"고 속 내복 속에 헝겁으로 꿰민 주머니에서 만원짜리 두어 장을 꺼내서 나한테 주셨다. 그거야 내가 이따금 와서 엄니 주머니 속에 넣어 둔 것이다. 내가 서울 올라간 뒤에 '혹시 돈 쓸 일이 있으면 쓰시라'고 우겨서 드린 돈이다.
엄니 돌아가신 뒤의 꽃무늬 지갑. 작은 지갑 속에는 만원권 두 장, 천원짜리 지폐 열아홉 장이 꽃지갑 속에 들어 있었다. 생전에 엄니 손가락에 끼던 금가락지 세 개도 들어 있었다. 금가락지는 오래 보관해도 괜찮은데 비하여 돈은 어찌할까? 몇 겹으로 접고 접어서, 돌돌 말린 종이돈은 어떻게 할까를 한참이나 생각했다.
엄니의 손때가 묻은 돈이기에 몇달 간이나 손대지 않았다. 그런데도 빈 집인 시골집에 내려가서 서랍 빼닫이를 열 때마다 지갑이 어찌 되었나를 확인했다. 빈 집에 계속 놔두어야 하는 지가 걱정되었고, 엄니라면 이 문제를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했다. 결론은 다 쓰는 거였다. 만원 권 두 장을 먼저 썼다. 천원권 열아홉 장은? 그것도 반 년 쯤 더 놨다가는 내가 눈 딱 감고 다 썼다. 그게 엄니가 원하는 것이라고 지금도 내가 나를 달래고 있다.
* 어머니 친정집 : 충남 보령시 남포면 월전리(용머리해수욕장 바로 뒷편 집)
* 어머니(1920. 2. 19. 음12. 30. 섣달 그믐 생) 집나이 다섯 살 때 이사 와서 평생 산 집(충남 보령시 웅천읍 구룡리 화망(花望 고뿌래), 지금은 내 시골집이다.
* 어머니 돌아가신 날 : 2015. 2. 25. 밤 11시 15분
* 화망(花望)은 '꽃을 바라본다'의 뜻을 지녀서 '곶바래, 고뿌래' 등으로 발음
* 쌍둥이 형제는 초등학교 4학년 말 1960년 이른 봄에 어머니와 헤어져서 대전으로 전학가서 대흥국민학교 졸업
- 작은쌍둥이는 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서울에서 고향집에 왔고, 안마당 끝에 있는 바깥 변소에 가다가 뱀 물려서 다음날 대천병원에서 죽었음(1969. 8. 10.). 형인 나는 2026년 2월 지금껏 살고 있음
2017. 1. 12. 목요일. 산다
'언덕에 올라' 방 32811 '돈주머니와 나' 글에 '아련* 나래'님이 댓글 달아주셨지요.
제가 고맙다고 재댓글 달면서, 글감 하나 얻었기에 위처럼 초안 썼습니다.
초안이니 더 다듬어야 하는데도 잠시 쉬려고 그냥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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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2. 23. 보충설명
참고 :
국민의힘당 대표 장동혁의 고향은 충남 보령시 웅천읍 대창리 방죽굴(한내) 태생.
내 고향 화망마을에서 5 ~ 6km 떨어진 동쪽 방죽굴(구웅천역, 신웅천역 뒷편)이며, 내 큰대고모네 마을이다.
오래 전 최씨네 일가가 이따금씩 들렀던 산골 아래 마을이며, 집 뒤 산에 내 증조부 산소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