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빛1/마종기
물빛1 / 마종기
내가 죽어서 물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가끔 쓸쓸해 집니다. 산골짝 도랑물에 섞여 흘러내릴 때, 그 작은 물소리를 들으면서 누가 내 목소리를 알아들을까요. 냇물에 섞인 나는 물이 되었다고 해도 처음에는 깨끗하지 않겠지요. 흐르면서 또 흐르면서, 생전에 지은 죄를 조금씩 씻어내고, 생전에 맺혀 있던 여한도 씻어내고, 외로웠던 저녁, 슬펐던 앙금들을 한 개씩 씻어내다 보면, 결국에는 욕심 다 벗은 깨끗한 물이 될까요. 정말 깨끗한 물이 될 수 있다면 그때는 내가 당신을 부르겠습니다. 당신은 그 물 속에 당신을 비춰 보여주세요. 내 목소리를 귀담아 들어주세요. 나는 허황스러운 몸짓을 털어버리고 웃으면서, 당신과 오래 같이 살고 싶었다고 고백하겠습니다. 당신은 그제서야 처음으로 내 온 몸과 마음을 함께 가지게 될 것입니다. 누가 누구를 송두리째 가진다는 뜻을 알 것 같습니까. 부디 당신은 그 물을 떠서 손도 씻고 목도 축이세요. 당신의 피곤했던 한 세월의 목마름도 조금은 가시겠지요. 그러면 나는 당신의 몸 안 에서 당신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죽어서 물이 된 것이 전연 쓸쓸한 일이 아닌 것을 비로소 알게 될 것입니다.
마종기 시인
1939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아동문학가인 마해송이며, 어머니는 한국여성 최초의 서양무용가인 박외선이다.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서울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1966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1959년〈해부학교실(解剖學敎室)〉등으로《현대문학》에 추천을 받아 등단
1960년 첫시집 《조용한 개선》을 발간하였다.
1976년 한국문학작가상을 수상 1989년 미주문학상, 1997년 제7회 편운문학상, 제9회 이산문학상 등을 수상
시집 《두 번째 겨울》(1965), 《변경의 꽃》(1976),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1980), 《모여서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1989), 《그 나라 하늘빛》(1991), 《이슬의 눈》(1997) 등이 있다.
[출처] 물빛1/마종기|작성자 마경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