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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8일 연중 제9주간 목요일
제1독서 : 토빗 6,10-11; 7,1.9-17; 8,4-9ㄱ
복 음 : 마르 12,28ㄱㄷ-34
그때에 28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 하고 물었다.
2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30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1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32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 신앙인이 가장 많이 바치는 기도는 ‘주님의 기도’일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복음 전체를 요약한 것이며,
우리가 반드시 바쳐야 할 기도이기에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셨습니다.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신 다음에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요한 16,24)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순서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많은 청을 주님께 올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순서를 따르고 있습니까?
모든 기도의 우선순위는 주님의 기도 다음 나의 청이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성인은 모든 청원의 시작은 주님의 기도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성 아오스딩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 실린 모든 청원을 살펴보십시오.
나는 여러분이 그 안에서 주님의 기도에 포함되어 있지 않거나
거기서 기인하지 않은 어떤 것을 발견하리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베다 성인도
“우리는 이 기도로 청하고, 바른 삶을 찾고
한결같은 신앙으로 두드려야 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 신앙인의 기도는 주님의 기도로 시작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 청원만을 외치는 공허한 기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기도를 가장 완전한 기도라고 외치셨던 많은 성인·성녀의 말씀을 기억하며,
자기 청원에 앞서 주님의 기도로 하느님 뜻에 일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자기 뜻보다 하느님 뜻이 먼저였습니다.
그런데 하느님 뜻보다 자기 뜻만 이루어지길 계속해서 말합니다.
자기 뜻이 먼저다 보니 하느님 뜻은 아예 보이지 않으면서, 비정상적으로 살게 됩니다.
무엇이 중요한지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유다인들은 인간 생활을 외부적으로 종교화하여 지켜야 할 계명 248개 조항,
금기의 조항 361개 조항, 모두 합해서 613개 조항으로 세분화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잡다하고 많은 계명을 다 지키는 것도 번거롭거니와
613개 조항의 법규를 지키느라고 쓸데없는 시간만 보내게 됩니다.
그러니 생활하는 데 중요하고 본질적인 계명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종교 생활의 고민을 예수님께 율법 학자 한 사람이 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확실하게 말씀하십니다.
즉,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큰 계명에만 집중하면 되는데, 이는 오히려 뒤로 하고
자질구레한 외부 생활 규율에만 치우치고 있음을 지적하신 것이지요.
가장 중요한 것은 소홀히 하면서, 쓸데없는 것만이 진리인 듯이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인 사랑에 과연 집중하고 있었을까요?
사랑 없는 종교 생활은 하느님을 깨닫지 못하고 또 만나지도 못하게 합니다.
쓸데없는 시간만 보내게 합니다. 따라서 철저히 하느님 뜻에 집중해야 합니다.
내 뜻보다 하느님 뜻이 먼저입니다.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합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식물인간이 되어 혼수상태로 있던 사람이 열흘 만에, 어떤 사람은 2년 만에,
어떤 사람은 무려 28년 만에 의식을 회복한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주변을 보면 하나같이 누군가가
지극한 정성으로 그를 돌봤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의식은 없지만 살아있는 사람으로 인정하고 사랑을 쏟았던 사람들은
결국 그 사랑의 헌신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무한한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12,30.31). 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은 외적으로 강제되는 의무가 아니라 우리를 위한
하느님 사랑에 대한 감사의 응답으로 하느님을 자발적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느님과 인간관계의 기반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마음과 목숨, 힘을 다한 존재 전체로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구체적인 이웃 사랑을 통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을 똑바로 인식하고 바르게 사랑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너그럽고 시간을 내고 관심을 쏟고 변명하고
행복한 생활을 바라는 것같이 이웃에게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야말로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1요한3,18) 해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결코 한가로울 수 없는 것,
한가로운 사랑은 벌써 잘못되었다는 표시입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
그러니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게으름 피우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유다교에는 계명이 많았습니다.
무려 613개 조항의 계명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248개 조항은 명령, 365조항은 금령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계명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한지에 대한 논의가 자연스럽게 생겨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잡다한 계명들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하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불가분의 관계임을 선언하셨습니다.
주님의 기도의 핵심정신을 보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도 그렇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리고 이웃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신 헌신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사랑을 낳습니다.
머리로 아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 아직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그 앎이 온몸에 배어서 행동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하느님 나라에 온전히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온몸으로 사랑하십시오.
그리하면 더 큰 사랑의 능력을 만나게 되고 마침내 사랑이신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사랑이 우리를 재촉하는 오늘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톨스토이는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지금, 이 시간이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만나는 사람이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만나는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묘비명에 이렇게 적었다고 합니다.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어.”
인생의 의미를 알고 무덤에 묻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것을 풍자하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듣고 싶은 말은 “나도 사랑해!”가 아닐까요?
1년이 넘는 전쟁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 우크라이나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말은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왔습니다.”가 아닐까요?
오랜 가뭄으로 바싹 타들어 가는 농작물을 바라보는 농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시원하게 내리는 비”가 아닐까요?
어렵게 국경을 넘어 이민자의 삶을 살아가는 분들에게
가장 얻고 싶은 것은 신분을 보장하는 “영주권”이 아닐까요?
여러분이 가장 바라는 것은 무엇인지요?
제가 가장 바라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합니다.
신문사가 재정적으로 걱정 없을 정도로 구독자가 늘어나는 것입니다.
성서에도 사람들의 간절한 갈망이 있습니다.
눈이 멀었던 소경은 다윗의 자손인 예수님께 자비를 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이 먼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셨습니다.
하혈하는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져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여인은 하혈이 멈추었습니다.
시로페니키아 여인은 예수님께 병중에 있는 딸을 치유해 주기를 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인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여인의 딸은 치유되었습니다. 사람들만 갈망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갈망이 있으셨습니다.
이집트에서 고통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모세를 보내셨습니다.
마음이 모질고, 하느님을 시험하려 했던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으로 용서하셨습니다.
예언자들을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외아들까지 보내 주셨습니다.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는 무엇이 가장 중요한 계명인지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사랑하는 시간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곁에 있는 사람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철학은 '삶이란 무엇인가.'를 찾고,
종교는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찾지만,
사랑은 그 두 가지에 대한 해답이다.
가장 미련한 것은 사랑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고
가장 슬픈 것은 사랑을 해보지 못하는 것이며
가장 불행한 것은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랑에 있어 가장 먼저 무너지는 것은 자존심이다.
깃대에 깃발이 없으면 무의미하다.
깃발에 바람이 없으면 더 무의미하다. 방황은 사랑의 깃발에 부는 바람이다.
혼배 주례를 하면서 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갈릴래아 호수가 생명이 넘치는 이유는 끊임없이 아래로 물을 내려보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것을 나누면 더 많은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이야기해 줍니다.
사해가 생명이 살 수 없는 바다가 되는 이유는 끊임없이 받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해 줍니다.
부부는 받기만 하려고 해서는 화목한 가정을 이룰 수 없습니다.
부부는 서로에게 내어 줄 때, 사랑이 넘치는 가정을 이룰 수 있을 거라 이야기해줍니다.
또 하나 물 이야기를 해 줍니다.
두물머리입니다. 북한강과 남한강은 서로 다른 곳에서 시작을 합니다.
그러나 두 강은 두물머리에서 만나고 하나의 강을 이룹니다.
그리고 넓은 바다로 나가게 됩니다.
혼인은 배우자가 서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배우자는 이제 함께 더 넓은 곳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서로만 바라보면 기대하게 되고, 기대가 충족되지 않으면 실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같은 곳을 바라보면 서로 도울 수 있고, 힘이 되어 줄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십시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는데, 그때 보이는 것은 예전에 보던 것과는 다릅니다.
첫 번째 계명에 관한 담화
박상대 마르코 신부
잘 알다시피 마르코복음 11장부터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활동기에 속한다.
갈릴래아 지방에서 공생활의 대부분(1-9장)을 보내신 예수께서는
그 마지막 시기에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을 받으셨고,
이어서 두 번씩이나 자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셨다.
그런 다음에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길목에서
세 번째로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셨고(10장),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성전정화 사건(11,15-19)으로
예루살렘 활동기를 시작하셨다.
예루살렘 활동기는 사실상 예수님 생애의
마지막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위한 준비 단계로서
외적인 업적보다는 敵手들과의 논쟁과 대담을 통한 자기 계시적 가르침,
그리고 종말과 재난의 예언 등으로 일관된다.
논쟁과 대담은 주로 적수들의 질문과 예수의 답변으로 이루어지는데
예수의 권한 논쟁, 납세에 관한 대답, 부활 논쟁 등은 이미 치러졌고,
오늘 복음은 첫째가는 계명에 관한 대담을 들려 준다.
어제 복음에서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부활에 관한 논쟁을 벌였고,
오늘 복음에서는 율법학자 한 사람이 와서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오늘은 율법학자에 대하여 잠시 살펴보자.
서기관 또는 랍비(스승)라고 불리던 율법학자들은
바빌론 유배(B,C 587년) 이전에는 예언자와 사제들과 더불어
이스라엘의 삼대 지배계급에 속했다.
그러나 유배 이후(B,C 538년)에 들어 사제들은 권위를 잃었고,
기원전 500년경에 활동하던 예언자 하깨와 즈가리야와 말라기를 끝으로
더 이상 예언자들도 없었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메시아 사상이 강하게 싹트기 시작하면서,
백성들은 모든 희망을 토라(율법)에 두었다. 이때부터 율법학자들이 바빠지기 시작한다.
더욱이 희랍의 통치(B.C 333년)와 로마제국의 통치(B.C 63년)가 이어지면서
침략자들에 의해 짓밟힌 예루살렘 성전은 신앙의 구심점을 잃게 되고,
흩어진 유다인들이 디아스포라를 형성하여 그 안에 회당(Synagogue)을 세워
안식일 예배를 드림으로써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율법학자들의 활동이 크게 두드러지게 된다.
회당에서의 예배는 제사 없이 율법서와 예언서의 봉독과 해설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율사들이 사제들보다 유리한 지위를 확보하게 된다.
물론 신약시애에 들어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각종 제사는 거행되었다.
율법학자는 상속되지 않았기 때문에 수년간의 정규적인 연구 과정을 거친 사람이면
40세의 나이를 채운 자에 한하여 서품을 통하여 누구나 될 수 있었다.
따라서 율법학자들 중에는 바리사이들, 사두가이들 뿐 아니라
일반직업을 가진 평신도 출신도 있었고, 최고회의인 산헤드린에 속한 자도 있었다.
특히 바리사이파의 지도자는 모두가 율사들이었다.
율법학자들의 힘은 오직 율법에 대한 지식이었다.
백성들은 그들을 존경했고, 술 달린 긴 예복을 입고 다녔으며,
향연에서나 회당에서 항상 윗자리에 앉았다.
이러한 율법학자들 가운데 예수께 와서 248개 조항의 行令과
365개 조항의 禁令을 합한 613개 조항의 계명 가운데
첫째가는 계명에 대하여 질문을 던진 것이다.
그가 예수와 사두가이파 사람들 사이의 토론을 듣고 있다가,
예수께서 호쾌한 답변을 주시는 것을 보고 예수께 이 질문을 하였다.(28절)는
오늘 복음의 서두와
“그런 일이 있은 뒤에는 감히 예수께 질문하는 사람이 없었다.”(34절)는 말미는
순전히 마르코 복음사가의 독자적인 편집으로 추정된다.
아무튼 오늘도 예수님의 답변은 명쾌하다.
613개 조항을 축약하면 십계명이 될 것이고, 십계명을 축약하면
첫째가는 계명이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느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신명 6,4-5)는 계명이고,
둘째가는 계명이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레위 19,18)는 계명임을
이 율법학자가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이는 바로 예수께서 모든 율법서와 예언서의 골자로 선포하신
사랑의 이중 계명인 것이다.(마태 22,34-40; 루카 10,25-28 참조)
오늘 복음의 핵심은 사랑의 이중계명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유일신 사상의 재확인과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는 율법학자의 답변도
오늘 복음을 통하여 나타난 큰 성과이다.
그렇다. 야훼 하느님께서 반기시는 것은 재물이 아니라 사랑이며,
재물을 바치기 전에 하느님이 마음을 알고 먼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호세 6,6)
사랑의 이중계명을 다시 환원시키면 십계명이 되고,
십계명을 다시 환원시키면 수백 개의 계명이 될 수도 있다.
사랑은 말이나 지식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의 어떠한 구체적인 행동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이중 계명의 핵심 정신을 비켜 갈 수는 없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사랑의 이중 계명을 잘 알고 지키는 자에게
이미 하늘나라를 약속하셨다.
첫째가는 계명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 복음 말씀은 모든 계명 중에서 어느 것이 첫째가는 계명인가에 대한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그 말을 듣고 있던 어느 율법학자와의 대화이다.
율법학자의 질문에 두 가지 큰 계명을 들어 그것을 하나로 만들어 대답하신다.
먼저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신명 6,4)라는
유대교 교리의 진수와 신앙의 기초를 말씀하시면서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하신다.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라는 말씀을 하시며,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유일한 증명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실행함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말로서가 아니라 가난한 이웃을 겸손하게 섬김으로써
하느님의 위엄을 가장 잘 찬미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모든 율법서와 예언서가
하느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계명에 달려 있다고 말씀하신다.
사랑의 계명은 너무 많고 분명해서 어떻게든 선을 행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랑을 가지고 행하지 않으면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다(1코린 13).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 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30절)
“마음을 다하여”라는 표현은 조그마한 갈라짐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찮은 것에 사랑을 쏟아붓는다면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그 사랑이 그만큼 부족할 것이기 때문이다.
동정이라는 말이 바로 하느님께 대한 갈림 없는 사랑의 삶이라고 한다.
바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자세를 말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31절)
이웃 사랑은 최고의 덕이며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계명의 근본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이웃을 모른 체 하지 않는다. 오히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다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라고 말씀하신 바를 기억하여 자비를 보여준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사랑은 함께가 아니면 완전하게 표현될 수 없다.
이웃을 떠나서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고, 하느님을 떠나서는 이웃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온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유일한 확증은
바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사랑을 베풀고 그들을 끊임없이 돌보아주는 일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대답을 들은 율법학자는 그 대답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덧붙여 말한다.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 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33절)
이러한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34절) 고 축복해주셨다.
나는 어떻게 이 계명을 살아가고 있는가?
“모든 계명 가운데서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입니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어제 복음의 사두가이와의 논쟁에서, 예수님께서는 부활과 부활체의 특성,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산 이들의 하느님, 곧 생명의 하느님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그 말씀을 듣고 있던 율법교사는 그 생명을 길인 계명에 대해서 묻게 됩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서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입니까?”(마르 12,28)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네 자신 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29-31)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행동의 원리로서의 계명을 말씀하기 전에,
그 계명이 어디로부터 오는지, 왜 중히 여겨야 하는지,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먼저 밝히십니다.
곧 행위규범으로 사랑을 말씀하시기에 앞서,
왜 사랑을 해야 하는지, 그 이유와 명분과 정당성을 밝혀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그분이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단지 하느님께서 ‘한 분이신 하느님’이시라는 사실과
‘우리 주님’이시라는 의미만을 밝히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동시에 우리의 존재와 의미도 밝혀 줍니다.
곧 우리가 ‘그분의 것, 그분의 소유’로 그분의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밝혀 줍니다.
나아가서, 그분이 우리를 당신의 차지, 소유로 삼기 위해
‘먼저’ 우리를 당신의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슬기롭게 대답하는 율법학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마르 12,34)
그러니 그는 아직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그가 계명을 들어서 알고는 있지만,
이를 몸소 실행할 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아직 선포되지 않은 “새 계명”에 따라 실행하지도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뒤에 선포하게 될 “새 계명”은
구약의 이중 계명과는 사뭇 다른 면모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3장과 15장에서 선포된 “새 계명”은 이중 계명이 한 계명으로 통합되며,
이웃 사랑의 시금석이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15,12)로 바뀌게 되기 때문입니다.
곧 당신이 먼저 베푼 사랑을 서로 베푸는 하느님 사랑의 실현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차지하고라도, 오늘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삶을 통해 사랑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는가?"
"혹 ‘이익을 얻는 법’, ‘손해 보지 않는 법’을 배워가고 있지는 않은가?"
더구나 ‘미워하는 법’을 배워가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또 “오롯한 마음으로 사랑을 맨 먼저 앞세우고 있는지?” 물어야 할 일입니다.
만약 우리가 진정 ‘사랑’과 ‘하느님’을 앞세우고 있다면,
하느님과 사랑에 대한 생각으로 우리의 머리가 가득 차 있어
늘 하느님과 사랑에 대한 말을 할 것이고, 사랑하기 위해 고민할 것입니다.
“오늘 나는 대체 무엇에 제일 관심이 많고, 무슨 생각을 제일 많이 하고,
무슨 말을 제일 많이 하고 살고 있는가?”
“하느님인가? 나 자신인가? 세상인가?”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1)
주님!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게 하소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가 되게 하소서.
사랑이 남에게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한 몸인 내 자신에 대한 사랑이 되게 하소서.
내 자신의 몸인 이웃을 사랑하게 하소서!
주님!
당신 사랑으로 새로 나게 하소서!
내 자신을 통째로 바꾸어 새로워지게 하소서!
이웃을 타인이 아니라 내 자신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그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게 하소서.
이웃 안에, 주님이신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아멘.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6,5)
복음에서 모든 계명 가운데 첫째가는 계명의 대답으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영어 성경을 읽다가 이 구절이 영문으로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You shall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with all your soul, with all your mind, and with all your strength.
저는 마음, 목숨, 정신 그리고 힘이라고 쓰여진 한국 번역보다
Heart 와 Soul 과 Mind 그리고 Strength으로 쓰여진
영문 번역이 조금 더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heart는 마음이면서 심장, 가슴을 의미합니다.
심장은 온몸에 피를 흘려보냄으로써 사람을 살게 합니다.
soul은 영혼, 정신, 마음을 의미합니다.
mind 역시 정신, 마음을 의미하지만,
여기서의 정신은 이성적인 정신입니다.
마지막으로 strength가 끝에 오는 것을 읽으면서
저는 이 구절을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되 나의 온 생명을 다해서 그분을 사랑하고,
나의 정신을 다해서 하느님을 영적으로 갈망하며,
사고하고 지성을 사용해 하느님을 찾는 사랑을 하여라.
이러한 사랑은
나 자신에게 머무르지 않고
결국 온 힘을 다해서 하느님께로 나아가고,
타인을 사랑할 수밖에 없음을 깨달아라.
아무리 내적으로 큰 사랑을 한단들
행동이 없으면 그것이 올바른 사랑인지 의문을 갖게 합니다.
나의 사랑이 온전할 때
하느님 사랑처럼 나를 벗어나 흘러넘치게 되고
그때는 역동을 지니게 됩니다.
이렇게 제게 알려주시는 이 말씀을
스쳐버리기보다 마음에 새겨 성경 말씀처럼
온 존재를 다 해서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이러한 의지가, 기도가 되고,
기도가 제 삶이 되길 희망합니다.
[출처] 마르 12,28ㄱㄷ-34 연중 제9주간 목요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