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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고의 노래 원문보기 글쓴이: 사람이 하늘이다
갈석산은 고구려의 역사를 알고 있다(제7회)
<졸본성의 위치>
고구려 초기 수도인 졸본성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은 고구려 역사의 첫 단추를 끼우는 중차대한 작업이다. 각종 문헌에 나타난 졸본성의 위치를 살펴보고, 통설의 문제점을 살펴보기로 한다.
1.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로 본 졸본성의 위치
우리가 널리 사용하는 만원권 화폐의 뒷면 배경에는 고구려 초기부터 석각본, 목각본, 필사본, 인본印本 등으로 제작·보급된 전천천문도全天天文圖인 『천상열차분야지도』가 그려져 있다. 이 전천천문도에는 고구려의 초기 수도인 졸본성의 위치를 과학적으로 추적할 수 있는 강력한 단서가 들어있다.
『천상열차분야지도』의 태조 석각본은 현재 국보 22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 외에 세종 석각본은 전해지지 않고, 숙종 석각본은 보물 837호로 지정되었다. 이 천문도에는 육안으로 식별이 가능한 1,467개의 별들이 293개의 별자리를 이루어 밝기에 따라 다른 크기로 새겨져 있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하늘의 뜻으로 세워진 새 왕조의 왕이라는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새로운 천문도를 갖기를 염원하였다. 고대에서 독자적인 천문도를 가진다는 것은 곧 천자국을 의미한다.
『천상열차분야지도』의 각석 하단부에는 이 전천천문도를 만든 배경이 새겨져 있다. 그 내용에 의하면, “예전에 평양에는 천문도를 그린 각석이 있었는데, 전란으로 강에 빠져버렸으며, 그 탁본마저 매우 희귀해졌다고 한다. 그런데 태조 이성계가 즉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어떤 사람이 천문도의 인본印本을 바쳤다. 태조가 그것을 매우 귀중히 여겨 돌에 다시 새기도록 하였고, 서운관書雲觀에서 그 연대가 오래되어 별자리들의 위치가 조금 바뀌어 생긴 오차를 바로 잡아 새 천문도를 작성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새로 『중성기中星記』를 편찬하여 그에 근거하여 『천상열차분야지도』를 작성하였다”고 한다.
세계적인 천문학자인 박창범 교수는 『천상열차분야지도』를 연구한 결과 중앙부인 북극부분은 조선시대 초기의 하늘을 나타낸 것이고, 그 바깥에 있는 별들은 기원전‧후에 해당하는 고구려시대 초기로 밝혀냈다. 관측자의 위치도 중앙부는 한양의 위도인 38도이고, 바깥부분은 39도~40도로 밝혀냈다.(『하늘에 새긴 우리의 역사』참조)
박창범 교수의 연구 결과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고대에서 천문도가 지니는 상징성으로 보아 천문을 관측한 지점은 고구려 초기의 수도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별들을 관측한 시기가 기원전‧후 무렵이고 관측자의 위치가 위도 39도~40도이므로, 고구려의 졸본성(BC 37~AD 3) 또는 국내성(AD 3~209)은 위도 39도~40도에서 찾아야 한다. 필자는 『천상열차분야지도』가 제작 시기나 상징성으로 보아 고구려의 첫 수도인 졸본성에서 제작된 것에 무게를 둔다. 통설에서 주장하는 졸본성이나 국내성은 오늘날의 중국 요령성 환인과 집안지역으로 위도가 41도를 넘어선다. 『천상열차분야지도』의 관측지점과 많이 어긋난다.
2. 『삼국사기』에 나타난 졸본성의 위치
(1) 바닷가에 위치한다.
① 주몽이 비류수가에 도읍한 후 상류에서 채소가 떠내려 오는 것을 보고 비류국을 찾아갔을 때, 그 나라 임금 송양이 “과인은 바닷가 한 구석에 외따로 살아와서 군자를 만난 적이 없는데, 오늘 우연히 만나게 되었으니 또한 다행스런 일이 아니겠는가!(寡人僻在海隅 未嘗得見君子 今日邂逅相遇 不亦幸乎)” 하였다. 비류수 상류가 바닷가이면 하류의 졸본도 바닷가이다.
② 유리왕 28년(AD 9)에 부여 사신이 왔을 때 왕이 부여왕에게 회답하기를 “과인은 바닷가에 치우쳐 있어서 예의를 알지 못합니다. 지금 대왕의 가르침을 받고 보니 감히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寡人僻在海隅 未聞禮義 今承大王之敎 敢不惟命之從 )” 하였다. 이때는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긴 후이다. 국내성도 바닷가였다.
(2) 졸본성은 요동군에 있다
“(장수왕 23년) 왕을 도독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영호동이중랑장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으로 삼았다(拜王爲都督遼海諸軍事 征東將軍 領護東夷中郞將 遼東郡開國公 高句麗王)”
장수왕, 문자명왕, 안원왕, 양원왕, 평원왕 등이 중국으로부터 받은 관작명에 요동군개국공이 나온다. 고구려가 요동군에서 나라를 열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졸본성은 요동군에 있다.
(3) 주몽사당이 요동성에 있다.
“(요동)성 안에는 주몽의 사당이 있고 사당에는 쇠사슬로 만든 갑옷과 날카로운 창이 있었는데, 망령되게 말하기를 전연 시대에 하늘이 내려준 것이라고 하였다(城有朱蒙祠 祠有鎖甲矛 妄言前燕世天所降)”
당나라 태종이 서기 645년 고구려의 요동성을 공격할 때 나오는 내용이다. 고구려 역대 왕들은 주몽의 사당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졸본으로 갔다. 요동성 안에 주몽의 사당이 있고 사당에 하늘이 내려준 갑옷과 창이 모셔진 것으로 볼 때, 요동성은 졸본에 위치하였다.
위 『삼국사기』의 내용들을 종합하면, 고구려의 졸본성과 국내성은 모두 바닷가에 위치한다. 그리고 고구려가 개국한 졸본은 요동군에 있으며, 졸본성이 곧 요동성이다.
3. 광개토태왕 비문에 졸본성은 성산城山 위에 있다
광개토태왕 비문에 의하면 “비류곡 홀본 서쪽 성산城山 위에 도읍을 세웠다(沸流谷忽本西城山上而建都)” 하였다. 중국 고지도인 『당토명승도회』‘순천부총도’에 성산城山의 위치가 잘 나타나 있다. 오늘날의 중국 천진시 계현薊縣 일대로 반산盤山 부근이다.
4. 연남산묘지명으로 보는 졸본성의 위치는 바닷가이다
“군의 휘는 남산으로 요동 조선인이다. 옛날에 동명이 기를 느끼고 사천㴲川을 넘어 나라를 열었고, 주몽은 해를 품고 패수에 임하여 수도를 열었다(君諱男產遼東朝鮮人也昔者東明感氣踰㴲川而開國朱蒙孕日臨浿水) ......중략...... 넓고도 신령스러운 바다여, 수많은 강물이 흘러드는 곳. 동명의 후예가 진실로 조선을 세웠도다. 호胡와 맥貊을 위엄으로 다스리고, 서주와 통하고 연나라를 막았도다(於廓靈海百川注焉東明之裔 寔爲朝鮮威胡制貊通徐拒燕) ......하략”
연개소문의 셋째 아들이었던 연남산의 묘지명에 의하면 주몽이 도읍한 곳은 ‘수많은 강물이 흘러드는 바닷가’ 이다. 위에서 살펴본 『삼국사기』내용과 일치한다.
5. 결론
위의 내용들을 종합하면 고구려 초기 졸본성은 위도 39도와 40도 사이에 위치하며, 바닷가에 위치하며, 고구려 시대의 요동군 요동성에 위치하며, 졸본의 서쪽 성산城山 위에 위치하였다. 필자는 『갈석산은 고구려의 역사를 알고 있다(제5회)』에서 고구려의 요동성이 오늘날의 중국 하북성 천진시 계현薊縣 부근임을 입증하였다. 그러므로 위의 사료들에 나오는 졸본성의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충족하는 곳은 오늘날의 중국 하북성 천진시 계현薊縣 일대이다. 계현 일대는 위도 40도에 해당하며, 바닷가에 위치하고, 고구려 요동성이 위치하였으며, 성산城山이 존재하였다.
오늘날 통설에서 고구려 초기 졸본성으로 비정하고 있는 요령성 환인지역은 위 사료들의 내용을 하나도 충족하지 못한다. 도대체 통설에서는 무엇을 근거로 요령성 환인지역을 졸본성으로 비정하고 있는 것일까? 졸본의 위치가 통설처럼 굳어진 배경은 고 이병도 박사가 『삼국사기』를 주해하면서 ‘졸본천’을 다음과 같이 해설한 까닭이다.
“호태왕(광개토왕)비에는 비류곡홀본서성산沸流谷忽本西城山이라 하고, 졸본의 주에는 위서를 이끌어 [지흘승골성]이라 했으니, 졸본은 바로 졸홀·승흘골의 이칭으로 볼 것이며, 고구려 최초의 수도인 만큼 저명한 곳이니, 지금 환인에 비정한다. 그러면 졸본천은 환인을 흐르는 혼강을 별칭한 것이라고 본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 1 주(15)’
통설에서 졸본성을 환인으로 비정한 사유가 고 이병도 박사의 “고구려 최초의 수도인 만큼 저명한 곳이니, 지금의 환인에 비정한다.”는 주장에 근거하고 있다. 납득할 만한 어떠한 고고학적, 문헌학적 사료도 없다. 참으로 허무하기 짝이 없는 주장이 해방 이후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통설의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고구려 초기 졸본성의 위치를 바로 잡아야 할 때이다. 졸본성의 위치는 오늘날의 중국 하북성 천진시 계현薊縣 일대이다. 졸본성의 위치를 알고 나면 신비에 쌓였던 고구려의 초기 역사가 명명백백히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국내성으로의 천도, 그리고 고구려 초기 대무신왕과 후한 광무제 사이에 벌어졌던 낙랑대전, 모본왕의 북평․어양․상곡․태원 기습사건, 태조대왕의 요서10성 축성 등 의문의 사건들이 모두 시원스럽게 풀어진다. 앞으로 고구려 기행을 계속하면서 위의 사건들, 특히 낙랑대전은 아시아 대륙의 상고사 흐름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일대 사건이었음을 보게 될 것이다.(다음호 계속) |
첫댓글 "갈석산은 고구려의 역사를 알고 있다(제6회)" 입니다. 스크랩한 글이라서 본문의 수정이 안되는군요.
3. 광개토태왕 비문에 졸본성은 성산城山 위에 있다
광개토태왕 비문에 의하면 “비류곡 홀본 서쪽 성산城山 위에 도읍을 세웠다(沸流谷忽本西城山上而建都)”
===> 여기서 성산상(城山上)은 성산城山 위에 있다가 아니라 산위에 성을 쌓았다라는 뜻으로 보입니다.
안녕하세요. 자이수님 말씀대로 대부분 "산위에 성을 쌓았다"로 해석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성산城山이라는 지명이 있음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성산城山이라는 지명이 존재한다면 "성산城山 위에 도읍을 세웠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무난해 보입니다. 한문 용법으로 보아 두 가지 해석이 모두 가능합니다. 그리고 <당토명승도회>는 지명 고증이 대단히 정밀한 지도입니다. 성산城山이라는 지명이 단 한군데 천진시 계현 부근에 있다는 것은 연구할 가치가 있지요.
"沸流谷忽本西 城山上而建都" 에서 보통 해석이
"비류곡홀본서쪽에서 산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 라고 해석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城山을 지명으로 보신다면 성산위에 도읍을 세우다라고 해야 되며 이때 한문은 城山上 建都으로 말이을 어조사 而 없어야 그리 해석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어조사 而는 '~에', '~에서'의 뜻이 있습니다. '城山上 建都' 보다 '城山上而 建都'가 더 매끄러운 문장입니다.
그렇군요 제가 어조사 而가 '~에', '~에서'의 뜻이 있는 것은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