꺾이지 않는 독립운동가 한용운 1.
역사
앞에서
만해 한용운 스님은 조선 왕조 말 국운이 기울어가던 1879년 8월 29일 충청도 홍주땅(지금은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491번지)에서 한응준(韓應俊)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온양 방씨이며, 어렸을 때의 이름은 유천(裕天)이었다.
그 무렵 개화파 주도의 갑신정변(1884)이 삼일천하의 비극적 막을 내린 후일담이 충청도 땅에까지 퍼지더니, 박영효의 《건백서 건백서》가 올려지고, 자유민권사상이 대두되면서 국운이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 때 아버지 한응준은 어린 유천을 불러놓고 세상 형편과 국내외 돌아가는 정세를 소상히 설명하여 주었다. 그는 후에 선친의 교훈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나는 선친에게서 조석으로 좋은 말씀을 들었다. 선친은 서책을 읽다가 가끔 어린 나를 불러놓고 역사상 빛나는 의인결사의 언행을 가르쳐주시며 세상 형편, 국내외 정세를 알아듣도록 타일러 주셨다. 이런 말씀을 한 번 두 번 듣는 사이에 내 가슴에는 뜨거운 불길이 타오르고, ' 나도 그 의인 결사와 같은 휼륭한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떠오르곤 했다.
이 글은 〈시베리아 거쳐 서울로〉란 글의 한 구절이다. 여기에서 훗날의 만해 스님을 이해하는 데 선친의 가정교육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가를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선친으로부터의 감화와 더불어 당시 국내외의 불안한 정세도 만해로 하여금 시대정신과 역사의식에 눈떠가게 하였다.
급기야는 1894년에 갑오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다. 그 기세는 삽시간에 정읍, 태인, 김제, 전주를 함락했다. 전라도를 거의 손에 넣은 동학군은 충청도 땅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당황한 조정에서는 전 충훈부도사 한응준의 재등용을 요청하는 교지를 내렸고, 청나라 군이 조정의 요청에 의하여 출병하자, 일본군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이리하여 청일전쟁은 이땅을 무대로 참화의 비극을 토해내고 말았다.
어릴 때부터 꾸준히 한학에 정진해 온 유천은 16세 되던 해에 서당의 훈장을 하고, 또 전정숙이라는 여인과 결혼을 하여 세속적인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급박한 시대상황은 그에게 삶의 전환기를 마련하여 주었다. 16살의 유천도 동학란과 청일전쟁의 격동기에 이땅에 살면서, 민중과 함께 고통을 겪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통 속에서 그는 역사의 현실을 통감했고, 나아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이같은 극한 상황에서도 살아야 하는 인생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인생이란 덧없는 것이 아닌가. 밤낮 근근 살자 하다가 생명이 가면 무엇이 남는가. 명예인가, 부귀인가, 모두가 다 아쉬운 것이 아닌가. 결국 모든 것이 공(空)이 되고, 무색(無色)하고 무형(無形)한 것이 되어 버리지 않는가.
2. 지견(知見)을 세우다
남달리 모험심과 개혁의지가 강한 유천으로서는 가만히 앉아서 그것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결국 그런 소문이 흘러 나오는 중심지인 한양을 향해 집을 나서기로 하였다. 무작정 집을 나와 한양으로 가던 중 오랜 노독과 굶주림에 지쳐 수원쯤의 어느 주막에 들어 하루밤을 묵기로 했다. 여기서 그는 다시 회의에 빠져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빈손에 한학의 소양밖에 없는 내가 무슨 힘으로 나라 일을 도우며 큰 뜻을 이룰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한양만 가면 모든 것이 해결된단 말인가? '
궁리 끝에 그는 발길을 돌려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름난 도사가 있다는 오대산 월정사로 가기로 했다. 그리하여 월정사에 도착했지만 거기서 그가 만나고자 했던 도사는 만나지 못하고 허기와 실망을 안은 채 돌아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다시 발길을 돌려 백담사를 찾아가기로 했다.
70리 대관령 굽이길을 넘고 넘어 당도한 곳이 내설악 백담사였다. 백담사는 내설악의 절경을 병풍처럼 두르고 나즈막히 앉아 있는 고찰이다. 그때 백담사의 주지 연곡(筵谷) 스님은 유천을 따뜻이 맞이하여 불문에 귀의시켰다. 이때가 1904년, 유천의 나이 26세 되던 해이다. 여기서 만해는 본격적으로 승려의 길에 들어섰다. 1905년 1월 26일 백담사 연곡 스님을 은사로, 영제(永濟) 스님에 의하여 수계를 하니, 득도 때의 계명(戒名)은 봉완(奉玩), 법명이 용운(龍雲), 법호는 만해(萬海 卍海)였다. 그는 이제 출가의 길을 걷는 승려가 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수도생활을 시작한 만해 스님은 1970년대에 소실되어 지금은 없어진 오세암 장경각에 쌓여있는
불교경전은 물론 외전과 내전을 비롯하여 매월당 김시습이 들춰본 뒤로 먼지 속에 묻혀있던 귀중한 고서들을 꺼내 오랫동안 굶주린 사람처럼 읽기
시작했다. 이때 세속에서 배웠던 한학이 그의 경전 공부에 큰 힘이 된 것은 물론이었다.
새로운 가치관을 갖게 된 그는 학암(鶴庵) 스님을 모시고 《기신론》, 《능가경 楞伽經》, 《원각경》을 공부하는가 하면, 금강산 유점사에서 월하(月華) 스님을 모시고 《화엄경》을 공부하였다. 백담사와 오세암을 오르내리며 경전 공부와 선수업(禪修業)을 겸해 나간 것이다. 특히 장경각의 경전들은 그동안 쌓여있던 만해의 지적 갈증을 풀어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니 더욱 경전 속에 파묻히고 선정삼매에 들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정말 가슴 가득 불꽃이 튀는 듯한 뿌듯함으로 책을 읽으면서 이만하면 나도 많은 공부를 했지 않았느냐 하는 생각에 이제 자신이 모든 것을 안다고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백담사 연곡 스님에 의하여 또 다른 눈을 뜨게 되었다. 연곡 스님은 셋째 상좌인 만해 스님의 뛰어난 한학 실력에 큰 기대를 가지면서 뒷바라지를 정성껏 해주었던 분이다. 그는 금간산 일대의 가장 큰 절이며 당시 유학승들의 왕래가 많았던 백담사의 본사인 건봉사에서 그때 널리 읽히던 두 권의 책을 그에게 가져다 주었다. 그것이 곧 《음빙실문집 飮氷室文集》과 《영환지략 瀛環之略》이었다. 이 책을 받아본 만해는 새로운 충격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음빙실문집》은 청조 말 구국의 큰 뜻을 품은 대학자 양계초(梁啓超)의 계몽서적이자 혁명서적이요, 《영환지략》은 세계의 지리를 소상히 설명라고 있는 지리서였다.
이제 자신이 모든 것을 안다고 자부하던 만해 스님은 그 책을 펼쳐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겨우 조선과 중국, 그리고 일본 등 몇 나라밖에 몰랐던 그에게 아메리카와 아프리카가 있고 유럽 등 이렇게 넓은 세계와 많은 나라에 무한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새로운 사실은 가히 충격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유신론에 다 흡수가 되기는 했지만 이 책을 통하여 칸트와 루소, 베이컨 등 서양철학에까지 접하게 된 그는 이제 산중에 묻혀 경전만 읽을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많은 이야기가 있는 넓은 세계를 직접 알아보아야 하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스님은 원산 항구에서 배를 타고 떠나 소련의 블라디보스토크(海參威)의 신항구에 도착하였다. 세계정세는 물론 조선의 정세에도 어두웠던 스님은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뜻하지 않던 봉병을 당하게 되었다. 이상스러운 중의 옷차림을 수상히 여긴 블라디보스토크 동포들이 그를 일진회(一進會) 회원으로 오인하여 다짜고짜 죽이려 들이려 들었던 것이다. 일진회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중국세력과 일본세력이 각축전을 벌이다가 다시 소련세력이 대치해 들어왔을 때 을사보호조약 이후 양 세력 중에 일본을 지지한 무리들이 규합한 단체였는데,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의 동포들 중에는 의심이 가는 조선 사람만 보면 무조건 일본의 첩자(일진회원)로 알고 잡아 죽이려 들던 때였다. 뜻하지 않은 봉변 앞에 그는 침착한 모습을 보이면서 살기를 원하면 죽고, 죽기를 원하면 살 수 있다는 신념으로 당당히 맞서 기지와 담력으로 담판을 벌였다. 죽더라도 뼈만은 조선땅에 묻어달라는 청에 오히려 그들이 당황하였다.
북대륙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스님은 세계여행을 포기하고 귀국하였다. 그는 두만강을 건너 고국땅으로 다시 돌아와 안변 석왕사에서 참선 수업을 쌓았다. 그러나 끝내 마음 속에 타오르는 새로운 것에 대한 열망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의 머리 속은 넓은 세상과 조선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그래서 생각 끝에 그는 국내의 사정부터 먼저 알아보아야 되겠다는 마음을 먹고 한양으로 들어갔다. 한양으로 들어온 스님은 세계정세와 조선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또 새로운 문화가 일본을 통해서 들어온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세계정세를 더 널리 알기 위해 1908년 4월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경도(京都), 동경(東京), 마관(馬關), 궁도(宮島) 등지를 시찰하며 신문물을 접하였다. 일본인 아사다 교수가 동경 조동종대학에서 불교와 서양철학을 청강하도록 배려하여 주었고, 유학 중이던 최린을 만나 사귀게 되었다.
만해는 그곳에서 일본인들이 현대문명의 이기(利器)를 수입하여 껏을 익혀 조선땅으로 밀고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들의 손에는 하나 같이 측량기계가 들려 있었고 조선땅으로 들어가는 측량기계가 토지수탈의 도구로 쓰여질 것을 생각하니 만해는 한없이 안타웠다. 당시 최첨단 기술인 측량술을 공부한 일인들이 조선땅으로 와서 하는 것은 바로 토지수탈이었기 때문이다. 농본사회이면서도 토지개념이 희박했던 우리나라 사람들은 조상 대대로 지은 것이니까 그대로 내가 지으면 된다는 생각이 고작이었는데, 그들은 측량해 주겠다고 해놓고는 3000평 땅을 2500평으로 기록해버리고 2∼3년 후쯤 다시 와서 당신은 국가의 땅을 허락도 없이 500평 더 경작해 왔으니 세금을 내라는 식으로 토지를 수탈하는 것이었다. 숫자에 대한 개념이나 지식이 부족했던 우리 민족은 눈 뜬 채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우리 땅덩어리가 얼마인지도 모르고 일본인의 수중으로 다 넘어가겠다고 생각한 스님은 도일할 때에 마음 먹었던 일들을 그만두고 측량술을 공부하기로 하였다. 그는 서둘러 측량술을 배워 일본 생활 6개월을 청산하고 그 해 가을(10월), 손에 측량기계 하나를 사들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12월 10일 그는 서울 청진동에 경성명진측량강습소를 개설하고 측량기술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하며 사찰이나 개인 소유의 토지를 수호하는데 앞장섰던 것이다.
그러나 국내정세는 점점 더 불안해졌다. 러일전쟁(1904∼1905)이 끝난 후 한반도의 정세는 날로 악화되고 국운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여 있었다. 군국일본의 강압에 의하여 굴욕적인 을사조약(1908)이 강제로 체결될 때 2천만 민족의 분노는 하늘에 닿았다. 우리 역사에 씻지 못할 치욕의 경술국치는 일본군의 총칼에 의해 강요되고 이에 분을 못 이겨 선비 매천 황현(黃玹)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역에서 이등박문을 통쾌하게 사살했다. 이 소식을 접한 만해는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만 섬의 끓는 피여! 열 말의 담력이여!
독립투사들은 권토중래(捲土重來)를 꾀하기 위해 해외로 망명을 하는가 하면 국내에서 생명을 걸고 투쟁을 벌였다.
3. 불교인으로의 지향
국맥마저 끊어지는 비운의 1910년 한일합방이 된 이후 해인사 주지로 있던 이회광은 한국불교를 일본불교의 지배하에 얽어맬 흉계를 꾸미고 있었다. 이른바 일본 조동종과 '연합맹약'을 체결한 것이 그것인데, 그 내용은 조선의 사찰은 전부 일본 조동종의 예속하에 둔다는 것이었다. 만해는 이를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민족종교의 말살책동은 측량술보다 더 급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분연히 일어난 만해는 1911년 1월 전남 송광사에서 승려대회를 주도하여 종문난적 이회광을 몰아내는 데 앞장을 섰다. 한영, 진응, 종래, 금봉 스님들과 함께 송광사, 범어사 등지에서 승려궐기대회를 개최하고 '한일불교동맹조약'을 분쇄하는 데 전력을 쏟았다. 범어사에 임제종 종무원을 설치하여 33세의 젊은 나이에 그는 임제종 관장서리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이 와중에서 총독부는 모든 사찰의 주지와 재산에 관한 권한은 총독이 가진다는 내용의 '조선사찰령'을 반포하였다. 이리하여 30본산이 모두 총독의 수중으로 들어가버리자 스님은 망국의 비애를 안고 국경을 넘어 만주로 발길을 돌렸다.
당시 만주에서는 독립지사 이시영, 김동삼, 박은식, 이동녕 등이 조국광복을 위해 독립군을 양성하고 있었다. 스님은 그들을 방문,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신흥무관학교 등 여러 곳을 돌아보던 중 밀정으로 오해받아 통화현에 있는 굴라재를 넘다가 독립군 청년의 총격을 받았다. 피투성이의 혼수상태 속에서 여인으로 나타난 관세음보살을 따라 마을까지 기어온 스님은 수술을 받아 겨우 다시 살아날 수 있었고, 마취도 하지 않고 수술을 받으면서 나라 잃은 슬픔이 이 육신의 아픔에야 비교될 것인가를 생각하였다. 오히려 부처님의 인욕바라밀을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았다. 훗날 잘못된 일임을 안 청년들이 찾아와 사죄했을 때 그는 담담한 어조로 조선의 혼을 간직한 청년들의 기개를 오히려 칭찬하며 만주의 많은 동포들을 잘 조직하고 교육시키는 데 온 힘을 다해 달라고 격려까지 했다.
만해의 기상은 이렇듯 생사를 뛰어넘었다. 고된 시련을 겪어낸, 오히려 고난의 칼날 위에 분연히 일어선 통쾌하고 장엄한 발걸음으로 만해는 고국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돌아와보니 우리 불교계는 너무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비장한 각오로 다시 백담사로 들어간 스님은 그 유명한 《조선불교유신론》을 집필, 1913년 5월 25일 불교서관에서 발행한다. 이 유신론에서 유신운동의 기본적인 목표와 방향이 정신문화의 혁명에 있다고 주창한 그는, 불교인이건 아니건 인간에게는 누구나 정신의 유신을 하여야 하며, 그 길만이 조선이 살아갈 수 있는 길임을 강조했다. 스님은 온 정열을 바쳐 중생구제를 위한 승려교육문제, 포교문제, 경전의 해석 등을 유신론을 통해 불교개혁의 의지를 천명했던 것이다. 또한 그는 당시 불교계의 풍토를 좀먹고 있는 비종교적, 비사회적, 비합리적, 토속적, 미신적인 요소와 인습을 타파하고 혁신해서 불교계도 시대적 변화에 부응한 새로운 진로를 개척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불교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순수한 신앙에 바탕을 둔 윤리관을 확립하여 부처님의 근본정신을 재구현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역사적 사회적인 요청에 부응할 대중불교 실현의 사면감을 고취, 촉구하였다. '유신이란 무엇인가, 파괴의 아들이다. 파괴란 무엇인가, 유신의 어머니이다. 천하에 어머니 없는 아들이 없다는 말은 하되 파괴 없는 유신이 없다는 것은 간혹 알지 못한다'라는 선언으로 시작한 유신론은 당시 조선불교의 난후성과 은둔성을 대담하고 통렬하게 비판했다. 제1장에서 제4장까지는 유신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고, 제5장부터 제16장까지는 당시의 조선불교가 직접 부딪치고 있고 또 시급히 해결하지 않으면 안될 구체적 문제들에 대한 이론을 제시했다. 이 논설에 나타난 그의 사상은 첫째 문명의 진보론, 둘째 자유주의와 평등주의, 셋째 불교를 현실과의 적극적 관계 속에서 해석하려는 점으로 요약된다.
그리고 승려교육에 대한 체험적 이론과 확고한 방법론을 피력했다. 그런데 《조선불교유신론》은 한문으로 씌어졌기 때문에 한문 지식이 부족한 일반인들은 읽기가 힘들었다. 스님은 다시 불경 대중화를 위한 작업으로 양산 통도사에서 그 방대한 팔만대장경을 모두 열람하여 《불교대전 佛敎大典》을 편찬하였다. 《불교대전》은 재래식 장경 위주의 편찬방법에서 벗어나 주제별로 엮어진 최초의 책이다. 여기서도 불교 근대화 작업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이 대전은 1914년 4월 30일 범어사에서 찬술, 발행되었다.
이같은 저술활동을 통하여 그는 포교면에서는 맹렬한 실천론을 주장하였고, 교리면에서는 선(禪), 교(敎) 일치를 제창했다. 만지풍설 같은 일제 치하의 암흑시대에 스님은 그 많은 일을 하셨던 것이다. 그 속에서 스님은 역사 현실을 외면한 불교, 시대정신이 없는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고 단호히 얘기했다. 그는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중생과 함께 하며 보살정신으로서 불교의 이상이 실현되어야 한다고 역설하고 실천한 것이다.
그러다가 그는 다시 설악산 오세암에서 피나는 선정삼매에 몰입했다. 설악의 대자연과 함께 호흡하다가 자신의 깊은 세계를 관조하면서 그는 '구름이 흐르거니 누군 나그네 아니며, 국화 이미 피었는데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화두를 들기도 했다. 1917년 12월 3일 밤 10시경 좌선중에 갑자기 바람이 불어 무슨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의심하던 마음이 씻은 듯 풀렸다. 그래서 오도송을 남겼다.
시대정신을 꿰뚫어 본 한용운은 붉게 붉게 피어나는 그의 마음을 천봉만학이 우쭐대는 설악의 깊은 골짜기에 파묻을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봄눈이 미처 녹기도 전에 그는 다시 대중의 품으로 달려왔다.
4. 3 1운동의 선봉에 서서
스님은 늘 마음 속에 세 가지의 커다란 원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부처님 정신으로 철저하게 살기 위해 혜초처럼 부처님 땅을 가보는 것이었고, 둘째는 중생제도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서 언론매체를 생각하고 잡지사와 신문사를 하나 경영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셋째는 백두산 천지에 오르는 것이었다. '이순신 사공 삼고 을지문덕 마부 삼아 파사검 높이 들고 남선북마 하여볼까'하는 시의 내용처럼 남아의 이상을 마음껏 펼쳐보고 싶은 그런 원이었다. 그런 원을 거진 스님이었기에 우리 민족 전체를 다 들어 올릴 수 있는 저울추의 역할을 기미년에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었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조선총독부는 무단정치 10년을 통하여 민중의 귀와 눈과 입을 다 막아버렸다. 서울로 되돌아온 그는 먼저 민중의 입과 눈과 귀를 열게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종합교양잡지 《유심 惟心》(1918년 9월 1일)을 창간하였다. 불교 근대화와 신문화 운동의 전개로서 주로 민족의 정통성과 자존성을 가진 우리 청년들에게 용기와 신념을 잃지 말라는 내용의 잡지였다. 여기에 기미 3 1운동에 동지로 규합될 육당 최남선, 최린 등이 글을 기고했다. 많은 원고를 총독 검열에서 삭제당하는 아픔을 겪으면서 스님은 굴하지 않고 언론활동에 필요한 세계정세에까지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기고했다. 《유심》 잡지 제2호를 내고 제3호를 만들 무렵, 세계정세는 급걱히 변하고 민족의 자주독립을 주장하는 소리가 높아갔다. 1918년 12월 초에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제창되었는데 때마침 기사가 대한매일신보에 게재되었다. 약소민족은 모두 일어나서 독립운동을 하라는 기사의 내용은 바로 만해 스님의 끓는 가슴에 기름을 붓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이에 그는 구황실의 귀족들과 종교계 인사는 물론 재력 있는 사람들까지 다 끌어모아 200명 정도의 동지들을 규합하여 거국적인 행사로서 민족의 자존심을 세계만방에 외치자는 의논울 하기로 마음먹었다.
동년 12월 26일 그는 최린을 은밀히 만나 그간의 결심을 텅어 놓으면서 우리도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최린의 동의를 얻은 후 권동진, 오세창도 적극 참여한다는 뜻을 확인했다.
또한 박영효, 한규설, 윤용구 등 귀족들과 접촉했으나 가진 자들은 한결같이 꽁무니를 뺐다. 처음 200명으로 계획했던 거사가 실패할 지경에 이르렀다. 귀족들과 재력있는 사람들은 다 빠지고 종교운동가들만 남게 되었다. 서울을 중심으로 기독교 세력을 규합하던 월남이 빠져나가자 남강 이승훈 선생이 평양 사람들을 중심으로 기독교인 15명을 모으고 천도교에서 16명, 불교에서 2명으로 33인이 구성되었다. 그리하여 손병희 선생의 승낙을 받고 당시의 거부 민영휘를 찾아가서 거사자금을 마련하여 이를 계획하였다.
손병희 선생을 33인의 대표로 추대하고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에 한용운 스님의 '공약 3장'이 첨가되었다. 기미년 3월 1일, 종로 태화관에서 최린의 사회로 "이제 우리는 조선의 독립을 선언했으니 죽어도 한이 없다"는 만해 스님의 축사와 대한독립만세 세번을 선창하고 일경에 피습당해 마포경찰서로 잡혀가게 되었다.
붙잡혀간 독립지사들은 말할 수 없이 심한 고초를 당해야 했는데, 국가내란죄로 사형된다는 소문에는 모두 마음이 약해졌다. 미결수로 있는 동안 너무 힘들어 눈물 흘리는 그들에게 똥통을 둘러 엎으며 스님은 "나라 잃고 죽는 것이 서럽거든 당장에 취소하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스님은 옥중에서 옥중투쟁 3대원칙을 정하고는 몸소 실천에 옮겼다.
첫째는 변호사를 대지 말자는 것이었다. 내 나라를 내가 찾는데 누구에게 변호를 부탁할 것이냐, 변호해 줄 사람도 받을 사람도 없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사식을 받지 말자는 것이었다. 온 천지가 다 감옥인데 호의호식하려고 독립운동하지 않은 이상, 밖에서 넣어 주는 사식을 먹지 말자는 것이었다.
셋째는 보석을 요구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스님은 이렇게 3대원칙을 정해놓고 옥중에서까지도 철저하게 항거했다.
공판할 때 33인을 한 사람씩 불러 취조가 시작되었다.많은 사람들이 이에 관심을 가지고 몰려들어 방청석은 꽉 찼다. 그 중 당시 가장 엘리트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최린 선생이 아주 명쾌한 논리로 일본의 무단정치 10년을 고발했다. 시대적인 배경과 함께 일본 정치의 잘목된 점을 낱낱히 고발해 사람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했다. 그때 스님은 최린의 진술을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최린의 논리에 의하면 만약 일본이 정치를 잘했다면 오늘의 독립운동 같은 것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과 같았다. 스님은 당장 그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고우(古友), 내가 내 나라 찾자는 일에 일본 정치 잘하고 못하고가 무슨 소리요"하며 최린 선생을 크게 꾸짖었다.
스님의 취조 차례가 왔지만 처음부터 입을 열지 않았다. 몇 번 반복해 보아도 재판장의 인정신문부터 묵살해 버렸기 때문에 재판은 조금도 진행되지 못했다. 하루는 재판장이 피고는 왜 말이 없느냐고 다그치자 그는 "조선인이 조선 민족을 위하여 스스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 백번 마땅한 노릇인데 일본인이 어찌 감히 재판하려 하느냐"고 오히려 호령을 했다.
또 독립선언서 공약삼장에는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폭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냐고 묻자 스님은 "조선 사람은 단 한 사람이 남더라도 독림운동을 하자는 뜻이다"라고 당당히 말했다. 최후의 일인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발표하라는 공약삼장은 광명, 정대, 화합이라는 바로 불, 법, 승 삼보정신을 말한 것이었다. "피고는 금후에도 조선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스님은 "육신이 다하면 저 신만이라도 남아 영세톨고 독립운동을 할 것이다"라고 당당히 말하였다. 또 그는 "나는 할 말이 많다.
서면으로 할테니 종이와 펜을 달라"고 요구하여 그 유명한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란 조선 독립 이유서를 써내려갔다. 53장의 논문을 옥중에서 참고서적이나 자료 하나 없이 완성할 만큼 만해의 독립에 대한 신념은 확고했다. 평화를 획득하고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회복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 희생하는 것이 사람으로서 얼마나 가치 있고 고귀한 행동인가를 주장했다.
탁월한 식견과 정연한 논리로 조선독립의 목적을 옥중에서 당당하게 주장함과 동시에 침략 강점의 일본 군국주의를 준엄하게 꾸짖었다. 더욱 놀랄 만한 점은 1919년에 벌써 군국주의 일본군도 제1차 세계대전 때의 독일처럼 반드시 패망의 쓴 잔을 마실 날이 올 것이라고 확언한 사실이다. 그의 통찰력은 이미 세계 대세의 흐름을 꿰뚫어 보았던 것이다. 자유, 평등, 평화, 정의에 입각한 민족자결원칙에 의한 조선 독립은 시간 문제일 뿐,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고 자신만만하게 단언했다.
그는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였다.
첫째, 민족 자결의 원칙은 정의이며 인류가 누릴 행복의 근원이기 때문에 어떠한 무력도 감히 자결의 원칙과 독립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고 공언했다.
자유는 만유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다. ...... 압박을 당하는 사람의 주위는 무덤으로 바뀌고 쟁탈을 일삼는 자의 주위는 지옥이 되는 것이니...... 자유를 위해서는 생명을 터럭처럼 여기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희생을 달게 받는 것이다. 이것은 인생의 권리인 동시에 또한 의무이기도 하다. ...... 자유와 평화는 전 인류의 요구일지로다. ...... 전 세계를 대표할 만한 군국주의는 서양에 독일이 있고 동양에 일본이 있도다. ...... 오호라, 총칼이 어찌 만능이며 무력이 어찌 승리이리요. 정의가 있고 사람의 도(道)가 있도다. 극악한 군국주의는 독일로써 최종막을 나타내지 아나하였는가. ...... 독일의 총칼이 적지 아니하거늘 전쟁의 종극을 고함은 무엇 때문인가. 정의 인도의 승리요 군국주의의 실패니라.
넷째, 조선은 독립 국가의 필수요소인 토지, 백성, 문화가 구비된 당당한 독립국임을 인식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조선 독립은 산꼭대기에서 굴러 내려오는 바위와 같아서 목적지에 도달하지 않으면 멈추지 않는다. "일본인은 기억하라! 마관조약, 포오츠머드조약의 먹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갖은 흉계와 폭력으로 조선 독립을 유린한 것은 어떠한 배신인가. 오직 평화만이 상호공존을 가능케 하니 일본은 깊이 각성하라"고 경고했다. 생사를 초월한 그는 붕의와 대한하며 정의의 화신으로 끝끝내 굴하지 않았고, '공약삼장'에 나오는 그대로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투쟁했다. 그에게는 따뜻한 동포애와 진한 인류애가 있었다. 독립을 선언한 직후 마포경찰서로 붙들려 가는 우국지사를 향하여 목이 터져라 부르는 어린 학생들의 만세소리를 들었을 때, 그의 눈애서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눈물이 쏟아졌다 한다. 그때 그 소년들의 모습과 소리는 일생에 잊혀지지 않는다고 술회하였다.
재판정에서 "피고는 금후에도 조선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라는 재판장의 물음에 대하여 그는 "그렇다. 언제든지 그 마음을 고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이 몸이 없어지면 정신만이라도 남아 영세토록 가지고 있을 것이다. 너희 나라에 승려 월조대사가 있지 않느냐, 조선에도 한용운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고 대답했다.
스님은 그 당시 최고형이던 3년 징역의 유죄 선고를 받고 복역중 1년 6개월 만에 풀려나게 되었다. 출옥 후에도 스님은 자항자세를 조금도 흐트리지 않고 기독교 청년회, 불교 청년회 등에서 강의를 하는 등 많은 활동을 했다. 강연 마당에서 스님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진정한 자유는 누구에게서 받는 것이 아니다. 또 주는 것도 아니다. 서양인들은 하나같이 '신이여 자유를 주소서! '라고 자유를 구걸하지만 자유를 가진 신은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필요도 없다. 사람이 부자유할 때는 부자유할 것이고, 신이 자유로울 때는 사람도 자유로울 것이다. 신이 만약에 있다면 '신이여 자유를 주소서! '가 아니라, '신이여 자유를 받으소서! '라고 얘기해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 불교의 진아에서 향유되어지는 자유권을 제시하고 그것이 인간의 본성, 민족의 자존성에 연결되어 조선의 독립이야말로 자유의 광범위한 의미임을 크게 가르친 것이다.
'철창철학'이라는 연제로 강연을 하던 어느날, 청중의 가슴에 민족혼을 불어넣기 위하여 비장한 어저로 "개성 송악산(松岳山)에 흐르는 물은 선죽교의 피를 못 씻고, 남강(南江)에 흐르는 물이 촉석루의 먼지는 씻어가도 의암(義岩)에 서려 있는 논개(論介)의 이름은 못 씻는다"라고 끝맺었을 때, 장내에는 떠나갈 듯한 박수와 함성이 가득 찼고 그 자리에 임석했던 일본 경찰까지도 박수를 쳤다고 한다.
또 다른 강연회에서는 "여러분! 얼큰한 된장찌개 맛보는 기분으로 내 말을 들어보소.
우리들의 가장 큰 원수는 대체 누구일까요. 소련입니까, 미국입니까? 아닙니다. 소련도 미국도 우리의 원수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가장 큰 원수는 대체 누구입니까? 일본이라고 남들이 그럽디다. 모두들 일본이 가장 큰 원수라고......" 연설을 하는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임석한 경찰이 연설 중지를 외쳤다. 하지만 그는 태연하게 연설을 계속 하였다. "우리의 원수는 일본이 아닙니다. 일본이 어째서 우리의 원수이겠습니까? 우리의 원수는 바로 우리들 자신의 게으름, 이것이 바로 우리의 가장 큰 원수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렇게 말을 다했다. 그의 음성은 시냇물처럼 흐르다가도 폭포수가 되어 떨어졌다.
그의 생활은 옥중에 있을 때나 민중들의 곁에 있을 때나 언제나 한결같았다. 민중의 편에 서서 그들과 함께 고통하며 호흡하고 있었다. 변절한 동지들을 질타하며 옥중에서도 옥밖에서도 굴하지 않고 투쟁한 스님의 자유 평등 독립 사상은 바로 우리 민족의 저울추로서 영원한 역사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는 또 교육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표명했다. 그해 4월 20일 민립대학설립운동을 지원하는 민립대학 기성회 주최의 기념강연회에서 "다같이 조선 민족이 된 의무감으로 일치단결하여 우리 2천만의 피와 정성을 모아 민립대학을 설립하자"고 했다. 그리고 오늘보다 내일의 삶을 위해 철저한 교육으로 내일을 준비하자고 역설했다.
5. 침묵의 미학
그는 다시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가 지난 날을 정리하면서 출가사문의 길을 처음 밟던 그 시절을 회상하며 오세암 장경각의 책 속에 파묻혔다. 자신보다 400년 앞서 이곳을 지나갔던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의 흔적을 발견하고 시대는 많이 흘렀어도 느끼는 바는 오히려 새로움이 있었다. 그는 중국 동안(同安) 상찰선사(常察禪師)의 선화게송인 《십현담 十玄談》에 주(註)를 달았던 《십현담주해》를 읽고 마음에 새로운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도 직접 매월당의 주와 비교, 대조하면서 주(註)와 해(解)를 달았다. 선의 오묘한 이치에 이해가 깊었던 그는 선(禪)에서 사회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솟아나와야함을 강조하였다.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모국어로 깨달음의 경지를 노래하고 싶었다. 그의 시집 《님의 침묵》은 설악의 영상과 그의 심혼이 담긴 노래다. 1925년 8월 《님의 침묵》을 탈고한 그는 노도광풍이 지난 후의 잔잔함에 비유할 만한 마음의 평안을 느껶다. 자유, 평등, 평화의 사상을 침묵 속에 담고 그 침묵의 노래를 상징적 님을 향하여 투영했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 너에게도 님이 있더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기 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기루어서 이 글을 쓴다.
여기에서 말한 기리운 존재가 바로 님의 정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기룹다"는 말을 어느 국문학자는 "그립다"는 말이 변형된 말이라고 하지만 시의 전체적인 내용으로 봤을 때 단순한 문자풀이로서 변형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기리운 것은 바로 보살의 원(願)사상이다. 우리에겐 많은 원하는 것이 있다. 욕망도 있고 갈망도 다 원하는 것이다. 그런 것은 "나"라고 하는 소아적 집착으로 바라는 원이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원은 나보다 당신에게 비중을 두었을 때 참다운 님의 얼굴이 보인다는 소살사상으로 나타난다.
만해의 시는 시이면서 철학적인 시이고, 종교적인 분위기가 가미된 시이다, 눈물을 분석해서 슬픔의 농도를 알 수 없듯이 "님"이라는 다 어 자체에 집착하는 것으로는 만해의 세계를 알 수 없다. 침묵의 세계에 바로 접하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세계이다. 팔만대장경이라는 수많은 경전은 모두가 중생의 근기에 따라 설해진 이야기이다. 그런데 화엄의 세계에 와서는 근기 자체가 부정되어 버린다. 그래서 논리적 사고로 분별이 가능하지 않는 세계, 지혜 그 자체인 비로자나 법신사상으로 침묵의 세계를 해석할 수밖에 없다. 비로자나는 바로 광명 자체, 곧 "공"이라는 그 설명의 세계를 뛰어넘어 존재하는 바로 그것이다.
새봄이 "내가 지금 갈테니 너희들 잘 맞이하라"고 말하면서 오는 것은 아니다. 아지랭이가 움을 틔우는 현상 그 자체로 존재되어지는 것일 뿐이다. 보이는 현상 그 자체가 바로 침묵의 세계인 것이다. 보살은 그것을 보고서 봄이라고 느끼고 중생은 그것을 보고서도 자신의 무명 때문에 바로 느끼지 못하는 슬픈 존재이다. 보살은 그 슬픔을 대신하며 끊임없이 부처의 세계를 비추어 제도한다. 침묵의 세계를 비로자나 법신세계로 보았을 때 보살의 할 일은 무한한 것이다. 이 사회 속에서 구현되어야 할 실천덕목이 끝없이 나열되는 것이다.
기리운 것은 다 님이라고 했다. 유정이든 무정이든 존재하는 것 그 자체는 모두가 님이다. 불성이 있는 부처님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나니"라고 하여 님과 나의 일체를 설명하고 있다. 보살의 입장에서 중생의 문제는 자신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너희에게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허상을 진상이라고 떠들지만 말고 이 사회와 중생을 위하여 무슨 일을 했는지 행위 그 자체를 반성해 보라는 것이다.
"나는 해저문 들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기리워서 이 시를 쓴다"에서 우리는 중생을 구원하려는 스님의 대비원력을 볼 수가 있다. 이렇듯 우리 문학사상 유례없이 순화된 정서로 엮어진 88편의 시는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다. 님이란 다름 아닌 생명의 근원이고, 영혼이고, 또 종교적 신념의 결정이다. "장차 이 나라의 시인들은 시학(詩學)을 배우려고 《님의 침묵》을 읽는 일을 드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떻게 전통을 생생하게 몸에 지니고 어떻게 미래를 개척하며 사느냐'하는 문제와 맞설 때마다 《님의 침묵》이 지닌 사자후에 귀를 기울이이라"고 송욱 교수는 지적하였다.
깨달음의 증험을 내용으로 한 시를 증도가(證道歌)라고 하는데, 시집 《님의 침묵》은 전체가 하나의 증도가다. 그의 시는 사랑의 시이므로 우리는 이 시집을 '사랑의 증도가'라고 부를 수 있다. 그는 이 시집을 통하여 성의 세계를 구체화하고 현대화하는데 성공했다. "이 나라의 신문학은 한문과 작별하여 모국어로써 표현된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신문학은 한문과 함께 사상까지 작별하고 말았다. 신문학사 전체를 통해서 오직 하나의 예외는 시집 《님의 침묵》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시집처럼 불교 전통이 우리 말로써 시화된 사례도 이 나라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라는 송욱 교수의 탁견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시집은 예술적인 면으로는 20세기 모국어가 이룩한 석굴암이다. '웅변은 은이고 침묵은 은이지만 이 금으로 자유의 꽃을 몽땅 사고 싶어라 雄辯銀 沈默金 此金買盡自由花'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중생에게 새벽을 알리는 보살로서, 어둠 속의 중생을 싣고 물을 건너야 하는 나룻배의 역할을 원하였다. 그는 시를 쓰되 영원 속으로 도피하지 않았다. 시를 쓰되 조국의 역사와 우리의 전통을 한 순간도 잊어버리지 않았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만은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님의 침묵〉의 전문이다. 부처님의 세계가 억만겁이 지나도 영원하듯이 만해의 침묵의 세계가 바로 그러한 것이다. 소월 등 우리 근대시가 대부분 감성의 세계를 표출하고 있는데 비해, 만해의 시에 와서는 감성과 이성의 세계가 강하게 마주쳐 조화된다. 서양에는 초월이나 명사으이 시는 있지만 이와같이 깨달음의 세계를 노래한 시는 없다.
현상의 님은 갔다. 현상이 영원하지는 못하다는 자각은 날카로운 첫키스의 대전환으로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사라졌다. 그러나 만날 때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떠날 때 다시 만날 것을 믿는다는 회자정리의 내용이 가지 않았다는 것을 말한다.
원래 무상한 인생 자체에 있어 님은 갈 수도, 가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다. 단지 우리들의 착각된 생각에 의해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가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돌 뿐이다. 님의 침묵은 바로 팔만대장경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널리 애송하는 시 〈알 수 없어요〉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바람도 없는데 어떻게 수직의 파문이 생기며, 떨어지는 오동나무가 발자취를 남길 수 있을까. 논리를 떠난 시적인 파격일 뿐 아니라 바람도 없는 공중은 바로 우주의 적멸이다. 부처님의 세계인 적멸보궁이다. 법성은 본래 원융해서 두 가지 모습이 아니고 일체만법, 그것은 본래 고요하다. 적멸의 세계며 근원의 세계인 것이다. 여기에 현실의 세계로 변화를 가져온 것이 수직의 파문, 인간사의 첫 페이지가 기록된다는 것이다.
그가 남긴 《님의 침묵》 중 〈찬송〉의 시를 다시 생각해 본다.
만해 스님은 〈독자에게〉라는 시에서 시인으로서 여러분 앞에 보이는 것을 부끄러워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새벽종을 기다리며 붓을 던진다고 했다. 여명의 순간을 바라보며 우리의 어둠을 사랄버릴 태양을 기대하며 새벽종을 기다리는 것이다. 수십 겁이 지나야 미륵부처가 온다고 한다. 무한한 시간, 한계를 벗어난 시간을 설명하기 위해 순간을 말하며 붓을 던진 것이다. 님의 침묵으로 새벽종 역할을 하던 비원이 여기 있는 것이다. 스님의 시는 문학지상주의나 피상적인 계몽주의가 아니라 바로 민중과 민족의 철학적 각성의 노래였던 것이다.
6. 설 중 매 화
자유는 만유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류의 행복이라고 주장하며 옥중투쟁을 하다가 1922년 남기 복역을 마친 스님은 물속에 피어나는 신비로운 연꽃 같은 시세계를 통하여 미묘한 법문의 세계를 열었다.
시집 《님의 침묵》을 내놓은 이후 스님은 낙산사 홍련암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총독부에서 새로 부임한 군수가 관광차 홍련암에 오게 되었는데 도로 정비까지 해가며 다른 스님들은 모두 나가 영접을 하는데 스님은 요지부동 관음정근만 하고 있었다. 약이 오른 군수가 저 자를 끄집어 내라고 하자 "네가 군수면 네 나라 군수지 내 나라 군수는 아니다"라고 스님은 벽력 같은 소리로 호령했다. 그에 대해 군수는 할 말이 없었다.
1927년 49세가 된 스님은 서울에 올라와 민족운동에 가담했다. 민족항일전선인 신간회 창립위워능로 활약하여 5월에는 이 모임의 중앙집행위원, 7월에는 서울지회장이라는 막중한 위치에 올라 좌파 우파로 가랄져 있던 그들의 사상을 하나로 모으려고 노력했다. 바쁜 생활 중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다. 신간회에서 전국에 돌려야 할 공문이 있었다. 그런데 인쇄된 봉투 뒷면에 일본 연호인 소화(昭和) 몇 년 몇 월 몇 일이라는 글자가 찍혀 있었다. 이것을 본 그는 아무 말 없이 천여 장이나 되는 그 봉투를 아궁이 속에 넣고 불태워 없애버렸다. 이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란 사람에게 가슴이 후련한 듯 "소화(昭和)를 소화(燒火)해 버리니 가슴이 시원하군! "하는 한마디만 남겼다. 참으로 만해가 아니고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1929년 겨울에는 조병옥 박사와 함께 광주학생운동을 전국적으로 확대 여론화에 앞장서고자 당대 유수의 민족운동과들과 민중대회를 계획했으나 총독부의 탄압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스님은 젊은이들을 사랑하며 모든 기대를 늘 그들에게 걸었다. 따라서 청년들이 좀 더 열심히 정진하기를 마음 깊이 바라고 있었다.
그러다가 소심(小心)하고 무기력한 젊은이를 보면 사정없이 호통을 쳤다. "이놈들아, 나를 매장시켜 나 같은 존재는 독립운동에 필요도 없을 정도로 네놈들이 앞서 나가 일해봐! "라고 말하며 젊은이들 가운데 독립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가는 이가 있으면 그는 오히려 축하한다는 격려의 말로 위로하였다. 그를 따르던 젊은이들을 대하면 엄격한 반면 따뜻한 마음으로 맞아주었다. 스님의 방에서 밤 늦도록 이야기하다가 방 한구석에 쓰러져 잠이 들어 깨어보면 어느 틈에 옮겨졌는지 따뜻한 아랫목에 눕혀져 이불이 잘 덮여 있었으며 그 자신은 웃목에서 꼼짝않고 앉아 참선을 하고 있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고 김관호 선생은 술회하고 있다.
만해는 민중들을 지도하고 계몽하려면 역시 언로느이 힘이 필요하다고 절실히 생각하였다. 그래서 늘 신문사 경영의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사정을 눈치챈 총독부에서는 식산은행을 통하여 서류 뭉치를 들고 그를 찾아왔다. 도장을 찍어 달라는 것이었다.
"왜 도장을 찍으라는 거요? "
그는 그것이 무엇하자는 것이며 어디에서 나온 돈인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어렵고 힘들지만 옳은 일이 아니면 사정없이 통박을 가했다. 고난의 칼날 위에 올라서는 고통이 있더라도 사람으로서 사람의 도리를 다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우리들의 가슴 속에 심어주었다.
조선불교총동맹 조직으로 일제의 종교 억압에 맞서서 불교 대중화의 선봉이 된 스님은 1931년 6월에 당시 유일한 불교 잡지인 《불교》지를 인수하여 《유심》지에서 못 이룬 종교개혁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84호부터 시작하여 108호에 이르기까지 종교에 관한 글뿐 아니라 청년의 교육문제, 민족의 진로문제 등 다양하고 깊이 있는 내용으로 스님의 혼을 실어 발표했다. 그 뿐 아니라 전주 안심사에 내려가 그동안 쌓여있던 한글경파 을 하나하나 조사하고 손질하여 책으로 만들어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토끼전》이나 《별주부전》 등 이조 500년 동안 박해받아 오던 불교가 민중에게 전달하는 수단으로 부처님의 전생담을 옮겨놓은 이야기들이었으나, 그 출처를 모르는 채로 묵혀 두었던 것들이었다.
그해 9월에는 윤치호, 신흥우 등과 나병구제연구회를 조직하고 여수, 대구, 부산 등지에 간이 수용소 설치를 결의하여 나병구제에 온 정력을 쏟았다. 그러나 사실 자신은 방 한 칸 없는 생활을 하며 떠돌아 다니는 외토리 신세였다.
스님이 법린, 상호, 범술 등 청년 승려들이 조직한 비밀결사 만당의 영수로 추대받은 사실이나 54세의 나이로 당시 불교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지목된 사실들은 바로 그의 지조와 기개, 이미 감춰질 수 없는 설중매화의 법향으로 만인을 감화시킨 것에 기인한다. 그러나 식민지 치하의 스님에겐 소망스런 활동의 터전이 주어질 리 없고, 만들어도 곧 단절될 수밖에 없었으므로 인도의 유마거사처럼 중생의 질환을 도맡아 앓을 수밖에 없었다.
요시찰 인물이었던 스님은 늘 갈 곳이 없었다. 주로 가있던 곳이 안국동 선학원이었는데 무슨 사건만 생기면 일차로 잡혀갈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괴롭혀야 했기 때문에 늘 불편한 처지였다. 그때 경봉 스님의 은사이신 구하 스님께서 서울에서 고생하지 말고 통도사에 내려와 조그만 암자나 하나 맡아 편히 지내라는 간곡한 권유를 받고 통도사로 내려가게 되었다.
스님이 내려온다는 소식을 들은 구하 스님은 신바람이 났다. 도량 청소며 만반의 준비를 해놓고 기다렸다. 스님을 흐뭇하게 해드리려는 마음에서 통도사 일주문 옆 큰 바위에다 기념글자를 새겨 넣어야겠다고 했다. 그러나 스님은 "나는 돌에다가는 내 이름을 안 새깁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나의 이름을 새기면 새겼지 돌에다가 이름을 새기지 않겠습니다"라고 거절했다.
그런데 양산경찰서에서 만해를 떠나게 하려고 통도사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어느 곳을 가든지 조선인 경찰이 뒤를 따랐다. 그는 펜을 들었다. '모기 너는 영웅호걸의 피를 빨고 어린아이의 피도 빨고 지조가 없는 얄미운 놈이다. 하지만 너에게 두 손 합장하고 크게 배울 것 하나는 동족의 피는 빨지 않는다는 점이다'라는 내용의 시를 썼다. 이것은 〈모기〉라는 제목으로 조선일보에 발표되었다. 이 시를 보자 일본 앞잡이로서 스님의 뒤를 쫓던 그 조선인 경찰은 그만 그곳을 떠나고 말았다. 풍난화의 매운 향내를 토하듯이, 설중매화와 같이 찬바람 눈비를 원망할 것이 없이 그는 당당한 모습으로 그렇게 버티고 섰다.
7. 심우장의 정절
그 심우장에서 스님은 당시 금서로 묶여있던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를 부도 속에 넣어 단재탑을 만들려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곤욕을 치르기도 했으며 〈흑풍〉〈박명〉〈후회〉 등의 신문 연재 소설을 남겼고, 단재 신채호 선생의 묘비명을 썼다. 우리의 역사를 지키고 보존하겠다는 눈물어린 노력이었다.
1937년에 스님은 크게 한 번 울었다. 우리의 애국지사 일손 김동삼 선생께서 서대문 구치소에서 돌아가신것이다. 조선은 앞으로 꼭 해방이 될 것인데 해방 이후 혼란이 있을 경우 그 혼란을 수습할 사람은 김동삼뿐이라고 믿고 있던 스님은 천지가 무너지는 듯했다. 연고자는 김동삼의 시신을 인수해 가라는 공고가 나왔는데도 총독부의 눈이 무서워 어느 누구도 그 시신을 책임지려 하지 않았다. 스님이 달려가 그 시신을 업고 심우장까지 걸어와서 크게 울며 5일장을 지냈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총독부 회의실에서 31본산 주지 회의를 주최한 남차량 총독을 호령한 만공 스님을 만나 "호령만 하지 말고 스님이 가지신 주장(주仗)으로 한 대 갈길 것이지" 하였다. 이에 만공 스님은 "곰은 막대기 싸움을 하지만 사자는 호령만 하는 법이지"라고 응수했다. 그러고보니 만공 스님은 사자가 되고 만해 스님은 곰이 되어 버린 셈이다. 그러나 만해 스님은 미소를 지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지사답게, 법사답게, 시인답게 일관된 길을 한 치도 흔들림 없이 걸은 스님은 변절한 동지들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다. 더구나 창씨개명한 당시 식자들을 똥보다 죽은 시체보다 더 더럽게 여겼다. 변절한 최린, 이광수, 윤치호 등을 일러 주인에게 충복하는 개만도 못한 놈들이라고 말했다. 1939년 세수로 61세 회갑을 맞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총총히 지나간 예순 한 해가 짧은 생애 같았다. 그는 이렇게 술회하였다.
가난과 병을 마음대로 하니 누가 묘방 얻은 줄 알겠지만 그러한 문제들이 나의 마음을 바꿔 놓을 수 없으며 이미 한 모습 변하여 님께 향하는 마음 속에서 물같이 흐르는 여생을 그대여 묻지 마라. 다만 매미 소리가 석양을 맞았을 뿐이다.
스님은 일제 말기 혹독한 무단정치 아래서 일제의 황민화 운동은 전 조선이 전개하며 강요할 때 끝까지 굴하지 않고 버티면서 비타협의 정신으로 나갔다. 창씨개명반대운동을 벌이고 조선인학병출정을 반대하면서 한편으로는 《유마경》을 번역하였다. 중생이 아프기에 내가 아프다는 유마거사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민족의 아픔을 당신의 아픔으로 아파했다. 만지풍설(萬地風雪) 차고 거친 뜰에 쌓인 눈, 찬바람에 아름다운 향기를 토하려는 매화, 그는 매화나무를 바라볼 때마다 "조국 청년들아! 너희들은 시대적 행운아다. 현대는 조국 청년들에게 행운을 주는 득의(得意)의 시대이다. 만지풍설 속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매화, 이것은 너희 모습이다"라고 말하면서 청년들에게 저 매화의 정절을 닮으라고 역설하였다. 주위가 어떻고 환경이 어떻고 불우하다 슬프다 말하지 말고 눈보라 속에서 꽃피우는 매화의 정절을 닮으라 하며 일진의 청풍을 불어 넣기를 잊지 않았다.
민족운동가, 불교사상가, 근대시인으로 집약되는 만해는 청정심으로 극락정토를 지상에 꾸미려는 깊은 뜻을 버리지 않은 채 1944년 6월 29일 심우장에서 66세를 일기로 입적했다. 학병 징병을 거부하고 일체의 배급을 거부하며 영양실조가 되었던 스님의 육신은 홀연히 사라졌다. 그러나 그의 법신은 영원히 이 조국 땅에 남아 역사의 등불이 된 것이다. 민족사의 암흑기에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부처님의 금본정신과 가르침을 이땅에 심고자 노력한 이가 어디에 또 있는가.
그는 민족의 갈망을 절실하게 노래한 시인이었고 또 구국 일념으로 살아온 독립지사였고, 가혹한 고난과 탄압 속에서도
위연함을 보여 지조를 꺽음이 없었다. 불굴의 투지로써 겨레를 이끌었다. 스님을 추모하여 쓴 조종현의 시는 만해 스님의 큰 삶을 잘 집약시키고 있다.
만해는
중이냐?
중이
아니다.
만해는
시인이냐?
시인도
아니다.
만해는 한국 사람이다. 뚜렷한 배달민족이다. 독립지사다.
항일투사다.
강철 같은 의지로 불덩이 같은 정열로 대쪽 같은 절조로 고고한
자세로
서릿발 같은 기상으로 최후 일각까지 몸뚱이로
부딪쳤다.
마지막 숨 거둘 때까지 굳세게
결투했다.
꿋꿋하게 걸어갈 때 성역(聖域)을 밟기도
했다.
보리수의 그늘에서 바라보면 중으로도 선사(禪師)로도
보였다.
예술의 산허리에서 돌아보면 시인으로도 나타나고 소설가로도
등장했다.
만해는 어디까지나 끝까지 독립지사였다.
항일투사였다.
만해의 진면목은 생사를 뛰어넘은 사람이다. 뜨거운 배달의
얼이다.
만해는 중이다. 그러나 중이 되려고 중이 된 건
아니다.
항일투쟁하기
위해서다.
만해는 시인이다. 하지만 시인이 부러워 시인이 된 건
아니다.
님을 뜨겁게 절규했기
때문이다.
만해는 웅변가다. 그저 말을 뽐낸 건 아니고 심장에서 끓어오르는 것을
피로 뱉았을
뿐이다.
어쩌면 그럴까? 그렇게 될까? 한 점 뜨거운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도사렸기
때문이다. 출처 : 블로그 > 살맛 나는 세상이야기들... | 글쓴이 : 크레믈린 [원문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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