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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10일 연중 제9주간 토요일
제1독서 : 토빗 12,1.5-15.20
복 음 : 마르 12,38-44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38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이르셨다.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39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40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41 예수님께서 헌금 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
42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43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4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전에는 글 쓰는 것을 부담스러워했지만,
20년 넘게 글을 쓰다 보니 오히려 즐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글을 써야지.’라고 마음을 먹는다고 곧바로 글이 써지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생각을 해야 하는데, 이 생각을 돕는 것이
바로 일상의 단편들과 책 읽으면서 얻는 영감들입니다.
그래서 계속 메모합니다.
특히 포스트잇을 가지고 다니면서 제 생각을 메모합니다.
그리고 글을 써야 할 때, 이 메모를 띄었다 붙이면서 구성하고 정리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글을 완성합니다.
누구는 일반 메모지를 사용하지,
왜 훨씬 비싼 포스트잇을 쓰냐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그 이유는 포스트잇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포스트잇은 적당한 접착력이 중요한데,
오래되면 자연스럽게 접착력이 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접착력이 떨어지기 전에 모두 사용하기 위해 팍팍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이 포스트잇을 주신 분이
2016년 주님 곁으로 가신 최기산 보니파시오 주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교구청에서 근무할 때, 연말에 마니또를 해서 선물을 나눴는데
그때 저의 마니또가 주교님이셨고,
제게 어마어마하게 많은 포스트잇 뭉치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포스트잇을 쓸 때마다 주교님이 생각납니다.
워낙 글을 잘 쓰셨던 주교님이시라 저 역시 글을 쓸 때 도움을 받는 것만 같습니다.
본인에게 의미 있는 물건들이 있습니다.
이를 통해 떠오르는 생각들이 있지 않습니까?
특히 좋은 의미는 미소를 띠게 됩니다.
저 역시 남에게 의미를 주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나쁜 의미가 아닌 좋은 의미를, 화를 내게 하는 의미가 아닌
기쁨을 주는 의미가 되었으면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참 의미로 다가오시는 것처럼,
우리도 그 모범을 따라 이웃에게 의미 있게 다가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헌금함에 돈을 넣는 사람들을 보고 계셨습니다.
부자들은 자랑하듯 큰돈을 넣었지만,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지요.
이를 보고 예수님께서는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마르 12,43)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는 제물의 양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제물을 바치는 마음, 솔직함, 겸손함 등이 필요했습니다.
다른 부자는 자기를 드러내기 위한 욕심과 이기심을 봉헌했지만,
이 가난한 과부는 자신의 온 정성을 봉헌했습니다.
주님께 진정한 의미로 다가온 사람은 가난한 과부였던 것입니다.
남에게 의미를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부정적인 의미가 아닌 긍정적인 의미를, 나쁜 의미가 아닌 좋은 의미로
주님의 뜻을 세상에 드러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 인정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일부는 전부보다 많을 수 없습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초등학교 2학년 학생에게 숙제로 ‘우리 집 자랑거리’를 써오라고 하였답니다.
그런데 그 자랑거리를 보니 “아파트가 넓다, 차가 좋다. 대형스크린 텔레비전이 있다.”등
물질적인 것들을 적어 온 학생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정말 물질이 정신을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나 봅니다.
핸드폰도 최고급 사양으로 가지고 있지 않으면 왕따당한다고 합니다.
앞으로는 AI 로봇의 지배를 받고 사는 것은 아닌지 걱정입니다.
복음을 보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자들은 큰돈, 많은 돈을 넣었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습니다.
렙톤은 당시 통용되는 화폐단위의 최소단위 입니다.
그렇다면 금전적 가치를 따질 수 없는 하찮은 금액입니다.
우리식으로 하면 십 원짜리 동전 두 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사람은 부자가 아니라 가난한 과부였습니다.
그 이유를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넣었기 때문이다”(마르12,43-44). 하고 말씀하십니다.
부자는 가진 것 중 일부를 내었고 가난한 과부는 있는 것 전부를 내었습니다.
일부는 액수가 얼마든 전부보다는 많을 수 없습니다. 전부는 액수가 적어도 부분보다 많습니다.
그리고 마음과 사랑을 봉헌한 것과 생색내기로 봉헌한 것은 분명 차원이 다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가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2코린8,9).
세상은 돈을 좋아합니다. 많은 돈을 가지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돈을 좇아 동분서주합니다. 그러나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마음입니다.
초등학생들이 벌써 물질을 자랑거리로 삼는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렇게 만든 것이 바로 우리 기성세대입니다.
우리가 어렵고 힘든 가운데에서도 기쁜 마음으로
그리고 민첩하게 자선을 베푸는 삶을 살았더라면 그것을 배웠을 것입니다.
사실 과부의 헌금이 소중한 것은 가진 모든 것을 남김없이 바쳤기 때문입니다.
남김없이 바칠 수 있는 마음을 언제나 간직할 수 있을지……
무엇을 봉헌하든 사랑의 마음으로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생계야 어찌 되든 재산을 다 팔아 성당에 바치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분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재물이든 시간이든 근심 걱정, 내면의 상처까지도
온전히 주님께 맡길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손희송).
오래전 일입니다. 컨테이너 박스에 거처를 삼으시고 살고 계시는
아가다 할머니로부터 귀중한 선물을 받았습니다. 네 잎 클로버입니다.
전날 들에서 발견했는데 신부님께 행운의 복을 빌어주려고 가져오셨답니다.
시들까 봐 물컵에 담아서!
저는 아가다 할머니의 모든 것을 받았습니다.
사랑이 담긴 네 잎 클로버는 오래도록 기억될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LA에 강의를 다녀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지난 4월, 성지순례를 함께 했던 자매님을 만났습니다.
자매님께서 평화신문 후원금을 주셨습니다.
성지순례에서 은총을 많이 받았다면서 감사의 마음으로 후원금을 내신다고 하였습니다.
우연히 자매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자매님은 물품 판매 봉사를 하였는데 조금이라도 이익이 남으면 모두 본당으로 봉헌했다고 합니다.
3년이 지났을 때 이익금을 계산하니 상당히 많은 액수였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수고한 보답으로 성지순례를 보내드렸다고 합니다.
자매님은 그 성지순례의 비용도 기꺼이 봉헌하였다고 합니다.
성지순례 중에 하느님께 청원기도를 하였는데
하느님께서 들어주셨다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후원금을 냈다고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봉헌하니 하느님께서도 축복을 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봉헌에 인색한 형제님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집이 3채나 있고, 지금도 열심히 일해서 여유로운 생활을 하는 형제님입니다.
아내는 형제님이 원하지 않아서 익명으로 봉헌한다고 합니다.
형제님은 나중에 가족들이 편하게 살 수 있도록 돈을 아낀다고 합니다.
열심히 번다고 합니다.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마치 창고에 재물을 가득 쌓지만
결국 하느님께 가지 못하는 부자의 이야기 같아서 안타까웠습니다.
지난 ‘Mother’s Day’ 때였습니다.
하느님의 품으로 가신 어머니 생각이 났습니다.
LA에 방문하면서 그동안 도움을 주셨던 분들에게 꽃다발을 선물로 드렸습니다.
그분들이 제게 주신 도움에 비하면 아주 약소한 선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선물을 받으신 분들은 무척 기뻐해 주셨습니다.
돌아보니 저는 많은 선물을 받았습니다.
부활절에는 축하카드를 많이 받았습니다.
환갑을 맞이한 생일이라고 축하의 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행복하다.’라고 하셨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이들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느님의 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재물을 나누는 데는 소홀했지만 생각하니 저도 나누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매일 아침 ‘복음 묵상’을 나누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의 넉넉한 헌금보다 가난한 과부의 정성어린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저의 묵상이 영적인 깊이가 있지는 않지만,
그저 가난한 과부의 정성이 담긴 헌금처럼 작은 나눔이 되면 좋겠습니다.
매달 신문사의 구독료 봉투 작업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의 나눔도 가난한 과부의 정성어린 헌금처럼 주님께서 사랑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신앙인들은 신앙 안에서 천사들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미카엘 천사처럼 나의 신앙을 굳게 지키며,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들에게 담대히 신앙을 증거 해야 합니다.
신앙이 약한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가브리엘 천사처럼 나의 뜻이나 나의 욕심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고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라파엘 천사처럼 신앙의 여정에 좋은 안내자가 되어야 하고,
상처 입은 이웃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위로해 주어야 하겠습니다.
‘積善之家 必有餘慶’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선을 베푸는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가 생긴다는 뜻입니다.
가난하지만 선(善)을 쌓은 집안은 언젠가는 경사를 맞게 된다는 말입니다.
나의 마음에 무엇을 쌓아 놓을 것인지 생각하면서 오늘 하루를 지냈으면 합니다.
“선을 행하여라. 그러면 악이 너희에게 닥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과부의 헌금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께서는 먼저 율법학자들을 조심하라고 하신다.
그들은 율법을 중요하게 여기고 실천하지만, 외적인 것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인다.
그들은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잔칫집에서 윗자리에 앉는 것에 더 신경을 쓴다고 하시며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도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고 하신다.
내적인 것에 관심이 없고 껍데기에만 신경 쓰는 그들의 불행을 말씀하신다.
예루살렘 성전 안에는 부인들을 위해 마련된 13개의 헌금 궤가 있다.
그것들은 매일 드리는 제물이나 성전의 비용을 위한 헌금 궤이다.
많은 사람이 상당한 액수의 헌금을 하였다.
그런데 한 과부는 동전 한 닢에 해당하는 렙톤을 헌금 궤에 넣었고,
예수께서는 그 과부를 칭찬하셨다.
그것은 그 과부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을 모두 희생하고 바쳤다는 데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과부의 헌금에 관한 이야기는 신학적으로 더 풍부한 의미를 담고 있다.
무엇보다도 과부의 동전에 관한 이야기가
율법학자들에 대한 가혹한 표현과 직접 연결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신앙생활을 겉꾸미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남에게 대우받기를 원하면서도 뒤로는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는다.”(40절).
이렇게 위선에 가득 찬 율법학자들과 단순하고도 충만한 과부의 믿음을 비교하고 있다.
그 과부는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하여 꼭 필요한 것까지도 바쳤다.
과부의 헌금은 그 무게가 아니라 그것을 봉헌한 선한 마음으로 재어진다.
즉 예수께서는 과부가 봉헌한 돈의 양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시고,
그 여인의 아낌없는 마음만 보셨다.
얼마 안 되는 것으로 최선을 다하여 충실히 응답하는 이들은,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 귀퉁이만으로 응답하는 이들보다
더 깊은 신앙을 표현하는 것이다.
마르코는 은총에 호응하지 못하는 율법학자들과,
조건 없이 단순하고 기꺼운 마음으로 응답하는 과부를 비교하고 있다.
자선을 베푸는 데 필요한 것은 마음가짐뿐이다.
비록 지독하게 가난한 사람들 틈에서 살아가면서도
동전 두 닢을 넣는다면 우리는 힘자라는 대로 모든 일을 다 한 것이다.
보리빵 한 조각밖에 없으면서도 그것을 나눈다면
우리는 자선 행위의 가장 중요한 것을 행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이 냉수 한 잔으로 하늘나라를 얻는 것과 같으니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오늘 헌금을 한 과부의 모습을 통하여 자비로운 마음과 믿는 마음을
즉 신앙으로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친 것과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당신의 모든 것을
즉 당신 자신을 온전히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한다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는 삶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오늘의 독서를 통해서 우리는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자비로운 마음과 신앙을 우리에게 주시도록 청하여야 하겠다.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다 넣었기 때문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의 앞부분에서는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엄하게 질타하십니다.
남에게 인사 받기를 좋아하고, 높은 자리에 찾으며,
약한 자들의 재산을 등쳐 먹으면서도 기도는 오래 바치는 위선의 삶을 질책하십니다.
뒷부분에서는 예수님께서 렙톤 두 개를 봉헌한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높이 칭송하십니다.
부자들은 나름대로 여분의 것에서 일부를 바쳤지만,
이 과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기에 가장 큰 봉헌을 한 것이라고 칭송하십니다.
과부의 헌금은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는 '내면적 헌신의 외적인 표시'였습니다.
이는 헌금의 의미가 액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달려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봉헌과 나눔도 바로 이러한 것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마지막 음식마저 내어주었던 사렙다의 과부처럼,
자신이 가진 동전 전부를 내어놓았던 이 가난한 과부처럼,
아니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우리에게 내어주신 예수님처럼,
우리 역시 그렇게 다른 이들과 하느님을 위해
믿음과 사랑으로 마음으로 헌신하여야 할 일입니다.
이는 교회를 위하여 헌금을 많이 해야 한다는 모금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봉헌’의 참뜻을 일깨워 주시고자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 곳곳에서 약한 자와 억울한 자와 가난한 자에 대한
우선적인 사랑과 관심을 강조하십니다.
'참된 봉헌'은 타인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당신께서는 마침내는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참된 봉헌’ 제물로 내어주셨습니다.
사실 이 과부는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인데도, 그의 전부를 바쳤습니다.
대체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의 전부를 바치게 하였을까?
우리는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고 싶은 이를 만났는가?
전부를 건네주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그분을 만났는가?
전부를 내어주고도 가지지 못한 것마저 만들어서라도 주고 싶은, 그런 이를 만났는가?
그렇게 소중하고, 그렇게 귀한 이를 만났는가?
진정 우리가 그분을 만났다면, 어떻게 하면 그분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그런데 ‘예수님의 마음’은 너무도 비싸서 그 어떤 많은 돈으로도 결코 얻을 수가 없지만,
또한 너무도 싸서 ‘단돈 두 닢’으로도 얻을 수가 있는 마음입니다.
그러니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순수한 마음의 지향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마음 안에는 ‘지향’이라는 보화가 있습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분께서는 그 ‘지향’을 보십니다.
마음속 ‘지향’이 순수하면 예수님 마음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아무리 거대하고 큰 일리라도 마음 없이 한다면 결코 예수님 마음을 얻을 수 없지만,
비록 작고 보잘 것 없는 일일지라도 사랑으로 한다면 예수님 마음을 얻게 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일을 잘하느냐 못하느냐, 혹은 크고 거창한 일을 하느냐,
작고 미천한 일을 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니라,
오히려 ‘마음의 지향’이 얼마나 순수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곧 무엇을 하든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는 요한 카시아누스가 수도승의 목표로 제시한 '마음의 순결'(puritas cordis)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지금 내가 하고있는 일을 순수한 마음의 지향으로 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4)
주님!
제 마음의 지향을 깨끗하게 하소서.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사랑의 마음으로 하게 하소서.
전부를 내어놓은 가난한 과부처럼, 목숨을 내어놓은 당신처럼, 산 제물이 되게 하소서.
오직 당신이 저의 전부이오니, 전부를 내어주게 하소서.
아멘.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궁핍한 가운데서 가진 것 모두
김 빈첸시아 수녀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겉모습을 보고 판단하지 말고 올바로 판단하여라.” (요한 7,24)
‘만약 내가 봉헌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헌금함을 바라보고 계신다면?’
한 번 상상해보세요.
예수님이 보고 계시니까 평소보다 좀 더 신경을 쓰게 될 것 같은데요.
나는 무엇에 가장 신경을 쓰고 있을까요?
금액, 의상, 태도 등.
다른 사람보다 특별히 예수님께 잘 보이고 싶다면
오늘 복음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저 가난한 과부가… 더 많이 넣었다.”(7,43)
예수님께 ‘많다’는 의미는 금액이 아닌
“궁핍한 가운데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7,44)입니다.
‘생활비’는 그리스어 ‘비오스’
즉, ‘생명’이라는 뜻으로 ‘자기 자신을 봉헌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내어주신 예수님처럼요.
우리들은 외모를 가꾸는데 많은 돈과 시간을 들입니다.
하지만, 내면을 가꾸는 데는 소홀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예쁘게 다듬는데 많은 시간을 들입시다.
예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고
우리보다 앞서 생명을 봉헌하신 주님의 사랑을 내 안에 간직하여
형식적이 아닌 전적인 봉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면 좋겠습니다.
[출처] 마르 12,38-44 연중 제9주간 토요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