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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위덕대학교 일본언어문화학과 교수
지난 밤에 오랜만에 앨범을 정리하다가 1997년 일본 홋카이도(北海道) 아사히카와(旭川)에 있는 작가 미우라 아야코(三浦綾子) 문학기념관에서 찍은 사진을 보고, 오래전에 읽은 『빙점(氷点)』이 생각나, 『빙점』에 등장하는 등장인물을 생각해 보기로 했다.
1997년에 내가 연구하는 작가 아베 고보(安部公房)의 발자취를 찾고자 아사히카와에 살고 있는 이종사촌 여동생을 만나러 갔었다. 아사히카와에는 옛 원주민이라고 일컬어지는 아이누족 부락이 있는 곳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고, 미우라 아야코 문학기념관이 있어서 유명한 곳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미우라 아야코 작가는 생존해 있었고 그로부터 2년 후인 1999년 오랜 투병생활을 마감하고 세상을 달리했다. 우리나라에 있어서 소설 『빙점』은 일본소설 중에서도 일찍이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작품 중 하나다.
『빙점』은 1964년 일본 <아사히신문> 1천만엔 현상 소설 공모에 당선된 작품으로 당시 일본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얻은 작품이다. 이 작품이 한국에 번역 소개된 것이 다음해인 1965년이다. 이렇게 빨리 번역 소개되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 뒤 이 소설은 일본어서 영화로 제작되어 다시 한 번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영화 『빙점』이 만들어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우선 소설 제목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빙점(氷點)은 어는점을 말한다. 물의 어는점은 0℃. 아무리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이어도 0℃보다 0.000…001℃만 높아도 물은 얼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빙점인 어는점은 ‘녹는점’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니까 얼음이 0℃보다 0.000…001℃만 높아도 얼음은 녹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말하는 빙점은 물이 어는점이 아니라 ‘마음이 어는점’인 동시에 ‘마음이 녹는점’이기도 하다. 인간의 마음이 어떠할 때 얼고, 풀리는지 잘 그려낸 작품인 것이다.
대략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병원장 스지구치 아내 나쓰에는 남편 병원에 근무하는 젊은 의사와 둘만 시간을 보내려고 세 살 난 딸아이를 밖에서 놀라고 내보낸다. 밖에서 놀던 아이는 유괴당하고 결국은 죽고 만다.
남편은 딸아이가 죽게 된 것이 아내와 젊은 의사와 불륜이라고 생각하고 아내에게 복수를 하기로 마음먹는다. 그 복수라고 하는 것이 생후 한 달된 범인 딸을 입양해서 키우는 것이었다. 딸아이 이름을 요코라고 짓고, 나쓰에는 죽은 딸아이가 살아 돌아온 것처럼 생각하면서 키운다. 겉으로 보기엔 화목해 지는 듯 했지만, 나쓰에가 남편 서재를 청소하다가 요코가 범인 딸이라는 사실이 적혀있는 메모를 발견하고 만다. 남편에 대한 배신감과 살인범 딸 요코에 대한 애증으로 서로 내부 갈등이 시작되고, 인간이 어디까지 추악해 질 수 있을까를 잘 그렸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는 요코에게 마음을 닫아버린 나쓰에, 갑자기 차가워진 엄마 태도로 친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요코는 그래도 묵묵히 그 상황을 잘 견뎌낸다.
예쁘게 성장해가는 요코에게 질투를 느끼고 미워하는 엄마 나쓰에, 그런 요코를 보고 사랑할 수 없는 아빠 스지구치. 이런 등장인물 설정과 내용이 억지스럽고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책을 읽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빠져들게 되는 게 이 『빙점』이 갖는 마력이라 하겠다.
나쓰에는 요코가 아들 친구와 사랑에 빠진 것을 보고 살인범 딸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이 아니라고 생각해 요코가 살인범 딸이라는 것을 폭로하고 만다. 이 사실에 충격을 받은 요코는 자살을 꾀하고 만다.
그러나 사실은 요코가 살인범 딸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자, 스지구치와 나쓰에는 죄책감에 절규하고 오열을 한다. 스지구치는 어떻게 해서든지 요코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요코가 살아날 거라는 한 줄기 희망을 남기고 소설은 막을 내린다.
여기까지 내용이 『빙점』이고, 많은 독자들이 요코를 죽이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자 1970년 『속빙점』을 발표해서 요코를 살려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용서하는 것도, 내 마음이 어느 쪽으로 움직이는 가를 잘 느끼게 되면, 미워하는 마음을 녹게 하고, 용서하는 마음으로 기울게 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출처 :장영희 교수님 팬클럽 원문보기▶ 글쓴이 : 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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