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중물을 주눅들게 하는 S, N, D의 눈총을 의식하지 않겠다. '유등천 다리 이야기' 글을 올린 후, 산행에서 만난 회원들이 용기를 무자게 북돋아주셨다. 따라서 글 길게 쓴다고 아무리 싸늘한 눈흘김을 해도 꿋꿋하게 써내려 가리라.ㅎㅎ
지난 글에서 멈춘 다리 이야기를 다시 하기로 한다. 유등교 - 도마교 - 호남선 철교 - 버드내다리 - 복수교 - 사정교 - 안영교 - 만성교 - 방아미다리 - 침산교순이다. 침산교에 이르면 대전시 경계내에 있는 모든 다리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마중물이 우리 사는 곳 이야기 하는 것은 내가 사는 곳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말이 안될성싶어서다. 내가 먼저 나 자신을, 내가 사는 곳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남이 나를, 내가 사는 곳을 사랑하겠는가.
그런데 여기엔 대전제가 필요하다.
'사랑하려면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는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문화재청장을 지낸 유홍준 교수가 남긴 유명한 말이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서문에서 언급했다.
사실 이 말은 조선 정조때 문장가인 유한준의 글에서 비롯된다.
'알면 진정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면 진정 보게 되고...'
유교수가 답사기 서문 글로 적절히 버무려 오늘날 명언을 남겼던 것이다.
진정한 사랑을 하려면 상대를 진정 알아야 하고, 결국 진정한 가치를 보게 되지 않을까.
각설하고,
태평교에서 유등천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유등교(柳等橋)다. 중구 태평동과 서구 도마동을 잇는 다리다.
유등교란 다리이름은 유등천이란 하천이름에서 비롯된다. 또한 유등천의 유래는 천변에 버드나무가 많이 있었다는 데서 시작된다. 참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다. 유등천과 유등교란 이름은 전국에 산재해 있다. 유등교는 경북 청도, 경남 창원, 강원 강릉 등지에도 있다.
유등천은 우리말로 '버드내'라 한다. 처음엔 순수 우리말이 있었고, 그 다음에 이를 표기하는 한자어가 등장했으니 '버드내'에 촛점을 맞춰 무슨 뜻인가 살펴볼 일이다. 천변에 버드나무가 많이 있어서라는 말은 일반론적인 유래이고, 어느 지역에선 하천의 물길이 쭉 뻗어 있어서 '뻗은내'라 했다가 '버드내'가 됐다고 한다. 우리 지역 모교수님께선 태평동의 '벌말'과 가장동의 '들말'에서 유래했다고 피력한다. 즉 각각의 마을 앞자를 따서 '벌들내'하다가 발음하기 편한 '버드내'가 됐단다. 참고로 1920년대 초반까지 유등천 물길은 지금의 서남부터미널에서 두 줄기로 나눠져 한 줄기는 태평동을 가로질러 흐르고, 또다른 물줄기는 가장동을 관통해 흘렀다. 지금의 삼천교근방에서 합수(合水)된 것으로 당시 지도상에 나타난다. 이를 일제가 치수사업을 통해 지금의 물줄기로 통합했다. 따라서 '벌들내'의 어원도 전혀 근거없다고 할 순없다.
슬슬 글이 길어지는 거같아 은근히 걱정이 밀려온다. 자꾸만 S, N, D 의 험상궂은 얼굴이 눈앞에 떠오른다. 대단한 트라우마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시작한 글 브레이크없는 벤츠다. 당분간 그들을 피해다니면 되겠지, 뭐!ㅎ
유등교와 유등천을 사이에 두고 버드내아파트와 버드내중학교가 서로에게 미소짓는다. 버드내아파트자리엔 과거 대전피혁이 있었다. 소가죽 가공과정에서 얻어지는 수구리로 콩나물 듬뿍 넣고 끓인, 얼큰한 매운탕을 생각하니, 술맛이 당긴다. 버드내중학교는 충남고가 둔산으로 이전함에 따라 그 자리에 새롭게 개교했다.
버드내중에 접해있는 도마큰시장이 오랜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1970년대초에 들어선 것으로 알고 있다. 수백개의 점포가 영업을 하고 있는데, 헐렁한 서민들의 주머니사정을 헤아려주고 수많은 애환이 서려있는 재래시장이다. 또한 엄청나게 저렴하고 의외로 맛난, 소문난 맛집들이 여기저기 많다. 대둘인들이 산행 끝내고 자주 갔던 '3천원짜리' 칼국수집. 먹으러 가본 지 꽤 돼 안부가 궁금하다.
도마큰시장은 그 옛날 1970년대, 80년대 대전피혁, 원미섬유 등의 근로자들이 반찬거리사러 애용하던 시장이었다. 복수동 원미섬유자리엔 효성타운아파트가 들어서있다. 대전피혁과 원미섬유는 당시 효성그룹 계열사였다.
유등교를 지나면 도마교(桃馬橋)가 우릴 반긴다. 중구 산성동과 서구 도마동을 잇는다. 산성동 동명(洞名)은 백제시절 삼국사기에 나오는 사정성(沙井城)이 있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또한 이로부터 연유된 '사정동(沙亭洞)'이란 법정동도 따로 있으니, 산성동과 사정동간에 동이름 적통을 놓고 다툴 수도 있겠다. 도마동의 유래는 애매하다. 왜 복숭아 도(桃)자를 썼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일제가 행정구역 변경을 하면서 왜곡시키지 않았나 추정한다. 그 이전 문헌에 이 지역의 지명으로 도동(道洞), 도동현(道洞縣), 손도동(孫道洞), 박도동(朴道洞) 등이 나타난다. 이 곳에 사는 양반네들이 자신들이 사는 동네를 추켜세워 부른 이름들이다. 이에따라 요즘은 길 도(道)를 써 道馬洞이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고 실제로 그렇게 쓰기도 한다. 고려말조선초 내동, 가장동, 도마동, 변동 등지는 부안 임씨, 충주박씨, 밀양손씨 세거지였다. 박씨와 손씨는 임씨의 사위들이었다. 세 성씨는 당시 이 지역에서 대단한 권문세족이었다.
다음은 호남선철교다리가 나온다. 청마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아이들의 담력시험장이었다고 한다. 서울쪽에서 빵~~하는 기적소리나면 철교다리위를 내달렸단다. 뛰어가는 속도가 늦어 기차가 가까이 뒤쫓아오면 다리 침목아래로 잽싸게 내려가 매달렸다고 한다. 웬만한 강심장은 시도조차 못할 것이다. 기차기관사는 얼매나 놀랐을까? 기관사는 지나가면서 참말로 거친 욕을 한 가마니 쏟아놓고 갔단다. 청마님은 어렸을 때부터 무진장 욕을 얻어먹었기때문에 백세까지 누리리라. 철교직전 좌안의 효성타운아파트는 원미섬유자리임을 이미 언급한 바 있으니, 더이상의 설명을 생략한다.
다음은 버드내다리. 중구 산성동과 서구 복수동을 잇는다. 또다시 버드내 얘기하면 식상할 거같아 또다시 과감하게 생략하기로 한다.
다음은 복수교(福守橋)다. 중구 산성동과 서구 복수동을 잇는다. 복수동에는 고려시대 복수소(福守所)가 있었다고 한다. 특수행정구역인 향, 부곡, 소의 하나에 해당된다. 향, 부곡민은 농업에 종사하고, 소민은 수공업, 광업 일을 했다고 한다. 예전 사학계(史學界)에선 천민집단구역으로 해석했으나 최근연구에서 최종적으로 평민집단거주구역으로 결론지었다. 다만 세금과 부역이 엄청나게 부과됐다고 한다. 이들 지역 거주민은 대부분 피정복민이거나 모반을 했던 사람들였을 것이란다.
다음은 사정교(沙亭橋)다. 중구 사정동과 서구 복수동을 잇는다. 사정동은 백제시대 사정성에서 비롯됐음을 언급했으니, 또한 부연설명 생략한다. 다만 백제시대엔 정 자(字)가 우물 정(井)자였는데, 지금은 정자 정(亭)자를 쓴다. S, N, D는 마중물이 걸핏하면 설명을 생략하는 등 짧게 쓰려고 노력하는 것을 가상히 여기고 어여삐 봐줄 거라 기대해 본다.ㅎㅎ
다음은 안영교(安永橋). 중구 안영동과 중구 안영동을 잇는다. 좀 이상하지 않은가.유등천이 중구와 서구의 경계를 가른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나 안영동부턴 아니다. 안영동이 원래 유등천을 가운데 두고 양안(兩岸)에 걸쳐있고, 서구면적이 매우 큰 편이니 중구에 양보해 안영동은 중구에 속하게 됐다는 생각이다. 이건 순전히 마중물의 독자적 추측이다.
안영동의 동명유래는 편안(安)함을 영(永)세토록 누리는 지역이란 뜻이란다.이건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양반들의 바램이었을 것이다. 안영동의 첫마을은 원안영(元安永)이다. 복수동에서 상류쪽으로 쟁기봉아래 절벽(청수바위)길을 지나면 오래된 느티나무가 마을을 지키고 있다. 이 일대가 그 옛날 원안영마을이다. 사육신을 따라 순절한 박심문선생의 고향이다. 그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왔던 밀양박씨 동족부락이었다. 마을안쪽 산아래에 사육신의 한분인 박팽년선생과 박심문선생의 위패를 모신 창계숭절사가 자리하고 있다. 창계(蒼溪)는 유등천물이 맑고 푸르다고 해서 달리 부르는 말이다. 이밖에 유등천을 칭하는 말은 천변에 쑥이 많이 난다고 해서 쑥 애자를 써서 애천(艾川)이라 했고, 또한 유천, 유포천이라고도 했다.
유등천을 조금 거슬러올라가면 뿌리공원으로 들어가는 만성교(萬姓교)가 우릴 맞이한다. 만성은 수많은 성씨들을 뜻한다. 뿌리공원내를 거닐어보면 그 뜻을 알게 될 것이다.
그 다음은 방아미다리다. 방아미는 침산(砧山)을 의미한다. 다듬잇돌 침(砧)자를 어디에선가 봤을 것이다. 바로 수침교의 침자가 그렇다.
그 다음 다리는 침산교(砧山橋)다. 방아미마을 뒷산이 침산이다. 산의 모양이 그렇단다. 침산동도 안양동처럼 침산교를 중심으로 유등천 양편에 걸쳐있다. 침산교가 대전시계안에서 마지막 다리다. 침산동의 놋점골을 지나 유등천을 거슬러 돌아가면 금산군복수면지량리다.
이제 그만 쓸란다. 쓰면서 엄청나게 길어지는 것을 자제하느라 힘들었다ㅎㅎ
대전시계안 유등천에 놓여진 다리들을 깜냥껏 썰을 마구 풀었다. 대전을 좀 알게 되는 계기가 됐다면 두고두고 감사할따름이다♡♡♡
첫댓글 상기(上記) 글을 '다리들이 울고 있다'며 용기를 북돋아주신 아마쓰님께 바칩니다♡
S.N.D
험상궂은 벗님 ㅋ.
교육 실시합니다
덕분에 좋은 공부를 하였습니다.
좋은 자료로 제겐 매우 도움이 됩니다. 담아 두겠습니다.
마중물님 덕분에 공부 많이 했어요.감사합니다~~^^
오!최고!감사합니다
대전에서
토박이로 살면서 몰랐던 '다리이야기'
글을 보면서 많은것을 알게되여 많은 도움이 되였네요.. 감사함니다..
공부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