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생 단체의 시계가 멈췄다. 분침은 여전히 돌고 있지만, 그 안의 사람과 세대는 정지되어 있다. 울산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서 한 때 지역사회의 버팀목이자 시민정신의 상징이었던 자생단체들이 노령화의 그늘 속에서 점점 숨이 가빠지고 있다. 한국자유총연맹, 바르게살기운동, 새마을운동, 자율방범대 등은 여전히 지역의 질서와 봉사의 최전선에 서 있지만,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청년의 부재가 조직의 생명력을 갉아먹고 있는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수십 년간 헌신으로 지역사회를 지탱해 온 기성세대의 공로는 결코 작지않다. 그러나, 지금의 문제는 그들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자리를 이어받을 다음 세대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회의실의 빈 의자, 행사장의 익숙한 얼굴, 젊은 목소리가 사라진 자생 단체의 풍경은 마치 멈춰 선 시계처럼 지역사회의 흐름 자체를 정지시킨다.
자생 단체의 노령화는 단순한 인력구조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지역의 시민적 역동성, 사회적 자본의 순환, 그리고 민주적 리더십의 재생 능력이 약화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세대가 교체되지 않는 조직은 결국 자정능력을 잃고, 봉사와 헌신의 가치는 형식으로만 남게 된다. 청년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관행이 자리하고, 혁신 대신 ‘유지’가 조직의 목표로 바뀐다.
문제의 핵심은 다른 데 있다. 청년들이 ‘참여할 이유’를 잃었다는 것이다. 자생 단체 내부의 운영 문화는 여전히 연륜 중심, 서열 중심의 수직적 구조에 갇혀 있다. 권위적 회의문화, 폐쇄적 인맥 중심의 인사 관행, 명목적 참여를 강요하는 분위기는 청년이 자신의 역량을 펼칠 공간을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혁신의 문을 닫고, 결국 청년은 자생단체의 주변부로 밀려난다.
청년들은 과거의 방식으론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그들은 가치 중심의 참여, 자율적 협력, 디지털 기반의 공감 등을 중시한다. 그러나 자생 단체의 활동은 여전히 구두지시와 회의 중심, 관행 중심으로 운영된다. 청년의 언어와 감수성이 닿지 않는 조직은 자연히 젊은 세대를 잃게 된다. 결국 자생 단체는 봉사의 조직이 아니라 ‘추억의 공동체’로 머물 위험에 처해 있다.
이제 자생 단체의 패러다임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세대교체는 나이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구조를 바꾸는 일이다. 청년이 스스로의 언어로 말할 수 있도록 조직을 수평화하고, 프로젝트 중심의 실질적 리더십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단체 내 청년위원회를 형식적 명분이 아닌 실질적 의사결정 주체로 전환하고, 청년에게 기획·집행·홍보의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
또 지역 대학, 청년단체, 사회적기업 등과의 연계형 생태계 구축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자생 단체가 더 이상 폐쇄적 조직으로 머물지 않고, 지역 문제 해결의 플랫폼으로 진화되어야 한다. 청년들이 봉사의 대상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하는 주체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디지털 홍보, 청년 리더십 아카데미, 세대 융합형 멘토링 제도 등과 같은 제도적 지원도 병행되어야 한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도 단순한 예산 지원을 넘어, 세대 융합형 자생 단체 육성 정책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지원의 초점을 행사나 운영비에서 탈피하여 ‘인적 교류’와 ‘리더십 양성’으로 옮기고, 청년이 자생단체에서 사회적 리더십을 경험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지역의 지속가능성은 재정이나 건물에서 오지 않는다. 그것은 세대가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관계의 힘 속에서 비롯된다.
자생 단체의 시계를 다시 움직이게 할 시간은 청년에게 있다. 그들의 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에게 길을 터주고, 그들의 언어를 경청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그 시간은 반드시 우리 곁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 때 비로서 자생 단체는 다시 현재 진행형의 공동체로 살아 숨 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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