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종건문제: 젊은 황제 허나 숙부의 반란으로 자살했다.
단종:어린나이에 왕이 되었으나 숙부의 반란으로 귀양간후 죽어야 했다.
성조영락제:반란으로써 황위에 올랐다. 자기편을 만드는데 주력하였고 환관들을 특히 많이 등용했다.(나중에 국가가 무너지고...)
세조:반란으로써 왕이 되엇다. 태종과 달리 자기편을 많이 건들진 않았고 훈구파란 꼴통들이 생기게 된다.
인종홍희제:성조의 장남으로써 홍희제는 즉위하자마자 능숙한 정치를 펼쳐 정난의 변 당시 멸문당한 일가의 신원을 회복하는 등의 선정을 펼쳤으나 1년도 채 재위하지 못한 채 죽고 말았다
예종:세조의 차남. 세조가 쿠데타로 즉위한 뒤에도 원래 그는 왕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세조의 장남인 의경세자와의 나이차가 워낙 많았는데다 의경세자는 여러모로 유력한 후계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운인지 음모인지 의경세자가 만 20세의 나이로 급사하자 세자가 되었고, 세조가 죽자 정통으로 왕위를 이어받는다. 하지만 몸이 안 좋았고 1년 후 죽고 말았다 한편, 조선의 최고 법전인 <경국대전>이 사실은 예종의 치세에 완성되었으나, 반포하기 전 예종이 급사해 그 업적은 성종이 이어 받았다..(대가 끈킴)
선종선덕제: 영락제 이후의 명나라 황제들 중 그래도 명군 축에 들어가는 인물로 어린 시절부터 똑똑하고 과감했으며 무예에도 소양이 있었는지 할아버지 영락제의 총애를 받았다. 특히 잦은 원정을 벌였던 영락제가 어린 선덕제를 원정에 자주 대동할 정도였다고. 그에 비해 아버지 홍희제는 문(文)에 치우쳤던 스타일이라 영락제는 홍희제보다 손자 선덕제를 더 후계자로써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한다 영락제가 죽고 홍희제가 즉위했으나 이듬해 바로 죽는 바람에 27세의 나이로 명나라 5대 황제에 올랐다.
당시에 '3양'이라 불렸던 양사기, 양영, 양부를 필두로 한 명신들을 중용했고 중국 황제치고는 대단히 검소하여 궁을 화려하게 꾸미거나 지나친 진상을 금지했다. 외정 면에서는 올량합 부족의 침공을 격퇴했으나 영락제와는 달리 대대적 대외정책은 쓰지 않았다. 이런 선정으로 전임 홍희제의 묘호인 '인종'과 선덕제의 묘호인 '선종'을 따서 이 시대를 '인선의 치(仁宣之治)'라 부르며 명나라 최고의 전성기로 평가받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예술감각이 뛰어나 글씨와 그림에 두루 능했고 특히 그림은 송나라 휘종에 비견될 만큼 뛰어났다고 한다. 그런 만큼 명의 문화 발전에도 기여했다. 다만 매우 사냥 매니아여서 조선에 해청(매과의 새)를 비롯한 각종 동물들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환관을 교육시키는 내서당을 설립해 권한을 강화했고 이는 명에서 환관들이 나라를 좀먹게 되는 한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사냥과 더불어 귀뚜라미 싸움을 워낙 좋아하여 싸움잘하는 귀뚜라미를 찾는 내시들을 전국 각지로 보내 이들에게 특혜를 준 탓에 각 영지에서 횡포가 심했다
성종:세조의 손자로, 세조의 장남인 의경세자(덕종으로 추존됨)의 둘째 아들 7년후, 성인이 된 성종은 친정을 개시했고 세종과 세조의 치적을 계승하여 조선을 발전시키는데 진력했다. 세조가 편찬을 시작했던 조선의 헌법에 해당되는 경국대전을 완성해 반포했고, "여지승람","악학궤범","동문선"같은 서적을 편찬했다. 이런 면모는 세종과 비슷한데, 세조에 의해서 사라진 집현전을 대체할 홍문관을 새로 창설하고 사가독서제를 시행해 인재들의 육성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동물을 유달리 좋아했는지 궁궐에서 동물들을 많이 기르기도 했다. 고양이나 개, 사슴, 노루, 매는 물론 심지어는 백조나 원숭이까지 길렀다고 한다. 성종 때가 성리학적 유교정치의 전성기였던 만큼 이런 점을 당시 정계에 진출하고 있던 사림 간관들에게 크게 비판받기도 했고 성종 본인도 간관들과 이 문제로 설전을 벌인 기록도 있다. 특히 성종의 원숭이는 류큐에서 보내온 원숭이였는데 이 원숭이에게 옷을 입히는 문제로 좌부승지와 설전을 벌였다. 좌부승지 손비장은 "원숭이에게 입힐 옷 한 벌로 하나의 백성을 추위에 떨지 않도록 할 수 있습니다"라는 논리로 공격하자 성종은 "외국에서 바친 것을 추위에 떨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반박했다. 그러나 신하들의 융단폭격을 버티지 못하고 결국 놔 준 동물들도 많다고 한다. 사슴이나 매는 실록에서도 놔 주었다는 기록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활을 쏘거나 시를 쓰면 취미에 빠져 나랏일 팽개칠 징조라고 태클, 구리통으로 수조를 만들었더니 '너 사치하는구나!' 라고 태클, '무신을 쓰랬더니 온 조정을 군인들로 채울 생각이냐?' 라고 태클, 역관, 의관에게 동,서반 직을 주랬더니 '위 아래도 없는 왕이구만' 하고 태클 허나 성종은 짜증은 낼 지언정 오냐 내가 잘못했다면서 끝내 양보를 해버렸다.
영종정통제:선덕제의 장남이다. 토목보의 변을 일으켜 사상최초로 황제가 인질이 되는 추태를 보인다. ㅉㅉ
연산군: 성종의 장남 조선사상최대의 폭군
대종경태제:토목보에서 오이라트 군에게 정통제가 잡혀가는 변을 당하자, 명의 조정은 급히 새로운 황제를 옹립하고 북경을 사수할 것을 결정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 명나라 황실에는 나이도 적절하고 황제의 동생이기도 한 주기옥이 있었다. 그래서 주기옥은 새로운 명나라의 황제로 옹립되었다 그러나
다음 해, 정신차린 명의 군대가 오이라트족에게 매운 맛을 보여 주고 화의가 성립되자 존재감이 0에 치달은 정통제는 아무 조건 없이 석방된다. 그러나 이미 명나라 황실에는 어엿한 황제가 있었으니, 경태제는 돌아온 형에게 태상황 자리를 주었다. 그러나 정통제의 존재는 경태제에게 아주 큰 위협이 되었으므로 경태제는 형을 억누를 필요가 있었다. 이래서 정통제는 남궁에 유폐당한다.
그러나 조정은 이미 정통제 파와 경태제 파로 나뉘어 버렸다. 그리하여 2년 후 1452년 본래 황태자였던 정통제의 아들 주견심을 폐하고, 자신의 아들인 주견제를 황태자로 책봉하나 주견제는 병으로 다음 해에 죽고 말았다.
그리고 1457년 경태제가 앓아눕자, 정통제 파는 정변을 일으켜 정통제를 다시 황위에 올리고 연호를 천순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경태제는 앓아누운 자리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중종:성종과 정현왕후 윤씨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왕이 되기 이전에는 진성대군으로 불렸다. 연산군과는 이복형제지간이다. 중전의 소생인 대군이었던 탓에 권력투쟁에서 희생양이 될 소지가 다분했었다. 이런 탓에 연산군의 매제인 신수근의 딸 신씨를 부인으로 맞아들여서 연산군 치세 내내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1506년, 박원종 등이 주도한 반정에서 왕으로 추대되어 연산군을 대신하여 왕위에 올랐다. 이것이 중종반정이다. 연산군 시절의 온갖 폐단들을 수습하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애시당초 정통적인 왕위 계승으로 왕위에 오른게 아니라 신하들이 주도한 반정에서 추대된 왕이라는 태생적인 한계 탓에 중종의 치세는 우유부단과 뒷걸음질로 점철되고 만다
첫댓글 흐음... 동시대의 황제와 왕을 비교한건가요? 그냥 유사한 사례를 열거한건가요?
후자
구리로 수로를 만든건 예종대에 테클받은걸로 아는데요.
예종 집권동안 아파서 낑낑대다가 사망크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