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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12일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제1독서 : 2코린 1,1-7
복 음 : 마태 5,1-12ㄴ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2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3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5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6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7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8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9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살아가며 마주치는 세 가지의 문제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나 자신과의 문제.
둘째는 다른 사람과의 문제.
셋째는 사물, 사건(일)과의 문제.
이 세 가지 문제로 우리는 세상 안에서 고민하고 힘들어합니다.
그런데 잘 생각하면 이 문제들의 해결책은 이미 내 안에 있었습니다.
먼저 나 자신과의 문제는 자기 조절력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대인 관계력을 키워서 해결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물과 사건(일)과의 문제는
자기 동기력(동기 부여를 할 수 있는 힘)으로 풀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모든 해결책은 자기 안에 있었습니다.
문제는 자기 안에 있는 그 해결책을 바라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그 해결책이 외부에만 있다고 생각합니다.
외부의 상황이 바뀌어야 문제가 해결되고 그래야 자신이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외부의 일들이 언제나 내 뜻대로 되었을까요?
그렇지 않지요. 그래서 불가능해 보이기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불평불만이 등장하면서 자기를 더 힘들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 ‘행복 선언’을 하십니다.
이는 행복과 불행이 우리가 지향하는 바에 달려 있음을 일깨워 줍니다.
마음이 가난하고, 슬퍼하고, 온유하고, 자비롭고, 박해받는 이들이
현실 속에서 행복해 보입니까?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생각하고, 사람들의 관점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면
행복할 수 없는 조건이 됩니다.
그런데 사람의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사람들의 시선이 아닌, 하느님의 시선을 생각하고, 사람들의 관점이 아닌
하느님 뜻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이가 불행하다고 말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좇으며 세속에 대한 욕심과 이기심이 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보다 분명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부족함을 느끼면서 불행의 한가운데 서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자신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인데도, 남들이 자신을 그 자리로 밀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문제보다 외부 상황의 문제만을 이야기합니다. 당연히 행복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지향하며 살아야 합니다.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하느님이심을 깨닫는 이들은 현실에서 겪는 일들에 집착하지 않고,
작은 일에서도 행복을 찾고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을 신중하게 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남을 비난하거나, 험담하는 말은 삼가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감사의 말, 칭찬의 말, 위로의 말, 희망의 말은 주저하지 말고 하라는 의미입니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 글은 가지 못하는 곳이 없습니다.
역사라는 시간에서 글은 수천 년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글 중에 경전은 인류의 지혜와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성경, 사서삼경, 불경, 꾸란’이 있습니다.
제가 선택한 서품 성구는
“눈물로 씨뿌리는 사람이 기뻐하며 곡식을 얻으리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수고한 사람의 노고를 잊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정했습니다.
뿌리지 않고 거두려는 것은 욕심이라는 생각에서 정했습니다.
“인생삼락과 사단칠정”은 유교의 가르침입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라는 말은
불교의 깨우침입니다.
“가장 완성된 인간이란 이웃을 두루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 이웃이 좋고 나쁜 것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이다.”는
이슬람의 지혜입니다.
소위 ‘악플’이라는 글로 선한 마음에 상처를 주기보다는
‘선플’이라는 글로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면 좋겠습니다.
LA 레지오 피정을 다녀왔습니다.
‘생면부지(生面不知)’인 형제님이 제게 인사하였습니다.
매일 저의 ‘묵상’을 읽는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LA에 피정 강의를 온다는 소식을 듣고 저를 찾아왔습니다.
형제님은 아내와 함께 왔고 같이 사진을 찍었습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글은 쓰는 사람의 인격을 드러냅니다. 글은 쓰는 사람의 철학을 드러냅니다.
인류가 문명과 문화의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도 ‘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의 설법을 가까이 할 수 있는 것도
예수님의 말과 부처님의 말을 기록한 제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뉴욕의 지하철에는 없지만 서울의 지하철에 있는 것이 있습니다.
지하철 스크린 도어에 옮겨 놓은 글입니다.
지하철이 떠났어도 다음 지하철을 기다리면서 글을 읽는 것은 기쁨입니다.
예전에 읽었던 글인데 지금도 생각나는 글을 나누고 싶습니다.
“늦었다고 원망하지 말라.
그래야 하늘을 보고,
뺨을 스치는 바람을 느끼고,
춤추는 꽃을 볼 수 있다.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는다.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
쓰레기통을 비우듯이 욕심과 욕망을 버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행복’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저는 이런 행복을 말하고 싶습니다.
“행복하여라!
코로나 바이러스의 시대를 사는 사람들,
발전과 성장이 모든 것이 아님을 알았을 겁니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음을 알았을 겁니다.
행복하여라!
암인 줄 알았는데 오진이었음을 알게 된 사람들,
하루하루가 참 소중하다는 것을 느꼈을 겁니다.
행복하여라!
오늘 새벽에 눈을 뜬 사람들,
어제 세상을 떠난 사람이 그토록 원하던 하루였습니다.
행복하여라!
신앙을 가진 사람들,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나라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월요일 아침입니다.
하루를 시작하면서 여러분이 ‘행복선언’을 하신다면 무슨 이야기를 하시겠는지요?
예수님의 행복선언과 여러분의 행복선언을 한번 비교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어떤 점이 비슷한지, 어떤 점이 다른지도 알아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시하시는 행복의 기준은
‘비움, 나눔, 희생, 봉사, 평화, 가난’입니다.
이렇게 살면 세상에 채울 것은 적어지지만
하늘나라에 많은 것들을 채울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내 초의 불을 다른 이웃의 초에 옮겨 주어도 내 초는 잃은 것이 없지만
세상은 더 밝아지듯이 우리의 희생, 나눔, 헌신, 비움은
우리를 영적으로 더욱 풍요롭게 해 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그만큼 더 환해지고 밝아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사라지고 말 것을 채우기 위해서 애쓰는 것도 필요하지만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것들을 채우기 위해서 노력하는 한 주간되시기 바랍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신다.”
참 행복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 복음은 산상 설교를 전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왜 산으로 올라가셔서 가르치셨는가?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은 바로 하느님께로 가기 위해 언제나 높은 곳을 향하라는 말씀이다.
사람들을 더 높은 곳, 하느님께로, 더 높은 삶으로 데려가시기 위해서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거룩한 가르침을 알려주시기 위해서이다.
오늘도 진리의 신비를 배우고자 하면 누구든지 교회라는 산으로 올라가야 한다.
“참 행복”에 대한 이 가르침은 “하느님 나라의 헌장”으로 당신 자신을 온전히 비우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회복된 “하느님의 모습”을 완성해 준다.
이제 창세 1,26-27의 거룩한 계획은 창세 2,7의 거룩한 숨으로 확인되었고,
성령과 함께 그리스도에 의해 최종적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참 행복의 말씀은
인간적 논리로는 역설적이고, 이해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참 행복론은 단지 재수 없는 사람들, 실패한 사람들, 약자들의 모습이다.
그래서 이익과 성공 위주의 딱딱한 사회는 이들을 완전히 무시한다.
마음이 가난한 이들, 온유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하느님과 이웃에 대해서 모든 벽을 허물고,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하느님의 나라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비난받는 사람들, 집에서, 길에서, 일터에서, 병원에서, 감옥에서,
실직에서, 퇴출에서 보는 사람들의 본보기며, 언어장애인, 걱정이 많은 사람,
표정이 어두운 사람들, 아무도 이들이 공적으로 말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직 이들만이 하느님 나라의 가운데 자리를 잡는다.
그들은 그들의 얼굴에 그들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같이 완전하게”(마태 5,48) 하려고
그들과 고통당하신 주님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참 행복”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는가?
그렇다. 문화적으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계산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이제 여기서 우리 대부분이 두 가지 의미로 다루어진다.
즉 은총을 받아들여서 이미 “행복한 사람”인 사람들,
그리고 그들에게 팔을 벌리고 그들 안에서 영광의 왕의 얼굴을 발견하면서(마태 25,31-46),
가장 위대한 사랑을 발견한 사람들이다.
자, 이것이 인간들을 바라보는 복음의 주요한 선포이다.
참 행복의 삶을 우리의 삶 속에 끊임없이 실현하며 살아가는 복된,
행복한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이것 역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이기고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따를 수 있을 때, 누릴 수 있는 삶이다. 참 행복은 여기에 있다.
“행복하여라. ~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참 행복’이 담고 있는 영성적 특징의 두 기둥에 대해 보고자 합니다.
곧 ‘존재론적 영성과 실천적 영성’, ‘됨’(being)의 영성과 ‘함’(doing)의 영성입니다.
전자는 우리를 ‘꼴 짓는 영성’이고, 후자는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영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존재로서의 영성’은 우리의 존재의 틀을 만들고 내용을 채우며 존재를 존재답게 하는 영성이요,
‘실천적 영성’은 존재론적 영성에 살이 입혀진 영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영성이 내면의 성숙이나 상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행위와 실천으로 살을 입고 구체화 되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곧 현실에서 육화될 때 비로소 살게 되는 영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도 먼저 ‘존재’가 변화된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새로운 피조물로의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이요,
변화된 존재로서 하느님 나라를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존재의 변화를 토대로
실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존재가 새로워졌다면, 그 새로워진 존재로 살아가기 위한 양식이 필요하게 됩니다.
곧 변화된 새로운 존재인 하느님의 자녀로서,
새로운 창조세계인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기운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존재론적 영성, 곧 ‘됨의 영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참 행복’에서는 어떤 윤리적 행위를 위한 실천 덕목들이 아니라,
존재의 변화와 변화된 존재의 모습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곧 인간의 외향적인 ‘행위’가 아닌, 내면의 ‘존재 됨’을 선언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존재와 행위, 이 둘은 이분법적으로 분리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삶의 양식에서 있어서 둘은 구분됩니다.
그러니 ‘참 행복’은 우리가 무엇을 행하고 그에 따른 보상으로 복이 주어진다는 논리가 아니라,
총체적 존재의 변화를 보여주며, 그것에 따른 영성 생활의 행복을 노래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됨’의 영성은 존재의 변화를 일으키며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우리 생활의 한 부분을 개선하거나 윤리적, 도덕적 행위를 촉발시키는 데 만족하지 않고,
우리의 전 존재에 획기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 행복’은 단지 여덟 가지 덕목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존재의 여덟 가지 측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참 행복’은 존재론적 영성에만 머무르지 않고, 우리를 역동적으로 움직이게 합니다.
곧 존재 변화로서의 ‘참 행복’은 삶의 실천적이고 활동적인 측면을 동반합니다.
그래서 ‘됨’의 영성은 ‘함’의 영성으로 육화하게 됩니다.
곧 존재의 영성은 실천적 삶의 영성으로 이어지고,
또 실천적 영성은 존재의 영성으로 맺어지는 과정으로 계속 순환, 반복하게 됩니다.
이를 ‘참 행복’에서는 이렇게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됨’의 영성은 가난, 슬픔, 온유, 의로움, 자비, 깨끗한 마음, 평화, 박해(고난)로,
‘함’의 영성은 하느님께 예속(의탁), 치유, 섬김, 해방, 용서, 회개, 비폭력, 인내로,
그리고 그 복은 하늘나라, 위로, 땅, 채워짐, 자비, 하느님을 봄,
하느님의 자녀, 하늘나라로 볼 수 있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행복하여라. ~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12)
주님!
가난을 살게 하소서.
당신을 이미 차지한 까닭에 더 이상 아무것도 차지할 것이 없게 하소서.
슬퍼할 줄을 알게 하소서.
가엾이 여기는 당신의 마음에 제 가슴이 찔리게 하소서.
온유해지게 하소서.
당신의 품에 안겨 다독거려지게 하소서.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하게 하소서.
참된 음료인 당신께 맛 들여지게 하소서.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측은히 여기는 당신의 마음을 선사 받게 하소서.
제 마음을 깨끗하게 하소서.
당신의 손길에 매만져지게 하소서.
평화를 위해 일하게 하소서.
당신 손이 저를 이끌게 하소서.
의로움 때문에 모욕을 받으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소서.
제가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주님의 것이 되게 하소서.
이 복된 삶이 제게는 참된 행복이 되게 하소서.
아멘.
박재찬 안셀모 신부
나는 예수님 때문에 행복한 사람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마음이 가난하고, 슬프고, 박해를 받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행복은 지금 여기에서 이렇게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찾아오는 참된 행복을 깨달을 수 있는 은총을 간구하며
이 미사를 온 정성을 다해 봉헌하도록 합시다.
매일 새벽, 동이 트기 전, 이불 속 따스한 온기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벌떡 일어나 하느님 앞에 나아가기 위한 준비를 합니다.
샤워를 하고 머리도 단정하게 빗고 수도복을 입고 주님이 계신 성당으로 향합니다.
아침에 일어나 제일 먼저 하느님께 기도 드리기 위해 가고 있다는 것,
그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느님 아버지, 오늘 하루도 당신 뜻대로 하소서.”
성당 안에는 언제나 일찍 와서 이미 가도하고 계신 수사님들이 계십니다.
장상의 신호와 함께 독서의 기도와 아침기도가 시작됩니다.
‘주님 제 입시울을 열어주소서’
우렁찬 사내들의 기도 소리는 언제 들어도 아름답습니다.
이런 공동 기도뿐만 아니라, 아침기도 후 성당과 묵상실,
각자 방에서 하는 관상기도 시간은 우리를 하느님과 더욱 밀접한 사이로 만들어 줍니다.
세상의 시간이 정지하고 하늘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것만 같습니다.
명상의 집 숲속에서 지저귀는 새소리는 영혼을 더욱 맑게 해 줍니다.
그리고 이렇게 여러 교우들과 함께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몸과 피를 함께 나누는 미사를 봉헌합니다.
매일 아침마다 하루를 살아갈 영적 양식을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우리는 너무도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각자 주어진 일터에서 충실히 일하며 기도하며
하느님의 일에 마음 쓰며 살아갈 수 있는 우리는 너무나도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함께 음식을 나누며, 삶을 나누며 살아가는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끝기도 후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텔레비전을 보거나 놀이를 하며 지내는데,
침묵 가운데 독방에 앉아 주님과 함께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기에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주어진 일상의 모든 일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섭리를 발견할 수 있다면,
우린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고, 행복감에 젖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내어 놓고 자신을 위해 재물을 쌓지 않고, 마음의 가난을 위해
하느님께 온전히 의지하며 살아가는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이 세상에 이루어지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걱정하고 슬퍼하며
이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 때문에
형제, 자매들에게 온유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는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주님보다 아무것도 낫게 여기지 않으며, 일터에서 또 자매 형제들과의 관계 안에서
주님의 뜻을 찾고자 애쓰기에 주님의 축복으로 우린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닮고자 애쓰기에 그분의 자비를 닮아 가는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말할 수 없는 사랑의 감미에 싸여
형제들 안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뵈올 수 있는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자매 형제들의 약점을 받아주고 감싸주며, 서로 돕고 사랑하며,
참된 평화를 이룩하는 우리는 하느님의 딸 아들이기에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위해 고독과 침묵 가운데 밀려오는 유혹들을 이겨내며
주님의 전사로서 성실히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받은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진실히 진실히 바랍니다.
여기 모인 우리 모두가 참으로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이 주는 행복을 넘어 진정 주님이 주신 참된 행복 안에서 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분명 진복선언은 이루지 못할 나와는 먼 행복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께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은총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수도자들과 같이 어떤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인 각자가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이라는 것을 온 마음으로 체험했을 때
이 모든 행복선언은 우리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주님께 대한 감사로움으로 일상을 바라본다면,
우리 주위에는 행복이 가득함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평범한 가정이고, 때로는 삶에 고달픔을 하소연하며 살아가기도 하지만,
주님께 희망을 두고 가난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자비를 베풀며,
세상 안에 주님의 사랑을 나누고 주님의 평화를 심어 가는 우리는
세상이 주는 행복을 넘어 참된 하늘의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신 행복을 느낄 줄 아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하느님 나라는 더욱 커져가는 것입니다.
자매 형제 여러분,
우리는 “이미” 예수님 때문에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십시오.
우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큽니다.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울 때, 그 행복은 우리 가운데 더욱 충만할 것입니다.
“예수님,
이 세상에 당신께서 주시는 참된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하소서.
가난한 마음으로 모든 것은 당신께 의탁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많아지게 하소서.
저희가 당신으로 말미암아 참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아멘.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행복
박 마리 피앗 수녀
'마음이 가난해야 행복하다'가 아니라
마음이 가난해도 행복하다.
'슬퍼해야 행복하다'가 아니라
슬퍼해도 행복하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야 행복하다'가 아니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도 행복하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아야 행복하다'가 아니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아도 행복하다
행복은 선행(先行)하는 조건의 결과가 아니라
선택이며 선물이다
[출처] 마태 5,1-12 연중 제10주간 월요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