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마중물이 현재 활동하고 있는 대전향토문화연구회 산하 '대전지명연구모임' 답사기입니다. 대둘 회원들과 공유하고 싶어 올려드립니다.
대전을 좀더 알고 사랑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앞으로도 기회가 닿는다면 계속해서 올려 드릴까 합니다. 많은 성원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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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답사기(신흥동-판암동)]
2022년 2월 4일 오후.
올들어 첫답사가 진행됐다.
오늘 답사 출발지는 대동교다. 대동교는 신안동과 대동을 오가는 도로에서, 대동천 위에 놓여져 있다.
두 분이 개인사로 불참하고 여섯사람이 만났다. 날씨는 쾌청한 편이나, 추위가 자꾸만 품속으로 파고드니, 일단 어디 따뜻한 공간으로 이동키로 했다.
인근에 교회에서 운영하는 커피숍이 있어 그 곳에 들어가 몸을 녹이고 조영연선생님으로부터 오늘의 답사코스 및 기본지식을 들었다.
현(現)대동교 바로 옆에서 용운천이 대동천에 합수(合水)된다. 판암천은 판암동 판암면옥 근처에서 '대동천'으로 이름이 바뀌어 이 곳까지 흘러온다. 판암천은 대전에서 제일 높은 산 식장산(598m) 개심사등에서 발원해 판암면옥 앞으로 흘러오는 지방하천이다. 그 옛날 판암천은 본디 사행천(蛇行川)였으나 지금의 판암면옥 아래쪽으로 일제에 의해 제방이 구축되고 물길을 거의 직선화하는 등 소위 대동천 치수사업이 이뤄져 오늘에 이르게 됐다. 현재 하천위에 시설된 제1치수교, 제2치수교가 그 옛날 일제의 치수사업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일부 사람들은 다리이름을 개명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대동천 하류로 조금 내려가면 오른쪽에서 자양천이 흘러와 대동천과 한몸이 된다. 대동천이 만들어지기전, 옛물길은 자양천과 용운천이 합수돼 흐르다가 판암천과 만나 하나의 물줄기가 돼 원동네거리방향으로 흘러가다가 경부선 철길을 건너자마자 두 줄기로 나눠져 한 줄기는 대전역앞을 지나 한밭중방향으로 흘러 종국엔 대전천과 만나고, 또한줄기는 원동네거리를 지나 옛 원동초교(구동구청사)옆으로 흘러 대전천과 합수됐다. 현 지도상에서 도로망을 잘 살펴보면 옛물줄기의 흔적을 읽어낼 수 있다. 당시 이들 하천주변은 웬만한 비에도 침수되는 경우가 많았고 특히 1925년 대전역과 원동, 인동 일원이 물에 잠기는 등 엄청난 물난리가 나는 바람에 일제는 대대적인 치수사업에 나서 오늘날의 대동천을 만들어냈다.
대동천 치수사업의 결과, 아름다운 소제호가 매립돼 없어진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었다. 일제는 소제호를 메우고 큰 물길을 돌리고 새로 만드는 대규모 치수사업을 벌이면서 대외적으로 침수피해를 방지하고 대전역주변에 철도관사 등 공공토지를 확보하기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은 항일, 반일투쟁을 하는 조선인들의 정신적 지주인 우암 송시열선생의 흔적을 지우려는 흉계가 저변에 깔려있다는 게 지역 항토사학계의 중론이다. 일본인 노동자들이 대전에 물밀듯이 들어오면서 그들의 정신적 상징물인 신사를 소제호변에 있는 송자고택 뒷산위에 세운 것만 봐도 저들의 의도를 알고도 남는다는 것이다. 이 신사는 나중에 현 성모초교 자리로 이전했다.
대동교에서 대동천을 따라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면 지척에 새들뫼아파트가 자리하고 있다. '새들'은 신흥동 동명의 어원이 되고, 신흥초교근처에 옛대전전기주식회사의 제3발전소건물이 현존하고 있고, 신흥동 반짝시장, 달기장길, 옻방골길, 판교길 등등이 이어진다.
대추생강차로 몸을 덥히고 다양한 사전해설로 귀도 덥혀진 상태라서 몸은 근질근질 이미 밖으로 움직였다.
우린 먼저 대동교주변 이 곳 저 곳을 둘러보고 살폈다.
다리옆에 자리한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장승과 솟대를 둘러보고 일제시대 흔적이 오롯이 남아있는 '동광교' 표석을 살펴봤다. 한 비석의 상단부분은 글씨를 못알아볼정도로 깊게 훼손돼 있다. 일제시대 일본의 연호인 '대정', 아니면 '소화' 일 것이라 귀띔해 주셨다.
대동천 상류로 올라가니, 왼편에 '새들뫼아파트'가 있다. 조금 가니 '새들뫼교'가 있고, 이어 대신교가 놓여져 있다. 아마 대동과 신흥동의 앞자를 따서 명명된 다리이름이리라. 또다시 올라가니 오른편 아파트단지안 깊숙히 대전전기주식회사 제3발전소 건물이 세월의 풍파를 이겨내고 있었다. 적벽돌과 흑회색 벽돌로 쌓여진 벽색깔의 조화, 박공지붕과 솟을지붕 등 조형성 및 실용성을 감안한 건축미가 한 눈에 들어온다. 일본인이 지었기에 후한 점수를 주고싶지 않지만, 아름답다는 맘이 절로 들었다. 한바퀴 휘~익 둘러보고 다시 대동천변길로 들어섰다.
건너편 천변은 아파트건설로 깔끔히 정돈돼 있다. 아파트건설이 있기전까지 길가로 좌판이 벌어지고 서민들의 삶을 지탱해준 반짝시장이 들어섰던 자리였다. 지금은 옛날의 모습을 전혀 찾을 수없다. 그 옛날의 시간들은 추억이 되고 옛 모습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제1치수교가 나타났다. 일행은 대동천 우안을 걷고 난 좌안을 걸었다. 일행들이 걸어가는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건너편에서 조현중쌤이 외쳤다. 현재 걷는 길 안쪽에 '달기장'이 있었다고 한다. 조영연선생님께서 알려주셨나 보다.
달기장 마을에서는 그 옛날 서민들이 먹고살기 위해 닭을 키웠단다. 닭장 그래서 달기장이라 불리워졌다.
제2치수교가 나왔다. 대동천이 도로확장으로 인해 하천의 절반은 지붕을 인 반복개상태였다. 완전복개가 아니라서 천만다행이다.개발과 보존의 갈림길에서 반반씩 양보한 흔적이 엿보인다. 냇물도 햇볕을 쐬고 신선한 공기를 접해야 건강을 유지한다. 하천이 건강해야 사람도 건강해지는 법이다. 공존공생이다.
마침내 판암동의 옛지명인 '너더리'근처에 도착했다. 먼저 산소골에 이르는 골목안으로 들어가 '옻밭길'이라 씌여진 채 매달려 있는 길표지판을 확인하고 되돌아나왔다. 도중에 대전에서 냉면집으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원미면옥과 판암면옥이 나의 허기를 부채질하고 꼬드겼다. 하지만 지금은 답사에 나선 몸. 아랫배에 힘을 꽉 줘 본다.
골목에서 빠져나와 좀더 윗쪽으로 올라가니, 골목길 입구에서 담벼락에 부착돼 있는, '판교길' 이란 표지판을 발견한다. 이 일대가 '너더리'가 있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판교(板橋). 板은 널판지 판이요, 橋는 다리 교다. 즉 널다리<너다리<너더리로 음운변화가 일어난 형태다. 너더리는 너다리보단 발음하기 편하다. 그래서 자연스레 변한 것이다. 또한 판교는 판암동 동명의 어원이 되기도 한다. 옛날옛적에 현(現)판암1동사무소 근처에 옥천방향과 금산방향을 알려주는, 이정표역할을 했던 큰 바위가 있었다. 이 바위가 널판지 판(板)을 만나 '판암동'동명운을 탄생시켰다. '너더리'란 말이 좀 촌스럽고 너덜길이 연상돼 좀 거시기하다. 하지만 살갑고 사랑스럽다.
지명은 오랜 세월 흐르면서 발음하기 편한 쪽으로 변화하고 많은 사람들 입으로 전해지면서 굳어지게 됨으로써 정식지명으로 자리잡는다. 우린 향후답사를 계속해서 이를 확인하리라.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와우 !!!
역시 글을 보면 뵬수록
많은 도움이 되고, 공부가 되네요..
소중한 자료에 감사합니다..
한수 배우고 갑니다.
謝謝
재미있네유~
우리동네 지나갔네요
달기장1길 19
닭장>닭이장>달기장
우리 말 음운변화, 참으로 재미있어요♡
발음하기 편한 쪽으로 자연스럽게 변하는 모습, 정다워요♡
@마중물 달기똥같은 눈물이 뚜우욱뚝
@이도령 달기똥!
아~~그렇군요.
하나 제대로 배웠네요♡
고마워요♡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