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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편 - 빈센트 봔 고흐의 사랑과 죽음
택시가 속도를 줄이며 오베르 쉬흐 와즈 건너 편에 있는 메리 쉬흐 와즈 마을 중앙로를
천천히 내려갔다. 고개를 숙여 차 앞으로 시선을 멀리 언덕 위로 보내 오베르 성당이
고승이 좌선을 하듯 동쪽을 바라보며 조용히 앉아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실브쁠레 무슈, 아헤떼 부 라 바. 죄송하지만 저기 세워주세요’
와즈강 다리를 건너자마자 와즈 강가로 내려가는 길목에 차를 세워달라고 부탁했다.
와즈 강을 내려다보는 곳에 있는 벤치에 가방으로 머리를 받치고 누워
솜사탕 같은 흰 구름이 오베르 성당 쪽에서 내려와 강을 건너 파리 쪽으로
낮게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다가, 흰 구름과 코발트 빛 하늘의 밝음을 견디지 못해 눈을 감았다.
아들의 무사 귀국을 기다리셨던 아버지 유골을 평소 좋아하셨던 천마산에 모셔 두고,
아버지의 소천으로 갑자기 기억상실증에 걸리신 어머니를 캐나다 동생에게 의탁시켰다.
파리에서 아버지 위독 소식을 들은 날 즉시 비행기를 타고 귀국해서,
인천 공항에 내리자마자 전화를 넣었다. 누나가 받았다. 기다리시다가 좀 전에
편안히 운명하셨다고 한다. 이 못난 자식 얼굴을 보고 싶어서 끊어지는 숨을
겨우 겨우 붙잡아 두시다가......
관 뚜껑을 덥기 전에 아버지 얼굴을 한없이 스다듬으며 용서를 빌었다.
몸이 아프셔서 서울대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 귀국해 3달을 돌보며
함께 지낼 때 속삭이듯이 말씀하셨다.
‘니가 하고픈 일 끝까지 해라. 니 식구들은 이제 그만하면 니 할만큼 했다.
니 애비가 가난해서 니 원대로 못해준 거 미안타. 니도 이 애비가 맘이 참
아팠다는 거 이해하제?‘
‘아버지도 하실 만큼 다 하셨어요. 힘드셨잖아요. 5명 자식 서울 데리고 와서
공부 다 시키고, 다 잘 되게 만드셨잖아요. 아들 중에 미국 유명한 대학 교수도
나왔잖아요. 저도 만족합니다. 아버지 수고하셨어요’ 이게 마지막 대화였다.
17살 꽃다운 나이에 안동 권씨 댁에서 청송 골짜기 아버지에게 시집을 오신
어머니는 아버지와 64년을 해로하셨다. 어머니는 아버지 소천하시자마자
기억상실증에 걸리셨다. 밤에 주무시다가 일어나 새벽에 이 서방을 찾으신다.
문이란 문은 다 여시며. 그러시다가 밥을 지으신다. 이 서방 아적 먹고 일 나가야 한다고.
어머니를 돌봐줄 아들이 모두 외국에 있어서 둘째 아들네가 살고 있는
캐나다로 모셨다. ‘느그 아부지 캐나다 계시나? 언제 거 같노? 거서 뭐하노?’
비행기 안에서 끊임없이 물으셨다. ‘나도 모릅니다. 가 봐야 압니다.’
‘오베르 쉬흐 와즈’는 와즈 강 위쪽에 있는 오베르라는 말이며, 고흐가 생애 마지막
70일을 살았던 곳이다. 고흐는 이 마을 라부 레스토랑 지붕 밑, 2평쯤 되는
방에서 살다가 죽었는데, 그가 자신의 마지막을 예측이라도 한 듯이 미친 듯이
그림을 그렸다. 하루에 한 점도 아니고, 70일 동안 90점을.
드골공항 입국장을 빠져나와 파리행 루와시 버스 승차장으로 가다가 갑자기 발길을
택시 승강장 쪽으로 돌렸다. 지난 15일 동안, 아버지 장례를 치루고 지금까지 안느는
전화 한 통도 없었다. 그 침묵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아버지 병간호로 귀국했을 때는 행여 내가 파리로 귀환하지 않을까봐 매일 전화를 해서
내 마음 상태를 확인했던 그녀다.
오베르 성당 앞에서 고흐의 그림을 보며 잠시 숨을 잠시 고른 후, 언덕 위로 올라가는
밀밭 좁은 사잇길을 따라 터널을 이룬 나무숲을 헤치며 빠져나가니,
여인의 풍만한 젖무덤 같은 노르망디의 구릉이 오른 팔로 고흐가 마지막으로 그렸던
밀밭을 안고, 다른 한 팔로 지친 나를 안아준다.
노르망디의 낮은 구름이 숲의 나무 잎들을 어루만지며 천천히 지나가는 그림자 아래
서서 숨을 고르면서, 고흐가 마지막으로 바라보았던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니,
까마귀 두 세 마리가 오른쪽 밭에서 날아올라 빙글빙글 돌며 마을 쪽으로 날아갔다.
고흐는 이 밀밭에서 화려한 석양을 뜨거운 회한의 눈물로 흘려보내고,
어스름이 내려앉는 순간 마지막 붓을 들었다.
까마귀들이 고흐의 마지막을 눈치 채고 일제히 하늘로 날아올라 꺼억꺼억 요란하게
울어댔지만, 고흐는 그 까마귀들에게 까지 남아있던 모든 사랑을 선물했다.
그리고는 하늘이 빛을 완전히 거두어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 조용히 따라 갔다.
라부 레스토랑 벽에 남겨진 그의 어리고 앳띤 모습이, 그곳으로부터 불과 100미터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오베르의 빈센트 봔 고흐 정원 안에 뼈만 앙상한 어른이 되어
강열한 눈빛으로 자신이 숨을 거둔 라부 레스토랑 지붕 밑 단칸방을 그리워하며 서있다.
오베르읍내로 들어 와 샌드위치를 사서, 정원 안 고흐 동상 발치에 기대앉았다.
‘무슈 리, 내가 아를에서 고갱에게 사랑하는 여인을 빼앗기고, 그 여인에게
이별의 선물로 귀를 잘라주었거든, 가쉐 박사의 딸에겐 무엇을 남겨줘야 할까?
그 아가씬 순결하고 뜨거운 사랑으로 내 죽어가는 심장을 살렸으니까 귀론 안되겠지?’
고흐가 오베르로 오게 된 것은, 아마추어 화가이면서 생약연구가며 의사였던
가쉐 박사의 권유에 의해서였다. 혹시 그의 분노조절장애를 그가 고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지만, 오베르의 동네와 들판, 그리고 와즈강과 강변 숲길이 좋았다.
치료 때문에 가쉐 박사의 집을 매일 방문하던 고흐를 연모한 가쉐 박사의 어린 딸과
그것을 눈치 챈 가쉐 박사의 무례한 폭언과 절교 선언이 없었다고 해도
고흐는 분명히 이곳에서 마지막 생을 마쳤을 것이다. 그의 운명이 그를 이곳으로
끌고 온 것이다.
고흐는 결심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그녀에게 주고 가기로...
고흐가 사랑에 빠졌음을 눈치 챌 수 있는 그림이 두 점 있다.
아를의 론강의 야경을 그린 ‘별이 빛나는 밤’이라는 제목이 붙여진 그림과
여기 오베르에서 그린 오베르성당 그림이다.
두 그림을 그릴 때 고흐가 선택한 색은 전혀 날랐지만 그의 넘쳐나는 사랑의 감정은
두 그림 모두에 가득하다. 색이 다른 건 사랑의 감정이 달랐기 때문이다.
고흐의 론 강의 야경 별이 빛나는 밤은, 하늘과 강물의 어둠과 짙은 청색을
일순간 사라지게 할 듯이 노란색이 눈부시게 작열한다.
그의 고달프고 고통스런 삶의 어둡고 추운 여정의 길에 갑자기 솟구쳐
춤을 추는 황색은 그의 영혼 깊숙한 곳에서 타오른 열정적 사랑의 불꽃이다.
아를에 있는 론강의 야경을 그린 '별이 빛나는 밤' 그림 아랫 부분에 있는 뚜엣은 고흐와 그의 연인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를에서 만난 고흐의 연인은 창녀였습니다. 그걸 안 고갱이 돈을 주고 그 여자를 품어버립니다.
고갱과의 극열한 싸움과 귀를 잘라 그 여인에게 던져 준 이유가 고흐의 순수한 사랑이 처참하게 짍밟혀서 일겁니다.
고흐의 또 다른 사랑은 그의 신앙적 경건함과 신에 대한 무한한 감사, 그리고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가정의 단란한 행복에 대한 그리움을 담고 있다.
그 사랑이 오베르 성당의 그림에 아름답고 경건하고 엄숙하게 칠해져있다.
만일 당신이 7월 중순 경 12시 정각에 오베르 성당 안에 조용히 들어가서,
남쪽으로 나 있는 창 아래, 겨우 엉덩이를 걸칠 수 있을 정도로 작고 아담한 나무 의자
위, 그리고 의자 아래 바닥을 보게 되면, 신의 사랑이 장미창의 스테인그라스 빛으로
내려오고 있음을 알게 되고, 그 색이 고흐의 오베르 성당 그림과 같음을 발견할 것이다.
고흐는 고통과 고뇌를 반죽해서 형과 공간을 만들고,
그 위에 절절한 바램을 색칠했다.
그 색이 우리의 눈을 유혹해 우리는 그의 아름다운 꿈만 바라보게 되고
감춰져 있는 고통은 볼 엄두를 내지 못한다.
감춰져 있는 작가의 아픔을 보는 것은, 그만한 고통은 아닐지라도 운명적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는 삶의 고뇌와 고통을 맛 본 후에, 신의 축복이 있어야 가능하다.
고통이 클수록,
짊어진 운명이 가혹할수록,
그리고 삶에 대한 욕구가 강할수록,
작품의 근간이 되는 열정은 더욱 용열하게 솟구치고,
붓의 터치는 솟구치는 감정을 견뎌내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현실 묘사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
形과 面과 空間은 화가의 붓 터치에 따라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간다.
캔버스 위로 쏟아져 마구 흩뿌려지고 뒤엉키는 칼라는.
그의 심장 깊은 곳에서 터져 나와 캔버스에 쏟아진 울음과
함께 쏟아진 생명이 다 타버린 재 같은 검은 핏덩어리 위로
황급하게 내던지는 그의 애절한 기도다.
그는 자신의 검은 고통을 색으로 감춘다.
고통이 깊고 클수록 색은 화려해지고 짙어진다.
깊은 주름을 감추는 여인의 화장처럼.
고흐는 태양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던 7월 마지막 날,
밀보리가 누렇게 익어 무거운 몸 가누지 못할 때 모든 색을 내던지고 검은 까마귀로 날아올랐다.
황혼에 넘실거리는 남 노르망디의 어머니 젖무덤 같은 둔덕 밀밭에서.(9편 완)
“오베르의 흐린 하늘 아래 한 없이 넓은 밭이 있고, 나는 슬픔과 극단적인 고독을 표현하려는 시도를 주저하지 않았다.(고흐)”
*빈센트 봔 고흐 그림에 대한 해석은 많이 부족해도 저의 깨달음 같은 것입니다.
*이대로 오래 글을 안 쓰면, 내 성격 상 끝을 맺지 못할 것 같아서, 어제 하루 종일 고민하다가
핵심 주제만 들어내려고 결심하고 글을 썼습니다.
*읽어주시는 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아래 링크는 고흐를 추모하는 노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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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골드문트님과 고흐와 그림이 ....혼연일체로
느껴집니다.
예술적 감수성과 글솜씨가
역시 비범하시네요~
너무 감사합니다.
향 좋은 커피 사드릴게요^^
자유로운영혼이시군요
글을보면서가슴이먹먹해져옵니다~~
지금은 우리에 갇혀 삽니다.
이런 삶도 나름 맛이 있고요.ㅎ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호의 강렬한 색채 , 그의 삶 그의 예술 ... 막연히 동경하고 좋아했습니다. 이렇게 자세히 설명해 주시니 다시 한번 고호를 보게 되네요 . 좋은 글 감사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부러워만 마시고 도전해보세요.^^
''골드문트님'은........
대단한 예술가이시군요.저의 딸도 미대를 나와 그림을 그리고 있고 합니만
이제와서 님의 글을 좀읽어보니 고흐의 예술의 세계를 그리고 있느군요
그리고 프랑스에 가서 미술을 공부하신것 같군요
이렇게 훌륭하게 글을 쓰신걸보니 훌륭한 예술인 이십니다.
제가 머리가 않 좋아 신경과 야2개식을 먹고 겨우 생활을 하고 있어 극히 조심을 합니다
죄송합니다.조금 복잡한 글은 보지를 못합니다
제 딸도 미대를 나왔습니다.
몸이 불편하신데 댓글 안쓰셔도 됩니다.
몸조리 잘하시길...
고흐에 관한 장문의 글 수고 많았습니다
부친과의 마지막 이별장면이 오래토록 여운을 남깁니다
감사합니다.
길을 가다가 비슷한 모습만 보면 돌아가신 분이 생각나곤 합니다.
좀 더 마음 깊은 대화를 하지 못한 것이 늘 아쉽고,
옆을 지키지 못한 게 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아이고~ 점이라는 말은 없는데...ㅎ
그런데 저의 우매한 글을 칸딘스키에 비견하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골드문트님 예술적부분에 무뇌한인저어게
깨우침을 주셨네요ᆞᆞ잘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깨우침이라시니 부끄럽습니다.ㅎ
64년을 해로하신 어머님 아버님 소천후 마음이 조금 이상해
지셨다는 그 대목에서 울컥 설움같은 아픔이 올라오는군요
인생이란것이 무엇인지 우리네 웃대부모님들 오직 하나의 부부애로만
사셨던 그시절 어느 한쪽이 먼저가시면 얼마나 마음에 상심이 크셨을까요
생각하면 참 마음이 아프네요.
긴 세월 해로하셔셔 아직도 돌아가신 게
실감이 나지 않으신가봐요. 아직도 찾고, 기다리시니...
꾸미없이 진솔한 삶의.예술의 이야기
목언저리까지 닿은 슬픔으로 읽었어요.
고흐는 밀밭에 솟아오른 까마귀로 하늘을 날라 죽음을
맞이 했는데~~,,,,
나는 무엇으로 죽음을 맞이하지?
골드문트님의 글앞에 앉아 깊은 상념에 빠져봅니다.
감사합니다.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답은 과거가 아니라 지금 어떻게 사느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만...ㅎ
골드문트님의이픔이보였거든요
다내려놓고행복했으면하네요~~
감사합니다.
이젠 많이 안정이 되었습니다.
나이도 들만큼 들었고, 욕망도 내려놓았으니까요.
그래서 글을 쓸 수있게 되었고요.
감사합니다
아프지마세요~^^~
거듭 감사^^
삭제된 댓글 입니다.
그 색 다 벗겨냈습니다.
그래야만 참된 나를 볼 수 있어서요.
나의 고뇌와 아픔이 어땠는지 곧 보여드리겠습니다.
감사를 드리며.
나는 눈이 어른어른하는데,
쓰시는데, 힘들었겠습니다.
글을 크게 획대하여 잘 읽어 보았습니다.
글이 좀 작죠?
보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