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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15일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제1독서 : 2코린 3,15─4,1.3-6
복 음 : 마태 5,20ㄴ-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1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25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26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올해부터 본당신부로 살면서 더 바쁘게 사는 것 같습니다.
우선 성당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본당신부의 유일한 휴일이라고 하는 월요일에도
사제관에 앉아 하루 종일 글을 쓰고 있습니다.
또 초보 본당신부로 해야 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워낙 능력과 재주가 없다 보니, 시간을 쪼개고 써야
간신히 조금 본당신부답게 사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살면서 힘이 빠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왜 그럴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가 길을 떠나시는 예수님을 묵상하면서
그 이유를 조금이나마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곳에 머무르시지 않고 늘 길을 떠났습니다.
그 떠난 길에서 기적이 이루어졌고, 그 자리에서 기적이 선포됩니다.
저의 모습을 깊이 반성할 수 있었습니다.
한곳에만 머물러만 있던 저의 모습을 말이지요.
한곳에만 머물러 있으면, 새로움을 얻기가 힘듭니다.
만나는 사람만 만나게 되고, 편하고 친한 사람만 만나며,
자기에 도움 되는 사람만 부르게 됩니다.
익숙한 것만을 찾고 편하고 쉬운 것을 향해서만 나아가려고 합니다.
새로움이 자리 잡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 길을 떠나지 않는 모습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으니 힘이 빠져서 늘 피곤함만 느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떠나셨다는 것은 늘 새로운 시작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새로움을 간직해야 말과 행동에 힘이 생기게 됨을 당신 삶으로 직접 보여 주신 것이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편하고 쉬운 것, 익숙하고 하고 싶은 것만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곳으로 끊임없이 걸어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정말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의로움’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 자리에 그냥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인 물은 썩는다고 하지요.
그들은 새로움을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에서
율법의 세부 조항 자체를 하느님을 받아들이면서,
율법의 근본정신인 사랑을 완전히 잊어버렸습니다.
의롭게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전혀 의롭지 않은 삶을 살게 됩니다.
주님께서 보여 주신 새로움은 앞서 말씀드렸듯이, 길을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편하고 쉬운 것, 익숙하고 하고 싶은 것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어떤 형제와도 화해하고 타협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이 새로움이 우리를 구원의 길로 확실하게 인도해 줍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사제연수에 참석하면서 새로움을 얻고 있습니다. 행복한 시간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6월 15일입니다.
23년 전 남한의 김대중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에서 ‘남북 정상회담’ 후 ‘공동선언’을 선포한 날입니다.
저는 당시 접경지역인 ‘적성’ 성당의 본당신부로 있었습니다.
공동선언 발표 이후 남과 북은 ‘해빙기’를 가졌습니다.
남한의 예술인들이 북한에서 공연하였고, 북한의 예술인들이 남한에서 공연하였습니다.
올림픽에서는 선수들이 ‘한반도기’를 들고 공동으로 입장하기도 하였습니다.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은 남북공동선언의 열매였습니다.
남과 북의 화해와 협력의 공로를 인정받아 김대중 대통령은 ‘노벨평화상’을 받았습니다.
4년 전에는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 국방위원장의 만남이 ‘하노이’에서 있었습니다.
아쉽게도 북한과 미국의 만남은 ‘공동선언’이 없이 결렬되었지만,
북한과 미국의 ‘공동선언’이 있었다면 새로운 시대를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북한에 미국의 대사관이 입주하고, 미국에 북한의 대사관이 입주하였다면 좋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북한이 핵무기를 전부 폐기하고, 미국이 대북경제제재를 해제하였으면 좋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예전의 기억입니다. 왼쪽 손목이 부어서 잘 가는 침술원엘 갔습니다.
원장님은 부은 손목을 치료하지 않으시고 오른손에 침을 놓으셨습니다.
신기한 것은 반대편에 침을 놓는데도 왼쪽 손목이 편해지는 것입니다.
원장님은 얼음찜질하거나, 감자를 썰어서 손목에 붙여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부은 손목에 침을 놓으면 오히려 더 부을 수 있다고 합니다.
왼쪽 손목은 시간이 지나 부은 것이 가라앉으면 침을 놓는 것이 좋다고 하십니다.
저는 원장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의 감정도 비슷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화가 나 있을 때는 잠시 멈추는 것이 좋았습니다.
화가 나서 결정하는 것들 때문에 때로 일을 그르치기도 했습니다.
화가 나 있는 상대방에게 좋은 이야기를 해도 결과는 신통치 않을 때가 있었습니다.
화가 난 감정을 추스르면서 시간을 가지고 생각하면 좋은 방법이 떠오를 때가 많았습니다.
화가 난 상대방도 시간을 가지고 기다리면 오히려 미안하다고 말할 때가 있었습니다.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상대방의 화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도 현명한 방법 같습니다.
우리는 그런 모습을 요한복음 8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죄를 지은 여인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손에는 돌이 있었습니다.
그런 죄를 지은 사람은 율법에 따르면 돌로 쳐서 벌하게 되어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떨고 있는 여인을 보셨습니다.
감정에 휩싸여 눈에는 핏발이 서 있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아서 글을 쓰셨습니다. 글을 쓰면 마음이 정리되기 때문입니다.
벌을 주어야 한다는 분노를 가졌던 사람들의 마음도 조금씩 누그러졌습니다.
떨고 있던 여인도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을 들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십니다.
‘여러분 중에 죄가 없는 사람이 저 여인에게 돌을 던지시오.’
그리고 여인에게도 이야기하십니다.
‘나도 그대의 죄를 묻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마십시오.’
우리는 내비게이션, 인공위성, 기상관측 기구를 통해서 원하는 곳을 쉽게 갈 수 있고,
1주일 혹은 한 달가량의 날씨도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지혜롭다 할 수 없습니다.
정말 지혜로운 것은 사람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내비게이션으로 찾아갈 수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인공위성으로 예측하기도 어렵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파처럼 겉모습만 하느님을 따라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신앙인은 세상 사람들보다 더 치열하게 살아야 하고,
세상 사람들보다 더 나누며,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참된 지혜는 며칠 앞의 날씨를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살인하지 말라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님의 말씀은 살인뿐 아니라 이웃에게 분노하는 것까지 금하신다.
즉 다른 사람에 대하여 적대시하거나 분노를 품어서도 안 된다고 하신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분노는 살인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을 해하는 것은 분노에서 생긴다.
이유 없이 성내는 사람은 누구든지 생각으로 사람을 해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에게 이유 없이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22절) 하셨다.
자기 형제에게 “바보”, “멍청이”라고 부르는 우리의 혀를 잘 길들여야 한다.
사람의 혀를 아무도 길들일 수 없다면
우리는 그것을 길들여 주실 하느님께로 피신해야 한다.
말이나 소, 낙타, 코끼리, 사자를 길들이려면 사람이 필요하다.
이처럼 인간이 길들려면 하느님이 필요하다.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모든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
분노를 버리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형제들 사이의 사랑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시는지 알려준다.
그러기에 예물을 바치려 할 때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을 품고 그와 화해하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 그의 예물을 받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카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이유는
그가 아벨을 사랑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미워했기 때문임을 알고 있다.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할 때”(23절) 라는 말은
주님께서 마땅히 당신이 받으셔야 할 영광은 제쳐 놓으시고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이것은 형제와 화해와 사랑이 가장 좋은 예물이라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너를 고소한 자와 타협하여라.”(25절)
우리를 고소하는 자는 육체의 욕망과 악덕에 맞서시는 성령이시다.
바오로 사도는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갈라 5,17)
그러므로 우리의 현세의 삶이라는 여행에서
그분과 함께 늘 살아가고 모든 일에서 그분을 따라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분과의 영원한 친교와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
언제나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며,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이웃과의 불목은 그 이웃이 가지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 때문에
그를 창조하신 하느님과도 불목한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우리는 여전히 산상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어제 복음에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옛 율법을 완성하는 ‘새로운 의로움’을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이 말씀은 '나는 하느님과 의로운 관계를 갖고 있는가?',
'곧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한 의로움을 지니고 있는가?'
그리고 '그들의 의로움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하느님 백성의 의로움’은 어떤 것인가?'를 들여다보게 합니다.
‘의로움’, 곧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이룸은 산상설교의 핵심 주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설교의 중심인 6장에서 또다시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고,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에 앞세워 “의로움”을 촉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백성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의 의로움을 능가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그들의 의로움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도 말합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합니다.”(갈라 3,11)
“율법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도록,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감시자 노릇을 하였습니다.”(갈라 3,34)
“율법은 단지 무엇이 죄가 되는지를 알려줄 따름이었습니다.”(로마 3,20)
그렇다면 대체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의로움은 무엇일까?
(또한 나는 그런 의로움을 행하고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여섯 가지 대당 명제를 통해 제시하시는데,
오늘 복음은 그 첫 번째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인하지 말라”는 옛 율법의 ‘살인’을
구체적 행동의 결과로 드러난 살인만이 아니라
원리상 살인으로 적용할 수 있는 내면적이고 근본적인 동기까지도 포함시키십니다.
곧 자기 형제에게 ‘성’ 내고, ‘바보’ ‘멍청이’라고 부르는 것까지도
‘살인하지 말라’는 내용에 포함시키십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1요한 3,15)라고 말합니다,
물론 모든 ‘성’(화) 냄이 살인인 것은 아닙니다.
사랑의 ‘화’ 냄도 있고, 교정을 위한 ‘성’ 냄도 있고,
단순한 습관이나 짜증의 ‘성’냄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집회서에서
“많은 이들이 칼날에 쓰러졌지만, 혀 때문에 스러진 이들보다는 적다.”(집회 28,18)고 했듯이,
의도되지 않더라도 “혀”로 인하여 죽는 이들이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단지 ‘살인하지 말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시고,
이 율법의 근본정신이 “화해와 사랑”에 있음을 밝히십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5,23-24)
이는 용서와 화해, 곧 ‘사랑’이 율법의 정신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제단의 예물이 아니라 예물을 바치는 사람의 “의로움” 입니다.
바로 우리 자신이 예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당신 앞에 나서기에 합당한 자 되기를 바라십니다.
동시에 형제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임을 깨우쳐줍니다.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마태 5,23)이라는 말은
자신만이 아니라 형제를 위하여 화해와 사랑이 필요함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너의 예물이 무엇이냐?’ 묻지 않으시고,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창세 4,8) 하고 물으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이 성찬례를 거행하기 전에,
혹 불목한 형제가 있는지 살펴보고 ‘얼른’ 화해하고 용서해야 할 일입니다.
이는 우리가 먼저 용서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닫는 일이요,
이미 받은 주님의 사랑을 하염없이 내어주어야 할 존재임을 깨닫는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얼른 화해하게 하소서!
제 자신이 당신께 드리는 참된 예물이 되게 하소서!
시시비비를 따짐이 아니라 화해를 이룸이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 예물을 바쳐라.”(마태 5,24)
주님!
먼저 화해하게 하소서.
지체치 말고 기회가 있을 때 먼저 화해하게 하소서!
원망을 품은 이의 아픈 마음을 보게 하시고, 제 불찰을 먼저 살피게 하소서.
시비를 따지기보다, 이기려 하기보다,
화해한 제 자신이 당신께 드리는 참된 예물이 되게 하소서!
아멘.
“화 → 바보 → 미친놈” : 점층적 가중처벌
박상대 마르코 신부
사방이 어둑해지자 어느 랍비의 집에 도둑이 들었다.
높은 담을 애써 넘어 들어온 도둑은
랍비의 정원에서 몰래 감자를 캐내어 포대에 담기 시작하였다.
얼마 후 감자를 가득 채운 포대를 메고 가려는데
글쎄 너무 많은 감자를 담았던지라 무거워 쩔쩔매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 광경을 창가에서 지켜보고 있던 랍비,
급히 방을 나가 도둑이 자루를 메고 집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었다.
기척을 듣고 달려온 집사가 이 장면을 보고 이해할 수 없다며 주인의 행동을 나무랐다.
랍비는 집사에게
“그가 도둑이라 하여 곤경에 빠진 사람을 도와야 하는 의무를 면제받지는 못한다.”하고 말하였다.
누가 보아도 어리석긴 하지만 과연 랍비의 의로움은 칭찬받을만하다.
예수께서도
“잘 들어라. 너희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20절)는 말씀으로 오늘 복음을 시작하신다.
이 시작은 단순한 가르침의 시작이 아니다.
예수께서 드디어 구약의 중심 율법에 참된 정의의 칼을 대기 시작한 것이다.(마태 10,34 참조)
이 정의의 칼은 율법의 일점일획에 담겨있는 하느님의 정신과 그 참뜻을 도려내어 밝혀줄 것이다.
산상설교를 통하여 예수께서는 당신의 肉化로 말미암아
이 땅에 하느님 나라가 到來했음을 선포하시고,
하느님 나라에 요구되고 통용될 새로운 憲法을 선포하신다.
모세의 율법이 이스라엘 백성의 헌법이라면(출애 19-24장),
예수님의 산상설교는 새로운 하느님 나라와 그 나라 안에서 살게 될 백성을 위한 헌법이다.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산상설교의 주된 내용은 두 가지로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그 나라가 요구하는 참된 정신을 선포하는 것이다.
前者의 내용으로는 진복선언(5,3-12)과 주님의 기도(6,9-13)를 손꼽을 수 있겠고,
後者의 내용은 산상설교의 그 나머지 부분에 속한다.
새로운 하느님 나라의 도래는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이기에,
하느님께서 성자를 통하여 이루어 주셨다.
그러나 그 나라 안에서 살게 될 백성의 자격은 백성 스스로가 취득해야 한다.
여기서 資格이란 狀態的 위치나 지위가 아니라 狀況的 행위를 말한다.
그 자격은 “선택 받음”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얻는 것이다.
그것도 구약의 율법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삶으로써 얻게 되는 것이다.(20절)
마태 복음사가는 예수께서 제시하시는 “더 옳게” 사는 방법을
우선 6개의 대당명제(5,21-48)를 통하여 조직적으로 설명한다.
대당명제는 구약의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으로 피력된다.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은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을 깨뜨리고 율법의 참된 정신을 밝히는 것이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비록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에 빠져
율법의 참된 정신을 곡해하긴 했지만, 세부적인 규정에 이르는
모든 계명을 지키려고 애를 썼다는 점은 인정되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기는 부족하다는 것이 문제다.
그들보다 “더 옳게” 사는 것이 요구되고, “더 옳게” 산다는 것이
율법의 세부 규정을 더 잘 지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이는 곧 법의 형식논리를 넘어 법의 정신을 추구하는 것이다.
6개의 대당명제는
① 살인하지 말라 – 성내지도 말라(21-26절)
② 간음하지 말라 – 음란한 생각조차 품지 말라(27-30절)
③ 이혼장을 써 주어라 – 아내를 疏薄하지 말라(31-32절)
④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 – 아예 맹세를 하지말라(33-37절)
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 앙갚음(보복)을 하지 말라(38-42절)
⑥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 – 원수까지도 사랑하라(42-48절)는 것이다.
구약의 율법은 살인을 금하고 있다. 살인자는 재판에 회부된다.(출애 20,13; 신명 5,17)
그러나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형제에게 “성(화)”만 내어도 그를 재판에 부치신다.
뿐만아니라, “바보”라고 욕하는 자는 중앙 법정에 나아가
“미친놈”이라고 욕하는 자에게 “지옥불”을 선고하신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살인과 성냄이 같은 처벌인 재판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며,
살인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살인을 초래할 수 있는 행위들에
점층적으로 더 무거운 처벌이 선고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예수님의 의도는 분명해진다.
예수께서는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십계명의 제5계명을 심화하여
함께 살아가는 어떠한 형제나 자매에게 화를 내거나 분노하지 말 것을 가르치고 계신다.
이 가르침을 따라 산다는 것은 한마디로 어렵다.
마태오는 자기 공동체에 분노와 욕설이 비일비재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따라서 하느님 앞에 나아가기 전에 즉각적인 화해를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화를 내다보면 쉽게 욕설이 튀어나오는 법이다.
욕설을 뱉는 자도 그렇겠지만 듣는 자의 기분은 더 나쁘다.
점잖은 욕설이나 기분 좋은 욕설은 없다.
화는 욕설을, 욕설은 주먹을, 주먹은 상처를 불러오고 급기야는 남의 생명을 상하게 한다.
살다 보면 화낼 일도 많다. 그러나 화를 내면 거의 본능적으로 욕설이 튀어나오는 것이 문제다.
화가 치밀어 오르면, 화를 내기보다 침을 한번 삼켜보자.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원망(마태 5,23)
김 바니아 수녀
어떠한 행동을 할 때
그 행동의 동기와 원동력이 무엇인지는 매우 중요하다.
의도에 따라, 때로는 동기에 따라
행동의 방향과 영향력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예수님과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가 대립하여 나온다.
복음에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를 의롭다고 말한다.
다만, 그 의로움을 능가하는 의로움도 있다는 것 또한 우리에게 말해준다.
행동의 의로움과 행동을 하게 하는
마음과 정신의 의로움의 차이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행동은 의로우나 마음이 의롭지 못하다면
결국 그 의로움은 '나'라는 존재를
다른 이들보다 월등하게 만들어주는 장치로밖에 사용되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타인을 누르고 '나'라는 바벨탑을 쌓아 하늘과 가깝다 착각한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의로움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늘 생각하고 찾아야 한다.
성경 속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조금이나마 의로움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지,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지의 기준을
늘 하느님께 두시는 예수님.
무엇을 위한 무엇에 의한 의로움인지를, 우리는 종종 놓치곤 한다.
안식일 보다 사람을 더 귀히 여기는 것,
사회에서 정의하는 법과 규칙이 무엇을 위해 만들어진 것인지를
그 근원을 바라보고 실천하는 것.
하느님 아버지께 산해진미와 보석을 바치고 제물을 바치는 것 보다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바를 행하는 것이 더 옳다는 것을.
의로움에 다가서기 위해선 내가 가지고 있는 의로움의 정의는 무엇인지를
그것의 기준은 무엇이며 내가 의로운 행위를 하도록 하는 원동력이 무엇인지를
늘 되돌아보고 성찰하며
아버지께 물어보는 하루하루를 보낸다면 어떨까.
[출처] 마태 5,20ㄴ-26 연중 제10주간 목요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