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2024,5.17.부활 제7주간 금요일 사도25,13ㄴ-21 요한21,15-19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내 삶의 좌우명>
“주님은 당신 성전에서, 하늘의 어좌에서,
세상을 굽어보시느니라,
당신 눈은 인생을 살피시느니라.”(시편11,4)
산티아고 순례 여정을 가진지 10년째 이지만 그 순례의 추억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2014년 그해 7.11일에 저는 25주년 서품은경축을 지냈고 이어 8월말부터 10월초까지 산티아고 순례를 다녀왔고 10년 흐른 내일은 제 후임 빠코미오 원장수사의 25주년 은경축 미사가 내일 오전 11시 수도원에서 있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 마침 지난밤 잘 아는 열심한 자매가 보내준 아들과 며느리가 신혼여행 기념으로 산티아고 순례를 떠나 어제 산티아고에 도착하여 부부가 사이좋게 하나되어 활짝 웃는 표정의 사진이 참 좋았습니다.
“아들 부부 참 멋집니다. 멋진 아드님-며느리 두신 자매님, 축하드립니다. 아들 부부 위해 기도드립니다.”
축하 메시지도 보냈습니다. 산티아고 순례후 참 많이 강론에 인용했던 제목이 삶의 여정입니다. 우리 삶을 하루로 압축하면, 또 일년사계로 압축하면 어느 시점에 와있겠는가 점검할 것을 권했습니다. 일일일생 아침 6시에 시작하여 저녁 6시에 해가 진다 생각할 때, 여기에 각자 삶을 압축해보면 어느 시점인지 들어날 것이며, 일년사계로 압축할 때 역시 각자 삶의 시점이 들어날 것입니다. 물흐르듯 흐르는 세월입니다.
참 많이도 나눴던 예화입니다. 저의 경우 하루로 압축하면 오후 4:30분 정도, 일년사계로 하면 초겨울쯤 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런 현재의 시점 확인이 오늘 하루 거품이나 환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게 합니다. 여기서 나온 제 좌우명이 “하루하루 살았습니다.”입니다.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 때 절실히 와닿은 제 좌우명입니다.
어제 지인으로부터 받은 “나이들면 인생은 비슷해 진다”라는 흥미있는 내용이 자신을 한없이 겸허하게 만든 느낌입니다. 더불어 어제 “공동체는 사랑으로 나를 비워가는 겸손의 훈련장”이란 깨달음성 말마디도 잊지 못합니다. 나이 들면서 이뤄지는 평준화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산은 낮아지고 계곡은 높아져 이런 일, 저런 일 모두가 비슷해 집니다. 많이 가진 자의 즐거움이, 적게 가진 자의 기쁨에 못미치고, 많이 아는 자의 만족이 못배운 사람의 감사에 못미치기도 하여, 이렇게 저렇게 빼고, 더하다 보면 마지막 계산은 비슷하게 되고 모두가 닮아가며 죽음 앞에서는 거의 평등합니다. 우리가 교만하거나 자랑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가 친절하고, 겸손하고, 서로 사랑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깨달음이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형제자매들을 서로 따뜻한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죽음 앞에서 저절로 이뤄지는 이런저런 평준화입니다. 이제 내일이면 부활시기도 끝납니다. 요한복음도 제1독서 사도행전도 끝납니다. 이에 걸맞는 오늘 말씀의 배치입니다.
오늘 복음의 베드로 사도와 사도행전에서 로마로 압송될 바오로에게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점차 가까워지는 순교의 죽음입니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문답이 베드로의 남은 생애 결정적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아마도 남은 삶을 위한 좌우명으로 삼아 하루하루 힘껏 주님을 사랑하며 사목자로서 양떼 사랑이 매진했을 것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세 번이나 연거푸 같은 문답의 반복을 통해 베드로 마음 깊이 당신 사랑을 각인시킵니다. 세 번 예수님의 부인했던 베드로의 아픈 추억이 있어 참 깊이 아프게 마음에 새겨졌을 문답입니다. 이에 곧장 주님은 결정적 중요한 당부를 하십니다.
“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정말 주님을 사랑한다면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 양들을, 형제자매들을 돌보라는, 섬기고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목자는 물론이요 신자들 모두가 평생 좌우명으로 삼아 살아가야할 말씀입니다. 바로 형제자매들 사랑이 주님 사랑이겠습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예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늘 되뇌며 살아야 할 공통적 좌우명입니다. 이에 필히 따라야 할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나를 따라라.”(요한21,19)
이제 머지 않아 순교의 죽음을 맞이할 바오로의 좌우명은 아마도 다음 말씀이지 싶습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2테살4,7)
어느 자매가 남편 선종시 들었다는 마지막 유언 세 말마디를 남은 생애 평생 좌우명으로 삼아 내심 주님께 고백하며 살아간다는 말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미안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제 좌우명은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고백시중 다음 마지막 연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영원이, 하늘나라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하루하루에 담긴 영원이요, 하늘나라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영원을, 하늘나라를 살지 못하면 죽어서도 못삽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된 하늘길이요 하늘문입니다. 끝으로 동방 4대교부중 한분인 요한 크리소스토무스(349-407)의 마지막 거룩하고 신비로운 죽음의 실화를 소개합니다. 결코 우연한 죽음은 없고 자비로운 주님의 섭리하에 이뤄지는 죽음임을 깨닫습니다
-“요한은 3개월 동안의 아주 혹독한 여행 끝에 순교자 경당, 바실리스쿠스에 도착합니다. 요한이 도착하기 전 순교자 경당의 주보 성인인 바실리쿠스가 나타나 요한에게 말합니다.
‘형제여! 용기를 내십시오. 내일 우리는 함께 있을 것입니다.’
성인은 순교자 경당의 사제 루키아누스를 불러 당부합니다.
‘요한이 올 것이니, 그를 위해 장소를 준비하시오.’
순교자 경당에 도착한 요한은 하얀 의복을 가져다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리고 입던 옷을 조용히 벗고 신발만 빼고 모두 바꿔입습니다. 다음 요한은 주님께서 마련해 주신 성체를 모시고, 평소 사용하던 형태로 마지막 기도를 바칩니다. ‘하느님은 모든 일에 찬미받으소서.’ 그리고 요한은 마지막으로 아멘이라고 말하며 성호를 긋습니다. 경주에서 승리한 선수 요한, 그의 비천한 시신은 바실리쿠스 경당으로 옮겨 바실리쿠스 무덤 옆에 안장됩니다.”-
아, 살아서보다 죽어서 영원히 사는 성인, 요한 크리스토무스요 사후 1600년쯤 지나 이렇게 동아시아 한국에서 프란치스코 수도사제 강론에 인용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었는지요!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식사 습관도 소개합니다.
-“그는 우아한 삶과는 달리 지나치게 검소했고, 그런 것에 돈을 쓰는 행위를 하느님 모독으로 여겼습니다. 요한은 혼자 먹었습니다. 포도주를 마시지 않은 이유는 술의 열기가 그의 머리에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더운 날씨에 그는 약간의 장미수를 마셨습니다.
때로 요한은 먹는 일을 잊어버리고 저녁까지 식사를 미루기도 했습니다. 교회문제에 휘말리거나, 성경의 의미를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며 영적 주제에 관한 묵상에 몰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공부에 전념하는 사람들은 음식을 전혀 먹지 않거나 아주 적게 먹는 것이 적절합니다.”(그리스도교 신앙 원천14권; 강선남 역주: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생애에 관한 대화279-282쪽)-
여러분의 좌우명은 무엇입니까? 바로 이 좌우명이 하루하루 날마다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살며, 환상이나 허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게 합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 역시 깨어 오늘 지금 여기서 본질적 깊이의 영원한 정주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의로우신 주님이기, 정의를 즐기시나니,
올바른 자, 당신 얼굴을 뵈옵게 되리라.”(시편1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