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4일 오후 서울대공원. 불과 몇 시간 전 사육사를 물어 중태에 빠뜨린 호랑이 로스토프(3)가 아무렇지 않게 관람객 앞에 섰다. 이 호랑이에게 물린 사육사는 28일까지도 의식 불명 상태지만 호랑이는 전과 다름없이 잘 먹고, 잘 지낸다. 사람 피 맛을 본 맹수가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단 소식이 전해지자, 사람들 사이에선 동물의 세계에서도 '유전무죄 무전유죄' 법칙이 통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일었다.
모시기 어려운 고가(高價)의 호랑이가 사고를 쳐서 처벌 없이 넘어간 거지, 멧돼지 같은 '싸구려' 동물이 사람을 해쳤다면 총알 세례를 면치 못했을 거라는 이야기다. 중국 베이징(北京) 동물원에서 '보물'로 대접받는 판다 구구도 관람객을 세 번이나 물어 치명상을 입혔지만 아무 처벌이 없었다. 반면 같은 시기 옆 우리에 살던 사냥개들은 사람을 위협했단 이유로, 사람을 물지도 않았는데 총살됐다. 한국 농가에 종종 출몰하는 멧돼지들도 발각되는 족족 엽총에 맞아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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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박상훈 기자
정말로 사람을 다치게 한 동물은 몸값에 따라 처벌 형량이 다를까. 소방방재청 관계자는 "꼭 그렇지는 않다. 기준은 동물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말했다. "동물이 사람을 다치게 할 가능성(위해 가능성)이 있다면 무조건 처벌해요. 단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선 죗값을 묻지 않아요." 이 기준을 적용해보면 사람을 물어뜯고 얌전히 우리로 들어간 호랑이는 처벌대상이 아니지만, 아직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았어도 덤벼들기 직전 멧돼지는 처벌대상이란 뜻이다. 지난 24일에도 중화기로 무장한 경찰특공대가 현장으로 달려갔다. 더 큰 인명 피해가 예상될 경우, 로스토프를 즉시 사살하기 위해서였다.
해외 동물원도 '동물 재판'에 같은 기준을 적용한다. 지난해 8월 독일 쾰른 동물원에서 우리의 문을 잠그지 않은 사육사가 호랑이에게 물렸다. 여기까지는 서울대공원 사건과 판박이였지만, 한국의 로스토프와는 달리 독일 호랑이는 우리 밖으로 도망치려 했다. 평일 낮, 우리 바깥에는 관람객이 적지 않았다. 동물원 원장 테오 파젤이 엽총의 방아쇠를 당겨 호랑이를 죽였다.
하지만 한 달 뒤 미국 뉴욕의 브롱크스 동물원에서 사고를 친 호랑이는 살아남았다. 이 호랑이는 5m 높이의 모노레일에서 떨어진 관람객을 10분 동안 물어뜯어 중상을 입혔지만, 출동한 사육사를 보고는 공격을 멈추고 현장을 떠났다. 브롱크스 동물원 관계자는 NBC와의 인터뷰에서 "호랑이는 어떤 처벌을 받느냐"는 질문에 "용서받았다. 맹수가 본능대로 행동한 것을 이유로 죄를 물을 수 없다"고 답했다.
미국 플로리다주(州) 올랜도의 시 월드(Sea world)에서 '범고래 쇼' 주인공으로 활약하는 범고래 틸리쿰도 20년간 사람 셋을 물어 죽였지만, 여전히 살아남아 공연에 참가하고 있다. 야심한 밤 틸리쿰의 수조로 몰래 들어온 침입자를 물어 죽인 것과 호루라기 신호가 맞지 않아 사육사를 물어뜯은 것을 틸리쿰의 잘못으로 볼 수 없단 이유에서였다.
지난 3월 미국 캘리포니아주(州)에서 여성 자원봉사자를 문 사자와 캐나다 퀘벡주(州)에서 청소 중인 사육사를 공격한 호랑이 역시 아무 처벌을 받지 않았다. 열려 있던 잠금장치 때문에 생긴 문제였다. 2008년 싱가포르에서 우리 안으로 뛰어든 관람객을 물어 죽인 백호 무리도 '무죄'였다.
미국 알래스카주(州) 알래스카 동물원에 있던 북극곰 빙키는 야생동물이 동물원에서 사람을 다치게 했을 때 동물에게 책임이 없단 걸 전 세계에 알린 동물로 손꼽힌다. 1994년 빙키는 6주 동안 동물원 관람객 2명을 다치게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모두 동물원 규칙을 어기고 빙키에게 가까이 다가간 경우였다. 이때 미국에선 "북극곰의 위험성은 인정되어야 한다(polar bear's dangerousness should be respected)"는 여론이 조성됐다. 잘못은 북극곰이 아니라 공원 관리에 있고, 동물원 관리에 좀 더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결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