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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16일 금요일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사제 성화의 날)
제1독서 : 신명 7,6-11
제2독서 : 1요한 4,7-16
복 음 : 마태 11,25-30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7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밝은 곳에 있다가 어두운 곳에 들어가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손을 앞으로 뻗어서 자기에게 다가올 위험을 손의 감각으로 막으려 합니다.
하지만 계속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잠시 뒤, 눈이 어둠에 적응하면서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평상시에 보던 것처럼 잘 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실로암에서 행하셨던 기적을 떠올려 보십시오(요한 9장).
그곳에는 태어났을 때부터 눈이 멀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진흙을 개어 그의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이 명령을 충실히 따른 그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앞을 볼 수 있게 되었다고 복음은 증언합니다.
선천적 백내장 환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태어났을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습니다.
성인이 되어 수술이 가능하다는 말을 듣게 되었고,
수술해서 드디어 앞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앞을 완전하게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형태만 보였습니다.
이제까지 하지 않았던 공간 능력 파악을 위해 몇 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이 대단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조금씩 보이는 수준을 뛰어넘는, 즉 시간을 뛰어넘는 기적이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엄청난 힘을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이렇게 힘센 분이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사랑을 더 많이 주실까를 고민하십니다.
문제는 늘 우리였습니다.
세상의 관점을 뛰어넘는 분이신데, 우리는 그분을 세상의 관점으로만 보려고 했습니다.
엄청난 분인데도 자기가 가진 그 어떤 것보다도 하찮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님의 사랑도 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장 힘센 분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 말씀에 큰 희망을 갖고 주님께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선택하신 것은
그분의 끝없는 사랑의 표현이며, 그 마음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 신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에서 새로운 것을 배웁니다.
무한하신 그분의 사랑입니다. 진짜 사랑입니다.
그 사랑 안에서 우리는 진정한 안식을 얻게 됩니다.
정녕 주님의 멍에는 편하고 주님의 짐은 가볍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신문사에 팩스가 한 장 왔습니다.
한국에서 저의 강론을 읽는 분이라고 합니다.
남편이 시각장애인이라서 아내가 남편에게 저의 강론을 읽어 주었다고 합니다.
아는 분이 매일 강론을 보내 주었는데 무슨 일이 있는지
요즘은 강론을 보내 주지 못한다고 합니다.
팩스의 요지는 어떻게 하면 매일 저의 강론을 볼 수 있는지,
개인적으로 보내 줄 수 있는지 알고 싶다는 것입니다.
저는 미주가톨릭평화신문 홈페이지에 오면
매일 강론을 확인할 수 있다고 문자를 보냈습니다.
지난 5월 LA에서 레지오 강의를 할 때에도
매일 저의 강론을 읽는다는 ‘부부’를 만났습니다.
처음 만났지만 반가운 마음에 함께 사진을 찍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걷지 못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금도, 은도 없습니다.
다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십시오.”
그러자 걷지 못하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 걸었습니다.
저는 아침 일찍 일어나는 습관 때문에 매일 강론을 나누지만
제가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을 만큼 높은 인격과 덕으로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사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난 토요일에 뉴저지 가톨릭 회관에서 특별한 미사가 있었습니다.
‘꽃동네’의 창설자인 오웅진 신부님의 ‘팔순축하미사’가 있었습니다.
저는 올해 60회의 생일을 지냈으니 오웅진 신부님은 저보다 20년 먼저 태어났습니다.
신부님은 군에서 복무할 때 김수환 추기경님을 찾아갔다고 합니다.
군부대 인근에 ‘공소’를 세우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는 오웅진 신부님께 비용을 주셨습니다.
아직 사제가 되지도 않았을 때인데 오웅진 신부님은 공소를 마련하였습니다.
신부님의 열정과 헌신은 사제가 되기 전에 이미 ‘공소’로 열매를 맺었습니다.
1999년 10월 1일에 저는 오웅진 신부님의 땀과 열정으로 세워진 ‘공소’의 본당 신부로 갔습니다.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꽃동네의 오웅진 신부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렸고,
수녀님을 파견해 줄 것을 청하였습니다.
오웅진 신부님께서는 기꺼이 두 분의 수녀님을 파견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저는 수녀님들과 함께 저의 사제생활 중에 가장 보람 있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오늘은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95년 예수 성심 대축일에 ‘사제성화의 날’을 지내도록 권고하였습니다.
한국 교회는 매년 예수 성심 대축일을 사제 성화의 날로 지내고 있습니다.
교구의 모든 사제들이 모여서 하루 피정을 하고 있습니다.
함께 모여 기도하고, 강의를 듣고, 고백성사를 보고, 은경축을 맞은 사제들을 축하합니다.
무엇보다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고자 다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하느님께 대한 순종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겟세마니 동산에서 하신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모든 사제는 예수님의 순종을 배워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연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지금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었습니까?”
율법학자는 강도당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에게 “당신도 가서 그렇게 하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산상수훈’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가난한 이,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이, 자비를 베푸는 이, 슬퍼하는 이,
평화를 베푸는 이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온 아들의 비유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잔치를 베풀어라. 죽었던 아들이 돌아왔다. 송아지를 잡자.”
잘못한 이를 용서하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모든 사제는 예수님의 자비하심을 배워야 합니다.
겸손과 희생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습니다.
첫째가 되려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합니다.
여우도 집이 있고, 참새도 새끼 두는 둥지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습니다.
누가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마저 내어 주십시오.
겉옷을 달라는 사람이 있으면 속옷까지 내어 주십시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행동으로 실천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고 죽으셨지만,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모든 사제는 예수님의 겸손과 희생을 배워야 합니다.
사제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닮을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초기 교회에서부터 예수성심에 대해 언급되었었는데
이는 하느님이면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이루는 한 구성요소를 의미하였다.
예수성심은 강생의 신비와 수난과 죽음, 성체성사 설정 등을 통하여 보여준
예수님의 사랑의 마음을 말한다.
특히 교부들은 예수의 성심을 사랑과 은총의 샘으로 생각하여
십자가상에서 군인의 창에 찔리어 예수의 옆구리에서 물과 피가 나온 것을(요한 19,34)
천상의 보물창고에서 무수한 은혜가 쏟아져 나온 것에 비유하였다.
즉 심장에서 흘러내린 물은 영혼을 깨끗이 씻고 초자연적 생명을 부여하는 성세성사를 상징하며,
피는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게 하는 영혼의 양식인 성체성사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마치 하와가 아담의 옆구리에서 나온 것처럼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로 예수의 옆구리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13세기 이래로 독일의 신비주의에 영향을 받아 성심 공경이 성하였다.
교황 비오 12세(1939-1958)의 회칙에서
“구세주의 상한 성심에서 구원의 성혈을 나누어주는 교회가 탄생하였다.” 언급하고 있다.
예수성심은 하느님이면서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사랑과 정서, 감정의 중추이며
인간에게 베푸시는 하느님 은총의 근원이며 사랑의 표현이다.
동시에 인간 사랑의 응답을 바라시는 하느님의 원의이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성심을 특별히 공경하는 축일이다.
성체와 성혈 대축일 다음 금요일에 지키도록 한 것은
이 축일이 성체성사와 밀접히 연관되기 때문이다.
13세기 이래로 예수성심의 공경이 성하였지만,
1673년 12월 27일 프랑스 파레이 르 모니알에서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콕(1647-1690)에게 예수께서 발현하시어
성심 공경과 성심 축일의 제정을 요청하시게 되어,
성심께 대한 신심이 공적으로 세상에 전파되었다.
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로 대축일로 지내오고 있다.
이날은 또한 한국 주교회의는 사제성화의 날로 정하여
사제들이 완덕으로 나아가도록 기도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율법을 잘 알고 잘 지키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며
철부지 어린아이들은 율법을 알지도 못하고 지키지도 못하는 무리들이다.
철부지 어린아이들은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다.
이런 어린아이들은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따르며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하느님 앞에 가장 아버지의 뜻을 잘 따른 어린이는 바로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예수님을 따르는 철부지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계시해 주셨다.
바로 예수님 당신의 아들 자신을 통하여 이렇게 알려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알게 된 사람들은
이제 예수님 안에서 위안과 안식을 찾고 또 누릴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의 법은 우리가 실천하면, 그만큼 큰 기쁨과 위안을 누릴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도 가지려 노력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예수 성심은 성체성사의 원천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예수 성심, 곧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
다시 말해서 그분의 우리 인간을 향한 애끓는 사랑으로 가득한 마음과 심장이
어떠한 것인지를 마태오 복음사가는 명쾌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골자는 이것입니다.
이 세상살이 하느라 죽을 고생인 우리 각자를 향해 주님께서 활짝 열린 팔로
우리를 열렬히 환대하시고 따뜻이 위로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 예수님의 추종자요 대리자로 살겠다고 약속한 사제로서, 수도자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님의 환대와 위로를 세상에 드러내고 있는지 진지하게 돌아볼 일입니다.
오늘 우리 죄인을 향한 각별한 사랑으로 충만한 예수 성심을 묵상하며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사랑이 제대로 된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상호 통교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랑이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흘러가야 하고, 다시 또 되돌아가야 그게 제대로 된 사랑이겠지요.
한쪽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사랑으로 가슴에 불이 붙고, 밤잠도 제대로 잘 못 이루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조금도 그 사랑을 눈치채지 못하고,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처럼 안타까운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인류의 역사는 하느님의 우리를 향한 짝사랑의 역사였습니다.
우리가 그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우리가 아무리 그분께 대들고 반역해도,
우리가 그렇게 배신을 때려도 늘 그 자리에서 우리를 향한 당신 사랑의 불꽃을 태우고 계시는 분,
그분이 바로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오늘도 예수 성심은 우리의 반역과 배신으로 인해 상처받고 괴로워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구세주의 상처 입은 성심에서
우리 교회가 탄생 되었고, 우리의 상처가 치유되고 있습니다.
그 부서진 예수 성심에서 7가지 성사가 흘러나왔으며,
그 성사는 큰 강이 되어 메마른 사막을 비옥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예수 성심 성월을 지내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간절히 바라시는 소원 한 가지를 들어 드리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소원은 단 한 가지입니다.
‘모든 이가 당신 성심께로 기꺼이 달려가 끊임없이 구원의 샘물을 퍼마시는 것!’
구원의 샘물은 어디에서 퍼마실 수 있을까요?
그것은 너무 간단합니다.
매일 거행되는 성체성사에 참석하면 됩니다. 매일의 영성체를 통해 가능합니다.
비오 12세 교황님께서는 회칙, ‘물을 길으리라’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성심 신심이야말로 매우 효과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하는 탁월한 방편이며,
현대 사회에 적합한 신심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배우는 가장 효험있는 학교입니다.”
“예수 성심에서 흘러나온 물과 피는 죄로 죽은 인간을 깨끗이 씻고,
새 생명을 주는 세례의 물과 새로 태어난 백성을 먹여 기르는 성체성사를 상징합니다.
예수 성심은 성체성사의 원천입니다.
인간에 대한 예수님의 끝없는 사랑이 성체성사로 드러난 것입니다.”
같은 물을 마셔 뱀은 독을, 벌은 꿀을 만든다.
박상대 마르코 신부
고대 철학자들은 거의 모두가
“行爲는 本性을 따른다.agere sequitur esse!”라는 명제에 의견을 같이했다.
뿐만아니라 중세기의 독일 철학자들도 하나같이
“가지지 않은 것을 줄 수는 없다. Was man nicht hat, das kann nicht geben!”는 생각에 일치하였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겉으로 행하는 어떤 행위든 그것은 內面의 본성을 드러내는 것이며,
사람은 자기가 스스로 가지지 않은 것을, 남에게 줄 수는 없다는 말이다.
여기서 後者를 굳이 유물론적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결국 사람은 본성에 따라 행동할 것이고,
무엇이든 스스로 가진 것을 남에게 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 어떤 마음을 가지던 마음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까라 생각이 달라지고, 생각에 따라 사람은 행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는 생각이 달라지면 태도가 달라지고,
태도가 달라지면 습관이 바뀌며, 습관에 따라 운명이 좌우된다는 말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도식으로 설명하자면,
마음heart → 생각thinking → 태도attitude → 행위act →
습관habit → 운명destiny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인간 행동의 많은 부분은 거의 습관에 따라 행동하는데 습관은 곧 반복된 행위를 말한다.
행동하기 위해 이왕에 마음을 먹을 것이라면 좋은 마음을 먹는 편이 바람직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가 그것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타인이 나에게 좋은 마음을 먹도록 강제로 요구할 수는 없는 일이다.
마음의 門에는 손잡이가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며,
그것도 밖으로 나 있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나 있기 때문이다.
보통 문이란 손잡이가 안팎으로 나 있어 어느 쪽에서나 쉽게 열 수 있지만,
마음의 문을 여는 손잡이는 마음을 가진 자의 편에서만 열 수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나 자신만이 열어 보일 수 있는 마음의 좋음과 나쁨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한 사람의 마음이 좋고 나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밖에서는 손잡이가 없으니 열고 들어가 볼 수 없다.
그렇다고 남의 마음을 透視하기란 더더욱 어렵다. 결국 내 마음은 나만이 안다는 결론이다.
나 혼자 아는 마음이 좋은지 나쁜지는 자기 마음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良心에 비추어 봄으로써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방법이 늘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양심이 올바르고 보편적이라면 문제는 없다.
그래서 독일의 철학자 칸트(1724-1804)는 자신의 저서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을 통하여 世人들에게
“너의 행위를 보편적 규범에 맞게 하라.”고 주문했던 것이다.
자기 마음의 선과 악, 옳고 그름을 평가하는 데 실패하는 경우는
보통 양심이 混濁하여 마음을 비추어 볼 수 없는 경우가 그렇다. 이럴 땐 낭패를 본다.
그래도 방법은 있다.
행위는 마음의 본성을 따르고, 자기 마음에 없는 것을 남에게 줄 수 없다고들 하니,
수행된 행동의 결과와 타인에게 주어진 것을 보고 그 원인이 되는 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즉, 행동의 결과, 타인의 반응, 자신의 後感 등을 검증함으로써 마음을 알 수 있는 방법이다.
물론 행동에는 착오가, 반응에는 오해가 있기 마련이다.
또는 양자택일의 기로에서 고민하다 수행한 최선이 원치 않은 결과를 가져오는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시킬 수는 없다.
좋은 결과를 목적으로 나쁜 수단을 쓸 수는 없다는 말이다.
행위의 좋고 옳은 결과를 위해서는 늘 좋고 옳은 마음을 가지도록 요구되지만,
마음은 스스로가 가꾸어야 하면, 전적으로 자신이 열고 나가야 하는 것이다.
현대인들이 선호하는 주거 공간인 아파트나 관광지에 위치한 호텔은
같은 방이라도 전망에 따라 가격 차가 상당히 나는 법이다.
똑같은 설계, 재료, 인테리어라 할지라도 방이 난 방향에 따라 가격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동물농장”으로 잘 알려진 인도태생 영국인 조지 오웰(1903-1950)은
천재적인 머리를 가졌으나 식민 역사의 죄책감과 부정적인 인생관 때문에 생긴
우울증과 폐결핵으로 젊은 나이에 인생을 마감해야 했다.
반면에 엘리너 루스벨트(1884-1962)는 어릴 때 고아가 되었으나 진취적인 인생관으로
루스벨트와 결혼하여 미국의 역대 대통령 부인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여성이 되었다.
그뿐이랴. 생후 19개월 만에 눈, 귀, 입의 기능을 모두 잃고도
사물에 대한 진지한 마음과 밝은 생각으로
아름다운 인생을 꾸려나간 “3重苦의 聖女” 헬렌 켈러(1880-1968)도 있다.
1956년에 세상을 떠난 프랑스의 철학자 살리 에즈Sali ge는
“이성을 가진 인간의 행동은 感動, 아니면 獨善의 싹을 피운다.”고 했다.
벌은 물을 마셔도 꿀을 만들고,
뱀은 물을 마셔서 독을 만든다는 말이 기막히게 들어맞는 순간이다.
감동과 독선, 바로 이 두 가지가 우리들 생활기록부의 양면성이다.
이는 우리들 생활기록부의 두 가지 서로 다른 문체이다.
감동은 사랑과 관심, 희생과 배려의 글씨체를,
독선은 미움과 무관심, 욕심과 배타의 글씨체를 구사한다.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우리 삶은 지금보다 훨씬 달라질 것이다.
예수님의 마음, 그분의 거룩한 마음을 기억하며 본받고자 하는 “예수성심 대축일”이다.
일찍이 어느 인간도 겪어보지 못했을 그런 무지막지한 고통을 이겨내며,
세상의 죄를 대신하여 “어린양”으로 아버지께 자신의 생명을 바치신 예수님을
그 때 그 자리에서 지켜본 사람들은 “예수님의 성심”을 모른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 성심을 자기 마음속 깊이 새겼고, 또 닮으려 노력했던 사람들의 증언으로
복음서가 집필되어 우리에게까지 전해졌다.
그래서 복음의 말씀은 그분 자신의 말씀과 행동이며, 그것은 그분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온 것이다.
교회는 일찍부터 예수님의 성심을 공경해 왔다.
이를 축일로 공경하기 시작한 것은
방문회의 수녀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콕(1647-1690)이 세상을 떠난 후부터였다.
10살 때 전신마비의 병을 얻은 마리아는 14살 때 기적적으로 치유되었고,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은혜와 예수님의 성심을 볼 수 있는 은혜를 함께 받았었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목격한 사랑으로 불타는 예수님의 성심을
죽을 때까지 외쳤던 성녀 마리아 덕분에 “예수성심축일”이
수도회와 프랑스 전역으로 확산되어 축일 미사를 거행하였고,
교황 비오 9세(1846-1878)는 이를 대축일로 제정하여 전체 교회에 공포하였으며,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다음 금요일로 고정하였다.
한국 천주교주교회의는 1995년부터 오늘 대축일을 “사제 성화의 날”로 지정하여
누구보다 사제들이 먼저 스승의 성심을 공경하고 닮아서
복음 선포와 성사 거행의 직무에 더욱 매진하기를 촉구하고 있다.
오늘 우리는 한없이 풍요로우신 예수 성심께 감사를 드리고,
나의 잘못과 죄로 상처받은 예수 성심을 통회 하는 마음으로 묵상해야 할 것이다.
루카복음 15,3-7은 바로 이러한 예수 성심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세리와 죄인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여들었고,
예수님은 애당초 그들을 위해 세상에 오셨다.
예수님의 말씀을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듣게 된다는 사실 자체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있어서는 모욕적인 일이었고,
예수에게는 비난의 빌미가 된다.
이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루카복음사가가 하느님의 크고 무한한 사랑과 자비를 집약한 15장으로서,
잃은 양(4-7절), 잃은 은전(8-10절), 잃은 아들(11-32절)에 관한 비유말씀이다.
하느님은 잃은 것을 찾아 나서시는 분이며, 죄인들을 회개로 초대하시는 분이시다.
바리사이와 율사들에게는 스캔들이 될지는 몰라도
하늘에서는 죄인의 회개와 잃은 것의 되찾음이 큰 잔치의 이유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마음이요,
세상이 주는 고통으로 아파하며 죄를 짓고 길을 잃고 헤매는
나 자신을 향한 예수님의 성심이다.
“걸음마를 가르치고, 팔에 안아 키워주고, 인정으로 매어 끌어주고,
사랑으로 묶어 이끌고, 젖먹이처럼 들어 올려 볼에 비비기도 하며,
허리를 굽혀 입에 먹을 것을 넣어주고, 죽을 것을 살려 주시는”(호세 11,3-4) 예수 성심이여,
온 세상에 찬미 받으소서.
민동규 다니엘 신부 (갑곶순교성지)
찬미 예수님
오늘은 예수 성심 대축일이면서 동시에 사제성화의 날입니다.
교회는 이날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권고에 따라,
1995년부터 해마다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에 ‘사제성화의 날’을 지내고 있다.
이날은 사제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복음 선포의 직무를 더욱 훌륭히 수행하는 가운데
완전한 성덕으로 나아가고자 다짐하는 날이다.
또한 교회의 모든 사람이 사제직의 존귀함을 깨닫고
사제들의 성화를 위하여 기도와 희생을 바치는 날이기도 하다.
사제 성화의 날은 사제들을 위한 날임과 동시에 사제들을 위해 기도하는 날입니다.
우선 이날은 사제들이 그들의 모습을 다시금 바라보는 말입니다.
처음 사제로 서품되던 날 다짐했던 삶을 온전히 살아가고 있는지,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열망과 성덕으로 나아가고자 함에서
자기 모습을 바라보는 날입니다.
또한 온유함과 겸손함으로 세상 속 그리스도의 빛을 증언하며 살아가고자 다짐하는 날입니다.
이런 사제들은 완벽한 사람이 아닌, 주님 앞에 모두가 철부지임으로
사제들은 분명 기도가 필요하고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날은 사제들을 위해 기도하는 날입니다.
기도해주십시오. 사제들을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하느님 나라를 위해 봉사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복음에서 주님은 주님의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절대로 편한 멍에가 아니었고, 편한 짐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온유함과 겸손함 때문이었습니다.
온유함과 겸손함은 절대적인 의탁을 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의탁 말입니다.
사제들도,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주님께서 말씀하신 온유함과 겸손함으로
하느님께 의탁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서로 기도하는 하루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최후의 심판
이 세상의 삶이 끝나면
우리는 주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때 이렇게 물으실 것이라고
십자가의 성 요한은 말합니다.
‘그대는 얼마나 사랑하면서 살았습니까?’
맞습니다. 우리는 심판받을 것입니다.
오직 사랑만으로 심판받을 것입니다.
뒤를 돌아보지 말고
늦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남 탓하지 말고
나중에 하겠다고 미루지 말고
오늘 사랑합시다.
우리는 사랑으로 심판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하늘나라의 신비는 철부지들에게
안 콘실리아 수녀
‘철부지’의 어원을 보면 계절의 변화를 가리키는 말이 ‘철’인데
그 변화를 알고 사리를 헤아릴 줄 아는 힘, 곧 지혜를 뜻하는 말이다.
이 같은 변화를 알지 못한다는 한자 말 ‘부지(不知)’가 붙어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하지 못하는
어린애 같은 사람을 일컬어 철부지라고 한다.
즉 , ‘철을 모른다’는 것은
지금이 어느 때인지, 무엇을 해야 할 때인지 모른다는 말이다.
오늘 복음에서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이란,
스스로 세상 이치를 깨달아 모든 것을 확신하고 안다고 자부하는 이들이다.
철이 들어 지금이 어느 때인지, 무엇을 해야 할 때인지 스스로 아는 이들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진실로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아보지 못했다.
왜 알아보지 못했을까??
스스로 만들어 놓은 지혜와 슬기가 그들의 눈을 가리웠다.
때때로 삶에서 여지를 남겨두지 않고
자기의 의견에 모든 확신을 거는 사람들을 만난다.
내가 부족해서 온전히 하느님만 의탁하며 살아가는 것이 어렵다면,
내가 틀렸다라는 여지라도 남겨두어야 한다.
1%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 어른들을 보고.
내 안의 생각들 안에서 여지가 없는 내 모습을 보고서도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낫겠다 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살아가다 보면 너무 똑 부러지고 척척 일을 잘해내는 사람보다
어리숙하고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을 대하면
마음이 편해지고 내 속 이야기를 털어 놓고 허물없이 나도 순수하게 웃을 때가 종종 있다.
그들의 철 없음이 나의 영혼을 더 흔드는 이유이다.
철부지들은 철을 알지 못하기에 지금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모르기 때문에
간절하게 하느님을 갈망하며 살아간다.
그들은 인생에서 헤매고 고통 한 가운데 있다.
하지만 세상의 지혜가 없기 때문에 하느님만을 갈망하기에
철부지들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먼저 알아보고
하느님의 나라를 지금 이곳에서 살아갈 수 있다. 아멘!
[출처] 마태 11,25-30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사제 성화의 날)|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