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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직암선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이해춘아오스딩
성모 성지순례를 다녀와서(2)
우리 일행은 서유림 성당에서 왕 신부님의 출신지이며 본당인 육합(六合) 성당으로 향하였다.
육합 성당을 소개하면 이곳은 주민 100%가 천주교 신자로서 교우수가 7,000여명으로 미사 참여율이 90% ~ 95%에 달한다고 하니 이곳에서는 신앙생활이 바로 일상생활 되었 있는 곳입니다.
육합 시내에 들어서니 우리를 맏이하는것은 큰 길거리에 서있는 성상(聖象)이었다 종교의 자유가 없는 중국 땅에 유럽에서나 볼수있는 성상이 큰 길에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큰 도로변 건물에도 전부 성화 같은 것을 벽에 조각이 되어있어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왕 신부님 안내로 성당안에 들어가 성체조배를 하고 본당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이 지역은 오래 전부터 천주교가 들어와 주민이 전부 천주교 신자인데 최근들어 개방화로 젊은 사람들이 외지에
직장 관계로 나가서 결혼을 하는 관계로 지금 현재는 천주교 신자가 아닌 사람이 약간 있다고 하며 정부에서 통제를하여도 주민이 전부천주교 신자이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 비하여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할수 있다고한다.
성당순례를 마치고 바로옆에 있는 왕신부님 생가를 방문하여 부모님들로 부터 접대를 받았다.
신부님 부모님은 40여년동안 새벽미사와 성체조배를 끊이지 않고 하였다고 신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머님이 얼마나 자상하신지 신부님이 거처하였던 방을 매일같이 아주 깨끗하게 정리정돈하여 자식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알수가있었다 이곳 순례를 마치고 통얼꺼우’칠고산 성모성지로 향하였다
‘통얼꺼우’본당은 산시교회 역사상 오래된 본당 중 하나이다. 타이유엔시 진유엔서남 10km에 위치하며 서쪽으로는 ‘뤼량’산, 동쪽으로는 ‘펀’강과 맞닿아 있으며 남쪽으로는 진나라 때 유명한 인물 삼국지 저자‘루워관죵(羅貫仲)’의 고향-칭쉬, 북쪽은 성급 명승고적-진츠가 있다.
타오촌의 관할에 속해 있다. 타이유엔 교우들 사이에는 ‘통얼꺼우, 거리아오꺼우에는 주교신부가 끊이지
않는다.’라는 속담이 전해 내려 온다.
1633년 벨기에인인 예수회소속의 Michael Trigault가 천주교를 타이유엔에 전하게 되는데 다시 통얼꺼우까지 전해지게 되어 지금까지 340여 년의 역사가 되었다.
천주교의 전교 후 마을의 남산과 북산 언덕에 보육원과 성당, 수도원 등을 지었는데 후에 교회의 발전에 따라 통얼꺼우는 점차 중국 천주교 서적에서 언제나 아름다운 명성의 마을로 불려졌다.
지금의 통얼꺼우는 이미 ‘칠고산 생태 여행지’로 정해져 있다. 은혜 입은 남산, 칠고의 뜻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칠고산의 원래 명칭은 ‘남산’이었다. 위에 ‘칠고당’을 건설한 후 ‘칠고산’으로 고쳐 부르게 된 것이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100년 전 가을이 되면 통얼꺼우의 농작물은 우박의 공격을 받는 재앙을 맞곤 했다. 그래서 매해 마을 사람들은 기근으로 살던 곳을 버리고 떠나야 했는데 당시의 신부가 교우들을 데리고 십자가를 들고 기도행진을 하여 십자가를 산 정상에 꽂고 재앙을 피할 수 있기를 기도 드렸다. 그 후 통얼꺼우의 농장물은 안전했는데 매년 가을 추수 때가 되면 통얼꺼우의 신부와 교우들은 십자가의 보호로 우박의 고통을 면하게 된 것에 감사하며 마음에 새기는 것이다.
십자가와 성모님은 깊은 관련이 있다. 교우들은 매 번 십자가상의 예수님께 경배할 때 자연스럽게 십자가아래 우리와 같은 고통과 슬픔을 가지신 성모님을 생각하게 된다.
중세기 수도회 단체들이 성모마리아의 십자가 아래서의 애통함을 기리기 시작했는데 이후 성모의 일생과 각종 고통을 기념하게 되었다.
1721년 교황 베네딕토8세는 ‘동정마리아의 칠고 기념일’을 제정하였는데, 예수수난 주일 전 금요일에 지낸다. 성모님의 고통과 그리스도의 고통은 긴밀한 관계가 있다는 의미이다.
1913년, 교황 비오 10세는 9월 15일로 옮겨 지내게 했다. 1970년부터 9월15일을 ‘고통의 성모마리아 기념일’로 명칭을 바꾸고 9월14일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로 기념한다.
성모마리아의 보호에 감사드리기 위해 통얼꺼우의 신부와 교우들은 칠고산 위에 성모당을 짓기로 결정했다. 성모님은 일곱 가지 고통이 있기 때문에 성모당을 칠 고당이라 부르며 남산은 칠 고산이라 하였다.
‘하늘에 오르는 문’을 지나면 광활한 광장이 펼쳐지는데 성모 대 성당만은 광장 서쪽에 위풍당당하게 자리 한다. 금빛 찬란한 고전적 건축물로 기풍이 웅대하다. 성전 앞 20미터쯤에 주 제단을 만들었는데 북경의 천단을 본떠 만들었다. 누런 기와와 붉은 벽, 오색의 대들보와 붉은 기둥, 천상의 궁궐과 같고 인간세계 속의 선경이다. 광장 양측에는 12사도의 조각상이 차례로 늘어서 있다. 모두 신비로운 자태가 서로 달라 살아 있는 듯하다. 조각상의 크기는 실물크기와 비슷하다. 백옥을 재료로 만들었으며 아래는 각 사도의 사적을 새겨 넣었다. 이것은 지금의 주임신부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성모 대성당, 중심 제단, 사도 조각상, 이 세 가지는 중국과 서양의 것이 잘 조화 되었으며 물과 젖처럼 잘 융합되어 산으로 끊임없이 이어져 서로 어울리는 것이 혼연일체가 된 듯하다.
성전 안으로 들어가면 중간의 성상이 장엄하고 순간 경외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성전 천장과 사방에는 각색의 벽화가 그림마다 연결되어 천주의 덕과 전능하심을 드러내며 성교회의 기적을 보여주는 것 같다.
성전 앞 좌우 양측에는 연못에 분수가 있는데 때로는 옥 나무에 은 꽃이 핀 것 같고 구슬과 옥이 쏟아지는 듯 하고, 때로는 윤이 나며 고요한 것이 마치 거울과 같다.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이 비칠 때 맑은 물을 한 줌 뜨면 맑은 물이 마음속으로 스며들어 모든 시름을 잊게 해주고 기쁨이 마음에 가득 차, 영혼의 세례를 받은 것과 같다.
구불구불한 갈지(之)자 형태의 작은 길 구석마다 14처가 있는데 14처마다 청동으로 새긴 것이 살아 있는 듯 생생하여 사람들에게 예수의 고통의 길을 하소연하는 듯하다. 모든 방문객은 마치 예수의 수난을 바로 뒤에서 따라가며 보는 것 같이 느낄 수 있다.
교황님의 축복문 번역본
요한 바오로2세는 직접 타이유엔교구에 위치한 통고성모 성지 봉헌일에 맞추어 매우 기쁜 마음으로 교구의 리지엔탕 실베스테르 주교 및 교구 내 전체 사제와 봉헌의 삶을 살고 있는 수도자들에게 교황으로 내릴 수 있는 가장 큰 복을 빌어드립니다. 또한 성지 순례오신 모든 교우들께도 빌어드립니다.
1998년 9월 15일 바티칸에서 요한 바오로 2세
“산은 높음이 아니라 비범함으로써 이름을 얻는다.”라고 했습니다. 칠고산이 널리 이름이 알려 지고 순례객이 끊이지 않습니다. 성모축일은 말할 것도 없고 5월에서 10월,매월 13일, 두가지를 합한 축일(통고의 성모와 성모칠고)에는 특히 더 많은 교우들이 운집하는데 아래로부터 위 까지 구불구불 산길을 메우고 갈지자로 이어진다. 각색의 깃발들이 날리고 북소리가 하늘까지 울려 퍼지며 찬송소리가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소리는 마치 밀물처럼 밀려들어 계곡에 울려 퍼진다.
성당의 재건, 천지를 뒤흔들다.
10년의 재난으로 칠고산 성당도 예외 없이 참혹히 유린당했다. 단지 무너져 버린 담장만이 남아 차마 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사제와 교우들의 성모공경은 조금도 변치 않아 오히려 무궁한 힘을 보여주고 있었다. 1992년 교구는 자금을 마련하여 칠고당을 재건하기로 결정한다. 흙 묻은 손과 발을 내밀고 가난하고 곤란함에도 아낌없이 주머니를 털었다. 5년 하고도 9개월간의 땀과 노력으로 마침내 넓고 밝은 성전을 마련하게 되었다. 오늘의 칠고산 어느 곳이나 생기가 넘쳐 각지의 순례객을 끌어 모으고 있다.
유구한 역사의 성프란치스코 수도원
칠고산 아래에는 성프란치스코 수도원이 있다. 이탈리아의 성 그레고리우스 가라시 주교에 의해, 산동에서 프랑스 국적 신부인 설계사 판더성을 초청하여 설계하고 1891년에 착공하여 1893년에 완공되었다
. 푸른 벽돌에 회색기와를 얹은 유럽풍의 프란티스코 수도원은 푸른 나무들과 어우러져 있다. 200년 동안 성프란치스코회 선교사의 본영으로 이곳에서 백여명의 신부가 나와 타이유엔, 루안, 위츠, 시안, 펑위, 지난, 헝양 의 교구로 퍼져 나갔다.
진정 복된 곳에는 그윽한 향이 영원하다.
복녀 아순타(Asumta, 1878.8.20-1905.4.8)는 이탈리아 마르케 지역사람이다. 1898년 로마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체스코 수녀회에 입회한다. 1904년 3월 원장은 그녀와 몇 명의 동료 수녀들의 요청을 받아 들이게 되어 6월19일에 ‘통얼꺼우’수도원으로 오게 된다.
그 후 소 젖을 짜고 돼지를 먹이고, 밥하고 밭 매고 빨래를 하는 등의 허드렛일을 하게 되지만 조금의 원망도 없이 즐겁게 임한다. 9개월 후 발진티푸스에 걸린 그녀는 결국 1905년 4월7일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게 된다. 임종 전 “성체여! 성체여!”를 외치고는 편안히 눈을 감았다. 당시에 온 방과 온 수도원에 향기가 가득 찼고 3일이 지나서야 사라지게 되어 마을 사람들이 기이 여겼다. 1913년 ‘타이유엔시지엔’강으로 이장할 때 8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순타의 얼굴은 원래와 같았다. 1954년 11월7일 교황비오 12세는 그녀를 시복한다. 이로써 복년 아순타의 아름다운 이름은 만천하에 알려져 칭송 받게 되었다.
인간의 죄를 대신하기 위해, 우리에게 천국의 문을 열어 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모든 모욕과 조롱을 당하셨습니다. 또한 인간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고통을 겪으시고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시기를 마다치 않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형벌을 받으시는 동안 성모 마리아께서는 자신의 사랑하는 아드님 곁을 지키시며 직접 모든 고통을 지켜 보셨습니다.
어머니로서 성모님께서는 자신의 아드님과 똑같은 고통을 겪으신 것입니다. 성모님의 심장은 마치 날카로운 칼에 베이는 듯 하였으니 아드님과 함께 구세 사업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성모님의 고통을 기념하고 구속 사업의 어려움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진정한 성모님의 근원적인 고통은 우리들의 죄악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죄악을 멀리하고 악마를 끊어 버리고 전심으로 하느님께 귀의하여 예수님의 은혜를 한시도 잊지 않을 것을 다짐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을 가슴에 담고 성모 마리아를 모범으로 삼아 자신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도 모두 주님을 증거하는 일에 써야 합니다. 일상생활에서도 언제나 복음을 전하고 가톨릭이 번영에 힘써 복음의 깃발이 중국 땅에 휘날리도록 해야 합니다.
성모칠고 산 순례를 마치고 바로 아래에 있는 옛날 수도원이었는데 정부에서 빼앗아 군부대로 사용하다가 최근에 교회에 돌려주어 수녀님들 몇 분이 이곳을 사용하고 계셨다.옛날 수도원 건물 모습은 그대로이고 부지도 상당히 넓었으나 관리가 허술하여 금방이라도 쓸어져 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옛날 수도원이었을 때에는 많은 수도자가 있어 기도와 하느님을 찬미하는 성가가 울려 퍼졌을 텐데 지금은 건물은 옛 그대로이나 모든 것이 황폐하여 쓸쓸함만 남기고 있다
성모 칠 고당을 관활 하는 성당에 들렸는데 이 성당 이태리 출신 아순타 복자가 선교 활동을 하던 본당으로 수녀님이 죽은 후 매장을 하였는데 칠년 후 이장하기 위하여 묘를 열었는데 놀랍게 살아있는 그 모습 그대로 였다고 한다. 순례를 마치고 태원 교구청으로 향하였다 주교님께서 우리 일행들을 위하여 저녁 만찬을 준비하여 주교님과 같이 식사를 하고 주교좌 성당에 들려 주교님께서 우리 일행 전부에게 친필 싸인을하여 중국어 성경을 선물로 주어 너무나 고맙다. 이렇게 첫째날 순례를 마치쳤다.
육합(六合) 시내 길거리( 육합은 요셉이라는 명칭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합니다
길거리에 성상이 있습니다.
길거리의 건물들인데 건물을 지을때 십자가의 문양을 넣어 길거리 전부 건물들이 문양이 들어가 있습니다.
육합 성당 건물
성당제대
성모칠고당 안내문
성모칠고당 올라가는 곳에 십자가의 길 14처가 있습니다.
성모칠고당에 중국을 상징하는 천안문과 천단을 본따서 산 정상을 깍아 (산 높이 약 300m)만들었습니다.
성모칠고당 천국의 문(이곳은 산 정상을 깍아 만들었습니다(산 높이 약 300m)
성모칠고당 아래 옛 수도원 건물 최근들어 군부대로 사용하다가 교회로 넘어와 현재 수녀원으로 사용
성모칠고당에서 열심기도하고 있는 중국 교우들 기도를 하고 있어서 내부 사진을 제대로 촬영치 몼했습니다
성모칠고당에서 바라본 청쉬의 들판과 수도원의 모습
성모칠고당에 있는 사도 상
성모칠고당 이곳 광장에 약 35,000여명의 신자들이 모여 미사를 봉헌 한다고 합니다.
수도원에서 바라본 성모칠고당 천국의 문의 모습
통얼 꺼우 성당(성모칠고당 아래에 있슴)의 옛날 교리공부와 미사 봉헌 모습
통얼 꺼우 성당의 현재 모습
복자 아순따 수녀의 죽은 후 8년만에 이장할려고 할때의 모습
통얼꺼우 성당에서 바라 본 성모칠고당의 천국의 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