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월요시편지_1059호
산지등대
고주희
바람이 허락하는 높이를 가진다면
가장 먼 곳의 바다가 되겠지
달빛 아래 잠시 교차하는 두 손, 서로의 이름을 바꿔 달고
밀물과 썰물
그러다 당신이 가진 어둠을 알게 되겠지
여전히 부글거리는 작은 칼데라처럼
탄산기 많은 공기로 가득한 검은 모래벌판
그 속, 고둥처럼 혼자인 사내
- 『야생화와 혁명가 사이』(걷는사람, 2026)
*
고주희 시인의 신작 시집 『야생화와 혁명가 사이』에서 한 편 띄웁니다.
- 산지등대
실은 표제시인 「야생화와 혁명가 사이」를 띄우고 싶었는데,
3쪽에 이를 만큼 길어서 부득이 포기하고,
그나마 가장 짧은 시를 띄웁니다.
짧다고 감동마저 짧지는 않지요.
짧아서 더 깊고 긴 여운을 남기는 것이
때로는 시의 묘미이지요.
오늘 띄우는 시도 그렇습니다.
짧지만 긴 여운
행과 행 사이 그 빈 여백의 울림을
음미해보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산지등대는 제주시 사라봉 옆쪽 제주항 위쪽에 위치한 등대인데,
1916년 처음 불을 밝혔다고 하니 100년이 넘은 오래된 등대입니다.
달빛 아래 등대가 보이고 등대 아래 밀물과 썰물의 철썩임이 보입니다.
그러고는 화자는 이 기본 뼈대에 살을 붙이라며 독자인 당신을 돌아보는 중입니다.
"당신이 가진 어둠"
"부글거리는 작은 칼데라"
"검은 모래벌판"
마침내
"고둥처럼 혼자인 사내"
는 다만
화자가 던지는 미끼일 뿐입니다.
토요일 저녁 <녹우의 방> 콘서트를 다녀왔더랬스니다.
녹우 김성호 형의 데뷔 20년을 기념한 20곡의 콘서트
녹우 형에게서 산지등대를 보았습니다.
일요일 안양 부모님댁을 다녀왔더랬습니다.
60년을 넘게 부부로 살아온 노부부입니다.
폐가 굴뚝처럼 기울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폐가 부뚜막처럼 패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문득 산지등대를 보았습니다.
아마도 그렇게 세상에는 수많은 당신(들)의 산지등대(들)가 있을 테지요.
아마도 말입니다.
2026. 10. 19.
달아실 문장수선소
문장수선공 박제영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