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에서 가장 극적이고 아름다운 사랑, 서동과 선화공주의 이야기, 그런데 이 아름다운 사랑이 깨어질 위기에 놓여있다. 지난 1월 미륵사지 석탑 사리 장엄구 발굴로 등장한 또 다른 여인. 과연 그녀는 누구이며, 서동과 선화공주 사랑의 진실은 무엇인가? 서서히 밝혀지는 삼국유사 무왕조에 담긴 진실과 백제 무왕의 익산경영의 의미를 추적해 본다.
사리 봉안기 속 여인, 사택왕후
지난 1월, 백제 무왕 때 왕비인 선화공주의 발원으로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 미륵사에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특히 세 개의 탑중 유일하게 남은 서탑의 사리 봉안기에서 우리가 알던 것과는 뜻밖의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曠劫]에 선인(善因)을 심어 금생에 뛰어난 과보[勝報]를 받아 삼라만상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불교[三寶]의 동량(棟梁)이 되셨기에 능히 정재(淨財)를 희사하여 가람(伽藍)을 세우시고, 기해년(己亥年) 정월 29일에 사리(舍利)를 받들어 맞이했다.”
그것은 사택왕후라는 새로운 이름과 그녀의 발원사실, 그리고 639년이라는 건립연대였다. 당시 사택씨 집안은 백제 8대 성중의 하나로, 백제가 망할 때까지 사비 백제시대에서 정계의 중심이었다. 이것은 사택지적비문에도 확인할 수 있는데, 금으로 불당을 세우고 옥을 다듬어 보탑을 세웠다는 기록을 통해 당시 사택가문의 경제력이 얼마나 컸는지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선화공주의 소원대로 연못을 메워 미륵사를 세웠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허구일까?
무왕과 선화공주 사랑의 진실
무왕은 재위 42년 간 12차례나 신라와 전쟁을 벌인다. 또한 삼국사기에는 선화공주에 대한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은 서동요가 허구라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그러나 고대국가 왕실에서 결혼은 철저히 정략적인 것이었다.
“동성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니 신라 소지왕은 이찬 비지(比智)의 딸을 시집보냈다. 1년 뒤 신라가 살수전투에서 고구려에 패하자 백제가 3000명을 보내 포위를 풀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
실제로 493년, 백제 동성왕과 신라 이찬 비지의 딸이 결혼을 하여 60여 년간 두 나라간의 돈독한 관계가 유지 될 수 있었다. 또한 서동의 구혼가인 서동요를 당시 신라의 개방적 성풍속과 어문학적으로 보았을 때, 당시의 어떠한 사실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삼국사기에 선화공주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은 삼국사기 특유의 서술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왕의 자식들을 따로 기록하지 않고, 왕의 부모를 항상 먼저 소개하고 있는데, 이러한 까닭으로 진평왕의 큰 딸인 선덕여왕과 김춘추의 어머니였던 둘째 딸 천명부인은 기록될 수 있었지만 선화공주는 기록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 밖에 실제로 서동이 마를 캐던 지금의 김제 지역은 금(金)이 들어가는 지명이 많을 정도로 사금이 많이 나는 곳이다. 선화와 서동이 들렀다는 사자사도 실제로 존재한다. 현재 발굴된 미륵사의 구조는 3월 3금당으로 역시, 기록과 일치한다. 무왕시대인 639년의 완성 사실 기록 역시 창건주체를 제외한다면 오히려 삼국유사 무왕조 기사의 신빙성을 높여주고 있는 것이다.
무왕 출생의 비밀과 백제 혼란의 정치사
“백제 제 30대 무왕의 이름은 장이다. 그 어머니는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 못가에 집을 짓고 살고 있었는데, 그는 그 못의 용과 관계하여 그를 낳았다.” <삼국유사 권2 기이 무왕>
삼국유사에는 이처럼 무왕이 용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보통 묘비명에는 왕실의 가계도가 담겨있다. 그러나 무왕의 손자인 부여융의 묘비명에는 할아버지 무왕은 나타나 있지만, 증조부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것은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무왕의 아버지가 법왕이라는 기록이 정확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실제 무왕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백제의 강력한 귀족 정치는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이 살해된 뒤, 위덕왕 이후, 즉위 한 지 고령으로 1년 만에 죽은 혜왕과 그의 아들 법왕까지 이어진다. 특히 법왕은 효순태자 시절 오합사를 짓는 등 강력한 불교정치를 추구했음에도 즉위 1년 만에 갑작스럽게 죽고 만다. 이것을 통해 법왕의 재위기간동안 귀족층과 마찰이 있었을 가능성을 볼 수 있다.
결국 당시 백제 왕실의 혼란 속에서 왕족이면서 정치적 기반이 대단히 취약했던 서동은 백제의 지배귀족들에게는 딱 알맞은 인물이었다. 결국, 용의 아들인 서동은 익산지역에 근거를 둔 몰락한 왕족의 후손이었던 것이다.
익산경영과 정략결혼의 의미
무왕은 자신을 왕으로 옹립한 귀족층의 끊임없는 왕권견제로 익산으로의 새로운 경영을 계획한다. 익산지역은 무왕이 태어나고 자랐을 뿐만 아니라 낮은 구릉과 넒은 평야 지역으로 물산이 풍부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익산경영 틀의 중심에 미륵사 창건이 있었다. 그것은 용의 아들인 자신을 미륵불과 동일시하여 자신을 세상을 구해줄 미륵불로 인식시켜 왕권을 강화하려 한 의도가 있었다. 그런데 미륵사의 사택왕후 명문기는 미륵사상이 아니라 석가불을 모시는 법화사상을 담고 있다. 이를 통해 미륵사에는 왕이 신봉하는 미륵신앙과 제1 귀족세력인 사택 집안이 신봉하는 법화경이 공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선화공주와 서동의 결혼은 단지 서동의 계략에 의해 결혼이 추진된 것일까? 무왕 재위 초기, 신라는 고구려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었고, 무왕은 약해진 왕으로서의 권위를 외부에서 찾을 필요가 있었다.
결국 양국의 필요성이 맞아 떨어져 무왕과 선화공주의 정략결혼이 추진되었다. 실제 무왕 재위 42년간 12차례나 신라와 전쟁을 벌이지만 즉위년인 600년부터 611년 사이에는 두 나라 간에 단 한차례의 공격만 있었다. 결국 서동요는 백제와 신라의 갈등의 역사 속에서 선화공주와 서동의 슬픈 사랑을 아름답게 승화시킨 노래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