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왕복 목사 / 내 귀에 들린 대로 행하리라 (민 14:28)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을 탈출하여 모진 고난 중에 광야 생활을 마치고 그렇게도 꿈에 그
리던 가나안 땅을 눈 앞에 두고 마지막 가나안 땅을 탐지하기 위하여 모세가 여호와의 명
을 받들어 각 지파중에서 한 사람씩 뽑아 가나안 땅을 탐지하러 보냈으나 믿음이 없는 사
람들이 돌아와 보고를 하는데
"가나안 땅에 갔더니 정말로 그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이미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들이 터를 잡고 있으니 그들의 모습이 마치 기골이 장대한 대장부
들이었으며 우리의 모습은 마치 메뚜기와 같았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아마 그렇게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가 없습니다" 라고 보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상반댄 보고를 하는데
"가나안 땅이 아름다운 땅이요 과연 여호와께서 준비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이라는 것
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사는 민족은 별것이 아니요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여호와께
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우리가 그 땅을 차지할 수가 있으니 여러분 결단코 두려워하지 마
시오" 라고 보고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불순종과 불신앙의 패혁한 이스라엘 민족은 여호수와와 갈렙의 말을 믿지 못하고
부정적인 사람들의 소리를 듣고 걱정을 합니다 이제 앞길이 막막합니다. 그래서 그 동안
자기들을 여기까지 인도한 모세와 아론을 돌로 치려고 달려들면서 하는 말이
"아 원통하구나 어찌하여 우리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아낙 자손들에게 죽을 것이냐 차
라리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아니면 광야에서 죽는 것이 좋을 것이다" 라고 외치면서 모세
와 아론을 원망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그들의 원망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27절에 말씀하시기를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사람들의 소리를 내가 어느때 까지 참고 들으랴 그들의 원망하
는 소리를 내가 들었은즉 이제 내 귀에 들린 대로 너희에게 행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
다.
"내귀에 들린대로 행하리라"
결국 하나님은 당신의 귀에 들린 대로 해하셨으니 "출애굽한 1세대 백성 모두 가나안 땅
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광야에서 죽게 되었으며 오직 하나님 말씀을 믿고 순종한 여분
네의 아들 갈랩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28절에 내귀에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내 귀에 들린 대로 너희에게 행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목으
로 삼았습니다.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라"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하는 소리를 듣고 그대로 행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어떤 사람은 무섭게 들릴 수도 있으며 어떤 사람에게는 구원의 말씀으로 들리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무섭게 들릴 까요 바로 함부로 떠들며 입술의 죄를 짖는 불신앙의 사람들에
게는 무서운 말씀이요
갈급한 심령에 하나님께 간구하는 믿음의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말씀으로
들릴 것입니다.
우리 나라 속담에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평소에 하던 말이 실제로 생활속에 그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시골 어느 교회에 여전도회장의 직분을 맞은 여집사님이 있는데 이분이 얼마나 말이 거
친지 만나는 사람마다 다투기를 좋아하고 또 악담을 잘 했답니다.
이 여집사님에게는 아들이 둘이 있었는데 엄마의 성격을 닮아서 그런지 어찌나 부산스럽
고 장난기가 심했던지 말썽을 자주 부리는 바람에 그 때마다 말씨 거칠은 여집사님이 아
들들에게 하는 말이
"이 망할 놈들, 저 자식들이 죽어야 내가 속이 시원하지 내가 언제나 편할꼬" 라고 악담
을 하였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 여집사의 두 아들이 한꺼번에 시름시름 잃기 시작하더니 며칠 간
격으로 두 아들이 모두 죽고 말았답니다.
이 여집사님 평소 말 버릇 대로 두 아들이 죽었지만 속이 시원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마
음은 슬픔과 아픔으로 삶에 의욕을 잃어 버렸으며 그 후로 여 집사님은 말문을 닫아 버리
고 꼭 필요한 말만을 하였답니다.
우리는 아무리 빈말이라도 필요 없는 말은 삼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종노릇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한 가나안 땅을 주기 위하여 구원
하셨건만 불평과 불신앙의 이스라엘 백성은 조금만 힘들어도
"목말라 죽겠다 배고파 죽겠다 애굽에는 매장지가 없어서 여기 까지 우리를 끌어냈느냐
차라리 여기서 죽었으면 좋겠다"고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당신의 귀에 들린 대로 그들의 소원을 들어 주셔서 모두 광야에서 죽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형편이 어려워지면 다른 사람들에게 화풀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가 아는 집사님은 믿음이 좋았는데 경제적으로 어려워지자 어느땐가 부터 교회에 와서
하나님과 교인에게 화풀이를 하기를 시작하였습니다.
교회에 이것 저것을 험담합니다. 교회가 지저분 하다느니 설교가 은혜가 없다느니 음악
소리가 크다느니, 돈을 함부로 쓴다느니, 어느 집사는 어떻다느니, 주보 헌금자 명단에
자기의 이름이 빠지면 난리가 납니다.
이렇게 자신의 어려움을 하나님과 사람에게 화풀이를 하는 사람은 한 마디로 믿음이 없
기 때문이요 체험 신앙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한 여집사님은 남편의 사업이 부도가 나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해도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건강하게 하심을 감사하였으며 가정에 자녀들이 잘 자라는 것을 감사하고 어려
움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은 것에 대하여 감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화려한 궁전에서 살아도 감사가 없고 불평만이 있다면 그는 불행한 사람
입니다. 그러나 오두막에 살아도 매사를 감사한 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인 것
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들은 환경과 여건에 따라서 감사하거나 불평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형편이 어떻든지 항상 자기 형편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할 때
에 하나님은 그 감사의 소리를 듣고 그의 형편을 고쳐 주실 것입니다.
욥이라는 사람은 하루 아침에 전재산을 다 잃고 열 자녀가 다 죽었습니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그는 마귀의 유혹에 소리를 듣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게 찬양을 하였습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으로 (벌거숭이 빈손으로) 나왔사오즉 또한 적신이 되어서 돌아 갈
지라 주신자도 여호와 하나님이요 취하시는 자도 여호와 하나님이시니 오직 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리라"
모든 것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욥의 믿음을 보시고 결국 하나님은
욥에게 갑절의 축복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인의 자세인 것입니다.
우리의 말이란 마치 심는대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칭찬을 심으면 칭찬이 돌아 올것이요 비평을 심으면 비평이 내게 돌아 올 것입니다.
때로 사람들은 남의 흉보는 것을 좋아 합니다 그러나 남을 비평하고 흉을 보는 것은 바
로 자기를 흉보는 것이요 하나님을 홍보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상대방을 향하여 손가락질을 할 때에 모습을 보면 검지 손가락 하나는 상대방을
향하지만 나머지 세게는 자기를 향하고 있으며 엄지 손가락은 하늘을 향하고 있다는 것입
니다.
즉 남의 허물 하나를 이야기 하지만 자기 허물이 세 개요 결국 남을 흉보는 것은 하나님
을 욕되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산에서 말할 때 울리는 메아리와 같아서
남을 칭찬하면 칭찬이 돌아오며 남을 흉을 보면 흉이 나에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산에 가서 "나는 너를 미워한다" 하면 산이 "나는 너를 미워한다" 라고 말 할 것
이며 또 "나는 너를 사랑한다" 말하면 산이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리를 귀로 들으시고 그대로 행하십니다.
요한복음 1장45절에서 예수님이 나다니엘을 부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먼저 예수님은 빌립을 부르시고 빌립이 나다나엘을 전도 합니다.
"나다나엘아 나사렛에서 메시야가 나왔다 나는 그 예수를 만났다 가보자"
그러나 나다나엘을 "빌립아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라 무슨 나사렛에 선한 것이 나겠는
냐?" 면서 빌립의 말을 믿지 않고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기도를 하자 예수님이 나다나엘
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나다나엘에 너의 속에 간사한 것이 없으니 너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로다" 그 소리에 나
다나엘이 깜짝 놀라 뭍습니다. 당신이 누군관대 나를 언제 보았다고 그런 말을 하십니
까?"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기도하는 소리를 내가 들었으니라"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 소리 분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소리를 듣고 그대로 행하십
니다. 그러므로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여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믿음의 사람들은 거짖말은 함부로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이들 세명이 길을 가다가 동전 하나늘 줏었습니다. 서로 갖겠다고 싸우다가 거짖말을
제일 잘하는 아이가 갖기로 하였습니다.
첫 번째 아이가 말했습니다. "우리 어버지는 바람이 너무 세게 불어서 산이 무너진다고
작데기로 산을 바치러 나갔다" 고 말 하였습니다.
두 번째 아이는 우리 엄마는 비가 안와서 논이 말랐다고 논에 오줌누러 갔다 고 말하였
습니다.
세 번째 아이는 우리 누나는 하늘이 찢어져서 비가 많이 온다고 하늘을 꿔매러 간다면서
바늘하고 실을 갖고 갔다고 말 하였습니다.
그러나 서로 비슷하여서 결정을 못하고 서당에 가서 훈장님에게 판결을 내 달라고 부탁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이야기를 들은 훈장님이 아이들에게 혼을 내면서 말하였습니다.
"아니 할 것이 없어서 거짖말 내기를 하느냐 나는 평생에 한번도 거짖말을 해본적이 없
단다 이놈들아" 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세명의 아이들이 상의를 하더니 동전을 훈장님 앞에 놓으면서 "훈장님이 1등입니
다 이 돈은 훈장님 것입니다" 라고 말했답니다.
물론 이 말은 거짖말을 안한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거짖말은 마귀가 하는 말이요 그러므로 거짖을 말하는 사람은 마귀의 앞잡이가 되는 것
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마귀와 대화를 하는 바람에 마귀의 꼬임에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범했습
니다. 아담과 하와가 마귀와 대화를 나누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들은 결코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짖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말끝마다 "차라리 광야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보기에도 메뚜기와 같으니 그들이 보아도 그랬을 것이다"
라고 자신을 비하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마귀의 꼬임에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랩은 9절에서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와 함
께 하시니 두려워 말라" 외쳤으니 이것이 하나님께 속한 사람의 언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속한사람은 항상 감사하고 긍정적인 말을 하게 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산에 올라가 하나님과 40일간 대화를 나누고 내려 오자 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남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얼굴을 쳐다 볼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바로 모세가 하나님과 대화를 나눔으로서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마귀의 말버릇을 닮지 말고 하나님과 대화하는 시간을 늘려야 할 것입니
다.
이제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귀에 들리도록 말을 하되 지켜야할 것이 있습니다.
첬째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진실된 말을 하여야 합니다.
진실된 말을 해야만 진실한 마음을 소유하게 되며 성도의 믿음은 진실한 마음 가운데서
성장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짖을 말하면 마음 까지도 거짖되게 만듭니다.사도행전 5장에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겉으로는 신앙이 좋은 척하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소유를 팔았지만 감추고
거짖을 말함으로써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거짖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성
도는 진실을 말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이 진실하시니 우리도 역시 진실하여야
합니다.
두 번째 믿음의 사람들은 남을 비판하기 보다 격려하는 말을 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남을 비판하기는 쉬워도 남을 격려하기란 참으로 인색합니다.
얼마전에 신문에 보니까 IMF를 맞이하여 남편들이 제일 아내에게 듣고 싶어하는 말은 따
뜻한 말 한마디의 격려라는 것입니다.
어디 남편 분이겠습니까?
여성분들도 남편에 따뜻한 말한 마디가 따뜻한 격려가 필요한 시대인 것입니다.
"여보 힘들지요 어렵지요 용기를 내세요 하나님이 계시잖아요 또 제가 항상 당신을 위하
여 기도하고 있잖아요 당신은 승리할 거예요"
"당신도 힘들지 변변치 못한 봉급으로 살림하랴 애들 뒷바라지 하랴 여보 어려움 많지
힘을 내요 사랑하는 애들이있고 내가 있잖아"
누에는 뽕을 먹고 살지만 사람은 사랑을 먹고 사는 것입니다.
사랑은 특별히 돈 드는것 아닙니다. 따뜻한 말한마디가 바로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개중에는 격려대신 비평을 하고 책망을 한다면 그렇잖아도 힘든 세상 더욱 힘이
들것입니다.
미국에서 일란성 쌍둥이가 고아원에 들어 와서 각각 다른 가정으로 양자를 보냈는데 훗
날에 보니까 한사람은 국회의원이 되엇고 또한 사람은 죄수가 되어서 감옥소에 있더 랍니
다. 그래서 학자가 그들의 성장 과정을 조사해 보았더니 국회의원이 된 양부모는 "항상
격려하는 말을 하였답니다. 너는 할수 있어 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야" 라고 말해 주었
으며 죄수가 된 사람의 양부모는 항상 책망을 하였답니다 "바보같이 그런것도 못하냐 너
는 가망이 없어" 결국 그아이는 가망이 없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말은 씨앗입니다. 뿌린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세 번째 생명을 살리는 살아있는 말을 하여야 합니다.
생명의 말이 무었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십자가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내가 누군가에 의하여 전도를 받고 예수 믿게 되었다면 우리는 누군가 나를 기다리는 외
로운 불쌍한 슬픔과 좌절속에서 방황하는 눈물로 흐느적 거리는 영혼이 있다는 것을 알아
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기주의요 사랑에 인색한
잔인한 사람인 것입니다.
지옥에 떨어져 그 영혼들이 소금 치듯 고통 당하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어찌 구원의
복음을 전하지 않겠습니까?
믿는 우리 기독교인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과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말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근본이 되어야 하며
우리의 입술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고 하나님말씀이 우리를 통하여 육신을 입
어야 합니다.
우리가 입술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외치면서 우리의 행동에서 사랑이 없고 오히려 인색함
이 전달된다면 그들은 우리를 비웃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을 통하여 실천된다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통하여 육신을 입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치유가 일어난 다
면 하나님의 말씀은 날선 검과 같고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10년을 교회에 다녀도 입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내 신앙을 고백하지 않고 증거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구원은 완전한 것이 못됩니다.
로마서 10장 10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
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입술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하고 시인하고 고백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자랑 할 것이 없습니다.
죄악속에 살던 영혼을 구원하심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혠데 우리가 무엇을 자랑하겠습
니까? 우리가 자랑할수 있는 것은 오직 십자가의 복음 밖에 없습니다.
누에는 입에서 나온 실을 가지고 집을 짖고 그 속에서 삼니다.
사람도 자기의 입에서 나온 말대로 형편과 환경이 이루어 지고 자기의 입에서 나온 말대
로 운명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시편 141편에 말씀처럼 우리는 우리의 입술에 파수꾼을 세우고 입술을 조심하여야 합니
다. 사람의 혀는 부드럽고 뼈도 없지만 이것을 잘못 쓰면 칼보다 무서운 것으로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하고 죽이기도 함으로 우리는 입술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야고보서 1장 26절에 보면 "누구든지 경건하기 원하면 자기의 입술에 자갈을 먹여야 할
것이며 만약에 입술에 자갈을 먹이지 아니하면 그의 경건은 헛것" 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아무리 예수를 잘 믿어도 말을 함부로 놀리면서 남을 흉보고 혈기를 부린다면
그의 경건은 헛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사람의 경건은 입술부터 경건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입술을 어떻게 하여야 깨끗한 입술이 될것인가?
이사야 6장6절에 의하면 우리의 부정한 입술은 하나님의 성령의 숯불이 닿으니 깨끗해
젔다고 하였습니다.
오직 우리는 성려의 숯불로 정화된 입술이 되어서 소망의 기도 소리와 소망의 말 소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귀에 들리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역대상 7절 13절에 보면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혹시 하늘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여 땅이 가물고 메뚜기가 너희 곡식을 도적질하
고 너희가 병에 걸릴지라도 내 백성들이여 너희는 악을 행치 말고 기도로 내게 구하면 하
늘에서 내가 너희의 소리를 듣고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하엿습니다.
여러분 혹시 삶에 어려움이 있습니가? 문제가 있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귀에 들리도록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소리를 듣고 고쳐 주실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귀에 들린 대로 너희에게 행하리라"
말씀의 힘으로 산다 / 민 14:36-38
그 땅을 정탐하러 갔던 사람들 중에 오직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생존하
니라.
오늘은 경제적으로 참 어려운 시기입니다. 그래서 모두들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년에는 경제가 더 어려울 것이라는 말에 모두 두려움이 배로 느껴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때 덩달아 불안해하지 말고 자세를 가다듬어야 합니다. IMF때 온 나라가 나라 망하는 줄 알고 모두 앞이 캄캄해서 난리를 떨었지만 2년 만에 거뜬히 그 위기를 극복하였습니다. 오늘의 고난도 곧 극복되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그 소망을 바라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때에 값을 발휘해야 합니다. 위기가 곧 기회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일찍이 일제의 탄압을 받았고 6•25의 불행한 역사를 거쳐 왔습니다. 그 때는 참 불행한 역사였지만 어찌 보면 그 불행들이 오늘 우리나라를 만들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모진 훈련들이 오늘 강력한 체질을 만든 것입니다.
윌리엄 번스타인은 그의 저서 “부의 탄생“에서 사람이 살아가면서 얻은 엄청난 충격들이나 실패의 경험은 큰 이익을 준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예들 들었습니다. 세계 1,2차 대전 때 전쟁을 겪은 나라들 중 일본, 독일, 한국은 전쟁당시에는 다 망가져 회복불능상태까지 되었지만 그런데 전후 유독 이 나라들만 고도성장을 누린 국가들이 되었다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때 전쟁이 없었던 나라 중 오늘 가장 낙후된 나라는 영국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오늘 이 어려움은 우리나라가 더 다져지게 되는 계기가 되고 도약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모두 두려워한다고 덩달아 두려워하고 움츠러들면 안 됩니다. 오늘처럼 미래가 암담할 때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12명의 정탐꾼 중 10명처럼 처신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때에는 갈렙과 여호수아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10명은 참 무책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가나안은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으로 주어진 땅이며 하나님이 거저 주신 땅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 땅을 돌아보고 와서 그 땅을 악평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부정한 것이고 가나안을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그 백성들에게 소망을 빼앗고 밤새도록 통곡하게 만들었습니다. 죄는 남의 물건을 훔친 것만 죄가 아닙니다. 사람들의 용기를 빼앗고 낙심하게 하고 절망하게 하는 것도 죄입니다. 믿음을 상실하게 하고 소망을 빼앗는 것도 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불평과 불만과 악평하는 자세를 버려야 합니다. 이것은 전염됩니다. 빨리 무섭게 파괴력을 가지고 전염시킵니다. 그래서 온 백성들이 그들의 보고를 받고 밤새도록 통곡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가나안에 대한 소망과 기대감을 순식간에 빼앗아 버렸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 시대에 행복을 말하고 언약을 말하고 희망을 전염시켜야 합니다. 희망도 전염됩니다.
미국 하버드대 의대 니콜라스 크리스타키스 교수는 영국 의학저널에 기고한 논문에서 “행복은 일반적인 통념보다 훨씬 전염성이 강하다”고 말 했습니다. 1983년부터 2003년까지 20년간 미국인(메사츄세츠) 4,739명을 대상으로 행복감이 어떻게 이웃과 공유되는지에 대해 연구하였습니다. 연구결과 옆집이 행복할 때 가까이 사는 나에게 전염되는 확률이 34%로 가장 크게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이웃을 잘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가까운 친구가 행복할 때 42%로 최고로 행복을 전염시킨다고 했습니다. 그때의 행복감은 갑자기 5천 달러가 생긴 것만큼 행복이 전염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행복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 사회의 중심에서 살아가게 되면 그 주위의 사람들 모두에게 행복감을 전염시킨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일은 반드시 돈을 주는 것만이 아닙니다.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고 용기를 주고 격려하고 희망을 주는 것도 아주 큰 도움을 주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나 지도자들은 세상에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행복을 주고 용기를 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정탐꾼 12명중에서 10명은 그 시대에 지도자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믿음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히려 백성들에게 꿈과 용기와 희망을 빼앗았습니다. 그 결과 백성들이 꿈에도 그리던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자신들과 가족들도 그 밤에 낙심하여 통곡하였던 모든 사람들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 땅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로 40년 동안 광야생활이 연장되고 재훈련을 하면서 피나는 고난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그 12명중에서도 갈렙과 여호수아 두 사람은 가나안에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유일하게 그날 보고할 때 가나안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대로 젓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소개한 사람들입니다. 본문을 보면 “모세의 보냄을 받고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그 땅을 악평하여 온 회중이 모세를 원망하게 한 사람 곧 그 땅에 대하여 악평한 자들은 여호와 앞에서 재앙으로 죽었고 그 땅을 정탐하러 갔던 사람들 중에서 오직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생존하니라”고 했습니다. 이 두 사람에게는 몇 가지 남다른 태도가 있었습니다.
긍정의 믿음
그 긍정의 근거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 그 자체이십니다. 하나님은 그 말씀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신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 말씀은 이 세상에 생명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이 있는 곳에 변화와 기적과 새 생명과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이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이 말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 말씀이 마침내 이 두 사람으로 하여금 긍정의 힘과 사고와 판단으로 마침내 가나안을 바라보는 눈을 갖게 했습니다. 그래서 10명이 가나안 땅을 악평하며 백성들 앞에서 이제 가나안에 가는 것은 불가능하니 애급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선동할 때 백성들은 모두 눈물바다를 이루었고 마침내 백성들은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습니다. 그때 갈렙과 여호수아 두 사람은 백성들 앞에 나서서 외쳤습니다. “그 땅을 정탐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자기들의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젓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14:6)”고 했습니다.
그때 그 두 사람은 조용히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옷을 찢었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슬플 때 하는 행동이 옷을 찢고 재와 티끌을 머리에 쓰는 습관이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그때 백성들 앞에 뛰어 나가 큰 소리로 외쳤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 마음속에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연해서 불이 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마음에 충만한 열정이 들어 있습니다. 몸이 건강한 사람은 항상 움직입니다. 건강한 아이들 보면 쉴 사이 없이 움직입니다. 속에서 충천하는 힘이 솟아나기 때문입니다. 이 두 사람은 속에서 말씀과 영적인 힘이 솟아나는데 그냥 보고만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뛰어 나가서 외쳤을 것입니다. “그 땅은 우리가 가보니 과연 약속하신 그대로 그 땅은 젓과 꿀이 흐르는 땅이더라, 가자, 우리들이 가면 하나님이 인도하여 주실 것이다.” 이것이 지도자의 모습이고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내안에 말씀이 있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오늘 현실이 아무리 어렵고 어둡고 힘들지만 문제는 내안에 이 말씀이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입니다. 내 안에 정말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힘 있게 내주해 계시다면 오늘이 그렇게 비관스럽고 힘들게 느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여호수아와 갈렙이 장수한 비결입니다.
하나님은 중대한 역사를 움직이실 때 많은 사람들을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갈렙과 여호수아 같은 몇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죄송한 일이지만 그 10명의 지도자들은 들러리들입니다. 그들이 그 땅을 아무리 악평하고 가나안은 절대 못간다, 절대 불가능하다 그러니 애급으로 돌아가자 하고 선동해도 하나님의 일은 지장 받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만 불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사고를 가진 불신앙을 가진 사람은 가나안에 가서 살지도 못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그 10명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문제는 내 마음속에 말씀이 있는가 없는가가 중요한 일입니다. 여호수아를 보십시오. 여호수아는 모세의 가장 가까운 시종이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으로 하나님을 만나러 갈 때 여호수아를 데리고 갔습니다.(수 24:14)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10계명 말씀(강령)을 주실 때 여호수아도 그곳에 함께 있었습니다. 그 후에도 하나님과 모세가 (출 33:7-11) 친구같이 대화를 나눌 때 그 때도 그 곁에 여호수아가 함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여호수아를 미리 준비시킨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개인이 아닌 민족을 이끌 준비자로 세웠던 것입니다. 그러나다 마침내 모세가 죽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이제 너는 이 백성을 이끌고 내가 주는 땅으로 가라(수1:1-2)”고 하셨습니다. 여호수아서 1장을 보면 그에게 주신 약속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람함에게 모세에게 약속하신 그대로 여호수아가 이끌 것이라고 재약속을 하셨습니다. 또 그에게 리더십과 주어진 사명을 성취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결코 그 옆을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도 하셨습니다. 여호수아 1장8절을 보면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하라, 이 율법책을 주야로 묵상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이 율법책을 주야로 묵상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여호수아가 말씀묵상에서 얻어진 힘으로 가나안을 정복하는데 사용했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 말씀 안에 거하였습니다. 그 힘으로 사탄의 모든 훼방도 물리쳤고 리더십도 얻었고 지혜도 얻었습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이 말씀의 힘으로 이겨나갔습니다. 이 말씀이 이 두 사람에게 긍정의 힘과 용기와 지혜를 주셨습니다.
언약의 믿음
이 두 사람은 장수였습니다. 몸만 장수가 아니고 정신도, 영적으로, 신앙으로, 결단력으로도 장수였습니다. 그래서 10명 모두가 불평을 유도했을 때 이 두 사람은 나서서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그 땅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언약으로 주신 땅이다, 비록 그들은 우리보다 크지만 하나님이 도우시면 우리는 충분히 그들을 정복할 수 있다.” 이 힘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그것은 그들에게 이 언약의 믿음이 분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가나안을 그 백성들에게 얼마나 많이 약속했습니까. 가나안은 젓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아브라함 때부터 약속 하셨습니다. 출애굽의 목적이 가나안에 가기 위해서 입니다. 홍해를 건넌 것도 가나안을 가기 위해서 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 가나안이 불가능하게 보였지만 이 두 사람에게는 그 땅은 언약의 땅으로 철저하게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두 사람에게는 사람들이 큰 것이 별로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거친 땅이 오히려 옥토로 보였고 젓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보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약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오늘의 현실 속에서 이미 약속하신 모습을 미리 보는 안목이 믿음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누구도 보지 못한 천국을 보고 믿는 것입니다. 가나안도 그런 것입니다. 그 두 사람은 가나안 땅에서 젓과 꿀이 흐르는 광활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누가 그들의 가는 길을 막을 수 있습니까. 믿음은 꿈이고 환상이고 약속입니다. 그 환상을 보지 못한 사람은 오직 현실만 말 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실은 소망적인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불평하고 불만하고 원망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믿음이 없이 산다는 것은 그래서 불행한 일입니다. 얼마나 불행한가 하면 그런 사람은 미래와 소망과 믿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인생은 오늘 현재만을 위해서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 현재는 재미가 없습니다. 오늘 현재만 보면 절망뿐이고 미래가 암담할 뿐입니다. 그러니까 나오는 것이 한숨이고 걱정이고 미래가 불안해서 죽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가나안 땅을 악평하였던 것입니다. 언약의 힘이 약하니까 보이는 것이 오늘 현재 삭막한 땅과 키 큰 사람들과 불가능만 보였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가나안 땅 즉 천국에 대한 언약이 분명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 꿈을 주고 삶의 목적이 분명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천국에 대한 확신입니다. 그때 우리는 흔들리는 나를 붙잡을 수 있고 흔들리는 여론을 잠재울 수 있습니다.
개척의 믿음
세계 역사를 보면 기독교가 들어간 나라는 한결같이 주어진 환경을 고치고 살아갑니다. 그 말은 주어진 운명을 바꾸고 개선하고 새롭게 만들어 살아간다 그 말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의 생리가 운명에 순응하는 삶이 아니고 개척하고 만들어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들어간 나라는 환경개선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하나같이 개척의 삶을 살아갔습니다. 갈렙도 여호수아도 아낙손들의 거인됨을 보았습니다. 그들 모두가 전사들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크고 견고한 성읍이 있는 헤브론 땅을 정탐할 때 그들은 얼핏 보면 패배를 모르는 사람들 같이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살아가는 성이나 큰 키를 볼 때 누구도 저들을 침략하기가 쉽지 않겠구나 하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것이 문제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고백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 우리가 그들을 쫓아내리이다(14:8)” 그 말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불가능이 없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고 믿는 이 믿음이 축복이고 능력의 시작입니다. 마태복음 28장20절에 주님이 제자들에게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 외에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합니까. 이것이 우리 믿음의 근간이고 뿌리이고 기초이고 권위입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그 땅이 내가 원한 땅이 아니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땅임을 상기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땅을 정복하는 일은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임을 알았습니다. 그 결과 나머지 10명과 모든 기성세대들이 다 광야에서 죽었지만 이 두 사람은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갈렙의 나이가 80세였는데 그때에도 갈렙은 가나안의 남은 땅을 정복하기 위해서 스스로 자원해서 정복에 나섰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가나안에 들어가서 그 땅을 분배하는 일에 전염했습니다. 불행하게도 모든 사람들이 광야에서 다 죽었는데도 이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은 노년까지 믿음의 선구자, 가나안의 개척자들이 되었습니다. 믿음에서 나온 이 긍정의 힘이 세상을 바꾸어 놓습니다. 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은 아이에게 기자가 “너무 힘들겠구나”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래도 감사해요, 하나님이 한쪽 다리는 남겨 주셨으니까요“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여러분, 누가 힘듭니까.
하나님은 말씀 그 자체이십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그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본체이신 예수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 말씀의 씨가 마리아에게서 잉태되고 마침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이 임하시는 곳마다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개혁이 일어났습니다.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새 세계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 이 말씀을 보내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새롭게 잉태하시기 바랍니다. 그 말씀에 사로잡히기를 원합니다. 그 말씀에 이끌려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이 세상에 희망을 말할 수 있고 소망을 전하고 행복을 전염시키며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세상에 말씀으로 오신 것입니다.
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글쓴이: 엘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