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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13:22-27
좁은 문
(눅 13:22, 개역) 『예수께서 각 성 각 촌으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눅 13:23, 개역)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저희에게 이르시되』
(눅 13:24, 개역)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눅 13:25, 개역)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눅 13:26, 개역)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눅 13:27, 개역) 『저가 너희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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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어떤 삶이 주어지던
자기를 절대적으로 의지하기에
극복할수 있다고 자부합니다.
그래서 이런 자기중심의 삶이
약자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합니다.
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즐겨 공감하고
같이 선포하면 됩니다.
본문의 경우,
‘구원받은 이가 적다’는 이 사실에 대해서
찡그리고 우울해할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감사하면서 고백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너를 모른다’는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우리 자신들이
우리 자신을 지켜내려고 할 필요가
없으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을
인간들로부터 차단하시므로서
인간들이 벌리고 있는 모든 종교적 노력들이
악마의 힘이요,
악마의 사주를 받고 움직인다는 사실을
까발리게 하십니다.
인간들의 교회 활동은
이 지상에서 힘든 인생을 청산하고
내세에서 그 보상을 받기 위함입니다.
바로 이런 생각으로 인하여
한시도 자기 생각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는
반증이 됩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이처럼
자기 생각에 빠져 있으니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말씀은
그들에게는 당황스럽고
화나게 만드는 말씀으로
이해될 수 밖에 없습니다.
아니, 인간들이 죽어서
좋은데 가겠다는 주장은
곧 이 땅을 힘들에게 살게 한
하나님의 지금 조치에
문제가 있다는 말밖에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즉 모든 인간들은
자기 구원에 환장해있습니다.
이것은 곧 ‘자기 행복’을
양보 못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인간들에게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구원 의지에
호응해주시기는커녕
도리어 ‘좁은문’을 제시하십니다.
좁은문이란 문이 없다는 말입니다.
문이 없다는 말은
사방이 벽으로만 둘러싸여 있어
손톱으로 후벼봤자 벽만 파이고 손만 다칠뿐입니다.
마태복음 19:23-26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고 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이 할 수 없다’는 것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예수님을 싫어하고
미워할 수 밖에 없게 되고
그 여파로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죽임을 당하게 되고 ,
그 당했던 예수님께서
비로소 구세주의 면면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구세주됨은
우리 인간에게 ‘구원불가하다는 통보일 뿐아니라 구원이 시작되었다는 말이 됩니다.
“아무리 행하고 노력해도
구원이 안돼!”라는 통보를 받으면서
왜 우리가 안되는지를 알아가는 절차가
곧 메시아를 새롭게 알아가는 절차가 됩니다.
마태복음 19:27-30에 보면,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고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를 알고
그 너머에 있는 부활의 세계가 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들의 아이디어이고
인간들의 종교적인 노력이요
지식일 뿐입니다.
십자가는 모든 것이
절망으로 끝납니다.
그 뒤에 부활의 세계가 있다는 것은
허구에 불과합니다.
인간이 알아야 될 것은
자신들이 죽음이 갇혀있고
그것으로 끝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부활의 세계는
우리의 세계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세계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로서 들이밀 때,
즉 우리는 왜 구원될 수 없고
구원되어서도 아니되는지를
혹독하는 알려주는 그것이
곧 부활 세계의 침투요 밀려오심입니다.
즉 길은 없다는 겁니다.
이 ‘길이 없음’을 말해주는 것이
곧 좁은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항상 예수님만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래나 저래나
사람을 위한 천국은 없다는 말이 됩니다.
인간들의 자기 사랑을 인정하고 긍정하는
그런 천국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천국이란
실은 인간들 자신들의 세계이기 때문에
지옥의 재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대하면서
산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들은
자신이 지금 살아있다고 간주하고
이 살아있는 나를 더욱 빛나게 살 궁리를
획책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런 인식과 방식으로는
지옥으로 갈 뿐임을 통보해주는 겁니다.
본문의 말씀처럼,
“제가 주님을 위하여
이러이러한 일을 했다니다”는 주장은
곧 ‘자기 자신’을 포기 못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을 통과시켜주는
천국문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천국문은 어디에 있습니까?
창세기 28장에 보면
야곱에게 사다리가 내려옵니다.
사다리가 야곱에게 내려옵니다.
이로서 하늘의 문은 뚫린 겁니다.
이 문이 곧 하늘로 통하는 벧엘의 문이요
하나님의 집입니다.
이 문을 통해서 내려오는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이 세상 끝날까지 함께 있어야
그래야 우리가 구원됩니다.
즉 ‘피 묻은 사다리’를 타고
우리는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 피는 왠 피입니까?
우리 자신이 매일같이 우리 밖에 모를 때에
그 철없음과 죄를 처리해주기 위한 피입니다.
곧 하나님의 죽음에서 야기된 피입니다.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죽음의 피가
늘 자기와 함께 있는 것을
부담스러워합니다.
마치 전쟁나서 군에 못간 아들이 군에 입대하고
홀로남은 며느리가 남편집에서 시부모를 모시고 있는데 부끄러워 멱도 못감고
뀌죄죄죄한 몰골로 눈치보며 살고 있는데
며느리 시집살이 시키며, 그것도 모자라
“나는 세상 끝날까지 너와 함께 있겠다”고 한다면
기가 찰 노릇일 것입니다.
며느리가 시어미에게 잘 보이기에 위해 솜씨를 부려봤자 도리어 시어미의 화만 돋울 뿐입니다.
“너는 내가 너와 함께 있는 것이
그렇게 싫으냐?”고 나오실 겁니다.
사람이란 자기로 인하여 살고,
자기 때문에 살고,
자기 것에 둘러싸여 있는 것으로 살고,
자기 노동의 대가 안에서
비로소 행복을 느끼는 존재입니다.
이런 존재가 갈 수 있는 곳은
천국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예수님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도 누군지를
몰라야 합니다.
자기 부인이 안되는 자는
남의 것을 부러워하게 되고, 끝없이 부러워하며
살게 마련입니다.
원래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서 범죄하여 쫓겨난 첫인간으로 인해
에덴동산에 자력으로 돌아올수 없는 죽은자로
간주하셨습니다.
인간을 죽은 자로 보기에
더 이상 남으로 인하여,
혹은 자기 것으로 인하여 고통받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쫓아내시는 것으로 팽개치시지 않으시고
언약이라는 돌이킬수있는 묘약을 남기시고
이 묘약을 먹은 사람들로 통하여
거룩한 백성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이 묘약을 삼킨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게 되며
하나님의 피조물로 삼아 주신것입니다.
이 묘약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며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실
예수니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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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강-눅13장22-27(좁은문)110731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13장 22절에서 27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118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13:22-27
“예수께서 각 성 각 촌으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저희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저가 너희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이 땅에서 예수님처럼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이냐 하면 바로 오늘 나왔던 말씀대로 이야기하면 돼요. 오늘 예수님 하신 말씀대로 자기가 그렇게 이야기를 하게 되면, 그 사람이 곧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예수님의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겁니다. 예수님 말씀 따로 있고 내가 할 말 따로 있고 이래 버리면 아무리 본인이 예수 믿는다고 하더라도 그 입에서 나오는 것은 예수님하고 전혀 다른 이야기가 계속 나오게 되죠.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예수님의 증인이라고 할 수 없고 무엇의 증인이냐 하면, 바로 자신의 자기 잘남의 증인으로밖에 되지를 않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대로 예수님께서 ‘구원을 얻는 사람이 적다. 좁은 문으로 가라.’ 이렇게 할 때 이걸 예수님 믿는 사람 같으면 이렇게 해요. ‘주여! 구원 받는 사람이 이렇게 적은 것을 감사하나이다.’ 이렇게 돼야 돼요. 예수님께서 구원 받는 사람이 이토록 적다 말이죠. 넓은 길이 아니고 좁은 문이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구원 받는 자가 적다.’ 하면 평소에 진짜 예수 믿는 사람 같으면, 그 구원 받는 사람이 적은 것이 기뻐서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야 돼요. 주여 우리 교인 다 나갔습니다. 이제 몇 명 안 남았습니다. 좋아가지고, 꼭 미친 것 같아.ㅎ 너무 교인이 다 빠져나가니까 돌아서 미친 경우도 있지만...ㅎ
아! 이 누가복음 13장 이 말씀이 멋지네, 평소에 내가 생각한 거와 똑같네요. 나는 주의 말씀 믿는 자가 적다고 해서 처음에는 곧이듣지 않았는데 정말 주님 말씀대로 빈틈이 없네요.‘ 하고 같이 동감하고 같이 좋아하고 춤추고 즐거워해야 됩니다. 성경 말씀에 예수 믿는 사람이 적다했는데 그거에 삐져서 개척교회 했는데 ’교인이 사모님하고 둘밖에 안 남았습니다.’ 이래 나오면 평소에 그 사람은 교회를 믿는 목사지, 예수 믿은 적이 없는 목사예요. 주의 말씀 가지고 ‘장사해볼까’ 하는 그 사람밖에 안 됩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 보면 이런 게 있습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예수님 말씀에 ‘나 니 누군지 모른다.’는 말이 나와요. ‘주여 문을 열어 주소서.’ 하니까 ‘나 니 누군지 모른다.’라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 했으면, 신앙생활은 이렇게 하면 됩니다. 내가 누군지 본인이 모르면 돼요. 아이, 얼마나 쉬운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꼭 지옥 가는 사람이 뭐냐, ‘주님, 저 모르겠습니까? 저 목회 했는데요. 저 강의하고 설교하고 성경 박사고 어떻게...꼭 ’나는‘ 이 꼭 뒤에 붙어요. ’나는 이러, 이러했던 사람입니다.‘ 라고 나를 주장하게 되면 그렇게 내세우는 그 자체가 ’나는 니를 모른다.‘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안 맞게 되는 겁니다.
사람들이 내가 누군가를 내세우면서 앞에 나올 때 그것은 그 자체가 주님 말씀에 위배돼요. ‘나는 니가 누군지 모른다.’ 라는 것을 수용을 해야 됩니다. 우리는 나 자신에 대해서 신경을 되게 쓰고 있지만 막상 구원하시는 주님은 우리가 신경 쓴 만큼 우리에게 관심 없어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 누구시죠? 누구시더라.’ㅎ 주님이 천하를 다 아시는데 모르실 리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나 알아달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주께서는 니가 ‘나 알아 달라’는 것에 내가 니 장단에 맞춰 줄 생각이 없다는 겁니다. ‘너가 너에 대해서 그렇게 애틋하게 생각하는 그것에 대해서 나는 너에게 동정할 의사가 전혀 없다. 그것은 니가 니 알아주는 재미와 즐거움으로 평생을 그런 식으로 살아왔다.’ 평생을 교회에서 누가 나 안 알아주나 하는 식으로 살아왔는데, ‘그래 니 잘난 맛에 그런 식으로 교회에 살다가 영원토록 지옥 가거라.’ 이것이 주의 뜻 이예요.
뭔가 주님 앞에 말씀을 들었으면 뭐가 삭제되느냐 하면 ‘아! 그동안 내가 나의 가치에 대해서 나의 존재의 긍정에 대해서 나의 의구에 대해서 이렇게 철저하게 나에게 신경 쓰는 이 자체가 주님의 은혜를 받고 십자가 앞에서 이것이 삭제돼야 돼요. ’이것이 다 무의미한 짓이구나. 내가 공연히 헛짓했구나. 평생토록’ ‘나 구원 받을까요? 지옥 갈까요? 천당 갈까요?’ 하고 이렇게 자기 자신의 구원관에 신경 쓰는 이 자체가 주님 앞에서 다 헛짓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파가 이단인 이유가 거기 있어요. 박 옥수 구원파가 이단인 이유가.
여러분들은 구원 받았습니까?‘ 하는 그 자체가 이미 주님은 관심 없고 내가 죽어서 좋은 나라 가려고 신경 쓰는 거예요. 그 구원파가 어디서 나왔습니까? 한국교회서 나왔어요. 한국교회가 그것 때문에 부흥된 겁니다. 박 옥수가 이단 같으면 나머지 거기서 나온 토대는 다 이단이죠. 주의 말씀은 예수님이 구원 받은 너보다 더 중요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고 말씀하시면 우리는 예수님 말씀 딱 들으면 그 다음에 뭐를 생각해야 하느냐 하면 ‘넓은 길에는 무슨 재미로 사는데?’ 이걸 조사를 해야 돼요. 넓은 길로 가는 그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갑니까? 넓은 쪽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쪽에, 교회 안 나오고 갓 바위에다 비는 사람, 이 시간에 교회 안 가고 휴가 가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무슨 재미로 사는 겁니까? 이 중에 복음 알고도 휴가 간사람 있는데 상처 받겠다.ㅎ 그 사람들 무슨 재미로 사는 거예요.? 그것은 자기 가족 있다는 재미로 살고, 내가 있다는 재미로 살고 내 직장 든든하다는 재미로 살고 그러니까 인간의 행복이라 하는 것은 십자가 없으면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는 그 재미로 사는 사람들이 그 넓은 쪽으로 다 몰려 있는 겁니다. 복음 없이도 나는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 나는 내 식구, 내 새끼, 내 가족만 있어도 우리 부부끼리도 행복할 수 있다. 가족이 예수보다 더 중요하다. 왜, 가족이 예수보다 더 중요한데? 그게 내 가족이니까.
마태복음 19장 29절에 보면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내 이름을 위하여, 가족이고 토지고 부동산이고 동산이고 집이고 다 날린 사람은 그것과 영생을 맞바꿨다 이 말입니다.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내 가족과 내 부동산과 내 재산을 꿍치고 있는 한 너는 결코 영생을 영생답게 좋아할 리가 없다는 겁니다. 많은 재산과 다복한 가정을 사랑하면서 ‘나는 주도 사랑해요.’ 하는 그런 거짓말 좀 나한테 하지 마라.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뻔히 아는 거짓말을 해댄다고 거짓말이 아닌 게 아니라 이 말이죠.
그러면 이런 이야기를 하면 꼭 나오는 말이 있어요. 그러면 ‘주님 어느 놈이 천국에 갑니까? 그러면 천국 갈 사람이 아무도 없네요.’ 꼭 지 잘못했다는 소리 안 하고 꼭 둘러봐요.ㅎ 그럼 아무도 구원 못 받네요.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게 바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다.’ 아무도 갈 수 없는 곳 이예요. 천국이라는 곳은!! 천국은 아무도 갈 수 없는 곳이 진짜 천국인데, 가짜 악마의 종들이 거짓말을 해서 ‘이렇게, 이렇게 하시면 천국 갈 수 있습니다.’라고 구라를 쳐서 노인네들 속이는 다단계에서 이상한 물건 팔듯이 그런 식으로 물건을 팔아 제켜서 어디 다단계 쓸 수도 없는 것을 5만 원짜리를 5백 만원주고 파는 그런 노인네들 속이는 것처럼 지옥을 천국이라고 소개해서 장사를 해먹었으니까 원래 천국은 아무도 못 가는 곳 이예요.ㅎ 그러려니 그런 줄 아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하시면 구원 받습니다.’ 할 때는 아멘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다가 ‘여러분, 아무도 못 갑니다.’ 하니 아멘이고 뭐고 노~멘, 가만히 있어 버리죠.ㅎ
내가 죽어서 어디가야 행복 하냐, 자기 행복부터 챙기지 마시고요. 하늘에 사시는 예수님께서 진짜배기 진리를 이야기할 때 그 진리 내용이 뭐냐, 그걸 먼저 생각해야 되죠. 그 예수님이 하신 진리는 우리하고 의논하고 타협하고 협상하고 흥정할 대상이 아니에요. 그냥 일방적으로 내질러 버립니다. ‘못 간다. 아무도 못 간다.’ 갈 수가 없어요. 그곳은 하나님의 일관된 뜻이기 때문에 그건 지극히 당연합니다. 창세가 3장에서 인간들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행여나 또 어떤 인간이 에덴동산 기어 올라와서 생명나무 따먹을까 싶어서 아예 주님께서 얼마나 잔인한지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쫓아낸 것도 모자라서 그 쫓아낸 고생스러운 생 노 병 사, 불교에서 말하는 그 고해 같은 이 세상에서 행여나 거기서 너무 견디기 힘들어서 죽어서 좋은데 가겠다고 기어오르는 인간들, 그 인간들마저 발길로 차버리기 위해서 못 들어오게 그 길마저 차단시켜 버렸습니다.
‘이 땅에서 고생했으니까 죽어서는 호강 해보자.’라는 심보, 그 심보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 인간들이 너무 힘드니까 사는 게 한이 맺혀요. 사는 게 그만 한이예요. 사는 게 죽기보다 힘든 세상, 사람이 악에 받혀서 악에 받히니까 나오지도 않던 교회도 나오고, 어릴 때 주일학교에서 빵 하나 얻어먹고 난 뒤에 40평생 동안 코배기도 안 뵈던 인간이 하는 쪽쪽 되는 일이 없어요. 잘 풀리는 집이 아니라 풀리는 것도 안 풀리는 집안이라. 이게 신의 뜻인가 싶어서 교회 기어 찾아왔어요. ‘왜 왔어요? 뭘 노리고 왔는데? 그냥 집에 있지, 집에 있어도 못 가고 교회 나와도 못 가요. 교회가도 사기꾼이 기다리고 있는데 안 돼요. 이래도 저래도 구원 못 받는다니까요.
‘이것이 주의 말씀인가’하여 주의 참 뜻이라고 받아들이는 순간 주님께서 그 사람은 구원하기로 작정한 그 시점입니다.
왕의 신하의 아들이 몸이 아팠을 때에 주님께서 우리 집에 오셔서 낫게 해달라고 왕의 신하가 요청할 때에 주님께서 가시지도 않고 하는 말이 ‘벌써 나았어.’라고 한마디 하고 가지도 않았어요. 나중에 신하가 자기 집에 와 보니까 이미 병이 나아있어요. 그래서 병이 언제 낫나 물어보니까 자기가 예수님 만나서 ‘벌써 나았다’ 한 그 시점에 이미 공간적인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왕의 신하의 아들 병이 나았어요. 그걸 알고 ‘야! 주께서 주의 말씀대로 되는구나.’ 그러니까 말씀이 도착하면 곧 그것이 그 사람이 병이 낫는 증거가 아니라 구원되는 거구나.‘하는 것을 알게 되죠.
바로 이 말씀이 오늘 우리가 펼쳤던 누가복음 13장 말씀이 여러분 마음에 도착되면 이미 그 사람은 이미 구원이 시작된 거예요. 이미 구원 받은 사람 이예요. 아무도 못 간다는 것, 갈 수가 없었다는 것, 이렇게, ‘이렇게 행하시면 갑니다.’하는 것은 전부 다 거짓말이라는 것, 20년 믿었으니까 그 다음부터는 가만히 있어도 구원 된다 것은 다 거짓말 이예요. 예수 믿는 거, 소용없어요. 주의 말씀이 또 다시 늘 상 떠나지 않고 있어요. 주의 말씀이 우리를 구원하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사람의 특징은 설교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그 입에서 주의 말씀이 튀어 나온다. 우리 몸이 껍데기라면, 하나의 바닷가의 고동 울리는 소라 껍데기라면 우~ 하고 울리는 그러한 통 속에서 주의 말씀이 입을 통해서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되는 겁니다. 튀어나오는 것이 주의 말씀이 튀어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평소에 볼 때 우리 속에서, 우리가 조개 통이라면 평소에 통 속에서 튀어나오는 게 뭡니까? 말씀입니까? 아니면 ‘나는 이렇게, 이렇게 살기 때문에 인간답다. 사람답다. 나의 가지를 알아줘.‘ 이런 소리가 통에서 튀어나오는 거예요. 어느 쪽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창세가 3장의 원칙이 그대로 적용이 되면 사람이라 하는 것은 언제부터 사람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그 인간을 죽여 놓을 때, ‘니는 죽은 인간이다.’ 할 때 그 죽은 인간부터 사람이 비로소, 죽음 앞에서 ’아! 사람이 이런 거구나.’ 하고 사람이 비로소 부각이 되는 거예요. 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인데 그동안 안 죽으려고 살려고 열심히 기도해서 살려고 얼마나 헛짓하고 있었는가, 나의 참 모습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지금 내 눈에 띄는 내 몸이 손에 만져지는 내가 있으니까 이걸 자꾸 인간이라고 그렇게 고집부리고 우기네요. 이것도 인간이라고. 인간이 아닌데 살아있는 인간 ‘더 살려주세요.’할 때 ‘인간도 아닌데 왜 살려하느냐,‘라고 하시는 말씀이 주님께서 하시는 거예요.
‘내가 있어서 그동안 돈 벌어서 가족도 있고 장가도 가고 이렇게 부동산도 있고 전토도 있고 땅도 사놨습니다. 좀 이렇게 키워 주세요. 하나님,‘ 그런 소리 하면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 ’ 그런 것 다 버려라. 그런 걸 다 버리면 영생이 보일 것이다.‘ 이래 이야기해요. 소위 말해서 소통이 안 됩니다. 대화가 안 돼요. 대화가 안 되는 이유가 우리는 자기가 죽었다고 생각 하지 않고 자기가 살았다고 생각하니까 우리를 죽은 존재로 보는 주님의 입장하고는 자꾸 어긋나는 거예요. 주님 뜻을 이해 못하고 자꾸 빗나가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우리가 지금 생명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목숨이 있는 것을 우리는 ‘생명이 있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생명이 없다‘라고 이야기하시면서 오늘 본문대로 이야기를 해요. ’없다‘고 하면서. 그래서 예수님의 취지는 이겁니다. 어렵게 생각할 거 없이 모든 인간이 천국에 가는 길을 차단시켜 버려요. 왜냐하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사람들은 사는 게 고생스러우니까 그만 고생스러운 것은 눈에 보이는 내 인생으로 종치고 천국에서는 보상받듯이 이 땅에서 고생한 거 10배, 1000배, 10000배로 고생을 알아줄 수 있는 이 땅에서 고생 했다는 그 수고로움을 들을 수 있는 해소할 수 있는 영원한 복락에 갔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관심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예수님은 관심이 없고 고생하는 나와 고생 안하게 하는 나, 지금 내가 죽어서는 천국 가서 고생 안하는 나, 그 외에는 다른 게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왔던 사람들이 모든 선배들이예요. 우리보다 먼저 이 땅에 태어났던 모든 인간들이 바로 종교라는 단체를 만들어서 전부 다 그런 식으로 살아왔던 겁니다. 그런 식으로 살아왔던 그것을 주께서 한마디로 전부 다 차단시켜 버려요. 모두 다 그럴 수가 없다고 차단시켜 버릴 때 차단시키는 효과가 뭐냐, 비로소 그럴 때 그 사람들이 평소에 종교생활, 하나님 믿고 예수 믿고 성령 믿고 어떻게 하고 그러한 모든 것이 바로 악마의 힘이고 그게 사단의 힘이고 그게 지옥갈 수밖에 없는 이유들이 거기서 힘이 솟아 나온다는 것이 발각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은 뱀의 앞잡이였어요. 나는 가수다. 뒤에 가수 붙이지 말고 ‘나는 뱀의 앞잡이였다.’ㅎ 성경은 그렇게 간략하게 그렇게 요약될 수가 있습니다. 뱀의 앞잡이가 천국에 간다면 그것은 천국이 곧 지옥일 경우에는 가능한 거죠. 뱀의 앞잡이라면 결국은 우리 속에서 내뿜는 곳은 사실은 우리 뜻이 아니고 사단의 뜻이고 뱀의 뜻이겠죠.
그러면 목사님 뱀, 악마가 노리는 것이 뭡니까? 악마가 노리는 것은 딱 하나 밖에 없어요. 예수님의 행하신 것을 무효로 돌리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것을 쓸데없는 짓으로 돌려버리는 것, 암, 그건 괜한 짓이라고 무시하는 것, 예수님의 십자가는 행복도 아니고 우리 영혼을 피폐케 하는 것이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는 순간 우리는 이 땅에 살 낙을 잊어버리는, 우리를 힘들게 만들기 위한 나쁜 짓이라고 예수님을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지난 수요일인가 예수님은 악마의 모습으로 왔다고 하니까 시험 든 사람도 있는데 예수님은 귀신의 대장이었습니다. 그렇게 표현한 겁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여, 왜 우리를 힘들게 하느냐는 겁니다. 주께서 하는 말씀이 ‘니가 힘든 것은 니한테 니 자신을 긍정하고 너의 가치를 안 놓으려 하니까 그게 힘든 거예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너라. 내게서 배워라. 나는 다 망했잖아. 그런데 니는 니 것을 안 놓으려 하니까 니가 니한테 죽도록 고생하는 거예요. 뭔가 힘들게 해놓고 지 가치 주장하니까 돌아서서 힘들고 뭐 했다 하면 했다고 자랑하니까 돌아서면 힘이 부치는 게 되고, 주님께서는 우리가 몸부림치고 애쓰고 하는 것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아무 신경도 안 써요. 죽은 인간이, 죽은 벌레가 몸부림치고 애쓴다고 그렇게 생각 안 하잖아요. 마찬가지입니다. 몸부림친다고 더 죽는 것도 아니고 더 사는 것도 아니고 우리는 살면서 그저 몸부림치는 거예요. 하나의 바퀴벌레 같아요. 주님께서 바늘 가지고 콕 찌르니까 우리는 죽겠다고 막 몸부림치는 거예요. 주님께서 산사태 일으키니까 난리 났어요. 비 한 500미리 와 버리니까 죽겠다고 난리입니다. ‘신은 뭐하십니까?’ ‘뭐하기는 뭐해. 너네끼리 해 놓고 뭐, 원래 세상이 그래.’ 요한계시록을 보지 못했어요. 요한계시록을 보지 않는다니까요. 사람들은 내 손으로 성과 한 것만 보지 성경 말씀 자체도 관심이 없어요. 내가 한 성과, 내가 이 나이까지 이룩해 놓은 성과, 내 직장과 든든한 가정과 이 든든한 교회와 화목한 교회 아름다운 교회 사랑이 넘치는 교회, 다복한 가정 나이 60까지 보장받는 직장, 그거 외에 우리 관심사가 어디 또 있습니까? 없습니다.
서울 서초구에 예술의 전당 근처 우면 산에 산사태 일어났을 때 어떤 분이 이런 이야기해서 제가 큰 은혜 받았습니다. 서초 구청장한테 그 사람이 몇 번을 탄원을 냈어요. 아파트 앞에 30미터 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를 치워 주세요. 큰 물난리 나면 덮쳐서 이 아파트 붕괴 됩니다. 치워 주세요. 하고 몇 번 탄원했는데 결국 서초구청이 그 말을 안 들었어요. 이번에 비가 와서 우면 산사태가 나서 나무가 넘어져서 자기 아들 죽였어요. 그래서 그 여자 분이 하는 말이 ‘그 나무만 잘라주면 내 아들이 살 건데.’
예수님께서 그 나무를 지금 잘라주고 있는 겁니다. 말씀을 통해서!! ‘처나 자식이나 남편이나 부동산이나 나무를 잘라주고 있는데, 문제는 안 잘리려고 하니까 문제 아닙니까? 교회도 잘라 버리고 가정도 잘라 버리고 모두 잘라 버리고 심지어 나도 잘라버리고 잘라 버리고 잘라버릴 때 우리는 그 이유를 알아야 돼요. ’나 니 누군지 모른다.‘ 그 이야기를 우리가 그 말씀을 우리가 진짜 내 말씀으로 들어야 돼요. 우리는 자기 이름이 있어서 남의 이름 욕 얻어먹는 건 소용없어요. 내 이름을 욕 얻어먹는 것은 참지를 못합니다.
쉽게 하겠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다시 돌아 올 내 자리가 없다는 뜻 이예요. 그리고 다시 돌아와서 구축할 내 자리는 주님 보시기에 ‘나 니 모른다.’는 평가를 받는 자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평생 애쓰고 노력해도 우리는 내 자리만 구축할 뿐이지 그 주님이 안 알아주는 그 자리를 왜 구축하는지 몰라요. 우면 산 그 아줌마 이야기 저를 미치게 만들었어요. ‘그 나무만 잘랐으면 내 아들이 살 건데, 왜 진작 안 잘라주는 지 몰라.’ 주님께서 지금도 계속해서 잘라 줍니다. 자르라고 우면 산 산 사태가 일어난 거예요.
여기 로마서 11장 33절에 보면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그의 길은 찾지 못 한다 그랬죠?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이 뭡니까? 이 이야기를 그대로 하는 거예요. 싱글 벙글 웃으면서. ‘집사님, 어떻게 나도 구원 받아요?’ ‘’‘그의 길은 찾지 못함이라.’ 이렇게 싱글벙글 하면서 이야기하면 된다니까요. ‘우리교회 나오세요.’ 그러지 말고 ‘그의 길은 찾지 못합니다.’ ‘그럼 집사님은 그 교회 어떻게 찾아 갔어요?‘ ‘나도 못 찾았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그의 길을 찾지 못합니다.’ 그게 로마서 나오는 이야기잖아요.
그것보다 더 한 게 나오죠. 35절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그러니까 내 것을 주 앞에 바치면 그 바치는 보상으로 하나님께서 복을 주는 이런 하나님은 애초부터 없었던 하나님이다 이 말이죠. 헌금한다고 십일조 한다고 복 부는 그런 하나님은 없어요. 애초부터 우리 것을 드려서 보상으로 되갚아오는 그런 하나님은 없습니다. 이걸 고린도교회에서 사도바울이 로마서에서 편지를 보내서 이 이야기를 했다고요. 지금 3차전도 하면서. 사도바울이 돌아다니면서 이 이야기 했다 말이죠. 어떤 인간도 하나님께 보상책으로 구원받는 법은 없습니다. 아까 분명히 이야기했다 말이죠.
그럴 때 사도행전 17장 32절에 보면 저들이 뭐라고 한 줄 압니까? 오늘 설교 하이라이트입니다. “저희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기롱도 하고....” 비웃었다 이 말이죠. 사도바울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복음은 그리고 예수님께로 나오는 모든 복음은 예수님 당시의 모든 바리새인들로부터 비웃음을 받았으며 사도바울의 모든 복음도 비웃음을 받았어요. 왜 비웃음을 받느냐 하면, 비웃어야 그게 정상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성도들은 제발 예수님처럼 사도바울처럼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는 말을 하면 안 되고 비웃을 수 있는 내용만 이야기해줘야 돼요. 비웃을 수밖에 없는 내용을!!! 그게 복음 이예요. 그걸 전하라 하는 거예요. 남에게 비웃음을 받을 수밖에 없는 복음을 전해야 이 복음이 복음을 전하는 내 가치를 옹호하기 위해 전하는 복음이 아니기 그렇습니다.
복음 전하고 인기 얻겠다는 노림수가 없다는 뜻 이예요. 다시 말해서 교회 와서 한이 맺혀서 하나님이여 내 것 찾아 달라고 온 사람에게 비웃음을 받을 수밖에 없는 복음을 전해야 됩니다. 그 보상 받아서 뭐할 건데? ‘애가 아픕니다.’ ‘애가 나아서 뭐할 건데? ’교회 부흥이 안 됩니다.‘ ’부흥돼서 뭐할 건데?‘ ’선교사,,,‘ ’선교사 해서 뭐할 건데?‘ 비웃음을 받아야 돼요. 선교야 주님이 하시고 죽고 사는 것도 주님 손에 달렸습니다. 왜 자기 것을 자꾸 쥐고 자기 것을 채우려고 교회 오느냐 말입니다. 그것은 주께서도 안 알아주는 건데. 왜 주님이 안 알아주는데 왜 내가 내 것이라는 이유 때문에 이걸 꼭 쥐고 있어야 돼요? 그 이유가 뭐냐 말이죠. 이유가 없잖아요.
비웃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 사실은 이 비웃음이 여러분, 성도 말고 불신자가 비웃는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도 오산입니다. 구원 받은 성도가 매일같이 예수님의 하신 말씀에 대해서 비웃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구원은 구원대로 받아가면서 비웃음은 비웃음대로 하고 있어요. 성도의 하루, 하루의 나날은 하나님께 감사가 아닙니다. 칫~ 하고 주님께 비웃는 식의 하루하루입니다. ‘에게, 주께서 나한테 예수 믿으니까 기껏 나에게 해준 게 요거밖에 안 돼요.’ 늘 주 앞에 비웃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인간이 누구냐, 그런 인간이 야곱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처음부터 노림수가 있었어요. 야곱 자체 이름이 빼앗는 자지만 노림수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좁은 문, 이 좁은 문이라 하는 것은 문이 없다는 뜻 이예요. 일체 문을 없는 거예요.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이 좁은 문은 어느 정도로 좁은 문이냐 하면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문보다 작은 문 이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우리를 낙타로 본다면 낙타한테는 바늘이 있으면 그걸 문으로 여기지 않잖아요. 결국은 낙타한테는 문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소리 듣고 제자들은 누가 놀랐느냐 하면 불신자들이 놀란 게 아닙니다. 제자들이 놀랐어요. 왜냐하면 저희들은 구원 받는다고 착각했기 때문에. 제자들이 하는 말이 '그러면 주님,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제자들이 예수님한테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예수님과 동행하면 매일같이 이 질문을 주님한테 해야 됩니다. ‘주여, 이런 식으로 저 구원 못 받습니다.’라는 이야기를 해야 되고 주께서 그 소리 듣고 얼마나 기쁘고 즐겁게 들으실 겁니다. ‘그래, 니 힘으로 구원 되려고 하는 니 성질 머리 자체가 문제지 그래.’ㅎ ‘그럼 누가 구원 받겠습니까? 이건 안 됩니다.’ 쉽게 말해서 ‘주여, 이건 구원이 안 되는 겁니다.’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 ‘ 그래, 안 되게 하는 것이 내 뜻이라니까.’ ‘그러면 누가 구원을 받겠습니까?’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 ‘ 내가 그러니까 인간이 못한 것을 하나님이 하시잖아.’라고 하시는 거예요.
인간은 자꾸 하나님 하시는 것과 자기가 하는 것과 섞어서 구원 되려고 시도를 하는 거예요. 주님은 요만큼 하면 미비한 것은 내 쪽에서 할 것은 내 쪽에서 보태서 그래서 같이 짝짜꿍돼야 천당 간다고 생각한다 말이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니 것이 나한테 포함되지 않는다. 니 행함이 니 구원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말은 처음부터 니는 뭘 해도 구원에 전혀 기여를 할 수 없는 그런 존재에 불과한 거예요.
그걸 다시 이야기하면 ‘니는 처음부터 구원을 못 받아. 구원 안 되는 것을 내가 니를 구원 해.’라는 겁니다. 주님이 세상 끝 날까지 우리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이 말이 여러분에게 기쁜 소식이기를 원합니다.
오랜만에 시골에서 고추하고 가지하고 돈은 안 되지만 나물하고 바리바리 싸가지고 와서 서울에 있는 아들 집에 떡 앉아서 시어머니가 ‘세상 끝 날까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면 기절할 거예요.ㅎㅎ ‘어머님, 언제 내려가십니까?’ 하면 ‘세상 끝 날까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면 기절한다 말이죠. 무슨 말이냐 하면 ‘니 살림 사는 것을 보니 니 살림 사는 것도 아니고 엉망이다. 내가 처음에는 니한테 기대했는데 아예 기대 못하겠다. 내가 죽을 때까지 니하고 함께 살면서 니 이렇게 살림 못하는 것을 혹독하게 잔소리 해댈 거야. 그래야 니 집 살림이 돼.’ 이게 주의 뜻입니다.
우리는 평생을 살아가면서 내가 내 힘으로 조치를 해서 그 천국에 예수님의 나라에 들어갈 기미가 안 보입니다. 우리는 매일 실패해요. 실패, 실패, 또 실패예요. 우리가 즐거운 것은 말씀 잔소리꾼이 평생을 떠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며느리가 시어머니한테 고추잡채를 배웠다 칩시다. ‘어머님, 제가 이번에 잡채를 배웠어요. 제가 만든 잡채가 어떻습니까? 이제 5년 동안이나 있으면서 어머님한테 이거 하나 배웠습니다.’ 어머님이 잡채 든 쟁반 들고 낯짝에 던져 버립니다. ‘내가 평생 너와 함께 있겠다는 의미를 모르느냐, 그래 나한테 5년 배워서 그것도 주의 뜻이라고?’ 에라, 주의 뜻이 시어머니 뜻이라고? 그것도 잡채야?‘ 라고 얼굴에 던져버립니다.
‘하나님, 제가 목회 20년 했는데 이제는 제 힘으로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대번 쟁반 갖고 던져 버립니다. 왜, 주께서 낯짝에 쟁반을 던지느냐 하면, 시어머니 뜻은 이겁니다. 시어머니 없이는 니가 집구석이 안 된다는 것이 시어머니 뜻 이예요. 이건 예수님의 뜻은 뭐냐 하면 ‘너는 예수님이 함께 있지 아니하면 니는 구원 못 받아.‘ 라는 것이 예수님 뜻인데 우리는 그것을 뭐로 해석하느냐 하면 주님이 나와 함께 있기 때문에 내가 구원 된다는 식으로 또 자기 자신의 구원의 욕구에 대해서 그대로 악마의 이빨을 드러내는 거예요. 악마의 이빨 덧니를!!
그러니까 주님께서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니는 내가 그렇게 싫나? 니는 그렇게 니 혼자 있는 것이 좋고 니 곁에 예수님이 말씀으로 잔소리 하는 게 그리 싫나? 그게 그렇게 미운 거야?’ 얼~마나 미웠으면 ‘십일조 했습니다. 뭐 했습니다. 전도 했습니다.’ 자꾸 자기 행한 것을 이야기 합니까? 얼~마나 미웠으면.... ‘주여 나는 아무 것도 못합니다.’ 십일조로 한 천만 원 내 놓고 ‘세상에 푼 돈 내놓았습니다. 이 돈으로는 아무것도 못 합니다.’ 우리교회하고 전혀 상관 없어가지고 아주 즐겁습니다.ㅎ '아무것도 못합니다. 돈 내도 이건 돈도 아니고 이건 떡 값도 안 되고 주일 날 봉사도 못하고 아무것도 못합니다. 저는 주님 곁에 있는 것 때문에 저는 삽니다. 그렇기 때문에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고 애가 아파도 감사하고 남편하고 이혼해도 감사하고 저는 주님 때문에 삽니다.‘
아까 찬송 부를 때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고요. 그걸 젊은 사람들이 어떻게 알겠어요. 지 잘난 맛에 살아가는데. 애들 보세요. 청소년들 보세요. 저 꼬마 보세요. 저마다 잘난 맛에 사는데. TV에서 가수 춤추면 그거 다 따라 하잖아요. ‘엄마, 나도 할 수 있다’ 이 말이거든요. 주께서 ‘나는 니가 누군지 모른다.’ 하시는데 ‘주님이 나 몰라도 괜찮아요. 내가 나 알아주면 그만 이예요..’
이러한 의식, 하나님께서 그 야곱을 철저하게 지밖에 모르는 인간으로 데려가는데 놀라운 것은 창세기 28장에 보면 사다리가 내려옵니다. 그 사다리를 가지고 한자로 뭐라 하느냐 하면 ‘문’이예요. 문!! 무슨 문? 하늘의 문, 이게 하나님 집입니다. 베델입니다. 하늘의 문이 어디 나오느냐 하면 저 어떤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고 말썽꾸러기, 나밖에 모르는 주님도 귀찮아하는 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잊지를 못하는 것, 주님 하신 것은 다 잊어버리고 지가 애쓴 것, 손톱에 때 낀 것, 지 손톱 아픈 것, 이런 거는 못 잊어버리고 하나님께 화내는 요 못돼 먹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사다리가 주님의 문이 거기서부터 개시가 되고 열립니다.
어떻게 열립니까? ‘니 때문에 내가 죽었다’는 피 묻힌 문이, ‘주여 이 피 왜 흘렸습니까?’ ‘니가 그렇게 잡채 만들고 애 잘 키운다고 나한테 자랑해서 내가 그 죄를 씻는다고 흘린 피가 아닙니까,’ 피가 물들은 사다리, 그 사다리가 주님의 십자가로서 우리 속에 박히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야기하기를 ‘ 너희들이 그리스도와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그 십자가가. 그 피 묻은 십자가가 주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 이 건희 회장이 부럽습니까? 축구 잘하는 박 지성이 부럽습니까? 누가 부럽습니까? 이 십자가 밖에 있는 사람을 여러분, 부러워하지도 말고, 사람이 누굴 부러워하면 그 사람한테 두려움이 생겨요. 부러움이 없으면 두려움도 없어요. 왜 사람이 사람을 두려워하느냐 하면 부럽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거예요. 자꾸 십자가 마을에 객소리 하러 들어오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그만큼 두렵고 무섭고 부럽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제가 이상한 사이트에 안 가잖아요. 안 부럽기 때문에. 안 부럽기 때문에 두렵지도 않아요.
지금 여러분, 누가 두렵습니까? 부모한테는 자식이 제일 무섭고 두려워요. 그 애가 잘못되면 부모 얼굴에 떡칠을 하기 때문에. 이게 공포입니다. 그러니까 그 부모는 자식을 낳고도 자식의 십자가에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자식 안에 살아가요. 자식이 문이라.ㅎ 자식이 천국의 문이 돼 버렸어요. 천국의 문이 없어요. 사다리가 없어요. 사다리가 없으니까 기껏 생각한 아이디어가 뭔지 아십니까? ‘착하게 살면 사다리가 내려올 거라고.’ 세상에 그런 속임수에 넘어갑니까? 여러분 착하게 산다고 되는 게 아니고 야곱은 못되게 살아도 그 안에서 솟아 나와요. 못 되게 산 야곱, 지 밖에 모르는 인간 속에서 사다리가 솟구쳐 올라왔습니다. 주님이 올라왔어요.
주께서 오늘 말씀에 ‘천국 가는 사람도 적다. 찾는 사람도 적다. 니 힘으로 알아주세요. 문 안 열어준다.’ 자꾸 거부하는 것은 그 당시에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받으면서 결국은 십자가로 가는 여정 중에 하나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을 수밖에 없습니까? 아무에게도 인기가 없거든요. 누구에게나 인기가 없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다 그를 두려워했습니다. 예수님을 제거하는 것으로 자기 속에 있는 공포를 해소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죽였습니다. 그것으로 이야기 끝났다면, 우리 인간은 위대한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죽은 데서 실제로 사흘 만에 살아남으로 말미암아 이제부터 세상은 말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말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라. 거기서 ‘다 이루었다’는 겁니다. 쉬운 예로 무슨 말이냐 하면 동대구에 가면 만약에 제가 차표를 끊었잖아요. 객차가 KTX 11호에 DA라면 나는 저 기관차 앞에 서면 안 되고 11호라고 써 있는 데가 있어요. 거기 서 있어야 기차 문이 딱 열리게 돼 있어요. 신기하지 않습니까? ‘와! 기관사 재주 좋다. 어떻게 10호는 10호에 맞추고 11호는 11호에 맞추고 9호는 9호에 맞추고, 희한하네, 눈이 몇 개고? 다 맞췄네.’ 그게 다 맞춘 게 아니고 자기가 기관차가 앞에 서면 자동으로 다 맞게 돼 있어요.
십자가가 우리 속에 들어오면 우리가 못 되게 굴었던 거, 주께 원망했던 거, 나 밖에 모르는 거, 그저 자기 이익만 생각하는 모든 것이 전부 다 ‘다 이루었다’의 혜택을 입게 돼 있습니다, 우리는 그걸 가지고 아까 기차는 뭐냐 KTX안이라고 돼 있잖아요. 성경에서는 이걸 뭐냐, 십자가 안이 되는 거예요. 여러분, 십자가 안에 몇 호실입니까? 11호 DA입니까?ㅎ십자가 안에 여러분 자리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 자리가 여러분 구원 받은 자리가 아니라 남들 전도하라고 준 십자가 자리, 여러분 입을 통해서, 소라 통에서 나오는 구원의 예수님 증거 하라고 튀어나오는 거예요. ‘나 개판인데 이 십자가 때문에 난 살았어. 그 십자가가 오늘도 떠나지 않아. 만날 나한테 잔소리 해 싸서 지겨워, 하지만 나는 그 십자가가 나를 구원해.’ 주께서 날 안 떠나겠다는데 어떻게 내가 주를 떠나, 어디를 가야 주님을 피할 수 있습니까? 못 피합니다.
왜 십자가입니까? 인간의 힘으로 갈 수 없는 나라가 바로 천국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