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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순종님
님께서는 성가대에 관한 역사를 공부하는 중에 가진 의문에 대해 질문하였습니다. 님은 성가대의 유래를 찬양을 로마카톨릭교회의 성가대만 가지고 있었으나 종교개혁시대에 칼빈에 의해서 회중에게로 돌아온 것에서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님은 성가대가 과연 유익한가 하는 의문을 가졌습니다. 님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예배 때 성가대 찬양에 집중하기 보다는 성가대가 소위 강단 정면에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성가대에 시선과 집중을 뺏겨 찬양에 집중하는 게 힘들다고 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 외에도 또 다른 이유가 있는데 성가대에 서는 분들에게서 시험을 많이 받는 경우를 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님은 왜 그렇게 시험받아가는 것을 사서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며, 본인들은 시험받을까 힘들어하고, 회중들은 찬양에 집중하지 못하고, 성가대에 집중이 흐트러지고, 성가대가 이러하기에, 있어도 괜찮고 없어도 괜찮은 것인지 아니면 꼭 있어야만 하는 것인지, 아니면 성가대는 반드시 없어야 하는 것인지, 그래서 회중에게 찬양이 돌아와야 하는 것인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다음과 같이 답변을 드립니다.
교회에 두고 있는 성가대(聖歌隊)는 합창대로 불려지기도 합니다. 성가대란 용어를 사용하는 교회도 있고, 이를 거부하고 합창대란 용어로 사용하는 교회도 있으며, 혼용해서 말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어느 용어로 사용하든지 간에 그 존재의 용도는 같은 것이기에 용어 가지고 왈가왈부 할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님은 성가대란 용어로 사용하고 있으니 답글도 이 용어로 말하겠습니다. 교회 음악을 하는 분들은 성가대의 유래를 성경에서 찾고자 합니다. 그래서 성경적 유래를 심지어는 창세기 4:21에 두고 있기까지 합니다. 그것은 그 구절이 "그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을 음악의 조상에 대한 성경의 최초의 문헌이라고 보고서 교회음악이 시작된 역사도 이것으로 근거를 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지나친 억지 주장이 될 것입니다. 가인의 후손 유발이 수금과 퉁소를 연주하는 음악의 조상이라고 하는 것은 그에게서 음악이란 문화가 발흥했다고 하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며, 그래서 이것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죄의 힘이 어떻게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지를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데 이것으로 교회음악의 기원을 삼으려고 하고 이것에서 교회음악의 유래를 말하려고 하다니요!.
그런가 하면 교회음악에서 자리하고 있는 성가대의 기원을 역대상 15:16-24에서 보려고 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들은 “다윗이 레위 사람의 어른들에게 명하여 그 형제 노래하는 자를 세우고 비파와 수금과 제금 등의 악기를 울려서 즐거운 소리를 크게 내라 하매, 레위 사람이 요엘의 아들 헤만과 그 형제 중 베레야의 아들 아삽과 그 동종 므라리 자손 중에 구사야의 아들 에단을 세우고, 그 다음으로 형제 스가랴와 벤과 야아시엘과 스미라못과 여히엘과 운니와 엘리압과 브나야와 마아세야와 맛디디야와 엘리블레후와 믹네야와 문지기 오벧에돔과 여이엘을 세우니, 노래하는 자 헤만과 아삽과 에단은 놋제금을 크게 치는 자요, 스가랴와 아시엘과 스미라못과 여히엘과 운니와 엘리압과 마아세야와 브나야는 비파를 타서 여청에 맞추는 자요, 맛디디야와 엘리블레후와 믹네야와 오벧에돔과 여이엘과 아사시야는 수금을 타서 여덟째 음에 맞추어 인도하는 자요, 레위 사람의 족장 그나냐는 노래에 익숙하므로 노래를 주장하여 사람에게 가르치는 자요, 베레갸와 엘가나는 궤 앞에서 문을 지키는 자요, 제사장 스바냐와 요사밧과 느다넬과 아미새와 스가랴와 브나야와 엘리에셀은 하나님의 궤 앞에서 나팔을 부는 자요 오벧에돔과 여히야는 궤 앞에서 문을 지키는 자더라”라고 해서 다윗이 레위 지파의 지도자들에게 명하여 그 지파 가운데서 노래 잘하는 자와 비파와 수금과 제금들의 악기를 잘 연주하는 자를 가려내어서 연주와 함께 즐거운 노래를 불러 여호와를 찬양하게 한 것을 보아 성가대의 기원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이것에서 성가대의 기원을 보려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지금 이 구절은 다윗이 자기가 살 왕궁을 짓고 법궤를 모실 곳도 정해 놓고서 그동안 단 지파에 소속된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맡겨 놓았던 법궤를 모셔오는데 있어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주신 대로 레위 지파가 이 법궤를 채에 꿰어 어깨에 메게 하고는,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레위 지파의 지도자들에게 그 지파 가운데서 노래 잘하는 사람과 악기를 잘 연주하는 사람을 추려내서 그들에게 수금과 비파와 제금 등의 악기로 연주하며 노래를 불러 찬양하게 할 것을 지시하는 것에서 하시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에 따라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감사하고 찬양하며 하나님이 행하신 은혜로운 일들을 노래로 칭송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날에 다윗은 처음으로 아삽을 비롯한 성소의 책임자들에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영광을 기리는 노래를 바치게 함으로 있는 것이 다윗의 찬양이었으며, 백성들은 이 찬양을 듣고 ‘아멘’하고 여호와를 찬양하였습니다(대상 16:8-36). 그래서 법궤를 모셔오는 것과 관련해서 다윗 왕을 비롯한 온 백성들이 하나님 여호와께 감사하고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기리는 찬양에 있었습니다.
이후 다윗은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 지파에게서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여호와께 찬양을 올릴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찬양하는 자들을 두고 항상 감사와 찬양의 노래를 준비하고 있게 하였는데 그 수는 4천명에 이릅니다. 이들은 레위 지파에 소속된 남자로서 30세 이상인 자들입니다(대상 23:3, 5, 30). 이는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도 계속해서 지속되어갔습니다.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은 왕국의 분열을 겪고 또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각각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을 당했으며, 이로 인하여 바벨론 포로기를 겪은 유대인은 언약궤를 손실하고 성전은 파괴당했으며 찬양을 맡았던 자들은 더 이상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었었다. 그러나 바벨론 포로기 이후 고국으로 귀환하여 예루살렘에 정착한 사람들에게서는 성전에서 “찬송하는 자가 있으니 곧 레위족장이라 저희가 골방에 거하여 주야로 자기 직분에 골몰하므로 다른 일을 하지 아니하였더라”(대상 9:33)라는 말씀처럼 다시 찬양을 전담하는 직무를 수행하는 자들을 둠으로써 그동안 레위 지파에서 끊어졌었던 성전에서의 찬양이 이때에도 계속되어 지속되어 갔습니다.
나라마다 왕궁에는 악사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니까 왕궁에는 악기로 연주하는 사람들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경우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처럼 악기를 사용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의 시작은 다윗왕에 이르러서 비로소 형성된 것이 아닙니다. 가령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을 때에도 모세와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찬양하였는데 아론의 누이이며 선지자인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고 앞에 나서 노래를 불렀으며 그 뒤를 따라 여인들이 모두 소고를 잡고 춤을 추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울이 왕위에 등극할 때 온 백성이 큰 잔치를 벌이며 크게 즐거워하였는데, 이러한 때에도 여러 악기를 사용한 연주와 노래가 불려졌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하는 것은 인류의 문화에서 항상 다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개인에게서도, 국가의 형태가 아닌 상태에서나 국가의 형태를 갖춘 상태에서도 그 모두에서 있어 왔습니다. 그런데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하는 것이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섬기는 자(백성)에 의해서 다루어지며 불려질 때는 그 내용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행사(行事)를 기려 칭송하는 것에서 찬양으로 다루어집니다. 그러한 것이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행하신 어떤 일에 있어서 하나님을 찬양함을 나타내게 되었을 때 악기가 사용되어 연주되고 노래가 불려진 것이 언급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어떤 특정한 연주가 있고 노래가 불려진 것과 관련하여 이것에서 교회음악과 성가대의 기원을 말하는 것은 무리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말하는 성가대는 이것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사에서 존재해온 성가대에서 그 유래를 찾아야 옳습니다. 왜냐하면 말입니다. 구약시대에 존재했던 레위 지파 중에서 성전에서 악기를 사용하고 노래하여 하나님을 찬양했던 직무는 성전의 실체이신, 곧 참된 성전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오셔서 사람의 손으로 지은 돌로 된 성전을 허물어 버리심으로 이 안에서 섬기는 봉사에 있던 레위 지파의 직무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말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는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는 유대인에서도, 그리고 그리심산에서 예배하는 사마리아인에서도 없으며, 오직 신령과 진정으로 - 하나님의 영과 진리를 좇아서 - 예배하는 자에게서 있게 되는데, 이는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비로소 있게 되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는 자에게서 이 예배에 있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온 세상의 주가 되신 때부터는 예배는 구약시대에 일정한 장소에서 의식을 통해 행해져 온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의 주 안에 있는 것에서, 그래서 주님의 통치를 받으며 그분이 행하신 인자하심과 선하심을 선양(宣揚)하는 백성에 있는 관계성에서 있게 됩니다.
교회가 그러한 것에서 갖는 예배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에 복음이 되심을 증거하는 것에 집중되어야 합니다만, 그래서 설교 - 말씀 선포 - 에 그 무게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 외에 다른 많은 것들이 예배 의식의 순서로 더해지면서 여기에 성가대의 찬양이란 것도 포함되어 왔습니다. 교회의 예배는 오직 한 분 그리스도 예수만 보이며 그래서 또한 오직 한 분 그리스도 예수만 보며, 그분을 증거하시는 복음을 설교하고 그래서 또한 그분을 증거하시는 설교를 들음으로써,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에 있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잘 드러내는 것이 되어야 하고, 그런 것에서 사도 시대의 교회예배는 의식적(儀式的)인 것이 아니라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에 의한 질서 속에서 있었습니다.
그러한데 A.D 313년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교회는 남자어른과 변성되지 않은 소년들로 성가대를 구성함으로써 교회 안에 구약시대에서 성전에 레위 지파에 의해 찬양하는 직무에 있었던 자들이 있었던 것을 따라서 그와 같은 ‘찬양대’, 곧 ‘성가대’를 조직하여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종교개혁 이전까지 성가대는 회중과 구별되는 위치에 있는 자들로 다루어졌습니다. 그것은 그레고리 교황(Gregory the Great 540-604)때 만들어진 "스콜라 칸토룸"(Schola Cantorum)이라는 성가학교를 통해 훈련 받은 자만이 성가대원이 될 수 있는 자격에 있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교회에서 성가대가 존재해 오게 된 것은 그 시작이 교회에서 성가대를 조직하여 만들면서 부터이며, 이는 종교개혁 시기까지 계속되어왔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 시기에 세워진 개혁교회에서 성가대는 폐지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주요한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신학이 철학의 영향을 받듯이 교회음악 - 성가대 - 이 세속음악의 영향 속에 있는 것을 비롯해서 무엇보다도 예배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되어지고 있는 것에서 오직 그리스도 한분에게만 온 회중이 집중되어 있어야 할 것에 인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개혁교회는 예배처가 말씀 외에 다른 것으로 치장되고 채워지는 것을 극히 주의했습니다. 그래서 회중의 눈과 귀가 복음의 설교자와 설교 외에 다른 것에 빼앗기지 않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개혁교회의 그러한 개혁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언제부터인가 다시 성가대의 필요성을 갖고 성가대를 두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성가대에 의하여 교회음악은 더욱 발달함으로써 찬송이 하나님과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칭송하여 기리는 것이 아니라 교회음악으로 자리 잡고 음악성과 그 기교에 의하여 불려지는 것이 되었으며 그에 따라서 음악적 자질이 성가대에 서게 되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습니다. 오늘날에 성가대가 부르는 찬송(성가곡)이 화음을 중요시 여기며 4부로 부르는 것은 여기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성가대의 찬송은 님이 의식하고 있는 바를 비롯하여서 여러 문제점을 지닙니다. 님은 예배 때 찬양에 집중하기 보다는 성가대가 소위 강단 정면에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성가대에 시선과 집중을 뺏겨 찬양에 집중하는 게 힘들다고 하였습니다. 과연 그런 문제점이 있을 것입니다. 이와 함께 성가대의 합창에 의한 찬송은 회중이 찬송하는 것과 분리되어 있으며 회중 찬송과도 차별을 갖고 있는 문제점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가대의 합창에 의한 찬송이 예배 속에서 한 순서로 있으면서 불려지고 있으나 실상은 성가대가 자신들에게 주어진 곡으로서 교회음악을 연습하여 그 실력을 연주하고 노래하여 발휘하는 것에 있는 것이지 진정으로 그 곡이 나타내고 있는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에 있지 못하다는 문제점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님이 지적한 바와 같이 성가대에 서는 분들에게서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로 인하여 믿음의 유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큰 해를 입고 있는 시험을 적지 않게 받고 있는 것에서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이는 성가대에서의 찬송을 성가대의 일로 해 나가기 때문입니다. 님은 왜 그렇게 시험받아가는 것을 사서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고 하였는데요 그것은 그렇게 성가대에 서는 것을 통하여 회중들의 시선을 받고 칭찬과 존경과 대우를 받는 참으로 자랑스러운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며, 그렇게 하는 것을 교회 생활을 잘하며 그것을 잘하는 것을 신앙이 좋은 것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교회 생활을 재밌게 하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심히 기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이 나서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자기를 위하여 하는 만큼 그러한 자신이 건드려지는 일이 생기면 그 일로 상처를 당하며 피해 의식을 갖고 함께 하는 성가대원들과도 등을 지고 대적하거나 자신 스스로 위축되어 신앙생활을 정상적으로 하지 않는 등의 온갖 폐단도 나타납니다.
이런 문제점 외에도 성가대를 두고 있는 교회는 그 성가대로 인하여 갖는 문제점들을 더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문제점들이 몇 개이든, 그래서 문제점이 적든 또는 많든지 간에 이로 인하여 교회가 유익에 있지 못하다고 하면, 그 교회는 그 문제점으로부터 성도를 보호하는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님은 성가대의 문제점들을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성가대가)있어도 괜찮고 없어도 괜찮은 것인지 아니면 꼭 있어야만 하는 것인지, 아니면 성가대는 반드시 없어야 하는 것인지, 그래서 회중에게 찬양이 돌아와야 하는 것인지....”라고 말입니다.
성가대가 교회에 있는 것을 무조건 문제 삼거나 없는 것을 무조건 당연시 할 일은 아닌 듯 싶습니다. 교회에 유익을 끼친다면, 그러한데 왜 문제를 삼겠는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교회에 아무런 유익이 없으며 해만 된다면요? 그러한데 왜 성가대를 만들고, 그래서 성가대를 두고 있어야만 하는지요. 성가대는 있어도 괜찮고 없어도 괜찮은 것이 아닙니다. 있어서 교회에 유익해야 있는 것이 괜찮은 것이지, 있어서 유익하지 않은데 있어도 괜찮은 것은 아닙니다. 성가대가 있어서 교회에 유익하다면 이를 누가 문제 삼을 수 권한이 있겠는지요. 하지만 말입니다. 성가대가 있어서 유익하지 않다면, 이럴 경우는 있어서 유익하지 않은데 무엇 때문에 굳이 성가대를 두고 있어야 하는지요. 성가대가 없어야 할 필요성에 의해서 당연히 없어야겠지요.
님은 또한 성가대는 꼭 있어야만 하는 것인지, 아니면 성가대는 반드시 없어야 하는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교회가 성가대는 꼭 있어야만 한다고 여기십니까? 그렇다면 그것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지요. 그런데 왜 성가대가 꼭 있어야만 한다고 여기시는지요. 하나님의 말씀의 전파와 함께 성가대가 합창하는 찬송을 통해서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신 구속의 복음을 잘 드러내는지요. 그러면 성가대를 두시고서 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그렇게 될 것이라고 여기고 성가대를 두었는데 이런 저런 해악이 나타나고 이로 인해서 교회에 유익을 끼치지 못하는지요. 그렇다면 성가대가 꼭 있어야만 하는 이유가 되지를 못합니다. 그러면 성가대는 반드시 없어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이런 논리가 아닙니다. 성가대가 반드시 없어야 하는 것이고, 그래서 성가대에 의해서가 아닌 회중에게로 찬송을 돌려서 회중 찬송을 하면 성가대의 찬송에 있지 못하는 바른 찬송만이 있게 되는지요. 교회는 회중 찬송을 하기 위해서 연습하고 연습하여 예배에 갖는 찬송에서 잘 부르려고 합니다. 회중이 소프라노로 부르든지 알토로 부르든지 테너로 부르든지 베이스로 부르든지 찬송의 본질은 이것이 아닙니다. 회중(성도)은 찬송곡을 가지고 연주하고 노래하려고 합니다만, 예배 찬송의 진실은 여기에 있지 않습니다. 예배에서 증거되고 있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그 믿음에 있어 그분을 높임에 있는 것 외의 그 어떤 것으로도 찬송의 진실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니 말이죠. 성가대가 반드시 없어야 한다는 논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래서 오직 회중 찬송만이 진정한 찬송이라는 논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가대가 없어야 하는 필요성을, 그래서 성가대가 있어야 이유와 그 필요성을 갖지 않음을 교회가 가짐으로써 교회에 있었던 성가대의 불필요성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말입니다. 교회사에서, 그리고 작금의 우리네 교회에서 성가대에서 보는 것은 그들이 열심히 연습하고 연습해서 예배에서 합창하여 찬송하는데 “참으로 합창(찬송) 잘한다!! 칭찬해 주고 싶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가대에 있으면서 활동하여 예배에서 찬송하고서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오늘 예배에서도 어려운 곡을 잘 소화하여 무사히 잘 불렀다!!”라고 여깁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요. 성가대원은 한 주 동안, 또는 그 이상을 그렇게 열심히 연습해서 예배에서 그 연습한 것을 발표한 것이죠. 성도는 그 광경을 보고 감탄하구요. 찬송! 여기에는 없습니다.
사도는 일곱 집사를 선출할 때 그 이유를 자신들이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와 같이 찬송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 또한 같이 하며 같이 가는 것입니다. 기도와 말씀이 다르지 않으며, 찬송과 말씀이 다르지 않습니다. 말씀을 제쳐 놓고 기도가 없으며, 또한 말씀을 제쳐 놓고 찬송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을 위해서 기도가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일에서 찬송이 있습니다.
님이여,
이상으로 답글을 마칩니다.
님은 교회의 성가대가 지닌 문제점을 느끼며 그 문제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님이 속해 있는 교회의 성가대가 갖고 있는 문제점일 것입니다. 님이 다른 교회의 성가대를 보고서 그 문제점을 가지고 질문하는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는 님 교회만이 지니고 있는 문제점이 아닙니다. 교회에 성가대를 두고 있는 모든 교회가 지니고 있는 대체적으로 공통된 동일한 문제점입니다.
우리네 교회가 두고 있는 성가대가 이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교회는 성가대에 애착을 갖고 성가대를 운영해 나가려고 합니다. 성가대가 있음으로 해서 그 유익함으로 말미암아서가 아니라, 성가대를 가져나감으로써 교회는 성도들이 마음껏 활동할 무대를 만들어 주어서 그들이 붙어 있을 수 있는 공간과 여건을 조성해 주려고 하며, 나아가서는 이것을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과 관심을 끌어 교회에 집중케 하며, 이것으로 사람을 얻는 수단으로 삼으려고 하는 욕심 때문입니다. 즉, 교회를 부흥케 - 사람을 끌어 모으는 것으로서 - 하기 위해서는 성가대란 것도 이용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것이 우리네 교회의 실정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닌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며 사람을 끄는데 열심인지요!.
이러한 것에서 님의 교회는 찬송을 바르게 해 나가는 것에 있을 수 있기 위하여 고민하며 애쓰시기 바랍니다.
주 안에서 평안을 빕니다.
첫댓글 성심 성의 있는 목사님 답변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한국교회 성가대가 나타는 보편적인 문제점을말씀 드렸습니다. 찬양후 성가대가 박수 받는 모습은 마치 공연장같고.. 성경적으로 예배때 우리가 박수받을 자격있는것 처럼 보이는게 자기를 부인해야할자리에 성가대가 박수 받고있고 하나님은 뒷전인 모습이 맘에걸렸습니다. 결국 하나님 중심이 아닌 인간 중심의 예배같아서 이건 아닌거같은 생각이들었습니다. 한번 죄문화가 보편화되어 전전염병처럼 퍼진것만 같았습니다. 보편화된 문화가 죄라고 생각 못하는 영적인 문둥병 같아서요
안녕하세요 순종님. 죄란 인간이 있는 곳에서는 항상 존재합니다. 왜냐하면요. 만물보다 부패한 것이 인간이며, 그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는 모든 생각이 항상 악할 뿐이고, 그에 따른 모든 행위와 일이라고 하는 것에는 또한 죄의 힘이 발휘되기 때문입니다. 성가대 그 자체가 죄문화의 실체가 아니라 인간이 하는 그 성가대에서, 그래서 성가대를 하는 그 인간에게서 죄를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이죠. 교회에 성가대를 하는 것에서도, 그리고 교회가 성가대를 갖지 않아도, 인간이 존재하는 곳에는 항상 죄가 활동하며 이로 죄문화를 보게 되지요. 성가대는 죄악된 그 하나를 보여줄 뿐입니다. 성가대가 없으면, 그것 외의 또 다른 것에서,
인간이 어떻게 악한 죄인인지를 보여줄 것입니다. 교회에서 이런 저런 것을 보여줄 것이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고, 그래서 보여줄 아무 것도 없으면요? 그 교회를 이루고 있는 인간에게서 죄란 실체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참으로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말입니다. 그 죄로부터 다시는 정죄받지 않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죽음의 심판에 이르지 않도록 죽음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로 우리를 옮기셨기 때문입니다. 허니 말이죠. 죄의 권능으로 가득한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바라보는 믿음의 의에 님이 있으면 님은 참으로 복 있습니다.
<성가대>라는 말보다는 <찬양대>라는 말이 적절하다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든 성도들, 곧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입니다.
저희 모임은 별도의 찬양대가 없지만, 모든 신자들이 주님을 기쁨으로 찬미하고 찬송합니다.
감사합니다 시워하면서도 서글프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