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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게시글은 2014.05.06.19:11분에 모카페에 올린 글을 그대로 펌복사하였음을 밝힙니다.아래 본문중에 황약사는 그 카페에서 활동할때 썼던 카페닉넴입니다 ^!^ 또 아래 본문 중에 <무제>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또한 그당시 그 카페에 썼던 어떤 게시글의 제목인가 보다 하는 정도에서 패스하시기 바랍니다 ^!^ ^!^
부처님이 열반하신 해를 기준으로 하면 올해(2014)가 불기 2558년이 되고 부처님이 태어나신 해로 보면 80을 더해 2638년이 됩니다.부처님이 이땅에 오신 까닭은,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의 질문과 어떤 실천적 상동성이 보이는 질문으로 보입니다.
불교경전인 법화경 방편품에는 <사리불이여, 무엇을 가리켜 모든 부처님 세존들께서는 일대사인연으로하여 이 세상에 나타나 오신다고 하는가 하면, 과거, 현재, 미래의 부처님들은 모두가 일체의 중생들의 본래 가지고 있는 부처님의 지혜를 스스로가 열어서(開) 청정한 마음을 얻도록 하기 위하여 세상에 나타나 오시며, 또 부처님의 지혜인 실상을 중생들에게 나타내 보이시기(示) 위하여 세상에 나타나 오시며, 또 그러한 부처님의 실상을 환히 아는 지혜를 중생들이 스스로 깨닫도록(悟) 하기 위하여 세상에 나타나 오시며, 또 부처님의 지혜에 깊이 들어(入)가서 평등상과 차별상을 모두 아는, 일체종지를 깨닫는 길(道)로 중생을 인도하기 위하여 세상에 나타나 오시는 것이니라.사리불이여, 이것을 가리켜서 모든 부처님 세존들께서는 오직 일대사인연으로 하여 이 세상에 나타나(現=如) 오신다(出=來)고 말하는 것이니라.>
이 일대사 인연은 불교에서는 생대사인연,사대사인연,일대사인연 이렇게 세가지를 합쳐서 나온 삼대사인연중의 하나입니다.이 중에서 마지막의 일대사인연이 그 핵심인데,그 이유는 바로 생사윤회의 고통과 의미를 깨치는 것은 일대사인연밖에 없기 때문입니다.이는 각자 중생이 가진 불성을 깨치는 것으로 한마디로 요약됩니다만,이게 말이 쉽지 한마디로 ,저 황약사식으로 말하면 불가능한 게임이라고 봅니다.
중국 조사선이래 선불교의 공부라는 것은 바로 이 불성을 깨쳐 생사해탈의 경지를 맛보는 것이라고 볼수 있는데요,그리고 실천적 수행의 방법으로 공안(=공안 중에는판치생모 화두를 드는 것이 제일 어렵다고 합니다:황약사주)을 깨치는 것으로 꽤 합리적인 방법을 제시했지만, 이것역시 쉽지않는 공부라는 것은 불교 선맥(한중일 할것없이)의 역사를 들여다 보지 않더라도 상식의 머리팍만 굴려봐도 쉽게 이해할수 있으리라고 봅니다.참고로 불교 조사선에서 공부한다는 것은 바로 이 화두하나 깨치는 것을 그들 스님네의 일생일대의 도박이라고 제가 조금 과장해서 말씀드려도 무방하리라 봅니다.그리고 불성을 깨치는 것이 단지 화두선에만 있는 것은 아니고,묵조선,염불선,사경선,사인선[(이 사인선법은 일본의 무묘앙 에오라는 자가 제시한 선법인데,기존 전통선 수행방법으로 보면 이단선법(?)이라고 말할 수 있을 듯 합니다.)한국에 이 분의 책이 모두(?) 번역되어 있는데,이들 책들에서 이분 사고는 상당히 충격적인 말들로 제시됩니다.제 기억중에 가장 뚜렷이 남는 말 한마디는 <대오(큰 꺠달음)는 광기와 자살사이에 존재한다>는 뭐 이 비슷한 말을 한 것이 기억나는데,여하튼 독특한 사고를 펼치다가 36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습니다.무묘앙 에오, 이분 대오했다 아니다고 아직도 말들이 설왕설래 하지요^!^(이번에사 알았는데,소파 방정환 선생도 32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는 걸 이번에 알았습니다.이 카페 대문을 보고요.신장염과 고혈압으로 돌아가셨더군요!!)]등 다양하며,깨침의 길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은 자명하고 불문가지의 사태로 봅니다.물론 깨달음(도)은 생물학적으로도 유전 안된다는 사실 역시나 자명하며,불문가지이고요.갑자기 죄송하다는 말씀 하나 올리고 싶네요.제 글을 읽으려면 문맥의 연관을 꽤나 신경써서 읽어야 된다는 걸 교정 보면서 새삼 저 자신 깨닫게 됩니다.글을 쓰다가도 생각이 계속 끼어들기를 하니, 이를 글로 다담으려는 욕심이 빚어낸 난맥상입니다.글쓰기도 욕심을 버려야 좋은글을 쓸수 있는데...그런 경지(도)에 가려면 한참 멀었음을 제 스스로 자인하며,자각하렵니다.고멘^!^
저는 깨치지 않아서 정말 그 수많은 (많지도 않다고 봅니다만,많아봐야 기백명은 안될듯 싶은데요)조사선으로 화두를 타파한 자가 정말 깨쳤는지,안깨쳤는지 반증할 수는 없지만,(반증하고 싶지도 않지만)하나 분명한 것은 이들은 이들 나름대로 내적 논리를 가지고,공안타파-조사인가라는 합리적인 깨침의 내적 시스템을 완성시켰고, 그 내적 논리에 따라 자신들의 법맥의 정통성을 유지해 왔다는 것은 부인할 수는 없다는 것만 말하고 싶습니다.즉 이 깨우침에도 각 문파에 따라 자신들만의 내적 시스템을 가지고 그 진리성을 주장하고,대변하고,권력을 누리고,생존해 간다는 것입니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몇가지 안다니,모른다니 소리좀 덧붙이고 가렵니다.소위말하는 대승경전들은 부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경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이 대승경전들은 불교사상역사(원시불교-근본불교-부파불교-대승불교-중국 선불교: 이들 불교사상의 역사적 계보가 맞는지 모르겠습니다만...이에 대해 카페 다른 분의 수정 부탁드립니다:황약사주)의 진행에서 대승불교(AD1~2세기경?)도들이 일반재가신도와 합심해서 일종의 불교의 인식론적,실천적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기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그것도 부처님의 권위를 빌려서[모든 대승경전은 그래서 나는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이렇게 들었다로 시작하지요.부처님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서야 기존에 패권을 쥐고있는 소승불교(소승은 자신들이 자신들을 소승이라고 자기 스스로 규정한 적이 없고, 대승교도들이 기존 패권을 쥐고있는 소승과 차별화 하기 위해서 만들어 낸 말임:황약사주)들과 감히 맞짱을 뜰수 있겠어요?] 마치 부처님 말씀인 것처럼 만들어낸 새로운 경전들이라는 겁니다.이는 마치 바울이 예수의 권위를 빌려서 지어낸 수많은 바울 서신이 꼭 마치 예수님의 생각이 그랬을 걸로 믿고서 신약 성경의 몇십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는 것과 같은 상동성을 갖는다고 말하겠습니다.
제가 여기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대승경전은 부처님의 오리지널한 오시독시한 말이 아니라는 것이고, 바울의 서신 역시 예수의 오시독시한 말은 아니라는 것입니다.그러면 문헌적(=해석학적)비평으로 소승경전들 (아함경 잡 아함경..기타등등)과 신약 4대복음서는 과연 어디까지가 석가의 말이고 예수의 말이냐고 씹어댄다면, 이것 역시 불교적으로는 제,1,2차 결집,이때 결집은 모두 구술 암송으로서 재 반복했고,일종의 문자로 하나의 텍스트화 된 것은 그 이후죠?아마 아쇼카왕때 산스크리트어로 최초 문자화된 걸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만,(이것 역시 다른 분이 정확히 바로 잡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황약사주) 기독교적으로는 니케아종교회의(AD325)때 기존 전승된 텍스트중에서 입맛따라,당파권력(종교파벌)에 따라 선별해서 체계화된 걸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그 와중에서 도마복음등 그 유명한 텍스트는 제외 시켰고요.(이에 대한 문헌학적 연구도 꽤 진행되고 있는 걸로 알고 있고,최근 카톨릭 전문서점인 바오로서원에 가보니 흥미있는 연구등이 진행되어 있는 걸 보고,서점에 서서 몇장 넘겨 본 기억도 있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넘어가기 전에 일대사인연이든,불성깨침이든,공안타파든,좀더 확장해서 불법이든,예수의 산상수훈이든,예수가 선포한 복음이든,하나님의 사랑이든,공자의 인이든,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네 영혼을 돌보라가 더 엄밀한 소크라테스적인 엄명임)라는 취지에서의 인간 덕의 본질성 탐구:소크라테스가 죽기전에 했다는 말:만약 내가 입을 다물든가 다른 나라로 도망쳐 떠나버리는 것은 신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이라네.그래서 나는 입을 다물 수 없다네.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나 탁월한 덕에 대해 논하고,자신과 이웃을 성찰하는 일이라네,숙고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는 것이라네)이든 이들의 발언에는 어떤 하나의 공통성이 있는데,그것은 이 인간 삶에 대한 어떤 모범을 제시한다는 것입니다.그리고 굳이 이들의 발언에 어떤 진리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소위 말하는 인간의 정신적 가치의 어떤 특정영역,즉 종교(넓게 봐줘도문화적,윤리적)적 영역에 한정해서만이 그 진리성을 우리가 인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즉,이는 다시 말해서 이들의 이런저런 발언,또는 선포(케리규마:예수의 발언을 신학적 용어로 이렇게 명명하는 취지를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제가 <무제>에서 제시한 인간 삶의 영역중 종교,아니면 문화,그리고 윤리정도의 영역에 그 발언의 현실적합성이 있다는 것입니다.그리고 그 진리의 보편성(만일 이들의 진리에 어떤 보편성이 있다고 한다면,우리가 종교권력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들의 진리성 역시 자기종교 보편주의 틀에 가두어져 있으므로,이게 모든 종교의 대화를 근본적으로 차단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고 봄)에 어떤 형이상학적 적합성이 있다고 한다면,제가 <무제>에서 제시한 인간현존재 조건의 10가지에 한번 적용해서 생각해 볼 여지를 조금 준다고 저는 봅니다.
저는 인간 조건에 과연 믿기,빌기(밂,빎)가 정말 현존재 조건인지 아직도 풀지 못한 숙제로 항상 고민합니다만,그러나 이 밂,빎이라는 근본적인 인간 조건이 없다면 과연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지구상에 종교가 과연 생존가능할지는 정말 의문시 됩니다.이런 측면에서 종교적 진리는 바로 이 인간 실존의 근본조건인 밂,빎에 바탕을 두고서만 그 진리성이 생존가능한 진리라고 저는 이해 합니다.여기서 제가 확신합니다라는 표현을 안쓰고 이해합니다라는 표현을 굳이 택한 이유는 저는 위에서 나열한 인류 4대성인(?)의 진리성을 믿음이 아닌,오성과,이성으로 파악하고,그 안에서 이 분들의 진리를 어느 특정 영역(제가 <무제>에서 말한 인간 삶의 영역 중에서는 종교,문화,윤리영역),그리고 인간현존재 조건으로 10가지 조건에 한정해서 이 분들의 발언과 선포의 어느정도의(100%는 아니라는 뜻으로)그 현실적합성과 형이상학적 적합성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종교학자도 그리고 어느 특정종교의 신자도 아닌 제가 종교들의 기원을 밝힌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만,그래도 이제 본격적으로(본론으로 들어가서) 저의 종교에 대한 생각의 일단을 말씀드려 보고 싶습니다.저는 종교 역시 인간 삶의 근본 형식으로 보며, 물론 종교가 현대에 와서 현대인의 삶의 중요한 두 영역인 정치와 경제에 대한 영향력은 확실히 약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종교는 멸망하지도 않거니와 사라지지도 않으며, 향후에도 사라질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봅니다.제가 저의 이 카페 게시글 <무제>에서 인간삶 형식의 큰 줄기들로 29가지를 나열했는데요,이것들은 인간 호모사피엔스 탄생 이래로 시차를 두고 이 세상에 나온 인간 삶의 근본형식들로서 이 지구상에서 인간종이 사라지지 않는한 이 삶의 형식은 결코 파괴되거나 멸망하거나 사라질 가능성은 없는 형식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앞으로 새로운 기본적인 큰 줄기로서 새로운 삶의 형식이 21세기 이후에도 탄생할련지 모르겠습니다만,이랬든 저랬든 인간은 이 삶의 형식 안에서 향후로도 인간개개인이 가진 잠재적 능력이 현실화되는 것이 가능하고 ,이 삶형식 안에서 인간은 계속 살아갈수 밖에 없다고 봅니다.물론 이들 삶의 형식의 내용들은 시대가 바뀜에 따라 그 구성내용이랄까 질들이 변화할수도 있고,또 이들 삶의 형식 중에서 어떤 형식이 더 큰 영향력이라까 파워를 행사하기는 하겠지만,인간 종이 호모사피엔스로 지속되는 한은,다시 말해서 인간종이 다른 종으로 진화하지 않는한은 인간은 제가 <무제>에서 제시한 이 29가지 삶의 형식안에서 계속 생존하고 살아가리라 봅니다.문제는 차별적 위계구조(모든 삶의 형식 안에서 불변 상수처럼 작동하는)를 과연 금세기(21세기)에 폭파시킬수 있는 혁명이 가능하냐 안하냐에 모든 사유와 문제의식,실천태도, 전략이 걸려 있다고 봅니다만,그리고 이는 지속가능한 인류 문명과 지구생명체의 존속,그리고 인류역사의 종말과도 직결된 아주 중요한 문제로 봅니다.
리처드 도킨스는 <만들어진 신>에서 종교(신 포함)는 인간(역사의) 유아기때 생존의 필요성(인간은 인간 실존의 한계와 위난을 당할시에 종교로서 치유하고,또 종교로서 빠른 의사결정을 하게 되어 인류생존의 가능성을 넓혀 주었다는 의미로)에서 탄생되어 우리 현대에는 하나의 격세유전적인 모습으로(이미 오래전에 사라져도 상관없는 삶형식인데 지금도 그 생존을 유지하고 있다는 의미로)아직도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취지의 설명을 하고 있는데,과연 종교가 그럴까요?
저는 인류의 생존 속에서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서 다른 동물과 경쟁하며 생존했어야 하므로,바로 이 생존 하기위한 인간이 가진 유일한 우수한 자원은 뇌밖에 없으므로 여기서 인간의 생각은 계속 집약적이고,밀집적일수 밖에 없으므로 여기서 인간 뇌는 수많은 주름을 만들어내며 뇌구조는 확장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므로,이의 연장 선상에서 인류에게는 어느날(?)단지 생존이 아닌 생존의 고통의 의미를 묻는 단계에 도달했을 거로 봅니다.이말이 의미하는 바는 인간의 뇌구조가 어느날 단지 생존의 뇌에서 그 생존으로 부터 야기되는 제반 문제를(특히 삶의 고통을)설명해 보고 싶다는 설명의 뇌로 진화했다는 것입니다.물론 인간은 처음에는 주술로서,또는 제사의식으로 그 초기모습에서 유아적 형태로 인간 생존의 고통을 줄여 보려고 했겠지만, 이는 어느날 하나의 사고,행동체계로 합리화되는 모습을 띄게 되었는데,그 합리화된 사고 행동체계중의 하나가 바로 종교라는 것입니다. 어느날(?=저는 언제 과연 인간의 종교가 탄생했느냐의 그 기원적 년대를 밝혀낼 만한 능력은 없음으로)왜 이런일이 어떤 모습으로 가능하게 되었는지를 여기서 베버의 말을 빌려서,즉 이 종교의 탄생 배경에 대한 이 고매한 학자의 말을 빌려서 한번 풀이해 보고자 합니다.
인간은 현실 속에서 자신의 불행,고통에 대해서 의미있는 해답을 찾고자 하는데 그 결과적 표현이 종교로 나타났다는 것으로 베버는 보고 있습니다.즉 인간은 장수(건강)와 물질적 행복(부귀영화)이라는 지극히 세속적인 관심도 추구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삶의 고통으로부터의 구원,영생(영적 행복),은총같은 초월적 관심도 추구하며 이 초월적 관심(이해)을 추구하려는 합리적인 사고, 행동방식이 종교로 귀결되었다는 것입니다.제식으로 조금 거칠게 표현하면 인간이 종교를 만들어 자신의 초월적 관심에 대한 해답을 얻었다고나 할까요^^그런데 베버는 현세적인 고통의 삶의 생존과 생활태도를 규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들은(핵심변수들은)하나는 주술적인 힘에 의존하거나,아니면 종교적 힘(종교적 예언자의 힘,그게 동양처럼 모범적 예언이 되었든,아니면 서양 유대-기독교 전통에서 보이듯 사명적 예언이 되었든)및 이에 대한 믿음에 뿌리를 둔 윤리적 의무관념들(종교적 의례 혹은 생활 속의 실천윤리 같은것)에 그 영향을 받고 인간은 그 삶을 영위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의 현재의 고통과 불행을 물질적 이해관심 속에서 해결해 보려는 합리적 노력이 있는 반면에(예컨대,정치,경제,사회,과학,기계-기술 영역들),또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은 이 고통과 불행의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든 합리적인 의미를 찾고자하는 욕구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베버의 문화인의 인간정의의 전제로부터 나오는 당연한 논리적 귀결로 저는 일단 보고 싶습니다만:황약사주)바로 이 현세의 고통으로 부터 벗어나서 어떤 합리적인 의미를 어떻게든 얻어보고 싶다는 욕구를 베버는 근원적인 인간의 종교욕구로 보며,이 대중(현대인의 매스미디어에 감염된 그런 대중이 아니라 베버의 종교사회학적 관점에서 대중이란 종교적 이념과 그 실천에 무지하고 종교적 실천 무행위자로서의 대중)의 구원욕구에 대해 그 합리적인 대답을 제시하는 자들이 바로 카리스마적 힘을 지닌 예언자라는 것이며,이 예언자들은 모범적 예언자(공자나 부처)가 되었든 사명적 예언자(아브라함,모세,...기타 성경에 보이는 수많은 에언자들,그리고 예수)가 되었든 공히 어느 문명,문화 어디서나 삶의 현실을 체계적이고 실제적으로 합리화하려는 시도를 보여주며,그리고 세계의 진행은 인간이 이 구원욕구에 관여되어 있는한 어떤 유의미한 결과를 낳지 않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요는 부당한 고통이라는 일상적 문제는 물론이고 더 근본적으로 세계가 망할까, 내가 망할까? <애초에 이 세계는 불평등과 부정으로 가득 차 있고, 정직한 자가 오히려 심한 꼴을 당하며, 부정직한 사람들이 행복의 향연에 도취해 있고, 한 꺼풀만 벗기면 시기와 질투, 불의와 증오가 소용돌이치는 세계가 아닌가. 이런 세계에 살 가치가 있는가. 왜 신은 이렇게 하찮은 세계를 창조했을까.세계의 비참이 자신들 바깥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세계의 비참은 자신들 안에 있다.행복한자,그렇게 생각하고 싶은자는 결코 알지 못한다.>(재일 역사학자 강상중의 아들이 자살하기전에 일기장? 노트?에 썼다는 말들임:황약사주>현세 내에서 도저히 치유할수 없는 근본적인 불평등구조,이 부조리한 현실이 지닌 무의미성에 대해서 ,의미를 총체적으로 재구성해 내는 방식이 바로 종교라고 베버는 보고 있습니다.대중의 이 삶의 고통으로부터 어떻게든 해방되고 싶다는 근본적인 구원욕구와 이의 의미를 어떻게든 얻고 싶다는 대중의 욕구에 카리스마적 예언자는 그 이념과 실천윤리로서 그 해답을 제시해 준다는 것입니다.그리고 이념은 중국은 유교와 도교로,인도는 힌두교와 불교로 근동은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카톨릭,개신교로 나타났다는 것이죠.
그리고 베버는 자신이 보는 종교에 대한 입장을 위에서와 같이 정리한 뒤,이들 종교의 세계에 대한 태도에 주목하여 나타난 그들 종교의 독특한 실천윤리를 종교사회학적으로 탐구하며,특히 베버가 주목한 것은 바로 이 예언자들의 이념과 종교적 실천윤리 덕목을 구체적으로 담지하고 현실 생활 속에서 살아갈수 밖에 없는 종교적 달인이라는 집단,사회적 계층에 주목하였으며,이들이야 말로 해당종교의 종교적 실천윤리를 사회적 생활 속에서 구현하고 그들 나름의 독특한 생활태도와 행동양식을 사회속에서 구현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베버의 생각을 따라 세계종교의 담지자와 전도자들이었던 계층을 간결하게 요약한다면,유교의 경우에는 현세의 질서를 관장하는 관료,힌두교의 경우에는 현세의 질서를 관장하는 주술사,불교의 경우에는 온 세계를 편력하는 탁발승,이슬람교의 경우에는 세계를 정복하는 전사,유대교의 경우에는 편력하는 상인,기독교의 경우에는 편력하는 수공업자,장인들이었다고 베버는 말합니다.그런데 이들 모두는 그 역활을 자신의 직업의 대변자로서나 또는 물질적 계급적 이해관계의 대변자로서만 한것이 아니라,자신의 사회적 상황(관계)과 특히 용이하게 결합할 수있는 그러한 윤리나 구원론의 이데올로기적 담지자로서 자신들의 역활을 수행했다는 것입니다.그런데 이들과는 다르게 근대 청교도인들만 생활인으로서 구체적인 경제활동에서 종교적 실천윤리를 수행한 자들이었고, 나머지 종교의 담지자들은 그들의 구체적인 사회적 관계망에서 종교적 이념 구현자로서만으로 활동했다고 베버는 주장합니다.즉 청교도를 제외한 나머지 종교와 그 담지자의 실천윤리는 구체적인 경제적 실천윤리와는 무관하게 움직였다는 것입니다.
요는 베버는 이 세계와 인간 삶의 부조리에 대한 어떤 합리적 설명을 얻고 이들 부조리로부터 야기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구원욕구와 이에대한 하나의 합리적 해답으로서 바로 인류역사의 어느날 바로 종교라는 인간 삶의 독특한 영역을 탄생시켰다는 것입니다.(더나아가서 한 사람의 종교사회학자로서 자신의 인식관심 속에서 위의 문단에서 밝힌 하나의 종교사회학적, 경험적 연구를 세상에 내 놓았다고 말 할수 있겠습니다.물론 베버의 종교사회학 연구는 방대하고(?) 베버 자신의 사회학적 연구가 딱히 종교 한 영역에 그친 것은 아니지만...:황약사주)
자!이러한 베버의 설명이 합리적이든,아니든,(개연성의 측면에서 설득력이 있든 없든),아니 인간의 종교적 경험(일종의 신비체험)으로 종교가 탄생했든 아니든,아니 프로이드식으로 인간의 종족의 부친살해라는 외디푸스 콤플렉스로 부터 비롯된 인간의 공동체유지를 위한 토템숭배로부터 종교가 탄생했든,아니든,아니 뒤르껭 식으로 사회의 사회적 사실로서 집단들의 집단적 의식 수행에서 자신들 보다 더 우월한 공동체(바로 사회)가 있다는 의식에서 이것이 하나의 집합표상이 체계화된 것이 종교탄생의 기원이라고 설명하든 아니든,미국의 현대사회학자인 피터 버거식으로 인간은 현실의 실존적 고통을 이 인간세계 전부를 아우르는 코스모스에 연결지어 설명하려는 인간의 거대한 기획의 하나로 종교가 탄생한 걸로 보든,아니든, 정말 이랬든 저랬든 이들 유식한 선생님들의 설명의 그 근본바탕에 뭔가 나사 하나가 빠진듯한 불안감이랄까 미진함을 저는 항상 의식하는데요....
저는 이들 고매한 학자분들의 설명에는 바로 이 설명이 가지는 잔여에 바로 인간 삶의 현실 존재적 조건인 언어와 관련된 어떤 근본적인 모순이 있다는 것입니다.즉,인간은 자신들이 바라보는 이 세계에 대해서,그리고 자신의 삶의 어떤 고통에 대해서 어떤 합리적 설명을 들이대어서 풀이해 주어도 결코 거기서 완전한 해답을 얻을 수 없다는 이 인간언어의 근본적인 한계,모순에서 저는 종교탄생,성장,생존유지의 비밀이 있다고 저는 보는 것입니다.이는 제가 동어반복적인 순환 논리에 빠질 위험성이 조금은 없지 않은 발언인데요,즉 인간은 언어를 가지게 된 어느 순간의 이후로 그리고 그 어느날 이후로 ,자신들의 인지적인(경험,오성,인식,지식,행위,지성,이성,사고,생각,사유)뇌 체게로서는 도저히 그 설명이 안되는 그 무엇은 단순히 믿는 것 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는 것입니다.바로 단순히 이 믿을 수밖에 없다는 이 인간조건이 바로 종교를 낳았다고 저는 봅니다.다시말해서 종교는 도저히 우리 인지적체계로는 도저히 설명안되는,못하는 사태에 직면해서 어쩔수 없이 요청된 것으로 이 요청의 논리적,실천적 필연성 속에서 하나의 사고,행동체계가 반복적으로 유형화되고 굳어진 형식으로 저는 봅니다.바로 인간 언어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인간 경험을 대변하기 위해서 바로 종교라는 삶형식이 필요하고 탄생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버의 카리스마적 예언자의 출현은 제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어떤 신념체계(사고,행동체계가 하나의 틀을 형성했다는 의미로)가 형성된 뒤에 이를 깨뜨리기 위해서 훨씬 더 합리화된 방식으로 등장한 사태로 저는 인식합니다.그리고 저의 이런 소박한 생각들을 종합해 볼때, 이런 점에서 종교는 향후에도 인간종이 호모사피엔스로 남아있고(즉,다른 종으로 진화하지 않는 한),또 언어를 가지고 자신들의 생존 조건을 담보해야 하는 한 결코 인간 삶의 형식에서 종교는 사라질 수도 없고,그에 수반되는 종교권력 역시 사라질 수 없다고 봅니다.제가 요즘,저의 게시글 군데군데서 말하는 다른 뉘앙스로 표현하면 인류역사가 사라지지 않는 한 종교는 인간 삶에서 결코 사라지지도 않거니와 사라질 수가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마지막 남은 하나의 문제는,종교가 생겨난 뒤에 인간의 밂,빎이,생겨났느냐,아니면,밂,빎이 있은 다음에 종교가 생겨났느냐의,닭이 먼저냐,달걀이 먼저냐의 문제인데요...저는 이에 대한 답변은 유보하렵니다.저는 이 문제는 고르기아스 매듭을 푸는 방식으로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단순한 문제는 아니라고 제가 이해,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이 문제를 풀기 어려운 이유는 종교가 단순히 밂,빎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보기 때문입니다.그러니 결국은 제가 종교를 인간 언어와 그것이 가지는 한계속에서 밂,빎으로 환원하여 설명하려는 것 역시 저만의 설명의지일 뿐이지, 그래서 결국은 저역시 인간 언어의 그 한계안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저 스스로 자인하는 꼴 밖에 안됐습니만,이 지구상에,아니 이 인류의 그 누가 이 우주와,세계와 인간을 비롯한 존재자들의 존재의미를 다 설명해 놓고 죽은 자가 있다고 감히 말 할 수 있겠습니까?제가 감히 당돌하게 한마디 한다면,인류의 4대성인이라는 분들도 제가 앞의 게시글 본문에서도 조금 언급했듯이,인간 삶의 몇몇 영역과 관련해서,또 인간 조건과 관련해서 몇몇 의미있는 발언들을 하고 돌아가셨지만,과연 이 분들이 제가 저의 게시글<무제>에서 제시한 시대라는 건 제대로 알고 죽었을까 싶습니다.이분들은 시대도 모르고(자신들이 살았던 당대는 물론이고)미래의 시대라는 것을,아니 좀더 명시적으로 역사라는 것을 깊게 생각해 본적도 없이 다 죽어간 자들로 봅니다.물론 이분들의 관심은 시대에 있지 않고 인간들을 영적으로 구원하는 것에 있었으니 너의 생각은 처음부터 잘못됐고,극히 어리석기 한량없구나 하면 저 또한 입 다물어야 하겠지만 서두요 ^!^
어디서 읽은건지는 기억 안나지만 어떤 스승이 정말 이 우주와 세계와 인간과 그 존재,삶의 비밀(과거는 물론이고,현재,미래까지:제가 <무제>에서 제시한 전부)을 다 깨우치고 이를 제자들에게 전수하다가,딱 반만 전달하고 꼴까닥 하셨는데,이 이후로 제자들은 그 나머지 비밀은 이것이다,저것이다로 계속 서로들 다퉜는데,바로 이게 인류의 현재의 바로 모든 인간들의 설명의 구조가 가지는 인식론적,실천적 함의를 비꼬는 메타포로 제시하는 걸로 읽은 적이 있습니다.이 우화에 대한 저의 해석은 저는 이 스승도 결코 그 비밀을 완전히 알지 못했고,본인 역시 모르다보니 딱 자기가 아는 것만 제자들에게 전해주고 죽었다는 것으로 해석해야 저는 맞다고 보는데요...(제자들은 스승님은 다 알았을 거라는 착각에 빠져 있는거죠^^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스승이 알기는 뭘 다 알았겠어요)카페 회원님들의 생각은 어떠신지 모르겠네요^^
저는 끝으로 이제 이렇게 밖에 말 할 수 없습니다.예수가 한 말을 뒤집어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가 아니라 <너희를 자유롭게 해주는 바로 그것만이 진리>라고 말하고 싶고요,제가 석가모니를 한번 띄워 줄 생각은 추호도 없는데,그래도 오늘이 그 분의 기일이기 때문에,...그분의 말씀중에(정말 석노인이 한 말일까?)상당히 그럴듯한 말씀이 있어서,개념작가 공지영이가 책 제목으로 써서 더욱더 유명해진 말인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로 저의 그냥 이런저런 생각들의,저의 뇌 속에서 아직 세밀하게 정리 안된 글을 마치겠습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