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준 權俊 ( ~ 미상)】 "경기 양주(楊州)·파주(坡州)·적성 의병장 활약"
경기도 적성(積城) 출신으로 의병에 참여하기 전 화적 생활을 하고 있었다.
1907년 7월 일제는 헤이그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이어서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체결하여 차관 정치를 실시하였고,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해산하였다. 이에 반발하여 서울의 시위 제1연대 제1대대를 중심으로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전국적으로 의병 봉기가 일어났다. 8월 5일 강원도 원주에서 원주진위대가 봉기한 것을 시작으로 경기도·강원도·충청도 일대에서 의병 봉기하였다. 이때 경기도 적성군에서 30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1907년 8월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이 봉기 후 주로 적성·양주(揚州) 등지를 중심으로 의병 활동을 하였다.
같은 해 9월에는 김진묵(金溱黙) 의병부대와 연합 의병을 결성하였다. 김진묵 의병부대는 김진묵을 대장으로, 왕회종(王會宗)을 부장으로 한 의병부대로 1907년 8월 28일 고양에서 봉기한 김진묵과 장면(壯面)에서 활동하고 있던 왕회종이 연합한 부대였다.
연합 의병을 결성한 직후인 9월 8일에 300여 명의 부하를 두 부대로 나누어 김진묵 부대와 함께 적성 군아를 공격하였다. 이 공격으로 상당수의 군수물자를 탈취하였고, 군민의 원성이 높았던 토지·가옥증명서 등을 불태워 없앴다. 또 군민들로부터 군수금을 징수하였으며, 일본인 매약상(賣藥商) 1명을 총살하였다. 한편, 10여 명의 부하를 한 부대로 편성하여 적성군 순사분파소를 공격하였다. 이 공격으로 군기 등을 탈취하여 의병부대의 무장력을 강화하였다.
이후 부대를 마전(麻田) 방면으로 이동시켜 9월 11일부터 13일까지 삭령(朔寧)·토산(兎山)·안협(安峽) 등지에 주둔하였다. 특히, 토산군청을 공격하여 탄약 1상자와 탄환 300발을 획득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안협에 주둔하였을 때에는 토산에서 부하 30여 명을 이끌고 온 김원묵(金元黙) 부대와 합세하여 연합 의병의 규모를 확장시켰다. 이어 9월 15일에서 16일 사이 평강(平康)을 거쳐 철원 보개산(寶蓋山)으로 이동하였다. 여기서 허위(許蔿) 의병부대와 연합하였다.
허위의 연합 의병으로 철원 보개산 심원사(深源寺, 지금의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상노리 소재)에 주둔하고 있을 때인 9월 16일 일본군 김화수비대의 기습 공격을 받았다. 또 김화수비대는 18일 밤 장승리(長承里)의 마을가옥 12호를 모조리 불태우며 기습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를 미리 알아채고 대광리(大光里, 지금의 연천군 신서면 대광리)로 후퇴하였다. 의병부대를 재정비한 후 20일에 허위·연기우 연합 의병의 한 부대가 되어 철원우편취급소를 공격하였다. 그 결과 연천군 우편취급소장 무네야마(宗山倉藏), 철원군 우편사무원 하라타(原田新三郞), 재류 일본 상인 에자키(江崎吉之助)를 처단하는 전과를 올렸다. 큰 피해를 본 일제는 9월 27일 김화수비대를 동원하여 근거지인 심원사를 재차 공격하였다. 이 공격으로 일본군과 1시간 넘게 교전하였고, 신탄막(薪炭幕) 대광리 부근에서도 교전을 하였다. 이 두 전투에서 의병부대는 상당한 피해를 보았고, 탄압을 피해 다시 적성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적성군으로 돌아온 10월에는 인근에서 활동하던 다른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적성군 늘목리(지금의 경기 연천군 전곡읍 늘목리)에 주둔하였다. 이때 주둔한 연합 의병의 수는 700여 명에 이르렀다. 이후 의병 활동의 주된 목표는 인근의 친일 지방관을 비롯하여 친일 관리를 처단하는 것이었다. 이를 눈치챈 적성군수 엄병직(嚴炳稷)은 서울로 피신하였고 마전군(麻田郡) 주사는 의병의 공격을 피해 도주하였다.
의병연합참여가 거절된 권준 관련 보도(『공립신보』 1907.11.22) [판형2] |
한편, 이 무렵 강원도의 이인영 의병장, 민긍호 의병장과 경기도의 허위 의병장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연합 의병이 추진되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에 발 맞추어 연합 의병에 참여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1907년 10월경 양주로 이동하였다. 이후 연합 의병을 결성하고자 광석면(廣石面) 등지에서 수백 명의 의병을 이끌고 활동하고 있던 김모(金某) 의병장을 방문하였다. 수십 명의 부하만을 이끌고 찾아가 연합 의병 결성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김모 의병장은 “지금 사람들이 의병을 지목하기를 비도(匪徒)니, 폭도(暴徒)니 하는데 유명한 화적 두목이 의병에 수종(隨從)한다고 하면 비루(鄙陋)한 설(說)을 우극난면(尤極難免)이라”라고 하고 그 자리에서 거절하였다. 이어 곧바로 체포되어 참살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