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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의 예수
노래는 힘이 쎄다. 평소 7080세대 풍의 가요나, 올드 팝을 들으며 공감하는 나이대를 보면 노래의 파장이 얼마나 강력한지 느낄 수 있다. 그런 공감대 덕분에 올림픽 때마다 평화와 인류애를 강조하는 존 레논의 ‘이매진’이 단골로 등장하고, 성탄 시즌이면 머라이어 캐리의 ‘올 아이 원트 포 크리스마스 이즈 유’가 라디오마다 독무대를 차지한다. 남과 북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의 소원’을 부르며 가슴을 적신 것도 얼마 전 일이다.
모든 노래는 소유권이 있게 마련이다. 저작권은 노래의 주인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한다. 남의 노래를 작은 부분이라도 흉내 내는 경우 쉽게 알아챌 수 있는 것은 모든 음율(音律)에는 만든 사람의 소리와 가락이라는 음악적 지문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창작물을 베끼는 행위를 표절(剽竊)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도둑질이다. 대신 노래를 사랑하는 것은 자유다. 그런 자유로운 사랑 덕분에 창작자는 행복하다.
한국인치고 ‘아침이슬’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1971년 음반으로 발매되고, 또 금지곡이 되고를 반복하면서 점점 국민가요 반열에 올랐다. 대학 캠퍼스와 골목에서 불리던 ‘아침이슬’이 전 국민의 애창곡으로 인정받은 것은 1987년 6월 항쟁의 거리와 고 이한열 장례식이 열린 시청 앞 광장에서라고 한다. 얼마 전 SBS가 제작한 다큐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 3부작에서 그렇게 증언하였다.
방송국은 미리 예고편을 만든 것일까? 지난 주간, ‘아침이슬’을 만든 김민기 선생이 세상과 작별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생을 배웅하던 사람들은 대학로 소극장 옛 학전 앞마당에서 ‘아침이슬’을 불렀다. 그날로 50년 이상을 거슬러 오르는 동안 사람들은 ‘아침이슬’을 불렀고, 위로받았으며, 어깨를 겯고 나아갔다. ‘아침이슬’은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상징이었고, 시대의 이미지였다. ‘아침이슬’은 김민기 선생이 지었으나, 모두가 사랑하는 노래가 되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노래가 있을까? 사람들은 종일 음악을 소비한다. 만약 음악이 없다면 라디오방송이 가능이나 할까? 행여 노래가 빈곤하다면 사람들은 얼마나 부대낄까? 어쩌면 노래가 과잉인 까닭은 그만큼 우리 사회의 목마름이 크기 때문이다. 노래가 유행보다 더 빠르게 낭비되는 배경은 안성맞춤의 인생곡을 찾기 어려운 탓일 것이다. 인생의 곡절을 우려내고, 내 이야기를 세상사의 일부로 만드는 그런 노래는 얼마나 귀한가.
월요일(7.22) 아침에 부음(訃音)을 듣고 저녁에 대학로로 향하였다. 서울대학교 장례식장은 크게 붐비지 않았으나 두어 차례 단체 분향을 기다려야 하였다. 생각보다 젊은이들이 많아 반가웠다. 고인의 얼굴은 웃다가 순간 정지한 표정이었다. 우리 시대 선지자의 죽음 앞에 예의를 표하려고 한 발걸음이지만 대부분의 조문이 그렇듯이 너무 순간적이었다. 그리고 대학로 학림다방에 들러 고인의 노래를 신청해 듣는 것으로 아쉬운 조의를 마무리하였다. 그곳은 공연을 마친 김민기의 쉼터였다고 들었다.
돌아보면 맨 처음 익은 김민기의 곡은 ‘금관의 예수’였다. 신학교 입학하자마자 3월에 성남 문무대로 군사훈련을 갔다. 워낙 우리 숫자가 작아 다른 학교 중대의 일부가 되어 훈련받으니 몹시 낯설고, 서로 어색해하였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같은 내무반의 서울대 1학년들이 들며 날며 서로 웅웅대며 노래를 불렀다. 가까스로 알아들은 대목이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였다. 궁금한 것은 신학생들도 모르던 ‘오 주여’를 그들이 부르는 이유였다.
나중에야 깨달았다. 그 시절은 노래가 참 귀했다. 서울대 신입생들이 입학하자마자 배운 노래가 ‘금관의 예수’라니 알만한 것 아닌가. 함께 부를만한 노래가 드믈던 배경이다. 대체로 대학생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는 금지곡이었고, 게다가 군대에서 부를 만한 노래도 못되었다. 그런데 신학생도 아니고 일반대생들이 집단으로 부르는 ‘금관의 예수’는 얼마나 은밀하고 풍자적이었는지, 알고 보니 그 노래는 김민기 곡이었다.
노래의 충격도 적지 않았으나, 공감은 더 오래 지속되었다. 어쩌면 ‘오늘의 예수’를 눈뜨게 한 것은 문무대 내무반에서였다. 너무나 목마른 나머지 부르던 ‘오 주여 여기에’는 신학교에서 부를 만한 노래도, 신학교육이 가르쳐주던 예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색동교회가 성탄전야 고요한밤기도회에서 해마다 ‘금관의 예수’를 부르는 이유는 구유에 나신 가난한 예수, 이웃과 역사 가운데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기억하려는 까닭이다. 유월절, 최후의 만찬 후 예수님과 제자들은 노래를 불렀다.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막 14:26). 아마 그 시절 ‘금관의 예수’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