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와 도덕은 사람을 주눅 들게 하는 딱딱하고 무거운 말이다. 이 말들을 감싸고 있는 당위적인 외투 자체가 엄격하고 무서운 선생님의 형상을 하고 있기도 하지만, 좀더 들어가면 그 속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이 육중하게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사는 게 제대로 사는 것인가,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은 예나 이제나 사람들을 괴롭히곤 하는 묵직한 문젯거리들이다.
가장 좋은 것은 이런 질문과 맞닥뜨리지 않고 사는 것이다. 하루하루 정신없이 바쁘게 공부하고 일하면서 사는 것. 하지만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은 어김없이 그 빈틈을 찌르고 들어온다. 그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질문과 대면해야 한다. 우리가 아는 윤리와 도덕이란 모두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마련되어온 것들이다. 윤리와 도덕은 곧 사람답게 사는 도리에 대한 가르침인 셈이다.
윤리와 도덕이라는 말은 그럼에도 약간은 상이한 어감을 가지고 사용된다. 도덕이라는 말은 좀더 전통적이고 객관적이며 절대적인 감이 있고, 윤리라는 말은 도덕에 비해 좀더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며 근대적인 느낌을 풍긴다. 이러한 어감의 차이는 구체적인 사용 속에 축적된 결과로서, 본디의 개념이 그런 차이를 지니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현재 우리가 쓰는 도덕과 윤리라는 단어는 한자어의 전통적인 의미에 기초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서구어에 대한 번역어로서 근대로 접어들면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도덕은 라틴어 mores에 어원을 둔 단어 morality의 번역어로, 윤리는 희랍어 ethos에 어원을 둔 ethics의 번역어로 간주된다. 본래의 뜻을 따지자면, mores와 ethos 모두 풍속이나 관습을 뜻하는 말이이기에 morality나 ethics의 뜻도 그 연장에서, 한 사회 내부에 존재하는 관습적인 질서나 그것을 지키는 일로 파악될 수 있겠다.
이들의 번역어로서 소환된 한자어들의 경우도 사정은 이와 유사하다. 도덕의 도(道)는 삶의 길을 지칭하는 추상적인 뜻[예를 들어, 『중용』 첫머리에는 성(性)・도(道)・교(敎)의 삼항조가 나온다. 여기에서 성은 하늘이 정해준 사람의 본성, 도는 그 본성에 따라가는 길, 교는 그 길을 닦는 것을 뜻한다]이 강하고, 윤리의 윤(倫)은 사회 내부에 존재하는 질서[인륜 ‘륜(倫)’ 자는 차례 ‘서(序)’ 자로 풀이된다]를 지칭한다. ‘도’건 ‘윤’이건 통상적으로 한 사회나 공동체 내부에 존재하고 있는 관습적인 질서를 지칭하는 말에서 시작된 것이며, 이를 잘 준수하는 것을 일컬어 윤리적이라거나 도덕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원환적 완결성을 질서의 정신적 근간으로 하는 전통사회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이미 대답을 마련해두고 있었다. 성스러운 책에 나와 있는 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 그 핵심이었다. 삼강오륜을 지키며 사는 것일 수도, 하느님과 알라의 계명을 지키며 사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런 삶은 숭고한 진리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다양한 격식과 제의, 즉 예의와 범절로 체계화된다.
전통사회에서 윤리와 도덕은 그런 제반 범절을 잘 지킴으로써 완성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효도란 무엇인가. 『효경』에 나와 있는 대로 행하는 것이다. 즉 부모로부터 받은 몸을 아껴 쓰고 자신의 이름을 날려 부모를 명예롭게 하는 것이 효도의 시작과 끝이며, 더 나아가면 예법 책에 나와 있는 대로 살아 있는 부모에게 문안하고 죽은 부모에 대해서는 상례와 제례를 행하는 것이 곧 효도이다. 삶의 당위적 질서로서의 윤리와 도덕은, 전통사회에서는 격식과 예의를 지키는 것으로서 완성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격식과 범절의 절대성이 붕괴되면서부터 발생한다. 근대에 접어들면서, 시대가 바뀌면 풍속도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에서부터 외적 격식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진심이 중요하다는 주장과, 더 나아가서는 예법을 준수하는 것 자체가 형식주의나 위선에 불과한 것이 아니냐는 좀더 근본적인 비판까지 등장하게 된다. 근대와 더불어 시작된 이런 생각의 흐름들은 ‘내면의 진정성’이라는 표어를 내세워 율법주의를 허례허식이라 하며, 형식의 외적 틀로부터 벗어난 개인적 진실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와 같은 양상은 윤리의 세계뿐 아니라, 내면성 혹은 진정성의 혁명이라 할 만한 것으로서 근대 문화의 모든 영역에 걸쳐 등장하기에 이른다. 격식의 엄격성을 추구하는 고전주의와 개성의 자유를 강조하는 낭만주의의 대립이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근대의 윤리가 처한 곤경은 근본적으로 이와 같은 내면성의 혁명에 어떻게 대처하는지의 문제에서 비롯된다. 윤리와 도덕은 무엇보다 미리 정립되어 있는 기성의 규범을 존중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데, 그것이 부정된다면 윤리는 어떤 척도를 가지고 스스로를 유지해야 하는가. 외적 당위에 앞서 내적 욕망을 우선시하는 세계 속에서 규범의 근거를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삶의 규범이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일 수 없다고 주장하는 순간, 근대적 주체는 스스로의 힘으로 규범을 찾아야 하는 과제에 직면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 대부분은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일반화된 삶의 지침을 체득하고 있다. 자신의 이익과 행복을 추구하되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곧 그것이다. 이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기치로 하는 이익주의적 윤리관에서 적실한 표현을 얻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와 같은 윤리관은 대뜸 다음과 같은 반박에 직면하게 된다. 윤리란 선악의 문제를 논하는 것인데, 이익이나 행복의 문제를 논하는 것이 어떻게 윤리적일 수 있는가. 거짓말을 하거나 남의 것을 훔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 궁극적으로 자기의 행복과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윤리적 판단이 아니라 경험적 처세훈의 수준에 있는 것이 아닌가.
칸트가 도덕률에 관한 한 단 하나의 법칙이 있을 뿐이라고 했던 것은 이와 같은 논리적 난관 속에서였다. 그 법칙은 “네 의지의 준칙이 동시에 보편적인 법칙 수립이라는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라고 표현된다. 요컨대, 이것은 선악을 자기 자신이 판단하되 언제 어디서나 또 누구에게나 요구할 수 있는 수준에서 그렇게 하라는 것으로, 일찍이 “네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말라(己所不欲勿施於人)”고 했던 공자의 말과 정확하게 같은 수준에 있다.
이것은 구체적 규범의 절대성을 부정함으로써 시작된 근대성의 윤리가 도달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형식일 뿐 구체적으로는 어떤 내용도 보장할 수 없다는 점에서 한계를 갖는다. 어떤 판단이라도 그 자신이 보편적인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했다면 윤리적으로 정당하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스스로 옳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한 그것이 어떤 나쁜 짓이라 하더라도 논리적으로 비판하거나 반박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곧 확신범 앞에서 칸트의 도덕 법칙은 무력해지고 마는 것이다.
근대의 윤리는 바로 이와 같은 난관에 봉착해 있다. 그렇다고 뒤로 물러설 수도 없다. 한 발만 물러서도 정해진 규범을 맹종하는 수준으로 떨어지거나, 행복주의라는 경험주의적 윤리관의 함정 속에 빠져버린다. 위에서 윤리와 도덕이라는 말이 상이한 어감을 지니고 있음을 지적했지만, 도덕보다는 좀더 포괄적인 의미로 구사되곤 하는 윤리라는 말의 쓰임은 근대성의 윤리가 지니고 있는 이러한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절대적인 느낌을 주는 도덕이라는 말과 달리 윤리라는 말은 다양한 분야에서, 이를테면 생명 윤리, 성 윤리, 경제 윤리, 정치 윤리, 생태 윤리, 기업 윤리 등에서와 같이 다채롭게 구사되고, 심지어는 사기꾼의 윤리, 전쟁의 윤리, 도둑질의 윤리처럼 역설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이런 경우 윤리라는 말은 모럴이라는 말로 대치할 수 있다. 여기에서 외래어로 쓰이는 모럴이란 도덕과는 전혀 다른 어감을 지니고 있고 오히려 윤리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쓰인다).
이처럼 다양하게 구사되는 윤리라는 말의 상대적인 쓰임을, ‘무슨무슨 윤리’라는 뜻에서 ‘하이픈 윤리’라 부르기도 한다. 물론 이 말은 윤리라는 말 자체가 지니고 있는 상대적인 속성을 비꼬아 일컫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이런 책임을 전적으로 윤리라는 말에 부과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것은 윤리적 무정부 상태를 초래한 근대라는 시대 자체의 탓이라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Daum백과]
윤리와 도덕의 차이 –
인문학 개념정원, 서영채,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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