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사는 영동의 백화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백화산은 포성봉(捕城峰)이라고도 불리는 산으로 충청북도의 영동과 경상북도의 상주의 경계가 되는 빼어난 절경의 산이다. 백화산(白華山)이란 이름은 ‘티 없이 맑고 밝은 산’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데 사시사철 그 풍경을 다양하게 변화하며 그때마다 찾는 이를 반갑게 맞아주고 있다. 봄에는 능선마다 꽃이 만발하고, 여름에는 푸르른 계곡의 물이 시원하며, 가을에는 단풍이 온 산하를 물들이고, 겨울에는 기암괴석이 몸을 드러내 그 웅건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백화산의 산봉우리 사이를 따라 석천이라는 개울이 흐르고 있다. 멀리 상주방면에서 발원해 백화산을 가로질러 구불구불 흐르는 개울이다. 구불구불 흐르는 석천의 모습이 마치 연꽃의 모양과 같으며 이 연꽃 모양으로 흐르는 개울의 한 중심에 넓은 공간이 만들어졌고, 이 포근한 대지에 반야사가 위치하고 있다. 반야사는 문수보살이 주석하고 계신 곳이다. 사찰의 명칭을 반야(般若)라고 한 것으로도 이곳이 문수도량임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반야사는 신라 성덕왕 19년 경신년(720년)에 창건되었다.
의상대사의 10대 제자 중 한 분이신 상원(相願, 相源)대덕이 창건한 이래 수많은 전설을 간직한 채 사찰의 역사가 진행되었다. 여러 전설 중 세조와 관계된 전설은 다시 한번 반야사가 문수보살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반야사에 도착해 많은 사람들이 대웅전이 위치한 본전의 영역만을 참배하고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개울을 따라 잠시만 상류로 올라간다면 백화산과 석천이 어울린 절경이 눈앞에 나타나고 오른편으로 높은 절벽이 위치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반야사 들어서는 길목에 행인을 반기는 반야사 명석...]
이 절벽 꼭대기에는 문수전이 마련되어 있다. 이곳은 망경대(望景臺)라고 불리는 곳이다. 반야사의 스님이 어느 날 아침 해가 오를 무렵 우연히 이곳에 왔는데 마침 앞 못에서 문수동자가 목욕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못은 용소(龍沼)라고 불리며 아주 깊은 곳이기 때문에 사람이 접근할 수 없는 곳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문수동자는 목욕을 하고 나서 그 옆에 솟아있는 절벽위에 별안간 올라앉아 멀리 사방을 바라보고 아침 해돋이를 예배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이후 이곳을 망경대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망경대에 올라 문수전 앞에 서면 눈앞에 펼쳐진 전경에 정신이 아찔해진다. 이토록 힘차고 아름다운 전경은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광경이다. 마치 눈앞에 병풍을 펼쳐놓은 듯 꿈틀대는 산들이 서로 다투어 참배자에게 달려드는 모습이다. 과연 문수보살이 사방을 바라보고 예를 드릴만한 곳이라 할 수 있다. 오랜 역사와 더불어 반야사에는 많은 문화재가 전해지고 있다. 경내 마당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삼층석탑은 보물 1371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으며, 절의 입구에는 조선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부도가 2기 위치하고 있다. 또한 대웅전에 모셔진 삼존불은 그 제작시기를 알 수 없으나 오래전에 조성된 것이다.
[넓은 개울을 끼고 오르는 길은 사찰로 들어서는 마음까지 잊은듯...]
[중턱쯤 들어서면 단청이 안된 일주문이 자연스럽게 반겨주고...]
일주문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보아 하나의 기둥으로 만 건물을 만들어야 하나 하나의 기둥으로 일주문을 구성한 경우는 찾아 볼 수가 없다. 즉 일주문이란 하나의 기둥 열로 만든 건물을 칭하는 것이며, 이는 또한 사찰에 들어오기 전에 모든 번뇌를 털고 하나의 마음을 만을 간직한 채 사찰에 들어오라는 표식이기도 하다. 일주문에는 대부분 사찰이 위치한 산명과 사찰명을 현판으로 걸어놓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반야사 일주문 역시 “백화산 반야사”라고 현판을 걸고 있다. 초석은 다듬은돌 초석을 사용했으며 기둥의 하부뿐만 아니라 기둥을 잡아주는 보조기둥 하부까지도 하나의 초석으로 지지하도록 만들었다.
원형초석에 고맥이를 추가한 초석이다. 기둥은 원형기둥이며 강한 배흘림을 갖고 있고 기둥 상부에 조성한 공포는 다포식의 공포이다. 주간에는 각각 2개의 공간포를 얹었으며 출목은 내외 모두 2출목으로 구성되었다. 많은 사찰의 일주문들은 대부분 맞배지붕의 형태로 만들어진다. 맞배지붕과 더불어 좌우의 커다란 풍판이 매우 인상적인 모양을 만들어 내는데 반야사 일주문 역시 거대한 맞배지붕으로 일주문을 조성했다.
[반야사 경내에 다다르면 영화에나 나올법한 예쁜 다공징검교가 멋지게...]
[한창 공사중인 입구 우측엔 공덕비가...]
凡洋建榮 會長 素巖 朴喜宅氏 功德碑(소암 밀양박공희택공덕비) 1993년 새롭게 건립한 대웅전 불사의 공덕에 지대한 공이 있는 박희택을 기리는 공덕비이다. 천년고찰 백화산 반야사는 신라 성덕왕 19년(720)에 원효대사의 상수제자 상원조사가 중창하였다. 그 후 고려말 충숙왕12년(1325)부터 조선초까지 신미, 학조, 학열 등 세 고승이 중건 많은 선지식들의 수행정진도량이었다. 그러나 연구세심토록 중수의 손이 미치지 못하고 보축수리의 틈을 가지지 못하여 전각과 요사가 훼손되어 붕괴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조계사문 정관의 발원과 주식회사 범양건영 박희택 회장의 정성어린 시주로 대웅전 중수 불사를 원만히 성취하게 되었다.
시주자 박회장은 밀양 박씨 국당공파 17대 후손이다. 선대로 자손이 귀하였으나 지금으로부터 60여년전 자모인 청신녀 망 성국영이 반야사 부처님께 지극지성으로 백일기도를 올린 후 초파일날 득남을 하였는데 그가 바로 오늘의 주인공이다. 이 깊은 인연은 평소 지극한 신심과 효성으로 불은에 보답하고 선망 부모님의 극락왕생과 자손창성을 기원하는 거룩한 뜻을 기리며 이 큰 공덕을 두루 회향하면서 여기에 그 뜻을 새긴다. 일공은 무상이라 영겁의 생멸변화 속에 반야의 법향은 시방에 그윽하니 백화도량을 가르는 연화천에 두발을 담구고 소리없는 풀피리를 분다. 불기 2537년 9월 9일/ 계유년 임술월 계사일/ 대한불교 조계종 반야사
[공덕비 바로 옆에 자리한 부도 2기...]
일주문을 지나 반야사에 경내에 들어서기 직전 오른편에는 따로 높은 축대를 형성한 대지가 나타나는데 이곳에 부도 2기가 봉안되어 있다. 이 부도는 영동군 향토유적 10호와 11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는 부도이다. 부도에 어떤 명문도 보이지 않아 어느 분을 봉안한 부도인지 명확하지 않다. 2기의 부도 모두 석종형의 부도이며 이런 석종형의 부도는 조선시대에 크게 유행한 부도형식이다. 석종형 부도란 탑신의 모양이 종의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좌측의 부도는 방형의 지대석 상부에 탑신을 얹었다.
탑신 상부에 건물의 지붕 모양을 묘사한 옥개석을 얹었다. 옥개석의 형태가 날렵하게 휘어올라가는 처마의 곡선을 묘사한 특징을 보이고 있다. 우측의 부도는 높이가 낮은 말각방형의 지대석 상부에 기단석을 하나 더 얹은 형태를 하고 있다. 기단석은 팔각형의 형태를 하고 있다. 기단석 상부에 석종형의 탑신을 얹었고 이 위에 옥개석을 얹었는데. 옥개석의 외부는 연꽃모양을 양각으로 조각해 장식했다. 옥개석 상부에는 상륜을 따로 조성해 얹었는데 팔각형의 단면으로 구성되었으며 외부에 조각을 했으나 마모되어 그 형태가 명확하지 않다.
[국당 박흥생선생 시비...]
반야사에 와서 묵으며 /절에 와서 묵은지 오랜데 /집 생각이 전연 안나는구나 /산 빛은 자리에 비춰 푸르고 /대나무 그림자는 발에 들어와 성글다 /맑은 시냇물은 깊은 골짜기에 소리 내며 흐르고 /흰 구름은 파란 하늘 위를 떠간다 /스님은 하던 공부를 이미 끝냈는데 /책상위에는 읽던 책이 그대로 남아있구나 / 반야사에 와서 묵으며 /대 숲속 높은 절간 사람소리 적구나 /밤중에 시냇물소리는 꿈속에 맑다 /촛불은 가물가물 향은 꺼져가는데 /스님은 벽을 향해 앉았구나 /밭에는 산들바람 불어오고 /달은 밝게 비친다 / 국당(菊堂) 박흥생(朴興生, 1374~1446)
[반야사 종무소...]
[반야사 감로수터...]
[반야사 삼층석탑과 극락전...]
[반야사 대웅전...]
반야사의 주불전으로 건립된 건물이다. 원래는 현재의 극락전을 반야사의 주불전 이자 대웅전으로 사용하였으나 1993년 현재의 대웅전을 새롭게 건립했으며, 원래의 대웅전은 극락전으로 사용하고 있다. 평면은 정면 3간, 측면 3간으로 구성했는데 정면의 협간에 비해 어간을 크게 간살이했다. 대웅전은 특별히 배면의 어간부분을 뒤로 물려 감실을 만들었는데 이곳에 불상을 모시기 위함이다. 자연석을 이용해 축대를 쌓고 이 상부에 정교하게 다듬은 화강암을 이용해 기단을 만들었다.
기단의 형태는 지대석, 기둥, 갑석의 모양이 묘사된 가구식기단의 형식을 채택했다. 자연석을 이용해 조성한 축대 좌우 상부에는 한 기씩의 석등을 건립해 놓았다. 대웅전에 오르는 계단은 건물의 중앙 전면에 만들었는데 기단과 마찬가지로 다듬은 돌을 이용해 만들었다. 초석 역시 다듬은 돌을 이용했는데 운두에는 화려한 연꽃의 모양이 조각되었다. 초석상부에 사용한 기둥은 원형기둥을 이용했다. 중간부와 하부의 폭에 비해 상부의 폭을 좁게 설정한 배흘림기둥이다.전면의 기둥에는 각각 주련을 걸어 놓았고,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天上天下無如佛(천상천하무여불) 천상천하에 부처님과 같은 분은 없고
十方世界亦無比(시방세계역무비) 시방세계에 비교될만한 분 역시 없다
世間所有我盡見(세간소유아진견) 세간에 있는 모든 것을 나 다 보았으나
一切無有如佛者(일체무유여불자) 부처님과 같은 분은 전혀 없더라
[대웅전 처마 안쪽의 단청의 모습...]
기둥과 기둥사이는 창방에 의해 지지되고 있으며 창방 상부에는 평방을 얹었고, 평방 상부에는 공포를 꾸몄다. 공포는 조선후기에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전통적인 다포형식의 공포를 이용했다. 출목은 외1출목, 내2출목으로 구성했다. 공포에 사용된 살미는 초제공의 경우는 앙서형, 2제공은 수서형, 3제공으로 사용된 운공에는 봉황의 모양을 조각해 구성했다. 특히 기둥상부의 공포에는 3제공 대신에 내부의 보머리를 굵게 외부로 돌출시키고 있다. 처마에는 서까래 상부에 부연을 달아댄 겹처마이며, 지붕은 맞배지붕의 형식을 하고 있다. 대웅전은 맞배지붕으로 건립했으나 박공면에 따로 풍판은 사용하지 않았다.
대웅전의 정면은 모두 개방할 수 있도록 창호를 달았고, 좌우 측면에는 출입이 가능하도록 한 짝의 문을 달았다. 정면의 좌우 협간은 빗살창호를 사용했지만 어간만은 협간과 다르게 소슬빗꽃살로 화려한 창호를 만들어 강조하고 있다. 창호가 매달지 않는 모든 면은 벽으로 막아대고 그 위에 벽화를 그려넣었다. 벽화의 내용의 석가모니의 일생을 8폭의 그림으로 묘사한 팔상도이다. 대웅전 내부에는 따로 고주를 사용하지 않았다. 불상을 봉안한 불단 역시 감실형으로 조성해 외부로 돌출시켰기 때문에 다른 사찰의 대웅전에 비해 매우 넓은 내부공간을 갖게 되었다. 감실형으로 조성한 불단 상부에는 3기의 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중앙에 봉안된 불상은 본존불인 석가모니불이며 좌측에는 문수보살, 우측에는 보현보살이 봉안되었다. 반야사 대웅전에 봉안된 불상은 3위로서, 중앙의 석가여래좌상은 높이가 100㎝ 이며,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은 높이 72㎝이다. 이 3기의 불상은 모두 경주의 옥석으로 제작되었다고 전하며 현재는 영동군 향토유적 12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불단 상부에는 닫집을 만들어 달았다. 중앙부는 2층으로 구성했고 좌우의 날개부분은 단층으로 만들었다. 전형적인 보궁형의 닫집이며 그 구성이 단순한 특징을 보이고 있다. 불단의 좌측에는 하나의 영정이 그려져 걸려있는데 “벽계당정심대선사지진영(碧溪堂正心大禪師之眞影)”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대웅전의 내부 좌측면에는 영단이 만들어져 있다. 영단의 중앙에는 감로탱화가 만들어져 걸려있는데 불기 2530년 즉 1986년에 제작된 것이다. 또한 대웅전 내부 우측면에는 신중단이 만들어져 있다. 신중단에 봉안된 신중탱화는 화기에 따르면 불기 2537년 즉 1993년에 제작한 것이다. 대웅전의 가구는 5량으로 구성했는데 종보 하부까지는 빗천장을 이용해 막아댔으며 종보 상부는 우물천장으로 구성했다. 또한 바닥은 전통적인 우물마루로 구성했다.
[반야사 지장전...]
대웅전 오른편에 최근 새롭게 건립한 불전이다. 지장전의 주불로 현재 지장보살이 봉안되어 있으며 지장보살 좌측에 무독귀왕, 우측에 도명존자의 상이 봉안되었다. 현재까지 불단의 좌우측 및 좌우 측벽은 닫집만 조성되어 있고 몇 기의 원불만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판단하건데 이곳에는 모두 원불을 조성해 봉안할 계획인 것으로 추정되며, 따로 시왕을 모신다거나 시왕탱화를 봉안할 계획은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평면은 정면 3간, 측면 2간으로 구성했는데 어간을 협간에 비해 넓게 설정했다. 기단은 막돌을 이용해 구성했는데 막돌을 2단정도 쌓아 조성한 두벌대이다. 초석도 막돌초석을 이용했다. 기둥은 원기둥을 사용했고 전면의 각 기둥에는 주련을 달았다.
地藏大聖威神力 (지장대성위신력) 지장보살의 위대하고 신통한 힘은
恒河沙劫說難盡 (항하사겁설난진) 억겁을 두고 설명해도 다하기 어렵나니
見聞瞻禮一念間 (견문첨례일념간) 보고 듣고 우러러 예배하는 잠깐 사이에
利益人天無量事 (이익인천무량사) 사람과 하늘에 이익 되는 일 헤아릴 수 없어라
공포는 익공식의 공포를 사용했는데 그 결구에 있어 조선시대 전형적인 이익공의 형식을 따랐다. 처마에는 부연을 더해 겹처마로 조성했으며 지붕은 맞배지붕의 형태를 하고 있다. 정면은 모두 창호를 달아 개방했는데 각 간을 모두 4짝으로 구성하다보니 양협간의 창호는 매우 세장한 모습을 하고 있다. 현재까지 외부에 단청이 칠해지거나 벽화가 그려지지는 않았다. 내부의 가구는 고주 없이 5량으로 구성했는데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구성했고, 바닥은 우물마루로 꾸몄다.
[반야사 삼층석탑...]
대웅전 및 극락전이 위치하고 있는 반야사의 주공간 정면에 위치하고 있다. 이 탑은 원래 현 반야사 북쪽의 석천계곡 탑벌이라는 지역에서 1950년에 이곳으로 이건했다고 전한다. 기단은 단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원래 형태가 단층이었는지 혹은 이건 과정에서 단층으로 줄어들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탑의 전체 높이는 335cm이다. 기단으로 사용된 돌은 모두 4장의 판석을 이용해 만들었는데 각 돌에는 우주와 탱주의 모양을 양각으로 조각해 놓았다. 기단 상부에는 각각 3개의 탑신과 3개의 옥개석을 올려 삼층탑을 구성했다.
2층과 3층의 탑신은 하나의 통돌로 구성한 반면 1층의 탑신은 모두 4매의 판석으로 구성한 특징을 보이고 있다. 또한 1층 탑신을 구성하는데 있어서도 좌우의 돌이 전후의 돌보다 크게 만들어져 있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2층 3층의 탑신에 비해 1층의 탑신이 매우 크게 조성되었다. 탑신 상부의 옥개석의 구성에 있어 1층의 경우 옥개석 받침을 5단으로 구성한 반면 2층과 3층은 4단으로 구성했다. 상륜부는 현재 노반과 복발만 남아있으며 다른 부분은 결실된 모습이다. 반야사에 위치한 이 삼층석탑은 신라양식을 기본으로 고려시대에 조성한 석탑이다,
[반야사 삼층석탑과 경내...]
[고목밑 넓은 바위엔 온갖 정성이 가득한 물건들이...]
[반야사 극락전...]
대웅전 왼편에 대웅전에 비해 작은 불전이 위치하고 있는데 이 불전이 반야사의 극락전이다. 원래 반야사의 대웅전으로 건립된 건물이었으나, 1993년 현재의 대웅전을 새롭게 건립한 이후 극락전으로 이용하고 있다. 현재 반야사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불전이다. 평면은 정면 3간, 측면 2간으로 구성되었는데 어간을 협간에 비해 약간 크게 만들었다. 기단은 막돌을 이용해 낮게 한단만 쌓은 외벌대이며 초석 역시 막돌을 이용한 막돌초석이다. 막돌초석을 이용하면서도 그 운두를 매우 높게 설정한 특징을 보이고 있다. 기둥은 원기둥을 사용했는데 따로 흘림을 두지는 않았다. 전면의 각 기둥에는 주련을 걸었으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
阿彌陀佛在何方(아미타불재하방) 아미타불이 어느 곳에 계시는가
着得心頭切莫忘(착득심두절막망) 마음속에 깊이 새겨 간절히 잊지 말지어다
念到念窮無念處(염도념궁무념처) 생각이 이르고 생각이 다해 생각 없는 곳에 다다르면
六門常放紫金光(육문상방자금광) 육문이 항상 자색 금빛을 발하리라
기둥 상부에 사용된 공포는 익공식의 공포를 사용했다. 초익공의 기본 구조를 갖고 있으나 2단의 헛첨차를 기둥에 꽂아 사용했기 때문에 변형된 이익공이라 할 수 있다. 처마에는 부연을 달아 겹처마로 구성했고, 지붕은 맞배지붕 형태를 하고 있다. 박공면에는 풍판을 달아 비바람으로부터 벽체를 보호하고 있다. 극락전의 정면은 모두 창호를 달아 개방했고, 우측면에는 출입이 가능하도록 한 짝의 문을 달았다. 정면 창호의 경우 어간과 좌측협간의 창호는 빗살창호를 사용한 반면, 우측협간의 창호는 정자살창호를 사용했다. 그 외 다른 부분은 모두 벽체로 구성했는데 외벽에는 심우도를 벽화로 그려 놓았다. 극락전 내부 중앙에는 불단을 만들고 이곳에 3기의 불상을 봉안했다.
중앙에 봉안된 불상은 아미타불이며 좌측의 불상은 지장보살, 우측의 불상은 관세음보살이다. 중앙의 아미타불이 좌상으로 만들어진 반면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은 입상의 형태를 하고 있다. 불상의 뒤편으로는 후불탱화가 걸려있으며, 불단의 좌우측에도 각각 하나의 탱화가 걸려있다. 좌측의 탱화는 지장탱화이며, 우측의 탱화는 관세음보살도이다. 두 탱화 모두 불기 2530년 즉 1986년에 제작된 것이다. 극락전 내부 좌우측 벽면에도 단이 조성되어 있다. 좌측 벽면에는 칠성단이 만들어졌고 그 상부에는 칠성탱화가 봉안되었으며 우측 벽면에는 신중단이 조성되었고 상부에는 신중탱화가 봉안되었다. 이 두 탱화 역시 모두 1986년에 제작된 것이다.
[반야사 산신각...]
대웅전과 극락전이 이루는 주공간 뒤편 언덕위에 작은 건물이 위치하고 있는데 이 건물이 반야사의 산신각이다. 산신각은 산신을 모시고 있는 건물이다. 산신은 불교의 전래 당시부터 불교에 포함되어 있던 분이 아니었다. 불교가 우리 민족과 더불어 발전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포함하게된 한국불교만의 독특한 신앙이다. 산신각이 위치하고 있는 부분에 자연석을 이용해 높은 축대를 쌓은 후 이 위에 산신각을 건립했고, 오른편으로 이곳까지 오를 수 있도록 많은 단의 계단을 쌓았다. 다른 사찰과 마찬가지로 산신각은 단간의 작은 규모로 건립되었으며 그 구성이 매우 소박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반야사의 산신각은 막돌로 높게 쌓은 축대위에 콘크리트에 의한 기단을 만들었다. 콘크리트로 만든 기단 내부에 따로 초석을 사용했는지 명확하지 않으나 현재는 기단 상부에 목조 기둥을 얹은 모습이다.
기둥은 원기둥을 사용했고 기둥 상부에는 따로 공포를 구성하지 않은 민도리집이다. 서까래 상부에는 따로 부연을 달지 않았고, 지붕은 모임지붕으로 만들었다. 모임지붕의 지붕 꼭대기에는 절병통을 얹어 마감했다. 산신각의 정면은 외부로 개방할 수 있도록 창호를 달았는데 일반적인 여닫지 형태가 아니라 미닫이 형태로 만든 것이 특징적이다. 산신각의 출입은 산신각 우측면에 만들어진 문을 통해 이루어지도록 했다. 산신각 내부 배면에는 단을 조성하고 이 위에 산신의 상을 봉안했다. 호랑이 위에 올라타고 있는 일반적인 산신의 모습이다. 산신상 뒤쪽으로는 산신탱화를 걸었는데 화기에 의하면 불기 2533년 즉 1989년에 조성한 것이다. 건물 내부 좌측면에는 하나의 벽화를 그려놓았는데 하늘을 나는 비천의 모습이다.
[반야사 종무소 2층 요사채...]
[반야사 요사채...]
[반야사 범종각...]
대웅전, 극락전이 위치한 주공간의 전면에는 넓은 마당이 조성되어있다. 이 마당 한쪽 켠에는 스님들의 거처공간인 요사가 따로 담장으로 구획되어 위치하고 있으며 이 요사공간 전면에 하나의 건물이 위치하고 있다. 이 건물이 범종각이다. 범종각은 사물을 걸고 소리를 내어 각각 온 세상의 모든 미물까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 건립하는 건물이다. 사물에는 범종, 북, 목어, 운판이 포함되는데 사찰의 형편에 따라 하나 혹은 둘의 사물만을 봉안하는 경우도 많다. 반야사의 범종각에는 범종과 운판이 걸려있다. 범종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범종은 2000년에 만들어진 것이며 범종각 역시 이 시기에 조성한 것이다.
범종각은 정면 1간, 측면 1간의 단간평면을 갖고 있다. 기단은 정교하게 다듬은 화강암을 이용해 만들었고 기단 상부 사면에는 각각 화강암에 의한 난간을 만들었다. 초석도 다듬은돌 초석을 사용했는데 원형초석이다. 기둥은 원형기둥을 이용했는데 강한 배흘림을 갖고 있다. 공포는 다포식의 공포를 얹었는데 출목은 외1출목으로 구성했으며 내부로는 출목을 형성하지 않았다. 주간에는 하나의 공간포만을 사용했으며 공간포 상부에는 하나의 보를 얹어 이로 범종을 지지하고 있다. 서까래 끝에는 부연을 얹었으며 지붕은 맞배지붕의 형태를 하고 있다.
[석천을 건너오는 곡성 성산...]
[영천위 망경대에 문수전이 보이고...]
[망경대 문수전...]
대웅전에서 물러나온 전하는 이 절에서 법회를 열도록 분부하였다. 그러자 갑자기 이적이 일게되었다. 사자 등에 올라선 어린 문수보살이 어전에 나타나서 나를 따르라고 하였다. 전하는 기이하게 여기면서도 화평스러운 기운에 압도되었다. 전하는 문수보살 뒤에 따라섰다. 망경대를 향해서 계류를 따라 동쪽 계곡을 더듬어 올라갔다. 급기야 영천(靈泉)에 이르른 것이다. 전하는 문수보살이 시키는대로 그 영천의 물을 떠 마신다음 그 밑에서 기도를 하고 정성을 다하여 목욕을 하였다.
“상감마마의 불심이 갸륵하시어 그 공덕으로 말미암은 부처님의 은총이 있나이다.” 이렇게 외치고는 문수보살은 사자를 타고 사라져 버렸다. 목욕을 하고 물밖에 나서니 영천위에는 연꽃이 만발하였다. 전하는 황홀한 기분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한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정결한 몸과 마음으로 기도를 올렸다. 전하는 절로 돌아와서 분부를 내리었다. 지필묵을 올리게 하였다. 전하는 붓을 들고 단정히 꿇어 앉아 종이에 글씨를 썼다. 그리고 반야사에 하사하였다. 이것이 지금껏 반야사에 보관되어 전해 내려오는 세조 어필이다.
[망경대 문수전...]
반야사의 주영역 전면에 흐르고 있는 석천을 거슬러 상류로 약 150m가량 따라가면 과연 문수보살이 상주할 만한 절경이 펼쳐진다. 이곳은 영천과 망경대가 이루어내는 경치로 다른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이 영천과 망경대에는 문수보살이 상주하고 계시며 망경대 꼭대기에는 문수전이 건립되어 있다. 영천에서부터 절벽을 따라 오를 수 있도록 높은 계단이 끊임없이 이어지며 이 계단을 따라 한참을 오르면 그 끝에 작은 공간이 나타나게 된다. 이곳에 하나의 건물이 만들어져 있으며 이 곳이 문수전이다. 문수전은 중층으로 건립되어 있는데 하층은 스님들이 거처할 수 있는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문수전은 정면에 만들어져 있는 계단을 통해 오를 수 있다. 이 계단을 통해 문수전에 올라 뒤로 돌아다 보는 광경은 과연 문수보살이 사방을 돌아다 봤다고 할 만큼 절경이다.
[망경대 문수전을 좀 가까이...]
문수전의 평면은 정면 3간, 측면 2간이며 어간이 협간에 비해 크게 만들어졌다. 기둥은 원형기둥으로 만들어졌으며 따로 흘림은 사용하지 않았다. 기둥상부의 공포는 주심포식 공포를 사용했고 주간에는 화반을 두어 상부 도리가 처지는 것을 방지하고 있다. 출목은 외1출목이며 내부로 출목을 형성하지는 않았다. 지붕은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문수전 주위로 계자난간을 둘러 외부로의 추락을 방지했다. 건물은 5량의 구조를 하고 있으며 내부에는 불단을 조성하고 이곳에 문수보살을 봉안했다. 문수보살은 청사자위에 올라탄 모습으로 표현되었으며 오른손에 보주를 들고 있다. 문수보살상 뒤에는 따로 후불탱화를 조성하지 않은 대신 반야경을 새겼다.
[아무리 봐도 멋진 문수전...]
[돌아오는 길목에 눈살 찌프려지는...]
[나무는 어찌 자라란 말인가?...]
[적은 안개까지 깔려있어 환상적인 풍광이...]
[석천의 깊은맛이 우러나는 듯한 ...]
[반야사 감로수...]
[반야사 삽살이...]
[반야사옆 석천엔 멋진 징검다리겸 잠수교가...]
[오르고 싶은 반야사입구의 백화산줄기 능선...]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반야사 문수전도 보았고 도 멋진 석천인 영천도 건너 보았는데 왜이리도 마음 한구석이 허전한지 모르겠다. 아마도 망경대를 못올라가 봐서 그런가 보다. 망경대에서 내려다 보는 풍광이야 말로 정말 극치를 이룬다고 하였는데 시간이 모자란다, 아니 날씨가 흐려 위에선 아무 것도 보이질 않을 것이다, 라는 핑계로 그냥 돌아서 왔던 문수전 오르는 돌계단과 부자가 다정히 오르는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바쁜 걸음을 영동 쪽으로 돌려본다. -<끝>-
첫댓글 소박하고 아름다운 산천을 함께하니 경건함조차 넘치는 엄숙함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