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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봉사는 비구니스님 사찰입니다. 아름답게 꾸며진 사찰 내 아내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산네 암자 내원암을 방문하였습니다.
차에서 내려 조금 올라가다보니 오른쪽 개집에서 진돗개 한 마리가 멍멍 하는 소리에 놀라 우리부부는 반사적으로 왼쪽으로 두거름 옴 기는데 갑자기 왼쪽 개집에서 송아지 만한 진도개가 나와 내 종아리를 물으려고 하얀 이빨을 드러내면서 달려든다 연거퍼 놀라 암자 쪽으로 올라가 뒤를 보니 개 두마리가 보통이 아니다 스님하시는 말씀 왼쪽놈은 사람이든 짐승이든 옆에 오면 문다고 합니다.
정신없이 법당에 들어가서 지장보살 님전 삼배를 올리고 나와 경내를 돌다보니 여기저기 개가있다 입구와 안쪽 개를 합처 5-6마리가 넘는다 정이 떨어진 우리부부 내원암을 나오려 고하니 역시 개 지랄이다
내원암에 돈이 그리 많아 개가많은지 아니면 법당에 보물이 많은지 마음이 쓰다
예산군 내 전통사찰 7곳중 청룡암과 명봉사 산내암자 내원암은 가보시라 권하는 마음이 사라 젓습니다. 멍 멍 멍
장안사
장안사(長安寺)는 예천군 용궁면 향석리 비룡산(飛龍山) 정상 부근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 직지사의 말사이다. 한 때는 향석리 구읍(舊邑)의남쪽에 위치하고 있어 속칭 남산사(南山寺)라고도 하였으며, 향석리에 있는 석불좌상과 삼층석탑을 장안사에서 관리하였다고 한다.
장안사와 더불어 유명한 것은 장안사 뒷산에서 바로 내려다보이는 회룡포(回龍浦)이다. 굽이치는 물길이 마을을 돌아서 감싸 육지 속의 섬이 되어 절경을 이루는 이곳은 예천의 자랑거리이기도 하다. 장안사 뒷산으로 10분 가량 올라가면장안사에서 세운 팔각정인 회룡대가 있는데, 이곳에서 내려다보면 그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전에는 의성포라 불렀으나 행정지명으로서의 의성과 혼돈을 막기 위해 근래에 예천군청에서 회룡포로 이름을 바꿨다.
주요 연혁
- 1627년(인조 5)덕잠(德潛) 스님이 중건
- 1709년(숙종 35)청민(淸敏) 스님이 종각을 중수. 이 때 불량계(佛粮契)를 결
성함
- 1755년(영조 31)법림(法琳)·지묵(智默) 스님 등이 임봉의(林鳳儀)의 도움을
받아 전각을 중수
- 1759년1755·1756년에 기근이 심하여 이 해에 절의 형편이 몹시 나빠졌으므
로, 1627년에 결성한 불량계를 본받아 다시 불량계를 결성함
- 1800년(정조 24)효일(孝日)이 전각을 중수
- 1830년(순조 30)삼존상을 개채(改彩)하고 불상 1위를 개금(改金)함. 또한
삼성(三聖)·나한 16위, 제석·범천·사자상 2위를 개채함. 후불도 2폭, 신중
도·독성도를 새로 조성함
- 1867년(고종 4)∼1881년설산(雪山)·설곡(雪谷)·백암(白巖) 등이 1867년에
법당, 1872년에 향전(香殿), 1876년 신사(神祀), 1881년에 종각을 세움
- 1898년(광무 2)세욱 응봉(世旭應峰) 스님이 이동건(李東建) 등의 시주를 받
아 법당을 중수
- 1899년백암 스님이 산령각을 중수
근대에 와서는 1925년 법당의 기와를 바꾸고 요사를 중수한 바 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와 몹시 퇴락하고 말았는데, 1982년 법진(法眞) 스님이 주석하면서 다시 중창의 기운을 맞았다. 법진 스님은 이후 1994년까지 머무르면서 대웅전·삼성각·범종각·요사 등을 중건하여 현재의 당우 대부분을 이 때 지었다. 최근에는 2001년부터 지정(智正) 스님이 주지로 주석하고 있
내용출처 대한불교진흥원
서악사
서악사(西岳寺)는 예천군 예천읍 대심동 산13번지 봉덕산(鳳德山) 중턱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 직지사의 말사이다.
봉덕산이 제법 높은 곳이어서 이곳을 찾는 등산객이나 혹은 약수를 길러 오는 이들의 휴식처로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절 앞마당이나 산신각 앞에서 내려다보면 예천 읍내가 한 눈에 들어와 좋은 경치를 볼 수 있다
절의 창건은 언제 이루어졌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신라시대 신문왕대에 의상 대사가 이루었다고 전한다. 서악사는 본래 이 지역의 동서남북 사악(四岳)에 있던 절 가운데 하나였다.
조선시대의 역사는 1960년에 요사를 중수할 때 발견된 조선시대 상량문을 통하여 알아볼 수 있다. 이 상량문은 현재 본사인 직지사에 보관되어 있다고 하여 확인하지 못하였지만 사찰에서 전하는 바에 의하면 1701년(숙종 27) 중건되었고, 1737년(영조 13)에 현재의 사찰 뒤편 산 너머로 추정되는 터로 옮겨지었으며, 1761년 요사를 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위와 같은 연혁은 안동 서악사의 연혁과 일치하는 부분이라 좀 더 면밀한 고증이 필요하다.
하지만 예천 서악사가 고찰임은 분명하여, 산 너머의 옛 터에서는 지금까지도 간혹 기와편이 발견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조선시대 중건을 뒷받침하는 유물로 1770년(영조 46)에 조성된 후불도 1점이 전하고 있다.
최근에는 거의 폐사될 지경에 이르렀는데, 1988년 성태(成太) 주지가 주석하면서 불사가 크게 이루어져 현재는 10여 동의 전각과 요사 등의 건물이 들어서는 등 중흥되었다. 그리고 1992년에는 룸비니 유치원을 인수하여 이듬해 첫 원생들을 받아 들였다. 이 유치원은 예천읍에서도 규모 있게 운영되는 곳으로 유명하며 유치원으로는 유일한 곳이다.
한편 산신각을 오르는 길에는 ‘연파독역산(蓮坡讀易山)’이란 명문이 음각된 바위가 있다. 연파는 장화식(張華植)의 호로서, 그가 이 산에서 '역경(易經)'을 읽었다는 의미이다. 예천의 유생이었던 장화식의 묘도 절 뒷산에 있다.
내용출처 대한불교진흥원
보문사
보문사(普門寺)는 1,3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유서 깊은 고찰로, 예천군 보문면 수계동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 직지사의 말사이다.
보문사의 창건 연대는 「보문사 사적」에 의하면 신라시대인 677년(문무왕 17) 의상(義湘) 대사에 의하여 처음 완성되었다고 전한다.
그 뒤 고려시대에 들어와 1184년(명종 14)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중창하였는데, 지눌이 '화엄경'을 읽다가 깨달음을 얻은 곳으로 유명하다.
특히 고려대에는 사고(史庫)로 이용되기도 했으나 고려 말 왜구의 잦은 출몰로 1381년(우왕 7) 7월 충주 개천사(開天寺)로 옮겼다.
조선시대에는 1407년(태종 7)에 교종에 속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1569년(선조 2)에는 법당을 비롯하여 당우를 중수하였으며, 몇 해 전 주지 도문(道門) 스님에 의해 1591년(선조 24)에 해당하는 연호와 ‘화주(化主) 도명(道明)’ 등이 새겨진 기와편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이 해에 도명 스님 등에 의해 중수가 있었던 것도 알 수 있다.
그러나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건물 대부분이 소실되었고 단지 극락보전과 반학루(伴鶴樓), 요사인 염불당 등만 남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 뒤 1750년에 염불당을 중창하였고, 1791년(정조 15)에 다시 중창하였다. 이어서 1882년(고종 19)에 강주(講主) 금해(錦海)가 이 절에 머물 때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보조 영당과 노전, 그리고 선당․조실․범종각․나한전․산신각․칠성각 등의 전각이 즐비하였으며, 대중들의 수도 50여 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산내암자인 운계암에는 30여 명이 머물고 있었다고 한다. 그 밖에 염불당의 해체 수리시 발견된 상량문과 대법당 상량문을 통하여 1848년 염불당을 새로 지었고, 1872년에 대법당을 짓는 등 조선 후기에도 면면히 법등을 이어왔음을 알 수 있다.
근세에 들어서는 1917년에 한 차례 중수한 것을 비롯하여 1926년에도 불전과 요사를 중수하였다. 1967년에는 극락보전을 보수하고 단청하였다.
최근에는 도문 스님에 의하여 중건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1980년 삼성각을 신축하였고, 1988년 반학루와 염불당을 해체․수리하였다. 그리고 1991년 적묵당을 신축하였고 이듬해 극락보전까지 중수하였다.
부속암자로는 운계암(雲溪庵)과 불타암(佛陀庵)이 있다. 운계암은 1992년에, 불타암은 1993년에 중창 복원하였으나, 불타암은 현재 잘못된 건물 복원으로 폐사 직전에 처해 스님도 떠나고 건물만 방치되어 있는 실정이다.
내용출처 대한불교진흥원
한천사
한천사(寒天寺)는 예천군 감천면 증거동(增巨洞) 184번지 주마산(走馬山) 기슭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 직지사의 말사이다.
한천사는 신라시대인 678년(문무왕 18) 의상(義湘) 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구전되는 내용이나 혹은 1875년(고종 12)에 기록된 「한대사연화기(寒大寺緣化記)」에는 의상 대사가 부석사를 지을 때 기둥이 자꾸 넘어져 그 이유를 조사해 보니 소백산맥 남쪽 주마산의 지세가 달리는 말의 머리 형국인지라, 그 지세를 누르기 위해 주마산에 한천사를 지었다는 설화가 전한다.
그러나 창건 이후부터 조선 중기까지의 연혁은 기록이 전하지 않아 전혀 알 수가 없다. 현재 유리광전에 봉안된 철조 약사여래좌상이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조성하였고, 삼층석탑은 9세기 말에서 10세기 초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므로 이러한 유물 자료를 통하여 번성했던 역사의 일단을 짐작할 수밖에 없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서 1803년(순조 3) 근천(謹天) 스님이 법당을 중수하였는데 이것은 1803년에 작성된 「한대사법당신창상량문(寒大寺法堂新創上樑文)」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어서 1808년 불량계(佛糧契)의 도움을 받아서 선당(禪堂)을 중건했으며, 이를 기념하여 「한대사연화기」를 남겼다. 그런데 「한대사법당신창상량문」이나 「한대사연화기」 등에는 모두 ‘한대사’로 나오고 있어 한때 ‘한대사’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근대에는 1932년 취운(翠雲) 스님이 요사를 새로 지었고, 1934년 덕기(德奇) 스님이 법당을 중건하였다. 이 때 기록한 「위선계서(爲先契序)」라는 기문에는 ‘한천사’로 나온다. 따라서 조선 후기에 한대사로 했다가 근대에 들어와 지금처럼 한천사로 절 이름을 바꾸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한천사의 역사에 있어서 주목되는 점은 조선 후기와 근대에 걸쳐 불량계와 등촉계·위선계 등의 사찰계를 통하여 절의 발전과 수행을 도모했던 곳이라는 점이다.
그 뒤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 때 완전히 소실되어 전쟁 후에 다시 지었다고 한다. 최근에는 1994년 법당인 유리광전을 새로 지으며 오늘에 이른다. 1998년부터 향엄(香嚴) 주지스님이 주석하고 있다.
내용출처 대한불교진흥원
용문사
용문사(龍門寺)는 예천군 용문면 내지리 391번지 소백산(小白山)의 줄기인 용문산 남단 기슭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 직지사의 말사이다.
용문사는 해발 782m의 용문산 기슭에 위치해 있으며, 예천읍에서 북쪽으로 약 15㎞ 떨어져 있다. 울창한 거목들 사이에 서 있는 일주문은 고색이 완연하다. 이곳을 지나면 풍경 소리, 목탁 소리가 청아하게 울려 퍼져 조용하기 이를 데 없는 산사의 느낌을 실감할 수 있다.
현재 보광명전을 비롯하여 16동의 전각이 세워져 있는 규모로 보아 용문사는 예천읍에서 가장 큰 절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오랜 사찰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는 유물이 전하는 이 지역의 대표적인 고찰이며, 지금도 끊임없이 불사는 진행되고 있다. 특히 보물 제145호로 지정되어 있는 대장전은 이 지역 사람들이 자랑하는 문화재 가운데 하나이다.
용문사(龍門寺)는 870년(신라 경문왕 10) 두운(杜雲) 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두운은 풍기 희방사(喜方寺)를 창건한 신라 말기의 스님이다.
절 이름은 고려 태조가 신라를 정벌하러 남쪽으로 내려올 때 이 사찰을 찾다가 운무가 자욱하여 지척을 분간치 못하였다고 하는데, 이때 어디선가 청룡 두 마리가 나타나 길을 인도하였다 하여 용문사라 일컬었다고 한다. 그 뒤 고려 명종 때는 절의 왼쪽에 있는 봉우리에 세자(世子)의 태(胎)를 묻고 사액(寺額)을 ‘용문산 창기사(龍門山 昌期寺)’로 개명하였다.
내용출처 대한불교진흥원
명봉사
명봉사(鳴鳳寺)는 예천군 상리면 명봉리 산1-1번지 소백산맥의 백운봉 아래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 직지사의 말사이다.
사찰의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지만 아담하고 정갈한 느낌을 주며 아늑함이 가득한 곳이다. 현재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도량으로 가꾸어지고 있다.
절의 창건은 신라 말 875년(헌강왕 1) 두운(杜雲) 선사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전한다.
창건 이후 조선 중기까지의 역사는 전하는 것이 없으며, 그 뒤 1662년(현종 3)에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여러 스님들이 힘을 모아서 중건했다.
1668년에 다시 절이 전소되어 신익(信益). 행선(幸善) 스님 등이 시주를 얻어서 크게 중창하였다. 이후 1807년(순조 7)에도 한 차례 중수가 있었으나,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으로 다시 소실되어 버렸다. 그 뒤 1955년에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산내암자로는 고려 태조 때 자적선사(慈寂禪師)가 지은 내원암(內院庵)과 법화암(法華庵)이 있었다고 하며, 옛날에는 100여 명의 수도승이 기거할 정도로 큰 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소실되어 빈터만 남았으나, 현대에 들어와 내원암만 새로 복원하였다.
절의 경내에는 조선 후기 1735년(영조11)에 건립된 '종대왕태실비' 1940년 비문을 새긴 '명봉사사적비'가 전하고 있고, 경내 옆으로 조금 올라가면 고려 최초의 이두 문자로 된 공문을 새긴 경청선원 자적선사 능운탑비가 있다. 이 자적선사 능운탑비는 고려시대인 941년(태조 24)에 자적선사 홍준(洪俊)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웠는데, 귀부의 머리가 떨어져 나가는 등 지금은 거의 마멸되어 글자를 알아보기 어렵다. 문종대왕과 사도세자의 태실(胎室)은 조선시대에는 절 뒤편의 산봉우리에 모셨다고 한다.
그 뒤 이 비는 일제강점기에 현재의 터로 옮겨왔는데, 이때 1785년(정조 9)에 건립된 '사도세자태실비'는 당시 주지가 비면을 깎고 여기에 명봉사사적비문을 새겨 넣어서 크게 문제가 되었다고 한다.
내용출처 대한불교진흥원
내원암
명봉사 산내암자
*경북 예천군 명봉사 산내암자 내원암(內院庵)을 지음.
(전통사찰총서17,명봉사편,300page)
자적 선사의 속성은 김씨(金氏)이고 법명은 홍준(洪俊)이다.
그는 882년에 태어났으며, 899년에 수계(受戒)하였고, 58세의 나이로 구산사(龜山寺)에서 입적하였다. 그의 입적 후 고려 태조는 자적선사(慈寂禪師)라는 시호(諡號)를 내리고,
경청선원 안에 ‘능운(凌雲)’이란 탑비(塔碑)를 세우게 하였다. 최언위(崔彦陶)가 비문을 지었고 글자는 고서에서 따와 새겼다.(전통사찰총서16,명봉사편,30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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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덕분에 편안히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찰구경 잘 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예천에 이렇게 전통사찰이 많은지 몰랐습니다..여정님 나 영주가면 둘이 사찰순례해요^_^
오시면 부석사로 해서 무여스님 계신 축서사 안내할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