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전 9:1-14
▣ 바울의 사도권에 대한 변호-고린도전서 9장-
앞 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지적하며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특히 연약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거리낌이 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원리를 펼쳤다. 본 장에서 그는 자신을 본보기로 들어서, 특권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복음을 위하여 이 특권들을 사용하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그가 여전히 우상에게 드려진 고기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특권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복음에 방해가 된다면 그런 특권들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1. 특권이 있음을 주장하는 바울(9:1-14)
고린도에 있을 때 바울은 교회에서 지원을 받지 않고 자기 손으로 직접 일하였으며, 결혼의 특권마저도 기꺼이 제쳐 두었다. 바울은 이러한 권리들을, 그리고 다른 권리들을 주장할 수 있음을 다섯 가지 증거를 들어 입증한다.
다른 사도들과 일꾼들(1-6절)-바울이 그의 사도권(Apostleship)을 언급하는 데에 있어 불확실한 어구들이란 없다. 그는 주님을 보았고(행 1:21-22) 부활하시고 영화롭게 되신 그리스도로부터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으며, 고린도에서의 그의 사역은 그의 사도권을 입증하였다. 그런데, 베드로를 포함하여 다른 사도들은 교회들로부터 지원을 받았으며, 이곳 저곳에서 사역할 때에 아내를 데리고 다녔다. 다른 종들이 이런 특권들을 가지고 있다면 바울에게도 이러한 특권이 있는 것이다!(베드로가 결혼하여 여행할 때 아내를 데리고 다녔음에 유의하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독신주의를 이상으로 삼는 로마 카톨릭에서 그를 “초대 교황“이라고 말하기에는 모순이 되는 증거가 아닌가!)
인간의 관습(7절)-군인은 스스로 쓸 것을 공급하지 않고, 그가 수호하고 있는 나라로부터 공급을 받으며 삯을 받는다. 포도원에서 수고하는 농부는 그 열매를 먹을 특권이 있으며, 목자는 양떼에게서 젖과 고기를 얻을 것을 기대한다. 그렇다면 지교회에게 목회자를 지원할 것을 기대하는 것이 비합리적인 일인가?
11절은 근본적인 원리를 주장한다. 만일 우리가 영적인 것으로 축복을 받았으면 물질적인(육신적인) 것을 나눔으로 우리의 감사를 표시해야만 할 것이다(갈 6:6-8). 여기에 목회자에 대한 세 가지 모습이 나와 있음을 유의하는 일은 흥미있다(교회를 보호하며 사단과 싸우는 군사, 영적인 밭이나 포도원을 손질하며 “열매를“ 기대하는 농부, 그리고 양떼를 인도하고 먹이는 목자).
구약의 율법(8-11절)-바울은 신명기 25장 4절을 인용하는데, 구약 시대의 관례상, 황소로 하여금 곡식단 위를 걷게 하여 알곡을 왕겨에서 분리시키는 일을 하였는데, 여기서 바울은 11절에 나오는 원리를 예증하기 위하여 이 율법을 사용한다(딤전 5:18 참조). 황소가 육신의 일을 하여 유익을 얻을진대, 사도가 영적인 일을 하고서 그 유익을 얻지 말아야 하는가? 쟁기질하는 사람과 추수하는 사람은 둘 다 추수 때의 몫을 기대하는 소망을 가지고 일한다.
구약의 제사장들(12-14절)-율법은 제사장들이 제단에 드려진 제물로부터 풍부하게 몫을 차지하도록 허락하고 있다. 제사장은 번제에서 가죽을 취하였고, 속건죄와 속죄제에서는 기름을 제외한 고기 전체를 취했으며, 소제의 대부분과, 화목제에서 가슴과 오른쪽 어깨를 취하였다. 여기 첨부하여 첫번째 소산물들과 십일조, 그리고 특별한 제물들을 받았다.
사실상,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보통 사람들이 너무 적게 받는 반면 제사장들이 너무 많이 받으며 호화로운 생활을 한다고 불평하였다.
그리스도의 명령(14절)-마태복음 10장 10절과 누가복음 10장 7절을 읽어 보라. 바울이 개인적으로 이러한 특권들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이러한 특권들이 나쁜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수고하는 자는 그 급료를 받기에 족하다“ 그리스도인들이 주 안에서 그들을 섬기는 사람들을 지원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고전 9:15-27
2. 특권을 희생한 바울(9:15-27)
바울은 이런 모든 특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들을 사용하지 않았는데(12, 15절) 왜 그랬는지에 대하여 몇 가지 이유들을 설명한다.
바울은 복음을 값없이 거저 주고자 하였다(15-18절)-그는 거저 주시는 은혜와 값 없는 복음을 영화롭게 하였다! 어떤 작가가 쓴 대로 실상 “바울의 급료는 급료를 받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자발적으로 복음을 전하였으며 이 특권을 즐겼다.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의 책임을 축복이기보다는 짐으로 보게 될 때 이는 얼마나 비극인가! 바울은 “만일 내가 기꺼이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해도, 나는 복음을 전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청지기직분(나누어 줌)을 맡기셨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여기 실천적인 원리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거저 제공되는 구원을 손상시키는 일들을 해서는 안 된다. 헌금하는데 30분이나 걸리고 더 내지 않는다고 군중을 꾸짖는 “복음 집회“에 참석한 불신자들이 무엇을 생각할 것인지는자명한 일이지 않는가 !
바울은 독립적으로 일하기를 원하였다(19절)-돈으로 인해서 멧세지의 음이 약화되는 그리스도인 사역자가 한둘이 아니다. “아주 많이 바치는 사람“을 감히 거스릴 수가 없는 목회자들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교파의 지원이나 보장을 잃게 될까 봐 두려워한다. 바울은 다른 주인이 아니라 그리스도만을 원하였다.
그는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을 구원코자 하였다(19-23절)-비록 바울이 목회자로서 자유를 즐겼지만, 기꺼이 모든 사람들의 종이 되어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이 말은 바울이 세상의 격언, 즉 “로마에서는 로마 사람처럼 행하라“는 말을 따랐다는 뜻은 아니다. 그렇다면 두려움때문에 타협한 것이 된다. 바울의 태도는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에 기반을 둔 것이다. 그가 자기의 표준을 낮추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자기의 개인적인 특권을 제쳐 두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위선이 아니라 동정심이 없다.
그는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이해하며 그들의 경험에 공감하려고 노력하였다. 바울은 유대인이었으므로, 이 점을 유대인의 마음을 여는 열쇠로 사용하였으며, 로마 시민으로서의 자격을 이방인들과 접촉하는 데 편리하도록 사용하였다. 그는 연약한 자들을 동정하였으며 격려하였다.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것이 된다“는 말은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들이 용납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놀라운 능력이며, 그들을 이해하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인도하려는 노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바울은 분별없이 날뛰는 “옹기 그릇점에 들어간 황소“는 아니었으며,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접근법을 사용하는 부주의한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재치있게 접촉하였으며, 잃어버린 자를 인도하기 위하여 자신의 특권을 기꺼이 희생하였다.
바울은 영원한 상을 얻고자 하였다(24-27절)-만일 우리가 영원한 상을 잃게 된다면 일상적인 특권이 무슨 유익이 되겠는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한 가치관“에 입각해서 자기의 삶을 조절할 필요가 있다. 바울이 자기의 특권을 제쳐 두었다는 말은 훈련을 뜻하며, 그는 이 훈련에 대하여 24-27절에서 설명한다. 그는 헬라의 경기를 예로 들었는데 그의 독자들에게는 아주 친근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유명한 고린도 지협의 경기(Isthmian Games, 올림픽과 유사한 고대 그리이스의 4대 경기회의 하나임)가 그 곳에서 열렸기 때문이다.
각 경쟁자들은 자기의 몸을 훈련해야만 했으며, 상을 받기 위해서는 하고 싶은 일들도 제쳐 두어야 했다. 만일 운동 경기자들이 감람나무 잎으로 꾸며 만든 면류관을 얻기 위하여 그들의 권리들을 포기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인도 영원한 면류관을 얻기 위하여 특권들을 제쳐 둘 수 있는 것이다. 지협 경기에서는 개최할 때마다 한 사람만 면류관을 얻을 수 있으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승인을 얻을 기회를 가진다.
버림을 당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구원과는 관계가 없다. 그는 구원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과 봉사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경주하고 승리함으로써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경주한다(빌 3:12-16/히 12:1-3). “버림을 당한다“는 말은 “만족하게 여겨지지 못한다“는 뜻이다. 10장 5절에서는 “기뻐함을 받지 못한다“로 번역되었다.
바울은 스스로를 경기자들을 투기장으로 부르는 전령으로 비유하는데, 아직 자신은 그 시험을 통과하지 않은 것으로 비유한다. 바울은 자기의 구원을 잃을까봐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충성되고 희생적인 봉사에 관한 상을 잃게 될 것을 두려워하였다."
고전 10:1-13
▣ 조심해야 할 점에 대한 경고-고린도전서 10장-
이 장은 “우상에게 바친 고기“에 대해 다루는 부분을 끝낸다. 바울은 그리스도와(8절) 자기 자신을 본보기로 인용하면서(9절),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를 지적한다. 바울은 아마도 자기들에게는 지혜가 있으므로 유혹이나 죄에 대해서는 삼가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할 만큼 지나친 자신감에 차 있는 고린도 교회 회중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12절에는 그들에 대한 경고가 나오며, 15절에서는 그들을 “지혜로운 사람들“이라고 부르면서 “경건한 풍자“를 사용한다. 신자는 먹고 마실 자유가 있으나 최소한 이교의 우상숭배에 관련된 세 가지 위험은 조심해야 한다.
1. 죄에 빠질 위험(10:1-13)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받은 유혹과 죄에 대한 예증을 위하여 이스라엘을 사용한다. 물론 구약의 이스라엘이 신약의 교회와는 다르지만(고전 10:32) 몇몇 유사한 점이 있다.
이스라엘은 영적인 이점을 소유하고 있었다(1-4절)-바울은 그들이 바다를 건너고 구름 아래로 행한 사실을 신자들이 경험한 세례(침례)와 비교한다. 그리스도인의 세례(침례)가 신자와 그리스도를 동일시하는 것이듯, 이스라엘의 “세례(침례)“는 그들을 모세와 동일시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십자가를 통하여 세상과 죄로 부터 구원을 받은 것처럼, 이스라엘은 어린 양의 피로써 애굽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 하나님은 바다를 열어 이스라엘을 지나가게 하심으로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분리하셨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인을 세상과 육신의 굴레에서 분리시켰다. 유대인들은 만나를 먹었으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을 때에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를 먹는다. 그들은 초자연적으로 공급된 물을 마셨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구원의 생수(요 4:10-14)와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물(요 7:37-39)을 마신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이란 구절에 난처해 하며, 문자 그대로 바위가 유대인들을 따라 광야를 굴러 온 것처럼 생각하기도 한다. 두가지 설명이 가능하다. 첫째는 그들을 따른 신령한 바위, 곧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백성들과 함께 여행하시며 그들의 필요를 해결하셨다고 보는 것이며, 둘째로는, “그들“(them)이란 단어는 원문에는 없는 말이며, 따라서 바울은 단순히 “그들은... 다음으로 신령한 바위로 말미암아 마셨다“고 말하는 것이다. 반석은 시간적으로 볼 때, 만나를 먹은 후에 대두된 것이므로, 먼저 떡을 먹고 다음으로 물이 나왔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은 죄 때문에 망하였다(5-10절)-하나님은 “그들을 기뻐하지 않으셨다“는 말은 9장 27절의 “버림을 받았다“는 말과 같은 단어이다. 그들은 인준을 받지 못하였으며, 죄로 말미암아 생명을 잃었다. 그들은 탐심을 가졌고(민 11:34), 우상을 숭배했으며(출 32:1-14), 음행을 자행하였다(민 25:1-9). 하나님의 인내심을 시험하여 고의적으로 하나님을 시험하였고(민 21:4-9), 불평하였다(민 16:41-50). 참으로 지독한 죄의 항목들이다. 그들이 경이적으로 애굽에서 구원되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심판하셔야만 했다.
영적인 특권이란 죄를 지어도 된다는 특권을 부여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특권들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영광을 돌려야 할 보다 큰 책임을 우리에게 부여한다(8절에 유의하자. 바울은 23,000명이 죽임을 당했다고 말하는데 민 25:9 에는 24,000명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바울은 하루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가를 말한 것이고 모세는 전체 죽은 사람을 기록하고 있다. 더러는 나중에 죽은 것이 분명하다).
이스라엘은 오늘날 우리에게 경고가 되고 있다(11-13절)-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어느 편이든 하나님의 백성은 죄를 지을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바울은 12절에서 지나친 자신감을 경고하고 있으며, 다음으로 13절에서는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격려하고 있다."
고전 10:14-22
2. 귀신과 교제할 위험(10:14-22)
바울은 우상이 실재하는 것은 아니지만(8:4-6), 사단이 사람들을 곁길로 인도하는 데에 우상을 사용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예증하기 위하여 주의 만찬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미신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명기 32장 17, 21절에서 귀신들도 우상들을 통하여 숭배를 받을 수 있음을 명백히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신자가 떡과 잔을 먹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교제(친교)를 가지듯, 그리고 구약의 제사장들이 성막 제단의 제물로 잔치를 베풂으로써 하나님과 교제했듯이, 이교도들은 우상 숭배의 향연을 통하여 귀신과 교제한다.
바울은 여기서 “사단 친교 제사“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사단은 가짜교회와 가짜 복음을 가지고 있듯이 또한 가짜 친교 예배를 가지고 있다. 현대의 인류학자들은 이교 숭배와 그들의 우상에 찬탄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 전 제도가 마귀에게 속해 있으며, 실제로는 “귀신 숭배“라고 말씀하신다. 우상이 있는 곳에는 귀신들이 있다.물론, 바울이 말하는 바는 떡을 먹고 잔을 마시는 것이 실제로, 그리고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에게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한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떡과 잔이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로마 카톨릭의 화체설(Doctrin of Transubstantiation)이다. 성경에서 이러한 교리를 가르친 곳은 어디에도 없다. 바울은 연합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하루는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고, 다음 날은 귀신의 식탁에 참여한다는 것은 모순된 일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귀신의 종교에 개입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만 한다. 기독교에서 용인하는 모든 것이 성경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어떤 종교의 예식에 마지못해 참여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상 귀신들과 친교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고전 10:23-33
3. 동료 그리스도인을 타락시킬 위험(10:23-33)
바울은 그의 토론을 끝마침에 있어서 8장에서 펼친 원리를 다시 반복한다. 형제의 양심을 약하게 하거나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들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유로우며 모든 일들이 합법적이다. 그러나, 모든 일들이 덕을 세우는(유익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감히 주님의 일을 파괴하는 데에 우리의 특권들을 사용하지 않는다.
바울은 몇 가지 매우 실제적인 규칙으로 끝을 맺고 있다.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도록 살라(23-24절)-이것은 9장에 나오는 교훈을 요약한 것이다.
지나치게 “까다롭게“ 굴지 말라(25-27절)-수 많은 의문을 제기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보잘 것없는 간증이 될 것이며,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물어볼 것 없이 고기 시장(푸줏간 또는 도살장)에서 고기를 사라. 모든 음식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며, 우리에게 유익하다. 그리고, 사단은 고기를 가지고 우리를 해칠 수가 없다(8:8).
구원받지 않은 친구의 집에서 베푸는 잔치에 초청을 받았으면 질문을 하지 말라. 그러나, 만일 거기 있는 그리스도인이 그 고기가 이교도의 제단에서 온 것이라고 말하면, 그리고 그 그리스도인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괴로움이 된다면 그 고기를 먹지 말라. 연약한 형제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보다는 배고픈 편이 훨씬 낫다.
비록 희생이 요구된다 해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라(29-31절)-바울은 29-30절에서 하나의 논란을 예상한다. “왜 나의 강한 양심이형제의 연약한 양심으로 판단을 받아야 하는가? 그리고, 내가 하나님께 감사한 고기가 무슨 손상을 끼친단 말인가?“
해답은 이러하다. 우리가 하는 일이 무엇이거나 간에, 먹거나 마시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하며, 우리 자신을 즐겁게 하기 위함이어서는 안된다. 인간적으로 말할 때는 강한 그리스도인이 연약한 그리스도인에게 숙여야 하는 것은 잘못되어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이다. 연약한 그리스도인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은 교회를 욕되게 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영혼을 구원하며 살라(32-33절)-사람들을 분류하기에는 단지 세 가지의 그룹이 있는데, 곧 유대인과 이방인, 그리고 교회이다.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유대인과 이방인을 주님께로 인도할 것을 기대하신다. 그리스도인이 구령자로서 살아 간다면 이러한 사소한 문제들은 저절로 해결될 것이다. 무익한 그리스도인, 즉 육적인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 멀리 나아가려고 안달을 한다. 그러나, 교회를 세우고 영혼을 구원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첫번째에 두어야 할 것을 첫째로 두며, 그리스도의 이름을 영화롭게 한다."
고전 11:1-22
▣ 주의 만찬-고린도전서 11장-
11-14장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공식적인 무질서들을 다룬다. 이 장들을 읽어 가면 몇 가지 문제점들이 분명히 드러나게 된다. 그들의 집회는 무질서했고 비성경적이었다. 여인들이 남자들을 지도하고 있었으며, 여러 회원들이 지도권과 말할 기회를 얻기 위하여 경쟁하였다. 종합적으로 말해서, 혼란이 있었고 잃어버린 자들에게는 보잘 것없는 간증이 되었다.
11장은 특히 주의 만찬에서의 무질서에 관심을 보이는 반면, 12-14장에서는 교회의 공식 예배와, 교회를 다스려야 할 원리들을 논한다.
1. 주의 만찬이 무질서한 원인(11:1-22)
여인들이 복종하지 않음(1-16절)-바울은 여인들에 대하여 너무나 비판적이라고 비난을 받을 때가 종종 있으며 열등한 지위에 둔다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이 말은 사실이 아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질서의 하나님이심과, 질서를 벗어나면 혼란과 능력의 상실이 있음을 깨닫고 있었다.
여인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남자보다 열등하다고 가르친 곳은 아무데도 없으며 다만 머리됨의 원리(명령권이 아님)를 설정하여, 그리스도는 남자의 머리요, 남자는 여자의 머리라고 하였다. 고린도 교회에서는 이 중요한 원리가 어지럽혀졌다. 여인들이 교회에서의 지위를 놓고 남자들과 경쟁을 하고 있었다. 더구나 주의 만찬을 준행함에 있어서 여인들이 그들의 적절한 지위를 지키지 않고 머리에 수건을 쓰지 않은 채 왔으며, 바울은 이제 이 문제를 논한다.
고린도는 부도덕한 도시였으며 사원에는 여자 사제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일반적인 매춘부일 따름이었다. 여인의 잔은 머리는 죄 있는 여인(매춘부)임을 표시하는 것이었고, 여자가 베일을 쓰지 않고 도시를 돌아다닌다는 것도 이를 표하는 것이었다. 일부 근동지방에서는 오늘날에도 여인들이 베일을 쓰지 않은 채 공식석상에 나타나지 못한다. 이것은 그녀가 자기 남편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표시이며, 범죄에로의 초청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사실상, 유대인들 중에서도 짧은 머리는 부도덕을 표시하는 것이었다(민 5:11-31/민 5:18). 그래서 바울은 교회의 여인들에게 머리에 베일을 쓰지 않고 공식 예배에 참석함으로써 그들의 간증을 잃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경고한다. 그 베일(덮는 것)은 남편에 대한 순종의 표이며, 머리됨의 원리를 인식하고 있다는 표시이기도 하다.유대인 남자들은 오늘날에도 회당에서 예배할 때 모자를 쓴다. 그러나, 바울은 지교회에서 이처럼 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리스도는 남자의 머리이시므로, 예배 때에 남자가 모자를 쓰는 것은 그의 머리를 불명예스럽게 하는 것이다.
물론, 한 조각의 천이 마음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이 마음으로부터 머리됨의 원리를 순종하는 것이지 외적으로만 따르는 것이 아님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바울은 여자들이 교회에서 적절한 위치를 지켜야 하는 이유를 몇 가지로 말한다.
-남편에게 존중을 표한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영광되게 한다.
-창조의 계획과 일치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남자를 위하여 여자를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천사들은 우리들의 예배를 지켜보며, 우리가 하는 일들을 알고 있다(10절).
-본성 자체가 여자에게 긴 머리를 주며, 남자에게는 짧은 머리를 주어 복종을 가르친다.
-이것은 모든 교회들이 실천하고 있는 사항이다(16절).
“모자를 쓰는 문제“와 “짧은 머리를 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될 것인가? 우리가 바울이 고린도에서 가졌던 지역적인 고려들을 모두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자든지 남자든지 자기의 위치를 벗어난 사람이 언제나 하나님의 일에 방해가 된다는 것을 시인해야만 한다. 지교회에서는 옷과 행동에 있어서 단정히 행해야 한다. 우리는 감히 세상을 본받아서는 안 되며,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간증을 잃게 된다.
교회 내의 분열(17-19절)-교회가 분열되고 분당(이단)이 있을 때에는 감추어진 것 같지만 공적인 모임에서 드러나게 된다.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안에서 신자들이 연합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이 놀라운 멧세지를 통해서 교회에서의 분열은 사라질 것이다.
이기적인 동기(20-22절)-초대교회는 종종 “사랑의 향연“을 벌였는데, 주의 만찬을 하기 앞서 교제의 식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서는 부자들이 바구니 가득 가지고 오는 반면 가난한 사람들은 빵부스러기를 들고 한쪽 구석에 앉아 있었다. 바울은 그들에게 “집에서 먹으라!“고 명령하였다. “너희의 폭식하고 마시는 것이 주님께 욕을 돌린다!“ 만일 믿는 자들이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결코 주님의 만찬에 참여할 수가 없으며, 축복을받을 수도 없을 것이다.전 11:23-30
2. 이러한 무질서의 결과(11:23-30)
축복받는 대신 심판을 받음(23-29절)-그리스도께서는 주의 만찬을 바울에게 개인적으로 베푸셨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 의식이 창설되었을 때 그는 다락방에 없었기 때문이다. 주의 만찬은 교회를 위하여 드려진 그리스도의 찢긴 몸과 피를 상징한다. 예식을 지킴으로써 그리스도의 사랑과 재림을 계속해서 기억하는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를 되돌아보며 그의 재림을 내다본다.
그러나, 성만찬이 교회에 축복이 되지 못하였고 도리어 심판의 근거가 되었다. 그들의 모임은 유익이 못되고 오히려 해가 되었던 것이다(17절). 영적인 문제들은 언제나 이와 같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바르지 않다면 축복이 되어야 할 일이 저주가 된다.
징계를 받음(30절)-고린도 교인들이 바람직하지 못한 태도로 주의 만찬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질병과 죽음조차 임하도록 하셨다. 바울은 우리가 주의 만찬에 참여할 만큼 “자격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만일 그래야 한다면 아무도 참여할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격은 없지만 거기에 어울리는 자세로 참여할 수는 있다. 즉, 성찬의 의미를 이해하고, 죄에서 자유로와진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위하는 사랑에 차서, 주의 말씀에 기꺼이 순종하며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안에서 부주의하게 그냥 넘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불가능하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의 자리로 인도하기 위하여 경계하셔야만 한다."
고전 11:31-34
3. 이러한 무질서의 교정(11:31-34)
자기 심판(31-32절)-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정직하게 대하며, 심판하고 고백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징계하지 않으신다. “자신을 스스로 검사하라“는 것이 28절에서 바울이 명령하는 바이다. 성찬에서 우리는 세 가지 것을 살펴야하는데, 내면을 바라보고 우리의 죄를 고백하며, 뒤를 돌아 보고 갈보리를 생각하며, 앞을 내다보아 그리스도의 재림을 주시한다. 원리는 분명하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심판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실 수밖에 없다.
상호간의 사랑(33절)-바울은 “자신만을 생각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라“고 말한다. 자신보다는 형제를 앞에 두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다. 교회에 예배하러 오면서 이러한 원리에 순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극소수이다. 우리는 교회에 오면서 “오늘 예배에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라고 묻는다. 하지만, “누군가 축복을 받기 위하여 나는 무슨 말을 하며 어떤 일을 해야 할까?“라고 물어야 할 때인 것이다.
영적인 분별(34절)-교제의 식사가 무슨 잘못된 일은 아니긴 하지만, 먹어야 할 장소는 가정이다. 따라서,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기 위해서는 영적인 분별력을 필요로 한다. 지교회의 사역은 성도에게 잔치를 하는 것도, 음식을 먹이는 것도 아니다. 서로를 영적으로 세워 주며, 그리하여 모두가 다른 사람들을 인도하러 나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근본 원리를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지교회는 하나님이 가정에게 하도록 정하신 일이나 국가가 하도록 정하신 일을 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어린이들을 기르는 곳이 아닌데도 사람들은 자기 자녀들이 잘못된 길로 갈 때에 교회와 주일학교를 탓한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원리들을 따른다면 우리의 모임은 함께 축복으로 나아갈 것이며,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다(29, 32, 34절의 “정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