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교 개혁신학의 특성들
“장로교인들은 무엇을 알고 믿어야 하는가?”
들어가는 말
한국 기독교 안에서 여러 종류의 교단(교파)들이 있습니다. '가족 은유'(family metaphor)로 말하자면 한 부모아래 있는 형제자매들과 같습니다. 한 부모 아래 여러 자녀가 있는 것 처럼 기독교 교파들은 하나님의 여러 자녀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일에 있어서 공통분모를 갖고 있으면서도 나이와 생김새와 억양과 기질과 성품에 있어서 서로 다른 형제자매들이라 생각하면 좋을 것입니다. 그러니 서로 잘났다고 으스대거나 다투면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서운해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장자교단이니, 내가 너보다 크니, 우리가 정통이니 하며 다툴 때가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좌우간 한국의 기독교 안에는 다양한 교회와 교파가 있습니다. 편의상, 역사와 전통과 외형적 크기에 따라 순서대로 나열하자면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오순절 계통의 순복음 교회 순이 될 것입니다.
본 글은 여러 교파 중에서 특별히 장로교 신학적 전통에 서있는 교인들을 위해 쓰여졌습니다. 장로교인들은 역사적으로 어디에서 유래하였으며, 어떤 신앙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어떤 방식으로 신앙을 표현하며, 어떤 신앙의 문법과 억양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 차분하게 따져보려 합니다. 이렇게 하려는 목적은 앞으로 우리의 뒤를 따를 신앙의 후배들을 위하여 신학적 이정표를 제시하기 위함입니다.
현실적으로 한국의 상당수의 장로교인들은 자신들이 믿는 신앙의 내용이나 본질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거나 혹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좀 과하게 말해서, 기껏해야 교회의 직제 가운데 장로가 있고, 장로들이 교회를 이끌어가는 주요한 사람들이며, 지역 교회의 상급 기관으로는 노회와 총회라는 기관이 있다는 정도의 지식이 그들이 장로교에 대해서 알고 있는 전부인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 가운데 안수집사나 장로 직분을 갖고 있는 분들이 많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교회 정치와 운영에는 관심이 많지만 신앙과 신학의 내용에 대해서는 실상 별로 관심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우 서글픈 현실입니다. 그분들이 교회의 기둥과 같이 신앙적으로 신학적으로 흔들림 없이 서있을 수만 있다면 한국의 장로교회들은 현재보다 훨씬 건강하고 뼈대 있는 성경적 교회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추측하건데, 이 글을 기꺼이 정독하시려는 읽는 분들은 아마 교회와 신앙과 신학에 대해 좀 더 깊이 알고자 하는 갈망이 있는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구도자의 마음으로 하나님 알기를 소원하며, 겸손하게 교회를 사랑하고, 자기가 자라온 전통을 기억하고 존중하며, 이 전통을 발전시켜 후대들에게 선물로 남겨주려는 분들을 위해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 기억 공동체
신학적 입장에 관한한, 장로교인들은 처음부터 역사적 개혁주의 신학을 전수받았습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현재 한국의 장로교인들이 지니고 있는 신앙과 신학은 어느 날 갑자지 태동한 새로운 신앙과 신학이 아니라, 신앙과 신학의 성실한 전승자들에 의해 우리에게 전해온 역사적 기독교신학을 신학적 정체성의 근간으로 삼았다는 것을 말하며, 여러 가지 역사적 기독교신학 전통들 가운데서도 특별히 '개혁주의 신학전통'(Reformed Theological Tradition)을 신학적 정체성으로 삼았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전통주의’가 아닌 ‘전통’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잘 말했듯이 “전통은 죽은 자들의 살아있는 신앙이지만 전통주의는 살아있는 자들의 죽은 신앙입니다.”
만일 장로교인들이 비난을 받고 있다면, 그들의 신앙의 내용인 신학적 전통이 아니라 전통을 형식적으로 보수하고 있는 전통주의 때문일 것입니다. 어떤 형태의 ‘주의’(主義, -ism)든지 ‘주의’는 언제나 이데올로기화 되어 독선적이 되거나 독단에 빠져 마침내 자기우상화나 자기연민 혹은 자만 속으로 함몰하게 됩니다.
어느 누구도 세상에 혼자 태어나지 않습니다. 부모를 통해 가족 공동체 속으로 들어옵니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 먼저 우리는 우리를 낳아준 부모가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전통’에 대한 ‘기억’입니다. 오래 전부터 시작된 커다란 이야기(전통) 가운데로 들어온 우리는 이 커다란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어왔는지를 살펴보고 기억함으로서 현재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주어진 것이며 만들어져온 것이며 형성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이해하려면 먼저 우리가 서있는 전통에 대해 사려 깊은 이해와 기억이 필요합니다. 장로교인들은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파악하고 이해하려면 단순히 몇 가지 원리로 환원되는 추상적 신학적 개념들을 파악하는 것으로만 충분하지 않습니다. 구체적이고 살아있는 전통을 이해해야합니다.
여러 가지 신학적 전통들이 있지만 내가 말하려고 하는 전통은 ‘개혁주의 신학적 전통’입니다. 다시금 강조해서 말하거니와, 각각의 신앙과 신학의 전통들은 단순히 현재 살아있는 사람들 사이의 동반자 관계나 연대감만을 대표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통은 죽은 자와 산자 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자들 사이의 동반자 관계를 나타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전통은 넓게 말해서 개혁신학을 표방하는 신앙 공동체가 전수해준 신학적 전통 안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이 개혁주의 신앙공동체의 신학적 전통은 앞으로 올 세대에게도 전수되고 이어져 나갈 것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적 전통은 여러 기독교 신앙 전통들 중 하나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표현하는 다양한 신학적 전통들로는 로마 가톨릭교회, 동방 정통교회, 루터교회, 재세례파 교회 등이 있습니다. 개혁교회 역시 기독교 신앙을 표현하는 여러 신학적 전통 가운데 하나입니다.
기독교 안에 있는 각 전통들은 자기들만의 독특한 해석학적 틀을 지닙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세상과 역사와 인간의 상황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각자만의 독특한 ‘해석학적 안경’을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주제들을 인식하는 원리를 성경에서 가져옵니다. 물론 실체와 경험에 대한 사람의 인식이 성경을 해석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체들을 이해하려는 해석학적 틀의 중심에는 언제나 성경을 해석하는 일정한 방식이 있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모든 것을 성경의 빛 아래서 바라보고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신학적 전통입니다.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 '전체 성경으로‘(tota scriptura)라는 모토가 이것을 가리킵니다. 이 두 가지 문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뒤에 다루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학의 전통은 그 해석의 양태를 표현하는 특정한 스타일들을 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생활하는 양식, 사고하는 방식, 제도와 기관들을 구성하고 조직하는 방식, 예술을 표현하는 스타일, 예배하는 형식, 휴식하는 방식, 여가를 사용하는 스타일, 감정을 표출하는 형태, 상호간의 이견이 있을 때 풀어가는 스타일 등이 그것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의 방식과 그 방식을 표현하는 스타일은 구체적인 이야기 형태를 띠고 전수되어옵니다.
따라서 개혁주의 신학 전통을 이해하려면 수많은 세월동안 그 정체성을 만들어온 역사적 이야기들을 떠나서는 불가능합니다. 구체적인 사건들 속에서 개혁주의 신학 전통은 태동하고 양육되고 형성되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전통-내러티브’는 신앙 공동체로서 개혁파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즉 그 공동체의 수많은 성공과 실패에 대해서, 신앙의 영웅들과 비열한 자들에 대해서, 겪었던 기쁨과 슬픔들에 대해서 ‘전통-네러티브’는 구체적으로 이야기 합니다.
종합하자면, “개혁주의 신학전통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개혁주의 신앙공동체가 어떻게 실체와 성경을 자기들 나름대로 독특하게 해석하고 있는지, 어떻게 그 해석을 자기들 나름대로 개성 있게 표현하는지를 이해해야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역사를 통하여 자신의 모험적 여정에 대해 말하고 있는 그 이야기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각주1) 사회학자들의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일관성의 문화’(culture of coherence)(각주2), 다른 말로 하자면, 공동체에 속한 일원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문화가 한 공동체와 사회를 공동체답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동체는 '기억'(remember)이라는 마음의 기관을 통해서 공동체에 속한 일원들을 하나로 묵어주는 거대 담론(이야기)속으로 참여하여 그 내용을 전수받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세워가며 후대에 그것을 전수합니다. 신앙공동체는 본질적으로 ‘기억 공동체’(community of memory)이기 때문입니다.
개혁신학과 개혁교회의 족보
개혁신학의 전통을 부각시켜 설명하는 방법 중의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로 시작된 포괄적인 기독교회의 가계(家系)에서 개혁(장로) 교회의 계보를 찾아보는 일입니다. 아래의 간단한 족보는 어떻게 기독교회가 여러 세기 동안 다양한 방향으로 발전해왔는가를 보여줍니다. 가계표는 도로 표지판과 같습니다. 운전하다가 표지판을 보고 그 지역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여기에 무미건조하게 나열되어있는 각종 도로표지판을 보고 그리로 들어가 한 곳 한 곳을 차근차근 둘러보면 그 지역에 대해 잘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여행하는 즐거움입니다.
이처럼 기독교회의 계보는 표면적으로는 건조하게 보이겠지만, 족보 안에 담겨진 수많은 사연들과 역사적 사건들을 교회 역사가들의 도움을 받아 읽어내어 보십시오. 얼마나 흥미진진하고 즐거운 여행인지요! 각 가정마다 한 권의 좋은 기독교회사 책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상상력을 동원하여 족보를 읽을 수만 있다면, 그 안에서 우리는 성공과 실패, 다툼과 분열, 아픔과 회복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역사라 불리는 인간의 이야기들 가운데서 역사를 주관하시고 운행하시면 자신의 이야기를 써내려 가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에 관해서도 듣게 될 것입니다.
a. 주요 기독교 교회의 계보
1-11세기 그리스도(기독) 교회
11세기 서유럽 로마 가톨릭 ↔ 동유럽 정교회
16세기 개신교 ↔ 로마 가톨릭 ↔ 동방 정교회
b. 개신교 교회들의 역사적 계보
16세기 재세례파 ← 개혁교회 ← 루터교회 ← 성공회
* 왼쪽에 가까울수록 로마 가톨릭으로부터의 보다 철저한 분리를 보여준다. *
17세기 퀘이커 청교도
18세기 감리교회 (요한 웨슬레와 관련을 맺는 교회의 시작)
19세기 자유교회
20세기 순복음교회(오순절 계통의 교회들의 출현)
교회는 처음부터 그리스도와 불가분의 관계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교회’라 부르지 않고 ‘그리스도 교회’ 혹은 한자어로 그리스도에 해당하는 ‘기독’(基督)이란 용어를 사용하여 ‘기독교회’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교회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그분의 몸이요, 그분은 교회의 머리이기 때문입니다. 머리는 몸을 대표합니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대표합니다. ‘교회’를 게르만어족에 속한 언어로 표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Church(‘쳐치’, 영어), Kirche(‘키르케’, 독어), Kerk(‘께르끄’, 네덜란드어), Kyrke('케르키‘, 스웨덴어). 모두 비잔틴 그리스어 κυρικἠ (큐리케)에서 유래한 용어들입니다. 이 용어는, “주(主)님께 속함,” “황제의 것”이란 뜻입니다. 번역 언어로만 봐도,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 고백하며, 그분에게 충성을 서약한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교회를 상상할 수도, 달리 표현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출생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기독교회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의 메시지(케리그마),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의 씨앗 위에 성령을 물 붓듯이 부으심으로(성령 강림) 창조된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교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출생한 신(神)적 생명체입니다. 마치 예수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되고 출생하셨듯이 말입니다. 교회는 천상에 계신 세분 한 하나님(삼위일체)께서 지상으로 내려주신 최상의 선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갓 태어난 교회의 출발은 처음부터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마치 갓난아기 모세가 탄 자그만 방주처럼(출 2장) 교회라는 배 역시 연약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약한 바람과 물결에도 뒤집힐 수 있는 연약하고 초라한 일엽편주(一葉片舟)였습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건너면서 ‘죽음의 세례’를 받은 후 새롭게 태어난 갓난아기 이스라엘이 망망한 광야에 놓이게 된 형편과 같습니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회는 수많은 난관과 핍박의 물살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자라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기독교회는 11세기에 서방 교회(로마 가톨릭)가 동방 교회(정교회)로부터 분리될 때까지 하나의 교회로 존속하고 있었습니다.
16세기에는 새로운 성령의 바람이 로마 가톨릭 교회에 불어 교회의 새로운 거듭남을 경험하게 됩니다. 일명 ‘종교개혁’(Reformation) 운동이 그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성경의 중심적인 메시지, 즉 우리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다시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의 신학과 신앙은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그리스도로’, ‘오직 성경으로’,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이란 문구들 속에 잘 담겨져 있습니다.
이러한 개신교의 종교개혁 운동은 네 명의 자녀를 출생하게 되었는데, 재세례파 교회, 개혁파 교회, 루터파 교회, 그리고 영국 국교회(성공회)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배열한 순서는 신학적 성향과 예전 형식, 성례의 위치와 교회 정치 형태 등을 고려하여 정해놓은 순서입니다. 먼저 왼편으로 갈수록 신학적으로 로마 가톨릭과의 단절이 보다 철저하게 이루어진 것을 보여줍니다. 예배의 형식과 관련하여, 가톨릭의 형식을 덜 따르는 데서 그룹에서 시작하여 보다 가톨릭 형식을 따르는 순으로 되어있으며, 성례에 대해서는 성례가 예배에서 덜 중심적인 교회로부터 보다 더 중심적인 교회의 순이며, 교회 정치와 관련해서는 보다 덜 계급적인 교회로부터 보다 더 계급적인 교회의 순서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교회사적 자리에서 개혁 신학적 관점은 좀더 폭 넓은 중간 지대에 위치합니다.
기독교 교회 역사에서 ‘개혁 신학 전통’(Reformed Theological Tradition)이란 용어는 일명 ‘칼빈주의’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지고 있으며, 위에서 대략적으로 살펴본 것처럼 개혁(장로)교회는 역사적으로 16세기의 초엽에 발생하였던 종교개혁운동의 일부분으로서, 당시 로마 천주교가 신앙의 근본적인 원리에서 벗어나자 ‘원리로 돌아가자,’ ‘기초로 돌아가자’는 시대적 운동이었습니다. 물론 여기서 원리와 기초는 모두 성경을 가리킵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개혁교회는 이처럼 사도들에 의해 전수된 복음으로 그리스도의 교회로 돌아가자는 운동인 동시에 부득불 당시의 ㅇㅠ일한 제도적 교회였던 로마 천주교에서 떨어져 나온 개신교의 한 가지이기도 합니다.
루터교회를 가장 가까운 신앙적 형제로 삼는 개혁교회는 16세기 스위스에서 울리히 츠빙글리(Ulrich Zwingli)와 요한 칼빈(John Calvin)의 탁월한 지도력 아래 시작되었습니다. 특별히 칼빈의 성경적 가르침과 신학체계는 빠른 속도로 라인 강 계곡을 따라 전 유럽으로 확산되어 갔으며, 특별히 프랑스와 네덜란드와 스코틀랜드의 개혁(장로)교회들에 가장 영향력이 있는 힘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후에 영국과 그 연방과 오대양 육대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18세기에는 미국 대륙과 아프리카, 헝가리, 인도네시아, 그리고 20세기 초에는 장로교의 형태로 한국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개혁신학의 계보에 들어있는 한국의 교파로서는 장로교회들을 들 수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개혁(장로)교회는 기독교회의 여러 가족 구성원들(루터교회, 침례교회, 성공회, 오순절교회, 복음주의자, 로마가톨릭, 동방 정교회, 구세군, 감리교 등) 중에 숫자적으로는 그리 크지는 않습니다(자랑스럽게도 한국은 예외입니다!). 그렇지만 기독교의 신앙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그리스도의 교회의 일원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이러한 개혁(장로교)신학은 유럽대륙과 남아공에서는 '개혁교회'(Reformed Church)로, 영미 계통과 한국에서는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물론 교회 정치에 있어서 양자간의 차이점이 두드러지기는 하지만 — 예, 교회정치의 중심부는 노회인가 아니면 지역교회의 당회인가 하는 점 — 신학적 강조점에 있어서는 거의 일치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미 계통의 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 교리문답서(1648)를 받아들이며 한국의 장로교 역시 이 전통에 서있습니다. 한편 유럽과 남아공의 개혁교회들, 미국의 개혁교회들은 자신들의 개혁주의 신학적 정체성을 천명하는 표준문서로 벨기에 고백서(1561), 하이델베르그 신앙교육문답서(1563), 돌트 신경(1619-19)을 받아들입니다. 이에 대한 신학적 계보는 차후에 말하기로 하고 먼저 개혁주의 신학의 조상이라 할 수 있는 요한 칼빈에 관해 말해보려 합니다.
요한 칼빈과 그 후예들
각주
1) Nicholas P. Wolterstorff, Keeping Faith: Talks for New Faculty at calvin College, Occasional Papers From Calvin College (Grand Rapids: Calvin College, 1997), p. 2.
2) 참조, Robert N. Bellah, Habits of the Heart: Individualism and Commitment in American Life,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5), pp. 152-155, 281.